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에 대한 깊은 고뇌는
모세 오경의 저자에 대한 실제적인 이해입니다.
정통적으로 모세오경의 저자는 모세라고 받아들이지만
성서에 기록된 모세가 기록한 율법책은 모세 오경의 원본일 것입니다.
여호수아가 다듬지 않은 돌에 새긴 모세의 율법은
아직 고고학적으로 발견되 않았습니다.
모세오경은 모세기 기록한 율법책의 원본을 바탕으로
편집되었다는 것이 대부분 성서학자들의 주장입니다.
모세오경의 영감적 편집은
모세가 기록한 율법책의 권위를 갖습니다.
성서학자들의 성서에 대한 학문적인 연구는
자유주의라도 탐구의 진실성은 매도되고 호도되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성서의 고고학적 고찰과 탐구, 그 역사에 대한 진실한 이해는
의도적으로 왜곡하고 날조하고 조작하지 않는다면 존중되어야 할 것입니다.
모세오경의 저자는 모세다는 이해는
토라에 대한 유대인의 진실한 신앙 고백이며 또한 개혁주의의 영감적 이해입니다.
그러나 모세오경의 역사성에 대한 이해는
고고학적 자료의 검증대에 서야합니다.
모세오경의 역사에 대한 성서의 기록은 없지만
모세 시대 이후 여호수아서를 비롯한 사사기서와 사무엘서와 열왕기서의 역사적 기록은 성서의 진실입니다.
성서시대 모세오경에 대한 성서의 내적인 역사의 이해는
"모세가 기록한 책"이라는 말, 그 기록 밖에 없습니다.
모세오경과 성서에 기록된 "모세가 기록한 율법책"과
일치한다고 믿는 성서 학자는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모세오경의 내용을 구절로 인용한 말씀은 거의 전무하며
심지어 십계명에 대한 구약성경의 인용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서에 대한 역사적 진실은 무엇인가?
깊이 고뇌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성서 저자가 성서를 기록할 때
소위 말하는 모세오경이라는 토라는 존재하지 않았다는 증거도 될 것입니다.
출애굽의 신앙과 그 증거는
이스라엘이 멸망하고 난 후 바벨론 포로 귀환의 에스라와 느헤미야서에 나타나고
그리고 이사야서를 비롯하여 예레미야서와 에스겔서, 그리고 시편에 나타납니다.
출애굽의 신앙과 그 증거를 추적해 보았는데
드보라와 기드온과 입다의 의식에 희미하게 남아 있고
실로의 성막과 언약궤와 놋단과 모세가 기록한 율법책이라는 그 기록 밖에 없습니다.
시편의 영감적 성찰은
성서의 기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시편에 녹아있는 시인의 영감적 성찰은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 대한 성서지대의 역사적 이해를 정확히 하고 있습니다.
출애굽한 모세에 대한 이해는
사사기와 사무엘서와 열왕기서에서 거의 찾아 볼 수 없습니다.
가나안 땅을 정복한 여호수아에 대한 이해는 구약을 기록한 각 성서 저자는
여호수아 때도 초막절을 지키지 않았다는 에스라의 기억 말고는 전무합니다.
창세기의 아브라함 믿음에 관한 교훈, 그 성서의 역사적 이해는
구약에는 거의 없고 신약의 바울 서신과 히브리서에 언급되었을 뿐입니다.
구약 시대 아브라함의 믿음은
이스라엘 백성의 신앙고백으로 상정되지 않았습니다.
사무엘이 위대한 선지자이지만
사무엘에 대한 성서지대의 역사적 이해는 단 한 번 모세와 사무엘도 구원하지 못할 것이라는
예레미야 선지자의 이해 밖에 없습니다.
모세가 기록한 책이라는 말 외에
모세에 대한 이해는 예레미야 선지자의 사무엘에 대한 이해와 같습니다.
창세기를 비롯한 모세 오경의 역사적 사건에 대한 믿음의 교훈은
성서지대의 역사서와 선지자의 글에 전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모세오경과 선지자의 글은 엄청난 시차에도 불구하고
거의 같은 시대 동시에 세상에 출현하고 알려졌습니다.
모세오경의 역사에 대한 성서적 이해가 없는 가운데서
성서시대가 끝나고 성서 문헌으로 세상에 출현하였고 발견되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모세오경의 히브리어는
언어의 변천 과정이 없이 히브리어가 통용될 때 그 시대의 작품으로 등장하였습니다.
그러니까 맛소라 사본과 사해사본의 모세오경이라는 토라는
여호수아는 물론 웃니엘과 에훗과 드보라와 기드온과 삼손을 비롯하여 사무엘도
다윗도 본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마치 오르겐의 70인경 헥사플라를
예수님의 제자를 비롯한 사도 바울이 전혀 알지 못한 것과 같습니다.
사무엘이 모세오경을 알았다는 말은
사도 바울이 오리겐의 헥사플라를 알았다는 말과 같습니다.
오리겐의 헥사플라는 사도 바울이 죽은 후
교부시대의 작품이기 떄문입니다.
모세오경의 역사성에 대한 성서적 이해는 전혀 없으며
구약의 성서시대가 끝나고 모세오경이 출현하였습니다.
히브리어에 대한 고고학적 자료는
아직까지는 B.C 2세기의 문헌으로 추정되는 1947년에 발견된 사해사본이 가장 오래된 문헌입니다.
이사야와 같은 대선지자도
에스라와 느헤미야와 같은 출애굽의 신앙과 그 증거에 대한 이해는 전혀 없었습니다.
모세오경 가운데서도 신명기는 문체가 가장 아름답고
예레미야서의 문체와 비슷해서 예레미야서를 기록한 것으로 추정되는 바룩의 저작이 아닌가라는 추정입니다.
여호야김 앞에서 예레미야의 두루마리를 낭독한 바룩은
늘 항상 예레미야와 동행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바룩은 예레미야의 두루마리를 기록하였고
또 다른 많은 기록을 남겼습니다.
예레미야에게 바룩은
바울에게 누가와 같은 존재가 아닐 수 없습니다.
바울의 전도여행에 동행하였던 누가는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의 저자가 되었습니다.
☞ 이에 예레미야가 네리야의 아들 바룩을 부르매 바룩이 예레미야가 불러 주는 대로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신 모든 말씀을 두루마리 책에 기록하니라 (렘36:4)
☞ 미가야가 바룩이 백성의 귀에 책을 낭독할 때에 들은 모든 말을 그들에게 전하매
이에 모든 고관이 구시의 증손 셀레먀의 손자 느다냐의 아들 여후디를 바룩에게 보내 이르되
너는 백성의 귀에 낭독한 두루마리를 손에 가지고 오라
네리야의 아들 바룩이 두루마리를 손에 가지고 그들에게로 오니
그들이 바룩에게 이르되 앉아서 이를 우리 귀에 낭독하라 바룩이 그들의 귀에 낭독하매
그들이 그 모든 말씀을 듣고 놀라 서로 보며 바룩에게 이르되 우리가 이 모든 말을 왕에게 아뢰리라
그들이 또 바룩에게 물어 이르되
너는 그가 불러 주는 이 모든 말을 어떻게 기록하였느냐 청하노니 우리에게 알리라
바룩이 대답하되 그가 그의 입으로 이 모든 말을 내게 불러 주기로
내가 먹으로 책에 기록하였노라(렘36:13-18)
☞ 이에 예레미야가 다른 두루마리를 가져다가 네리야의 아들 서기관 바룩에게 주매
그가 유다의 여호야김 왕이 불사른 책의 모든 말을 예레미야가 전하는 대로 기록하고
그 외에도 그 같은 말을 많이 더 하였더라(렘36:32)
☞ 유다의 요시야 왕의 아들 여호야김 넷째 해에 네리야의 아들 바룩이 예레미야가 불러 주는 대
로 이 모든 말을 책에 기록하니라
그 때에 선지자 예레미야가 그에게 말하여 이르되
바룩아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네가 일찍이 말하기를 화로다 여호와께서 나의 고통에 슬픔을 더하셨으니
나는 나의 탄식으로 피곤하여 평안을 찾지 못하도다
너는 그에게 이르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보라
나는 내가 세운 것을 헐기도 하며 내가 심은 것을 뽑기도 하나니 온 땅에 그리하겠거늘
네가 너를 위하여 큰 일을 찾느냐 그것을 찾지 말라 보라 내가 모든 육체에 재난을 내리리라
그러나 네가 가는 모든 곳에서는 내가 너에게 네 생명을 노략물 주듯 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렘45:1-5)
구약 성경의 기록자에 대한 말씀은
예레미야서의 바룩이 전무후무합니다.
아마도 바룩은 요시야 때 발견한 모세가 기록한 율법책을 바탕으로
신명기를 기록하였을 개연성이 아주 높습니다.
신명기의 내용은 모세의 글이지만
신명기의 기록은 모세의 죽음과 레위인 제시장에 대한 언급은 후대의 기록이라는 확실한 증거가 됩니다.
요시야 시대 발견한 모세가 기록한 율법책과 에스라가 초막절에 낭독한 율법서는
모세가 기록한 율법책의 원본이거나 그 사본일 것입니다.
성서에 대한 고고학적 고찰은
성서에 대한 올바른 이해의 길잡이가 될 것입니다.
예루살렘은 그 오랜 역사를 가졌어도
다윗의 유적이나 유물은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습니다.
성서에 대한 맹목적인 믿음은 불교적 미신이며
성서에 대한 올바른 이해는 불가지론의 불가항력이어서 성서에 대한 믿음의 검증은
반평생의 여정으로도 요원하기만 합니다.
오늘날 강단의 설교는
성서에 대한 성서적 이해가 없는 아전인수요, 이현령비현령 타령 수준입니다.
강단의 설교로 성서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하는 것은
모세오경에 대한 모세의 저작이라는 맹신과 같습니다.
아브라함에 대한 사무엘의 이해은 무엇인가?
모세에 대한 사무엘의 이해는 무엇인가?
사무엘에 대한 이사야의 이해는 무엇인가?
여호수아에 대한 에스라의 이해는 무엇인가?
고라에 대한 사무엘의 이해는 무엇인가?
사무엘에 대한 예레미야의 이해는 무엇인가?
정답은 "없다" "모른다"입니다.
왜냐하면 구약의 기록이 없기 때문입니다.
성서에 대한 깊은 묵상은
이해의 절벽을 만나면서 사즉생의 고뇌로 믿음을 구합니다.
사무엘이 한번도 교훈 받지 못한 아브라함의 믿음은
오늘날 강단의 설교로 쏟아지고 있습니다.
여호수아의 가나안 정복에 대한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적 이해가 없는데도
오늘날 강단은 여호수아의 가나안 정복은 말씀의 비전으로 꿈을 쫓는 신앙이 되었습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는 말씀의 비전을 쫓는 신앙으로
가나안 땅의 정복을 미래적 삶의 비전으로 추구합니다.
종말론적인 타락한 바벨론 교회의 이상은
오늘날 한국 교회의 강단을 통하여 적그리스도의 비전이 되었습니다.
모세오경에 대한 확증편향과 미신적 맹신은 성서적 바른 이해요,
모세오경에 대한 역사적 성서의 고찰은 멸망의 심판을 받을 불신입니까?
오늘날 교회 강단의 말씀의 비전을 추구하는 실존적 메카니즘은
성서의 본질에 대한 약속과 성취의 메시야 복음을 인본주의 신앙으로 왜곡하고 날조하였습니다.
신명기의 레위인 제사장은
에스겔의 사독에 대한 레위인 제사장의 이해와 일치합니다.
아론의 후손 제사장에 대한 모세의 이해와
레위인 제사장에 대한 신명기의 이해는 모세와 신명기의 시차를 증거합니다.
성서에 대한 깊은 고찰과 묵상은
성서적 이해가 없는 역사의 진실은 무엇인가를 깨닫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