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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행복의 길을 묻다] (41) 모든 덕의 어머니인 참사랑을 통해 이르는 행복
하느님과 맺은 참사랑, 분열과 갈등 치유하는 구원의 이정표
현대 사회에서 사랑은 흔히 개인적인 감정이나 일시적인 열정으로 치부된다. 그러나 토마스 아퀴나스는 「신학대전」에서 참사랑(caritas)을 단순한 정념(passio)이나 도덕적 의무가 아니라 성령을 통해 인간의 영혼 안에 주입되는 초자연적인 덕이자 습성(habitus)으로 정의한다.
이는 인간의 본성적인 힘만으로는 도달할 수 없는 것이며, 하느님이 당신의 참행복을 인간에게 전달해 주심으로써 맺어지는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영적인 우정(amicitia)이다.(II-II,23,1)
토마스는 참사랑이 본성적인 욕구인 에로스(eros)와 구별됨을 명확히 하며, “참사랑은 우정이지만, 만물 가운데 가장 귀하고 소중한 분인 하느님을 향한 우정이라는 특수성이 더해진 것”이라고 역설한다.(「명제집주해」III,27,2,1,ad7) 결국 참사랑은 인간의 노력을 넘어선 신적 본질에 대한 참여이며, 하느님과 인간이 생명을 공유하는 통교(communicatio)의 선물이다.
더 나아가 토마스는 ‘참사랑이 모든 덕의 어머니’이며 “모든 덕의 형상”(forma virtutum, II-II,23,8)이라고 강조한다. 어떤 도덕적 행위라도 참사랑이 결여되어 있다면 그것은 인간의 최종 목적인 하느님과의 일치에 도달할 수 없다. 그것은 ‘덕의 거짓된 유사품(falsa similitudo virtutis)’에 불과하며, 엄밀히 말해 악습으로 전락할 위험을 내포한다.(II-II,23,7)
그런데 토마스는 이러한 원론적인 체계화에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참사랑이라는 덕이 인간의 내면과 외적 행위에 미치는 구체적인 효과들을 분석한다. 이를 통해 우리는 파편화된 현대 사회에서 인간이 어떻게 진정한 평안과 공동체적 유대를 회복할 수 있는지에 대한 소중한 지침을 발견할 수 있다.
참사랑의 내적 효과: 기쁨, 평화 그리고 자비
토마스는 참사랑이 인간 영혼 내부에 일으키는 첫 번째 효과로 즐거움(gaudium) 또는 기쁨을 꼽는다. 이 즐거움은 자신이 사랑하는 선(善)이 현존할 때 발생하는 결과이다.(II-II,28,1) 현대 사회에서 많은 이가 물질적 성취나 타인의 인정과 같은 가변적인 선에 행복의 근거를 두기에 끊임없는 불안과 우울을 겪는다. 그러나 토마스는 참사랑의 대상인 하느님의 선하심은 결코 변하지 않기에, 이를 통해 얻는 영적인 즐거움은 어떤 외부 환경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견고한 기쁨이 된다고 설명한다.
둘째 효과인 평화(pax)는 단순히 갈등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성 아우구스티누스가 정의한 바와 같이 “질서잡힌 평온함(tranquillitas ordinis)”이다.(II-II,29,1) 토마스는 인간의 다양한 욕구들이 하나의 참된 선인 하느님을 향해 올바르게 질서잡힐 때 비로소 진정한 평화가 찾아온다고 본다. 현대 사회의 극심한 양극화와 무한 경쟁 속에서 발생하는 내적 불화는 욕망의 무질서에서 기인한다. 참사랑은 인간의 의지를 최고선에 결합시킴으로써, 내면에 상충하는 갈망을 조화롭게 통합한다.
참사랑의 또 다른 내적 효과인 자비(misericordia)는 타인의 ‘비참함(miseria)’을 자신의 고통처럼 느끼는 동정심이며, 이를 돕고자 하는 의지적 움직임이다. 토마스는 자비가 하느님을 향한 사랑보다는 낮지만, 타인을 향한 덕들 가운데서는 가장 큰 덕이라고 평가한다.(II-II,30,1)
참사랑의 외적 효과: 구체적 실천으로서의 선행과 자선
참사랑은 내면의 변화에 머물지 않고 반드시 외적인 행위로 드러나야 한다. 그 첫째는 선행(beneficentia)이다. 토마스는 선행이 다른 사람의 선을 원하는 사랑의 마음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결과라고 설명한다. 진정한 선행은 기회가 닿는 대로 모든 이에게 선을 행하려는 자발적인 자세에서 기인한다.(II-II,31,1)
둘째는 구체적인 자선(eleemosyna)이다. 토마스는 이를 육적인 자선과 영적인 자선으로 세분화한다. 굶주린 이에게 먹을 것을 주는 등의 육적인 자선뿐만 아니라, 무지한 이를 가르치고 슬퍼하는 이를 위로하며 죄짓는 이를 훈계하는 영적인 자선의 중요성을 강조한다.(II-II,32,1)
인공지능 시대에 정보의 비대칭으로 고통받는 이들에게 지식을 공유하거나, 극심한 외로움과 정신적 고통을 겪는 이들에게 정서적 지지를 제공하는 행위는 현대적 의미의 탁월한 자선이다. 특히 토마스는 영이 육체보다 고귀하므로 영적인 자선이 우선이지만, 절박한 위기 상황에서는 육적인 자선이 먼저 이루어져야 한다는 현실적인 지침을 제시한다.(II-II,32,3)
형제적 교정: 혐오의 시대에 필요한 사랑의 훈계
외적 효과의 마지막인 형제적 교정(correctio fraterna)은 형제가 죄를 짓지 않도록 막는 영적인 자선의 일종이다. 이는 물질적인 도움보다 더 높은 차원의 사랑의 행위로 간주된다. 토마스는 형제적 교정이 공동선을 위한 정의의 성격을 띠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상대방이 잘못을 바로잡아 참된 행복에 이르기를 바라는 참사랑의 실천이라고 본다.(II-II,33,1)
안타깝게도 현대 사회에 만연한 온라인상의 무분별한 비난은 타인의 잘못을 배척과 혐오의 수단으로 삼는다. 반면 토마스가 제안하는 형제적 교정은 상대방의 품위를 존중하며, 그가 하느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도록 돕는 은밀하고 자애로운 권고이다. 만약 교정이 상대방을 더 악화시킬 것이 예상된다면 차라리 침묵하는 것이 낫다는 토마스의 조언은(II-II,33,6), 진정한 사랑 없는 비판이 오히려 공동체에 독이 될 수 있음을 경고한다.
토마스에게 참사랑은 일시적인 쾌락의 허무를 뚫고 영원한 평온과 진정한 행복을 성취하게 하는 가장 확실한 이정표다. 지식이나 예언과 같은 다른 모든 능력은 현세의 종말과 함께 사라지겠지만, 참사랑만은 내세에서도 영원히 지속된다. 더욱이 참사랑의 내적, 외적 효과들은 파편화된 현대인들이 겪는 정신적 고통과 사회적 갈등을 치유하는 실질적인 약방문이 된다.
무한 경쟁과 각자도생의 논리가 지배하는 현대 사회에서 자비는 단순한 감상적 동정을 넘어선 윤리적 태도를 요구한다. 예를 들어, 난민 문제나 소외 계층의 빈곤 문제를 대할 때 참사랑을 지닌 이는 그들의 비참함을 자신의 결함으로 인식하고 이를 치유하려 노력한다. 이는 자선이 시혜적인 차원에 머물지 않고, 하느님 안에서 맺어진 형제애적 유대라는 영적 기초 위에서 수행되어야 함을 알려준다.
[특별기고] AI 시대, 노동하는 인간을 다시 묻다 (상) 일자리를 넘어 인간의 존엄을 보다
노동 가치 존중, ‘기술의 목적’에 달렸다
레오 13세 교황의 회칙 「새로운 사태」(Rerum Novarum)가 올해로 반포 135주년을 맞았다. 지난 5월 15일, 레오 14세 교황은 회칙 「고귀한 인류」(Magnifica Humanitas)에 서명했다. 이 회칙은 산업혁명 시대에 노동자의 존엄을 수호했던 교회의 사명을 인공지능(AI) 전환 시대에 계승하며, AI를 신기술이나 산업 경쟁력의 차원을 넘어 인간 존엄과 공동선, 문명의 방향에 관한 문제로 제시한다.
오늘날 AI는 글·그림 제작, 고객 상담, 전문적 판단까지 대신하기 시작했다. 기업은 업무 자동화를 서두르고, 노동자는 AI가 자신의 일자리를 대체할까 걱정한다.
그러나 AI 시대의 노동 문제는 단순히 일자리의 증감에 그치지 않는다. 더 근원적인 질문은 ‘인간이 앞으로 노동의 주체로 존중받을 수 있는가’이다. 인간마저 생산성과 비용, 데이터로 치부돼 필요에 따라 대체될 존재로 취급되지는 않을 것인가.
「고귀한 인류」는 노동 안에서 “전체 사회 문제를 이해하는 본질적 열쇠”를 발견해온 가톨릭 교회의 사회교리 전통을 강조한다.(148항) 노동은 단순히 생계를 위한 수단이 아니기 때문이다. 인간은 노동을 통해 재능을 발전시키고 가족을 돌보며, 타인과 협력해 하느님의 창조사업에 참여한다. 그러므로 노동의 위기는 단지 소득과 고용의 위기가 아니다. 곧 인간 존엄과 가족, 공동체와 사회정의의 위기이기도 하다.
「새로운 사태」 가르침 계승한 회칙
이러한 가르침은 앞서 「새로운 사태」에서 뚜렷하게 나타났다. 산업혁명은 놀라운 생산력과 번영의 길을 보여줬다. 하지만 수많은 노동자를 저임금과 장시간 노동으로 내몰며, 인간은 기계와 자본의 부속품처럼 취급됐다. 당시 교회는 정당한 임금과 인간다운 노동조건, 노동조합의 권리를 옹호하며 노동자의 존엄을 지키고자 했다.
오늘 우리가 마주한 현실은 당시와 닮아 있으면서도 더욱 근본적이다. 산업혁명 시대의 질문이 “노동자가 기계의 부속품으로 전락하지 않는가”였다면, AI 시대에는 “인간 자체가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은 존재로 간주되지 않는가”라는 질문이 등장한다. AI는 인간의 육체노동뿐 아니라 지식과 판단, 경험과 창의성의 영역까지 들어오고 있다. 노동자는 일자리를 잃을 위험뿐 아니라 자신이 오랫동안 축적한 지식과 경험의 가치마저 인정받지 못할 수 있다.
회칙은 이 대목에서 현대 기술문명과 인간의 책임을 깊이 성찰한 20세기 가톨릭 신학자 로마노 과르디니 신부의 말을 인용, “현대인은 힘을 올바르게 사용하는 훈련을 받지 못했다”(93항)고 밝힌다. 인간은 과학과 기술을 통해 전례 없이 강력한 힘을 얻었지만, 그 힘을 어떤 목적과 가치 아래 사용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충분히 성숙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인간의 도덕적·영적 성숙이 기술적 능력의 발전을 따라가지 못할 때, 인간이 만든 기술이 오히려 인간을 지배할 수 있다.
「고귀한 인류」가 기술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AI는 위험하고 반복적인 노동에서 인간을 해방하고, 질병을 진단하며, 재난을 예방하고, 장애인과 노인의 삶을 돕는 데 기여할 수 있다. 인간이 더 많은 시간을 창의적인 활동과 돌봄, 배움과 관계에 사용할 수 있도록 도울 수도 있다.
문제는 기술이 어떤 목적을 향해 설계되고 사용되는가에 있다. 효율성과 이윤만이 유일한 기준이 된다면 AI는 노동자를 감시하고 통제하며, 인간의 판단을 약화시키고, 사람을 손쉽게 대체하는 수단이 될 수 있다. 반대로 인간 존엄과 공동선을 기준으로 삼는다면 AI는 인간의 안전과 자유, 창의성과 참여를 확장하는 도구가 될 수 있다.
기술이 인간을 섬겨야 한다
「고귀한 인류」는 AI가 도덕적으로 중립적인 도구가 아니라, 설계와 활용 과정에서 인간의 선택과 우선순위를 담는다고 강조한다.(104항) 따라서 AI의 미래는 기술이 아니라 그것을 개발하고 소유하며 사용하는 인간과 공동체의 책임에 달려 있다.(105항) 우리는 “AI로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넘어 “그 힘을 누구를 위해, 무엇을 위해 사용할 것인가”를 물어야 한다.
AI라는 새로운 힘으로 우리는 무엇을 세울 것인가. 인간의 능력과 효율을 과시하는 또 하나의 바벨탑인가, 아니면 무너진 인간 존엄과 공동체를 함께 회복하는 예루살렘 성벽인가. 그 선택의 기준은 분명하다. 인간을 기술에 적응시키는 것이 아니라 기술이 인간을 섬기게 하는 것, 인간을 대체 가능한 비용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성장과 참여의 주체로 존중하는 것, 기술 발전의 성과를 소수가 독점하지 않고 공동선을 향해 함께 나아가는 것이다.
[특별기고] AI 시대, 노동하는 인간을 다시 묻다 (하) 노동을 통해 사랑의 문명을 세우다
AI를 인간답게, 기술을 공동선으로
레오 14세 교황의 회칙 「고귀한 인류」는 인공지능(AI) 시대의 위험을 경고하는 데 머물지 않는다. 회칙은 “새로운 기술조차 공동선을 향하여 방향 지어질 수 있다”고 선언한다.(227항) 기술의 미래는 이미 정해진 운명이 아니다. AI는 인간을 감시하고 통제하며 배제하는 도구가 될 수 있지만, 인간의 자유와 안전, 창의성과 참여를 확장하는 도구가 될 수도 있다.
그러므로 AI 시대에 필요한 것은 기술을 거부하는 일이 아니라 기술을 ‘인간화’하는 일이다. AI와 자동화가 인간을 위험하고 반복적인 노동에서 해방한다면, 그로 인해 생겨난 시간과 성과는 인간이 더 창의적으로 일하고, 가족과 이웃을 돌보며, 배움과 관계를 풍요롭게 하는 데 사용되어야 한다. 특히 기술 발전의 혜택이 소수에게만 집중되지 않고 모든 사람이 인간다운 삶을 누리는 데 기여하도록 해야 한다.
「고귀한 인류」 155항은 노동법과 노동조합, 협동조합과 복지제도가 노동자의 권리와 인간다운 노동조건을 증진하는 데 크게 기여해왔다고 평가한다. 그러나 AI와 새로운 시장 구조, 플랫폼 노동의 확산 앞에서는 기존 제도만으로 충분하지 않다고 진단하며, 정치 지도자와 노동조직, 기업과 과학 공동체가 새로운 협력과 보호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고 촉구한다. 아울러 노동조합도 새로운 고용 형태에 종사하는 이들을 대표하고 보호하는 데 적극 나서야 한다고 강조한다.
AI 시대의 노동하는 인간으로서 가장 중요한 질문은 “기계가 얼마나 많은 일을 대신할 수 있는가”가 아니다. “인간에게 어떤 일을 남기고, 어떤 새로운 인간다운 일을 만들어 낼 것인가”이다.
「고귀한 인류」는 노동을 자신의 능력을 발전시키고 타인과 협력하며 공동선에 기여하는 가운데 창조주의 일을 이어 가는 길로 본다.(148항 참조) 또 노동은 인간 존엄을 드러내고 인격적 성숙으로 이끄는 과정이며(149항), 자기표현과 관계 형성, 공동체 참여의 장이다.(154항) 따라서 AI 시대 노동사목의 과제는 ‘직업 보호’를 넘어 노동을 통한 ‘인간 형성’에 있다. 선한 노동은 인간과 공동체를 함께 성장시키고, 창조질서의 근원인 사랑을 세상에 드러낸다.
이 부분에서 기업 리더의 역할은 매우 중요하다. 「고귀한 인류」는 “기업가적 주도권은 부를 창출하고 삶을 향상시키는 진정한 소명이 될 수 있다”고 강조한다.(157항) 기업가 정신은 단순한 이윤 창출이 아니라 사람과 자원, 기술을 연결해 인간다운 일과 새로운 가치를 만드는 힘이다. 따라서 AI 시대 기업의 리더는 노동자를 대체하는 기술 관리자가 아니라, 더 안전하고 창의적이며 의미있는 일을 설계하는 공동선의 건설자가 되어야 한다.
느헤미야기의 예루살렘 성벽 재건은 이러한 공동체적 노동의 모습을 보여준다. 무너진 성벽은 한 사람의 힘으로 복구되지 않았다. 사람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책임을 나누고 함께 일하며 공동체 안전과 희망을 되찾았다. AI 시대에도 노동자와 기업가, 과학자와 교육자, 정치와 시민 사회, 교회 공동체가 서로의 역할을 다할 때 기술은 인간을 배제하는 바벨탑의 도구가 아니라 공동선을 세우는 도구가 될 수 있다.
「고귀한 인류」라는 제목은 기술보다 인간이 위대하다는 자만을 뜻하지 않는다. 인간에게 주어진 힘을 하느님 모상으로 창조된 인간의 존엄을 증진하고 공동선을 이루는 데 사용할 때 비로소 드러나는 고결함을 뜻한다. 노동을 통해 사랑의 문명을 세우는 일, 그것이 AI 시대를 살아가는 노동자와 기업가, 교회와 사회 모두에게 맡겨진 공동의 소명이다.
[영성심리] 당신은 어떤 색깔의 안경을 쓰고 있나요?
우리는 하루에도 수만 가지 생각을 하며 살아갑니다.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이 생각들은 마치 세상을 바라보는 ‘안경’과도 같습니다. 안경 렌즈에 파란색 물감이 묻으면 세상이 온통 차갑게 보이고, 붉은 물감이 묻으면 세상이 온통 험해 보이는 것처럼, 우리가 어떤 생각의 안경을 쓰고 있느냐에 따라 우리의 하루는 천국이 되기도 하고 지옥이 되기도 합니다. 특히 마음이 유난히 지치고 불안한 청소년 시기에는 나도 모르게 ‘왜곡된 안경’을 쓰기 쉽습니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인지 왜곡(Cognitive Distortion)’이라고 부릅니다. 쉽게 말해, 생각의 필터가 좁고 편협할 때 그 해석의 결과로 나오는 판단 역시 잘못될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쉽게 빠지는 생각의 함정들을 살펴볼까요? 그 첫 번째 함정은 바로 모든 것을 흑과 백으로 나누어 버리는 사고입니다. 시험을 한 번 망쳤을 뿐인데 ‘내 인생은 끝났어!’라며 삶을 성공과 실패라는 두 가지의 극단으로 나누어 버리고 마는 것이지요. 분명 그 사이에는 다른 경험과 가능성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마음은 차가운 이분법에 갇히고 맙니다. 또한 친구의 마음을 마치 내가 다 알고 있는 것처럼 확신하며 내 식대로 해석해 버리는 사고 역시 우리를 외롭게 만듭니다. 복도에서 마주친 친구가 피곤해서 무표정하게 지나쳤을 뿐인데, ‘저 친구는 나를 싫어하는 게 분명해.’라며 혼자 상처받기도 하지요. 작은 실수를 평생 돌이킬 수 없는 재앙처럼 확대하여 해석하는 사고 역시 우리를 끊임없이 괴롭히는 생각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여기에서 기억해야 할 것은, 편협한 필터로 걸러진 해석들은 ‘진짜 사실’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그것은 그저 왜곡된 안경이 만들어 낸 가짜 이미지일 뿐인 것이지요.
그렇다면, 생각의 함정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우리는 어떤 노력을 해야 할까요? 잠시 숨을 고르고, 내 생각과 객관적인 사실을 분리해 보려는 연습이 필요합니다. “지금 내 생각이 100% 진짜일까?” 하고 스스로에게 다정하게 물어보세요. 혹은 제삼자가 되어 나의 감정을 쏙 뺀 채 객관적인 눈으로 상황을 다시 바라보는 것도 도움이 됩니다. 그러면 무언가 한쪽으로 기울어진 잘못된 생각들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그 기울어진 생각들이 다시 제 자리를 찾을 수 있도록 나에게 다시 말해 보세요. “한 번의 실수가 너라는 사람을 결정하진 않아.” 하고 말이죠.
우리가 종종 느끼는 무기력함, 우울한 감정은 흔히 잘못된 필터로 해석하여 실제보다 더 커진 고통인 경우가 많습니다. 습관처럼 내가 하고 있는 생각에 또 다른 치우침은 없는지 매일 조금씩 관찰해 나간다면, 균형 잡힌 건강한 내면 안에서 지금 이대로 충분히 잘해내고 있다고 우리를 응원해 주시는 예수님의 다정한 음성을 듣게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교회의 기도] “아버지 말씀의 놀라움으로 살아가신 성모님”
지난 시간에는 예수님께서 광야의 유혹 속에서도 아버지 하느님의 사랑 안에 머무르셨다는 사실을 함께 묵상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유혹자의 말에 흔들리지 않으시고 아버지의 말씀을 붙드셨습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어려움이 사라지기를 바라는 데 그치지 않고, 유혹과 시련 속에서도 아버지의 말씀을 신뢰하며 그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이었습니다. 오늘은 성모 마리아의 모습을 통해 말씀을 듣는 기도에 관하여 묵상해 보고자 합니다.
성모님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마음에 간직하며, 그 말씀이 자신의 삶을 이끌도록 맡기신 분이셨습니다. 멕시코의 성서학자 후안 로페즈 베르가라는 『예수님의 기도』에서 예수님의 기도를 다음과 같이 표현합니다.
“아버지, 제 영혼이 확장되었습니다. 저는 지극히 거룩한 어머니에게서 가르침을 얻었습니다. 어머니는 언제나 아버지의 은총으로 가득 차 있고, 언제나 아버지의 말씀에 놀라움을 느끼는 사람입니다.” - 후안 로페즈 베르가라, 『예수님의 기도』, 44쪽.
성모님께 하느님의 말씀은 이미 알고 있는 익숙한 말이나 자신의 생각을 확인해 주는 말이 아니었습니다. 성모님은 말씀을 들을 때마다 마음을 새롭게 열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자신의 예상과 다르더라도 밀어내지 않고, 그 뜻을 찾으며 마음속에 간직하셨습니다. 가브리엘 천사가 하느님의 아들을 잉태하게 될 것이라고 전했을 때에도 성모님은 그 말씀을 즉시 모두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루카 1,34)라는 질문은 믿지 못하겠다는 거부가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더 깊이 받아들이기 위한 질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성모님은 마침내 이렇게 응답하셨습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 이 대답은 앞으로 일어날 모든 일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 아닙니다. 말씀에 응답한 뒤 성모님 앞에는 베들레헴의 가난, 이집트로의 피신, 시메온이 예고한 고통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열두 살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전에 남으셨을 때에도 성모님과 요셉은 예수님의 말씀을 곧바로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루카 복음은 “그의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루카 2,51)라고 전합니다. 성모님의 위대함은 모든 것을 즉시 이해한 데 있지 않습니다. 이해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말씀을 버리지 않고, 그 뜻이 드러날 때까지 마음에 간직하며 기다리신 데 있습니다. 그렇다면 성모님은 무엇을 믿고 그렇게 기다릴 수 있었을까요? 후안 로페즈 베르가라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마리아는 자신의 아들이 하느님의 살아 계신 영원한 말씀에서 태어났으며, 날마다 그 말씀으로 길러지고 있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 후안 로페즈 베르가라, 『예수님의 기도』, 39쪽.
성모님의 확신은 자신의 판단이나 강한 의지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성모님은 자신에게 말씀하신 하느님께서 신실하시며, 아들 예수님의 삶이 언제나 아버지의 말씀 안에 있다는 사실을 믿으셨습니다. 예수님의 모든 행동을 이해하지는 못하셨지만, 그분께서 아버지에게서 오셨고 아버지의 뜻을 이루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신뢰하셨습니다.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도 성모님은 일꾼들에게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모님은 사람들이 자신의 말을 따르도록 하지 않고 예수님의 말씀을 듣도록 이끄셨습니다. 성모님 자신이 평생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살아오셨기 때문입니다.
기도는 하느님께 내가 원하는 것을 말씀드리는 것만이 아닙니다. 기도는 하느님께서 오늘 나에게 무엇을 말씀하고 계시는지를 듣는 시간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 말씀과 복음을 이미 알고 있는 내용으로 여기며, 그 말씀이 오늘의 나에게 새롭게 건네지는 말씀이라는 사실을 잊곤 합니다. 성모님은 하느님의 말씀을 당연하게 여기지 않으셨습니다. 말씀을 들을 때마다 놀라워하셨고, 그 말씀으로 자신의 마음이 넓어지도록 맡기셨습니다. 우리에게도 이러한 놀라움이 필요합니다. 이해되지 않는 말씀을 밀어내지 않고, 말씀하시는 하느님을 믿으며 마음속에 간직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성모님의 확신은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데서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아버지의 말씀에 대한 놀라움과 그 말씀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신뢰에서 나왔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성모님의 이 응답이 우리의 기도가 될 때, 우리 역시 아버지 말씀의 놀라움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신앙에 주파수를 맞춰요] 신앙과 이성은 서로 의존한다
신앙(Fides)이란 인식론적 차원에서 하느님을 받아들이는 인간의 특별한 인식이다. 예수님이 “아버지”라고 부르셨던 분, 아우구스티노 성인이 「고백록」에서 “님”이라고 불렀던 분, 그리고 우리가 항상 기도와 전례 중에 부르는 그 “하느님”을 받아들이고 아는 인간의 특별한 인식이 바로 신앙이다.
이성(Ratio)이란 사물과 사물의 이치, 사건과 사건의 의미와 맥락을 받아들이고 알고 인식하는 인간의 개념적 사유 능력이자, 지성 활동이다. 인간은 본성적으로 이성을 갖고 있으며 이성은 ‘하느님’이라는 신비(Mysterium) 앞에서 자신의 한계를 인정한다.
인간 정신 속에는 신앙과 이성이 있다. 이 둘은 인간 인식의 두 영역이다. 인간은 신앙으로 보이지 않는 하느님과 하느님의 초자연적 계시인 진리를 인식하고, 이성으로 보이는 사물과 사물의 이치를 인식한다.
“신앙과 이성(Fides et Ratio)은 인간 정신이 진리를 바라보려고 날아오르는 두 날개와 같습니다.”(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 회칙 「신앙과 이성」)
신앙은 이성을 강화하고 순수하게 해주며, 이성은 신앙이 헛된 믿음과 맹목적이고 광신적인 신앙에 빠지지 않도록 인간을 보호해 준다.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받아들여 그 하느님의 신비 속으로 들어가는 사람이 신앙인이라면, 보이지 않는 하느님이 계신다는 것을 알지만 그 신비 주변에 서성이는 사람은 철학자이다. 더 나아가 하느님도 모르고 거룩함도 모르는 사람은 이방인이다.
이상의 고찰을 통해 신앙과 이성은 서로 의존한다. 신앙은 이성을 완전하게 해주며, 이성은 신앙을 받아들여 완전하게 된다.
“이성은 자신이 추구하는 궁극적 진리에 도달하기 위하여 신앙으로 조명될 필요가 있고, 초자연적 진리를 역사적 조건 속에서 수용해야 하는 신앙은 이성의 날카로운 분석과 해명을 필요로 한다.”(이재룡 「회칙 ‘신앙과 이성’의 역사적 의미」 참조)
이렇게 이성은 신앙의 조명과 인도를 필요로 하고, 신앙은 이성의 검증과 도움을 필요로 한다.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신앙과 이성 둘 다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고, 따라서 양자 사이에는 어떠한 모순도 있을 수 없다고 말하고 있다.(「대이교도대전」 참조)
따라서 교회는 신앙만을 고집하는 신앙주의(fideismus)도, 이성의 자율성과 절대성을 내세우는 이성주의(rationalismus)도 반대한다. 신앙과 이성의 조화를 강조한다. 끝으로 신앙 행위에 있어서 이성의 역할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믿어야 할 것이라고 선포된 것이 합리적으로 가능한 것임을 명백히 한다. 둘째, 신앙에서 주어지는 초자연적인 진리를 인간에게 전해주는 존재자는 바로 신 자체임을 명백히 한다. 이것은 곧 ‘신앙의 동기’에 대한 완전한 확실성을 확보하게 해준다는 의미이다. 셋째, 살아가는 동안 어느 순간에 하느님의 말씀이 주어지면 우리는 그 말씀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 명백히 한다. 곧 ‘신앙의 정당성’을 확보하게 해준다. 넷째, 계시된 신비를 보다 잘 이해하기 위해 끊임없이 추구하도록 이끌어 준다.”(김정호 「신을 아는가 믿는가?」 참조)
[프란치스코의 향기] (13) 프란치스코, 가서 나의 집을 고쳐라
복음으로 교회 다시 세운 두 프란치스코
2026년.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선종 800주년 희년을 보내는 이 뜻깊은 시기, 시대를 뛰어넘어 복음적 이상을 공유했던 ‘두 프란치스코’를 함께 묵상하고자 합니다. 첫 번째 프란치스코는 13세기 중세 교회에 새로운 복음의 숨결을 불어넣었던 아시시의 가난뱅이 프란치스코이며, 또 다른 프란치스코는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가 남긴 발자취와 영적 유산으로 오늘날 우리에게 깊은 깨달음을 주고 있는 프란치스코 교황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지상에서의 모든 소임을 마치고 선종하였지만, 그가 뿌린 복음의 기쁨과 형제적·생태적 가르침은 오늘날 교회 안에서도 여전히 등대처럼 밝고 뚜렷한 이정표이자 아름다운 신앙의 유산으로 살아 숨 쉬고 있습니다. 지난 2013년 콘클라베 전후 시기, 가톨릭교회는 역사적인 도전들 속에서 깊은 성찰과 개혁을 강력하게 요구받고 있었습니다. 교회가 세상을 향한 예언자적 기능을 상실한 채, 오직 요새 안에 갇혀 자기 안위와 행정 관리에만 안주하는 ‘자기준거적(self-referential)’ 자아도취에 빠져 있다는 뼈아픈 반성이 제기되기도 했습니다.
콘클라베 직전 추기경 전체 회의에서 베르골료 추기경은 자기 영광을 추구하는 세속적 교회를 극복하고 실존적 변방으로 나아가는 교회의 두 가지 영적 모델을 선포하며 추기경단에 깊은 울림을 주기도 하였습니다. 투표를 통해 베르골료 추기경이 제266대 교황으로 피선되었을 때, 그의 곁을 지키던 절친한 동료 클라우디오 우메스 추기경은 새 교황을 따뜻하게 안아주며 “가난한 사람들을 잊지 마십시오”라는 간곡한 당부를 남겼습니다.
이 조용하고도 강력한 메시지는 베르골료 추기경의 영혼 깊숙이 각인되었습니다. 그는 즉시 평화와 가난, 피조물 보호의 성인인 아시시의 프란치스코를 떠올렸고, 가톨릭교회 2000년 역사상 그 누구도 선택한 적 없었던 지극히 가난한 ‘프란치스코’를 자신의 교황명으로 채택했습니다. 이는 단순한 이름의 선택을 넘어, 그의 교황직 전체를 이끌어갈 일종의 직무 설계도와 같았습니다.
교황 피선 후 성 베드로 광장에는 “프란치스코, 가서 나의 집을 고쳐라!”라는 배너가 펄럭였습니다. 이는 800여 년 전, 아시시의 프란치스코가 산 다미아노 성당의 십자가로부터 전해 들었던 소명과 일치하는 부르심이었습니다. 당시 13세기 교회 역시 교황권과 군주적 세속성이 정점에 달하며 참된 복음의 단순함을 잃어가고 있었습니다. 당시 파도바의 안토니오 성인이 자신의 강론을 통해 고발하듯 고위 성직자들이 사치스러운 모피와 상아 침대에 안주하는 동안, 가난하신 그리스도는 마구간에 헐벗은 모습으로 누워 계시는 모순이 존재했습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가서 나의 집을 고쳐라”라는 부르심을 처음에는 문자 그대로 알아듣고 낡은 성당 건물들을 수리하다가 점차 인간과 피조물을 아우르는 하느님의 집(oikos) 전체를 수리하는 여정을 걸었습니다.
마찬가지로 프란치스코 교황 또한 상처 입고 소외된 현대 교회를 그리스도의 자비로 다시 세우는 쇄신의 여정을 성실하게 걸어갔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취임 직후 화려한 황금 십자가와 교황 모제타(mozzetta, 망토)를 거절하고 주교 시절의 낡은 은십자가를 고수하며 가난과 단순함을 드러냈습니다. 자신을 교황이 아닌 ‘로마의 주교’로 겸손히 소개하고, 군중에게 첫 강복을 하기 전 먼저 고개를 숙여 하느님 백성의 기도를 겸손히 청했습니다.
이렇듯 두 프란치스코의 만남은 구유와 십자가로 대변되는 가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삶의 중심으로 모시고, 복음의 영원한 새로움으로 돌아가 교회의 본질적 기쁨을 회복하라는, 시대를 관통하는 거룩한 초대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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