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닫힌 사랑, 열린 사랑 / 김상욱
닫힌 사랑, 열린 사랑
서정윤과 도종환의 시
김상욱(춘천교대 교수)
꽃씨를 거두며
언제나 먼저 지는 몇 개의 꽃들이 있습니다. 아주
작은 이슬과 바람에도 서슴없이 잎을 던지는 뒤를 따라
지는 꽃들은 그들을 알고 있습니다. 아이들과 함께
꽃씨를 거두며 사랑한다는 일은 기쁨과 고통, 아름다움과
시듦, 화해로움과 쓸쓸함 그리고 삶과 죽음까지를
책임지는 일이어야 함을 압니다. 시드는 꽃밭 그늘에서
아이들과 함께 꽃씨를 거두어 주먹에 쥐며 이제 기나긴
싸움은 다시 시작되었다고 나는 믿고 있습니다.
아무것도 끝나지 않았고 삶에서 죽음까지를 책임지는
것이 남아 있는 우리들의 사랑임을 압니다. 꽃에 대한
씨앗의 사랑임을 압니다.
(도종환, 『접시꽃 당신』, 실천문학사)
사랑은 가장 오래도록 인류의 관심을 끌어온 주제의 하나이다. 또한 사랑이 가장 나중까지 우리를 설레이게 할 주제임은 물론이다. 제한된 역사적 시간과 공간을 훌쩍 뛰어넘은 곳에, 우리들 가슴 속 아득히 깊은 곳에 사랑은 의연히 자리잡고 있다. 때로는 터져 나오는 기쁨으로, 때로는 가누기 힘든 좌절과 안타까움으로 우리를 찾아온다. 따라서 차가운 머리보다 우리의 섬세하고 뜨거운 가슴에 가까이 다가서고자 하는 문학이 사랑을 주제로 삼고 그 언저리를 뱅글뱅글 맴도는 것은 전혀 타박할 일일 수 없다. 특히 시가 소설이나 희곡과 달리 감정이 지극히 고조된 순간을 포착하여 언어로 표현한다는 점을 생각할 때, 시는 곧 사랑이라는 등식까지도 가히 틀림이 없다. 그리고 시가 곧 사랑임을 최근 여러 사람들에게 익히 알려진 두 시집을 통해 더 생생하게 받아들여질 수 있을 것이다.
두 시집은 어느 날 갑작스럽게 우리 앞에 나타났다. 미처 잘 알려지지 않은 두 시인의 시집은 출판가에 보기 드문 화제로 떠올랐으며, 수많은 사람의 입에 오르내리는 것은 물론 영화로 만들어지기도 하고 청소년들의 공책 표지나 책받침 등에까지 우리 생활 속으로 깊숙이 다가섰다. 『접시꽃 당신』과 『홀로 서기』가 바로 그것이다.
두 시집은 모두 사랑을 주제로 빛나는 언어를 아로새겨두고 있다. 물론 그 빛깔과 향기는 서로 다르나, 우리들의 등걸처럼 굳어버린 마음에 촉촉한 윤기를 안겨주었으며, 새록새록 시의 의미를 되새겨보게끔 해주었다. 사회의 구석구석에서 황폐해진 우리들 삶을 하염없이 쓸어안고 있는 우리들에게 그 두 시집은 참으로 흔쾌한 경험이었다.
그러나 마음 한구석에서는 전혀 낯선 껄끄러움이 서정윤의 시를 읽으며 덧쌓이는 것 또한 어쩔 수 없었다. 껄끄러움, 그것은 결코 좋은 시를 만났을 때 알싸하게 다가서는 해맑은 한 줄기 바람의 신선함은 아니었다. 그것이 도종환과 서정윤의 서로 다른 빛깔과 향기뿐만 아니라, 그들의 서로 다른 철학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사실을 알기까지에는 얼마간 시간이 지나야만 했다.
철학이란 사람이 둘러싸여 있는 세계를 보는 관점이자, 사람과 사람이 맺고 있는 관계로 보는 관계를 보는 관점을 의미한다. 따라서 철학이란 두터운 서고에 갇혀 한쪽 벽면을 장식하거나 철학자의 도수 높은 안경 너머 널려 있는 해독하기 어려운 문자의 거대한 탑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들의 삶에 끊임없이 말을 걸어오고 눈짓을 보내며, 살아 숨쉬는 등대이자 나침반이다. 등대가 어두운 밤바다를 밝히고 나침반이 깊은 숲 속을 헤매는 이에게 생명을 주듯, 철학은 사노라면 겪게 마련인 숱하게 많은 어려운 갈림길에서 올바른 선택을 가능케 하는 저울이자 잣대이다.
요컨대 우리의 하루 하루의 일상을 떠받치고 있는 것은 상식이다. 그러나 상식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일이 우리에게는 너무나 많다. 상식이랑 서로 반대되는 사실을 동시에 끌어안고 있다. 아는 것이 병이기도 하고 약이기도 한 것이 상식의 세계이다. 혼란스러운 상식의 뿌리에 놓여 있는 근원적인 원리, 그것을 찾아가는 것이 철학이다. 원칙 없이 상황에 따라 이렇게도 저렇게도 부대껴 가는 것만으로 우리들 삶은 너무도 복잡하고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 그 산더미를 하나하나 헤쳐 가는 힘, 그것은 삶을 보는 생각의 폭과 깊이이며 인간과 세계를 보는 관점에서 시작된다. 철학은 우리들 자잘한 일상을 선명하게 밝혀주고 그 속에서 올바른 실천을 끌어내게끔 해주는 삶의 푯대이다. 그러나 철학이 있다는 것만으로 모든 것이 해결될 리는 없다. 문제는 그것이 어떠한 철학이며, 무엇을 위한 어떠한 삶을 내다보고 있는 철학인가 하는 점이다.
도종환과 서정윤, 두 시인의 삶을 대하는 태도는 분명 같지 않다. 그러나 그 차이는 쏟아지는 잡지와 영화 등의 대중매체에 의해 철저히 가려져 왔다. 애당초 대중매체는 보여주고 싶은 것만 대중에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두 시인의 ‘이룰 수 없었던 사랑’에 초점을 두고 그 끈끈한 사랑의 폭과 깊이를 가늠해보고자 애쓰는 매체는 어디에도 없었다. 특히 도종환의 경우 ‘사별한 아내에 대한 애틋한 그리움’이 어떻게 시로 표현되었는가에 대한 관심은 묽어지고, 병으로 죽어간 아내, 홀로 남은 남편, 남겨진 아이들이라는 비극적인 상황만 우리들 시야로 우겨 넣기에 겨를이 없었다.
비록 때늦은 감이 없지 않으나, 이제라도 우리는 사랑이란 이름으로 뭉뚱그려지기에는 너무도 판이한 두 시집의 틈새를 파고들어야 할 것이다. 동일한 주제에도 불구하고 차이가 있다면 뚜렷이 나누어야 할 것이다. 그 나눔으로 말미암아 시를 만나는 우리들의 시야가 더욱 넓어질 수 있고 깊어 질 수 있다면, 그리하여 우리들의 사랑이 한때의 어설픈 몸짓으로 떨어지지 않고 소담한 망울을 터뜨리는 꽃으로 피워 올릴 수 있다면, 우리들 가난한 이웃과 동강난 조국에의 사랑을 향해 조금씩 조금씩 다가설 수 있다면 말이다.
먼저 서정윤의 사랑을, 그로부터 그의 사랑의 철학을 살펴보기로 하자. 결론적으로 그의 사랑은 닫혀 있다. 이웃으로부터, 벗들로부터, 현실로부터 심지어는 사랑의 대상인 상대편에게서조차 닫혀 있다. 그는 늘 함께이고자 하나 번번히 홀로 일 수밖에 없음을 깨닫는다.
나의 전부를 벗고
알몸뚱이로 모두를 대하고 싶다.
그것조차
가면이라고 말할지라도
변명하지 않으며 살고 싶다.
말로써 행동을 만들지 않고
행동으로 말할 수 있을 때까지
나는 혼자가 되리라.
그 끝없는 고독과의 투쟁을
혼자의 힘으로 견디어야 한다.
부리에,
발톱에 피가 맺혀도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다.
숱한 불면의 밤을 새우며
‘홀로서기’를 익혀야 한다.
(서정윤, 「홀로서기 6」, 『홀로서기』, 청하)
그는 철저히 홀로임을 인식함으로써 세상을 본다. 비록 헐벗은 알몸뚱이를 솔직하게 드러내 보이며 살고자 하지만 다만 그것은 열려진 관계 속에서 맺어지기보다 일방적이다. 물론 그가 노력조차 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죽음이
인생의 종말이 아니기에
이 추한 모습을 보이면서도
살아 있다.
나의 얼굴에 대해
내가 책임질 수 있을 때까지
홀로임을 느껴야 한다.
그리고
어딘가에서 홀로 서고 있을, 그 누군가를 위해
촛불을 들자.
허전한 가슴을 메울 수는 없지만
‘이것이다’ 하며
살아가고 싶다.
누구보다도 열심히 사랑을 하자.
(서정윤, 「홀로서기 7」, 같은 시집에서)
그러나 그 노력조차 이 시에서처럼 철저히 홀로임을 느낀 다음에야 시작되는 어설픈 자기합리화로 시늉에 그치고 만다. ‘허전한 가슴을 메울 수는 없지만’ 으로 분명한 단정을 내림으로써 더 이상 우리가 밀고 들어갈 공간은 이미 막혀 있는 것이다. 따라서 그가 ‘누구보다 열심히’ 하자는 사랑은 자신이 느끼는 무한 절대의 고독이란 틀 속에서의 사랑일 뿐이다. 이처럼 서정윤이 생각하는 사람과 사람의 관계는 근원적으로 혼자이다. 마치 현미경으로 들여다본 양파껍질처럼 세포벽 속에 꽁꽁 갇혀 있다. 관계뿐 아니라 심지어 기억 속에서마저 잊혀지는 존재일 뿐이다. 누군가 날 기억해 주리라는 믿음마저 여지없이 허물어지고 만다.
눈 오는 날에
아이들이 지나간 운동장에 서면
나뭇가지에 얹히지도 못한 눈들이
더러는 다시 하늘로 가고
더러는 내 발에 밟히고 있다.
나는 눈에 기대를 걸어보아도, 결국
어디에선가 한 방울 눈물로서
누군가의 가슴에
인생의 허전함을 심어주겠지만
우리들이 우리들의 외로움을 불편해 할 쯤이면
멀리서 반가운 친구라도 왔으면 좋겠다.
날개라도, 눈처럼 연약한
날개라도 가지고 태어났다면
우연도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만남을 위해
녹아지며 날아 보리라만
누군가의 머리 속에 남는다는 것
오래오래 기억해주기를 바라는 것조차
한갓 인간의 욕심이었다는 것을
눈물로 알게 되리라.
(서정윤, 「눈 오는 날에」, 『홀로서기』, 청하)
물론 그가 인간을 보는 이러한 관점이 유독 그만의 것은 아니다. 우리는 프랑스의 실존주의 철학에서 그 선명한 원형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다. 실존주의에서 인간이란 이 땅에서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내팽겨쳐졌고, 홀로 고독하게 살아가다가, 또 쓸쓸히 혼자 죽어갈 수밖에 없다고 주장하는 이들이다.
그러나 인간은 철저히 사회적인 존재이다. 요람에서 무덤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결코 역사와 사회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 완전히 자유롭다고 주장하는 서정윤의 철학이나 실존주의조차 사회적 산물임을 부정할 수 없는 것이다. 요컨대 실존주의는 1차 세계대전 이후의 폭력적인 권력과 사회, 그 속에 무참히 짓밟힌 인간성을 겪으며 시작되었다. 그 앞에서 떨며 있던 사람들은 낯선 두려움을 총총히 거두며, 어둡고 외진 각자의 방으로 서둘러 숨어버린 것이다.
서정윤의 외로움, 고독, 홀로서기 역시 세계대전과 비슷한 역사적 맥락에서부터 시작된다. 그의 성장기 모두를 휩싸고 있던 유신독재와 5공화국의 폭력을 우리는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그의 시에 아로새겨진 절절한 고독은 뒤틀린 사회의 문학적 반영인 것이다. 그러나 고치 속으로 기어드는 나약한 개인은 부정한 권력이 쌍수를 들고 환영하는 바이다. 몽둥이로 헬멧으로 방패로 내리치는 것만이 폭력이 아니다. 고난받는 이웃과 벗들로부터 등을 돌리고 홀로 서기를 외치는 것 역시 폭력일 수밖에 없다.
시를 쓰는 일 역시 사람의 일일진대 그것은 의당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와 관계를 맺는 한 방식이다. 서정윤이 철저히 관계를 포기함으로써 관계를 맺는 반해 도종환의 경우는 접시꽃조차 관계를 맺지 않고 홀로 피기를 거부한다. 도종환의 접시꽃 같은 당신은, 즐겨 외로움을 타는 한 젊은이의 사랑보다 더욱 어쩌지 못할 이른바 실존적인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혼자만의 고치 속으로 움츠려들지 않는다. 그럴수록 더욱더 질기고 강한, ‘주체할 수 없는 신열’과 같은 뜨거움으로 이웃에게 매달린다.
옥수수잎에 빗방울이 나립니다
오늘도 또 하루를 살았습니다
낙엽이 지고 찬바람이 부는 때까지
우리에게 남아 있는 날들은
참으로 짧습니다
아침이면 머리맡에 흔적 없이 빠진 머리칼이 쌓이듯
생명은 당신의 몸을 우수수 빠져나갑니다
씨앗들도 열매로 크기엔
아직 많은 날을 기다려야 하고
당신과 내가 갈아엎어야 할
저 많은 묵정밭은 그대로 남았는데
논두렁을 덮는 망촛대와 잡풀가에
넋을 놓고 한참을 앉았다 일어섭니다
마음놓고 큰 약 한번 써보기를 주저하며
남루한 살림의 한구석을 같이 꾸려오는 동안
당신은 벌레 한 마리 함부로 죽일 줄 모르고
악한 얼굴 한번 짓지 않으며 살려 했습니다
그러나 당신과 내가 함께 받아들여야 할
남은 하루 하루의 하늘은
끝없이 밀려오는 가득한 먹장구름입니다
처음엔 접시꽃 같은 당신을 생각하며
무너지는 담벼락을 껴안은 듯
주체할 수 없는 신열로 떨려왔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에게 최선의 삶을
살아온 날처럼, 부끄럼 없이 살아가야 한다는
마지막 말씀으로 받아들여야 함을 압니다
우리가 버리지 못했던
보잘것없는 눈높음과 영욕까지도
이제는 스스럼없이 버리고
내 마음의 모두를 더욱 아리고 슬픈 사람에게
줄 수 있는 날들이 짧아진 것을 아파해야 합니다
남은 날은 참으로 짧지만
남겨진 하루 하루를 마지막 날인 듯 살 수 있는 길은
우리가 곪고 썩은 상처의 가운데에
있는 힘을 다해 맞서는 길입니다
보다 큰 아픔을 껴안고 죽어 가는 사람들이
우리 주위엔 언제나 많은데
나 하나 육신의 절망과 질병으로 쓰러져야 하는 것이
가슴 아픈 일임을 생각해야 합니다
콩댐한 장판같이 바래어 가는 노랑꽃 핀 얼굴 보며
이것이 차마 입에 떠올릴 수 있는 말은 아니지만
마지막 성한 몸뚱아리 어느 곳 있다면
그것조차 끼워 넣어야 살아갈 수 있는 사람에게
뿌듯이 주고 갑시다
기꺼이 살의 어느 부분도 떼어주고 가는 삶을
나도 살다가 가고 싶습니다
옥수수 잎을 때리는 빗소리가 굵어집니다
이제 또 한번의 저무는 밤을 어둠 속에서 지우지만
이 어둠이 다하고 새로운 새벽이 오는 순간까지
나는 당신의 손을 잡고 당신 곁에 영원히 있습니다
(도종환, 「접시꽃 당신」,『접시꽃 당신』, 실천문학사)
도종환의 이웃과 사회로 넝쿨을 뻗어 올리는 열려진 사랑은 더욱이 저 홀로 ‘움찔 뒤로 물러서지’ 않는다. 그것은 ‘꽃씨를 거두듯’ 책임을 지는 일이며, 사랑의 기쁨과 고통, 아름다움과 쓸쓸함까지 온몸으로 껴안는 사랑이며, ‘기나긴 싸움’의 봉화불을 지펴 올리는 사랑이다. 아내의 죽음을 뒤로 남기고, 서늘한 바람에 떠밀려 딸아이와 마을로 들어서는 그의 마음을 헤집는 아픔은 결코 넋두리로 떨어지지 않는다. 그를 헤집는 아픔은 ‘이별이 아니라 그리움’이며, 그 그리움의 치유는 정녕 무덤에서가 아니라 마을에서야 가능하다. ‘어금니 사려 물고 주먹 움켜잡고’ 지켜야 할, ‘눈물로 씨 뿌린 것들을 기쁨으로 거두어야 할’ 이 땅의 사람들 속에서 비로소 그의 그리움은 덜어질 것이다.
이처럼 도종환과 서정윤의 각기 다른 차이는 앞서 말한 것처럼 철학의 차이에서 비롯된다. 더불어 함께 사는 삶과 홀로 서는 삶의 차이가 사랑을 인식함에 있어서도 열린 사랑과 닫힌 사랑으로 끌어가고 있다. 우리가 도종환의 시에서 아껴야 할 점은 그의 이별과 그리움뿐만이 아니라, 그가 <분단시대>의 동인이며 한 사람의 교사로서 우리가 사는 이 시대를 온몸으로 허물며 살아가고자 한다는 사실이다. 하여 그의 사별한 아내에 관한 시편 속에 담긴 열린 공간이 소중한 만큼 그의 이웃, 사회, 역사를 보는 눈이 새겨진 시들 역시 기억해두어야 할 것이다.
나 죽은 뒤
이 나라 땅이 식민의 너울을 벗었거든
내 무덤 가에 와서 놀아라
새떼처럼 하얗게 아이들 데리고 와
웃으며 손뼉치며 놀아라
나 죽은 뒤
아직도 이 나라 땅이
식민의 너울로 그늘져 흐리거든
내 무덤 가에는 오지 말아라
돌아가 피 흘리며 싸워라
나 죽은 뒤
아무 곳에나 잘 자라는 앉은뱅이 민들레로 돋아
타는 마음으로 이 땅을 지켜보다
꽃 다하면 풀씨로 산천 떠돌며 보리라
너희와 너희의 아이들이 진달래처럼
환하게 살고
살아 지켜야 할 이 땅에서
너희가 어떻게 살고 있는가 보리라
(도종환, 「앉은뱅이 민들레」,『접시꽃 당신』, 실천문학사)
80년대 벽두부터 우리는 광주를 경험하였다. 한편으로 그것은 참혹하게 일그러진 상처였으며, 또 다른 한편으로는 힘차게 솟구쳐 오르는 불기둥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때 당시 우리 모두는 빛고을 광주의 한과 희망을 제대로 알 수 없었다. 역사적인 사건일수록 거리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역사의 한가운데에서 온몸으로 맞서 싸우는 이들조차 선명하게 그 의미를 걸러내기 어렵다. 엄청난 무게에의 가위눌림, 가늠하기 힘들 정도로 캄캄한 미래. 우리는 그러한 시대를 시의 시대라 일컫는다.
시는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시대, 그러나 고통의 한가운데에 놓인 시대에 홀로 불을 밝히고 길을 가는 늙은 장님의 호롱이다. 시의 시대에, 우리는 시의 주변을 맴도는 아주 고운 두 권의 시집을 만났고, 그 속에서 작은 기쁨을 느낀다. 사랑은 우리들 삶의 가장 정갈하고 소롯한 정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랑은 결코 그 자체로 완성되는 이야기의 끝이 아니라 새롭고 더 큰 사랑을 향한 시작이며 출발점일 따름이다.
김상욱,『시의 길을 여는 새벽별 하나』(친구.1990).108~11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