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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명화론
- <오징어게임> 놀이의 사건성에 대한 전개체적 분석
권대근
문학박사, 대신대학원대학교 교수
Ⅰ. 로그인
1. 의미의 재현에서 사건의 발생으로
- 놀이를 ‘말하는 수필’에서 놀이가 ‘일어나는 수필’로
질 들뢰즈는 『의미의 논리』에서 사건을 이미 완결된 사실이나 개인의 체험이 아니라, 주체 이전에서 발생하는 비인칭적 생성으로 정의한다. 사건은 “무엇이 있었는가”가 아니라 “무엇이 지금 일어나고 있는가”의 문제다. 이 관점에서 볼 때, 수필 <오징어게임>은 놀이에 대한 회고나 감상문이 아니라, 놀이가 다시 발생하도록 조직된 사건적 텍스트다. 요한 하위징아는 『호모 루덴스』에서 “놀이는 문화보다 오래되었다”고 말한다. 이 수필은 바로 그 문장을 문학적으로 증명한다. 세계적 콘텐츠 <오징어게임>이라는 디스토피아적 놀이를 출발점으로 삼지만, 텍스트는 곧 의미의 비판을 넘어 놀이의 힘 그 자체를 현실에서 다시 발생시키는 장으로 이동한다. 즉 이 글의 핵심은 놀이의 의미가 아니라 놀이의 사건화다. 들뢰즈적 관점에서 말하면, 이 수필은 체험의 재현이 아니라 전개체적 놀이, 강도의 배치로 읽혀야 한다.
Ⅱ. 클릭
- 전개체적 사건으로서의 놀이: 개인을 넘어 발생하는 감응의 장치들
들뢰즈의 사건의 존재론에서 놀이란 주체가 선택해 수행하는 행위가 아니라, 주체가 형성되기 이전의 층위에서 이미 발생하는 힘의 배치다. 다시 말해 놀이는 ‘누가 놀았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어떤 감응의 장이 열렸는가의 문제다. 수필 <오징어게임>에서 다대포 바닷가는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바다의 윤슬, 파도의 리듬, 햇빛의 온기, 웃음과 박수가 서로 얽히며 하나의 전개체적 아장스망을 형성하는 사건의 장이다. 이 장 안에서 개인의 나이, 직함, 이력은 잠정적으로 해체되고, 대신 놀이 근육, 몸의 리듬, 즉각적인 반응과 같은 비인칭적 강도가 전면에 떠오른다. 놀이가 시작되는 순간, 주체는 놀이를 ‘하는’ 존재가 아니라, 놀이가 통과해 가는 통로가 되며, 수필은 바로 그 통과의 순간을 포착함으로써 체험의 서술을 넘어 사건의 발생을 조직한다.
1. 디스토피아적 놀이에서 사건적 놀이로의 전환
수필의 초반부에서 영화 <오징어게임>은 분명히 놀이의 타락한 형식으로 제시된다. 글쓴이는 어린 시절의 놀이를 떠올리며, 놀이가 지녔던 본래의 윤리, 함께 어울리며 규칙을 배우고, 이김과 짐을 동시에 감당하는 태도를 조심스럽게 호출한다. “진한 우정이 자라고, 승리의 기쁨과 승복의 태도도 배웠다”는 회상은 놀이가 단순한 오락이 아니라 사회적 감응과 윤리를 생성하는 장이었음을 환기한다. 이 회상의 층위에서 놀이는 공동체적이며, 생을 확장시키는 힘으로 자리한다. 그러나 영화 <오징어게임>의 놀이터는 이러한 기억의 공간과 단절되어 있다. 그것은 타고르가 노래한 아이들의 바닷가가 아니라, 생존을 조건으로 한 폭력의 경기장이다. “이기지 않으면 실제로 죽임을 당하는” 규칙은 놀이를 더 이상 놀이가 아니게 만든다. 놀이가 지녀야 할 여백과 우연성, 패배의 교육적 가능성은 제거되고, 오직 결과만이 남는다. 이 대목에서 텍스트는 분명한 가치 판단을 제시하는 듯 보인다. 놀이정신이 망가진 디스토피아라는 규정은 도덕적 비판으로 읽힐 여지가 충분하다.
많은 것을 내주었습니다. 그래도 나이 제한 없이 편짜고 놀이하던 어릴 적 친구들을 그리워하는 마음만은 아직도 싸매고 있습니다. 그 속에서 진한 우정이 자라고, 승리의 기쁨과 승복의 태도도 배웠거든요. 세계적으로 흥행한 영화 「오징어게임」 속 놀이터는 타고르가 꿈꾸고 우리가 그리워하던 유토피아가 아닙니다. 이기지 않으면 실제로 죽임을 당하는, 놀이정신이 망가진 비참한 디스토피아입니다. 영화를 본 이후 섬뜩한 두려움에 꿈자리가 뒤숭숭하던 밤도 있었어요. 그런데도 세계적으로 흥행에 성공하고, 지구촌을 들썩이게 한 힘이 궁금해집니다. 호모 루덴스, 인간의 놀이 본능을 명중시켰기 때문이 아닐는지요.
<오징어게임>중에서
“이기지 않으면 실제로 죽임을 당하는, 놀이정신이 망가진 비참한 디스토피아입니다.” 그러나 이 문장이 놓인 자리에서 중요한 것은 비판의 강도가 아니라, 비판이 더 이상 확장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글은 여기서 영화의 자본주의 비유를 분석하지도 않고, 폭력성의 사회적 원인을 추적하지도 않는다. 설명은 멈추고, 질문만 남는다. “그런데도 세계적으로 흥행에 성공하고, 지구촌을 들썩이게 한 힘이 궁금해집니다.” 이 질문은 의미 분석의 방향이 아니라, 힘의 방향을 가리킨다. 무엇이 옳은가가 아니라, 무엇이 움직였는가를 묻는 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들뢰즈가 말한 사건의 논리가 작동한다. 들뢰즈에게 사건은 대립항 사이의 논증에서 발생하지 않는다. 선과 악,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의 대비는 사건을 설명할 수는 있어도, 발생시키지는 못한다. 사건은 언제나 다른 배치로의 이동, 즉 감응의 장이 바뀌는 순간에 출현한다. 수필은 영화에 대한 비판을 끝맺음으로 삼지 않고, 곧바로 전혀 다른 공간으로 독자를 데려간다.
그 전환은 다대포 바닷가라는 구체적인 장소에서 시작된다. 찰랑이는 바닷물, 햇볕, 파래, 방파제의 촉감이 서서히 문장 속으로 스며든다. 이는 단순한 장면 전환이 아니라, 놀이를 둘러싼 아장스망의 급격한 재구성이다. 죽음을 담보로 한 경쟁의 규칙이 사라지고, 대신 바다의 리듬과 사람들의 웃음, 몸의 움직임이 서로 얽히는 장이 열린다. 여기서 놀이는 다시 의미가 아니라 사건으로서 출현할 준비를 마친다. 즉, 이 수필에서 디스토피아적 놀이는 비판의 대상이지만 결론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사건적 놀이로 이동하기 위한 문턱이다. 영화 <오징어게임>이 보여준 왜곡된 놀이의 형식은, 다대포 바닷가에서 실제로 벌어지는 놀이가 지닌 생명력을 더욱 선명하게 드러내는 대비 장치로 기능한다. 이렇게 수필은 놀이를 해석하는 글에서, 놀이가 다시 발생하도록 배치하는 글로 방향을 틀며, 사건의 층위로 진입한다.
다대포 바닷가에 부산수필문학협회 회원들이 모였습니다. 찰랑이는 바닷물이 우리가 앉은 계단형 방파제를 찰싹이며 핥고 있었습니다. 파래는 물결을 타고 일렁이며 초록을 우려내고, 우리는 따사로운 햇볕을 즐기며 권대근 교수님의 문학특강을 들었습니다. 호모 사피엔스의 본성을 한껏 살려 집중하였습니다. 한흑구가 보리는 고개를 숙인다고 한 것이나 염상섭이 청개구리의 내장에서 피어오르는 더운 김을 보았다는 것, 누군가 나팔꽃이 밤에 피었다고 한 부분에 대해 진지하게 메스를 가하였습니다. 무료하던 일상도, 요양원에 간 친구 생각도, 떠나지 않는 허리 통증도 잊어버릴 정도로 재미있나 봅니다. 매사 시큰둥한 이즈음에 활기찬 질의응답이 이어진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생각을 요리조리 굴리고, 새로운 예를 찾다보니 놀이처럼 다가왔던 것이지요.
<오징어게임>중에서
“찰랑이는 바닷물이 우리가 앉은 계단형 방파제를 찰싹이며 핥고 있었습니다.” 이 문장은 배경 묘사가 아니라 사건의 촉매다. 바다, 햇볕, 파래, 윤슬, 소리, 이 모든 비인칭적 요소들이 인간 주체 이전에서 하나의 정동적 장(場)을 구성한다. 여기서 놀이는 ‘하는 것’이 아니라 발생하는 것이 된다. 주목할 점은, 이 장 안에서 이루어지는 활동이 본래 ‘공부’라는 사실이다. 권대근 교수의 문학특강은 집중과 분석을 요구하는 지적 노동이지만, 이 수필에서 그것은 곧 놀이로 전환된 사유의 운동으로 변형된다. 한흑구의 “보리는 고개를 숙인다”는 문장이나, 염상섭이 포착한 “청개구리의 내장에서 피어오르는 더운 김”에 대해 메스를 가하는 장면은, 텍스트 분석의 결과를 도출하기 위한 과정이 아니라 사유 자체가 몸을 얻는 순간을 보여준다. 질문과 응답이 활기를 띠는 이유는 참여자들의 의지가 각성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바다의 리듬과 햇볕의 온기, 문장의 촉감이 서로 얽히며 사고의 속도를 바꾸었기 때문이다. 들뢰즈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때 사유는 주체의 소유물이 아니라, 배치 속에서 생성되는 운동이 된다.
그래서 이 장면에서는 개인적 고통과 일상의 무게가 잠정적으로 중지된다. “요양원에 간 친구 생각”이나 “떠나지 않는 허리 통증”은 해결되지 않았지만, 잠시 작동을 멈춘다. 이는 치유나 위로의 서사가 아니라, 사건이 지닌 고유한 효과다. 전개체적 사건은 개인의 기억과 감정을 제거하지 않되, 그것들을 다른 리듬 속에 접속시킨다. 이 접속의 결과, 무료하던 일상은 갑자기 밀도를 얻고, 공부는 놀이처럼 체험된다. 결국 이 대목에서 수필은 놀이의 본질을 설명하지 않는다. 대신 놀이가 어떻게 발생하는지를 현장적으로 보여준다. 생각을 “요리조리 굴리고, 새로운 예를 찾는” 행위는 목적을 향한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로 즐거움을 생산하는 사건이 된다. 이처럼 다대포 바닷가에서 형성된 정동적 장은, 이후 실제 놀이판으로 이어질 수 있는 에너지의 예비적 축적이며, 놀이가 신체를 통해 폭발하기 직전의 사건의 전조로 기능한다.
2. 전개체적 강도
- 개인 이전의 놀이 근육
들뢰즈에 따르면 사건은 전개체적(pre-individual)이다. 즉, ‘나’라는 주체가 느끼고 해석하기 이전에 이미 강도가 흐르고, 그 강도가 주체를 통과하며 감정과 행위를 발생시킨다. 사건은 개인의 소유물이 아니라, 개인을 앞서 존재하며 잠시 개인을 통과해 가는 힘이다. 이 수필에서 놀이의 진정한 주체가 개인이 아니라 집단적 리듬이라는 점은 바로 이 전개체적 차원에서 분명해진다. 다대포 바닷가에서 작동하는 놀이는 특정 인물의 의지나 성향에서 비롯되지 않는다. 누구도 먼저 “놀자”고 선언하지 않으며, 놀이를 통해 무엇을 얻겠다는 목적도 제시되지 않는다. 대신 바다의 파도 소리, 손뼉의 박자, 웃음의 번짐, 시선의 이동이 서로 얽히며 하나의 집단적 박동을 만들어낸다. 이 박동 속에서 개별 인물들은 주체라기보다 리듬에 몸을 내맡긴 매개체로 존재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들뢰즈가 말한 전개체적 강도가 구체적인 장면으로 현현한다.
수필 속에서 자주 반복되는 표현들, “분위기가 고조되었다”, “박수와 탄식이 낭자했다”, “구경꾼들도 함께 분위기를 탔다”는 모두 개인의 심리를 설명하지 않는다. 대신 이 문장들은 놀이판 전체를 관통하는 강도의 상승과 파동을 기록한다. 누가 잘 던졌는지, 누가 졌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비석이 날아가는 궤적을 따라 시선과 호흡이 동시에 움직이고, 그 순간 신체들이 하나의 장 안에서 동조(resonance)한다는 사실이다. 이때 깨어나는 것이 바로 ‘놀이 근육’이다. 놀이 근육은 특정 개인의 재능이나 숙련이 아니다. 그것은 어린 시절에 형성되었으나 오랫동안 사용되지 않아 잠들어 있던 전개체적 능력이다. 사회적 역할, 직함, 나이, 성취의 기억은 이 근육을 억제해 왔지만, 사건의 장이 열리는 순간 그것들은 효력을 잃는다. 단체장을 지냈던 이도, 교수라는 이름으로 불리던 이도, 한순간에 “개구쟁이 아이”가 된다. 이는 퇴행이 아니라, 전개체적 층위로의 접속이다.
들뢰즈가 말했듯, 강도는 비교되지 않는다. 그것은 많고 적음의 문제가 아니라, 흐르고 멈추는 문제다. 이 수필에서 놀이 근육은 누군가에게만 더 많이 주어진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장이 열리는 순간 모두에게 동시에 흐른다. 그래서 탈락자도 웃고, 구경꾼도 박수를 치며, 바닷물마저 “찰싹이며 격려하는” 존재로 서술된다.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 또한 이 전개체적 강도 속에서 느슨해진다. 결국 이 부문에서 수필이 보여주는 것은 놀이의 심리학이 아니라 놀이의 역학이다. 놀이는 개인의 선택이 아니라, 강도가 특정 임계점에 도달했을 때 불가피하게 발생하는 사건이다. 이 사건은 잠들어 있던 놀이 근육을 깨우고, 신체를 다시 리듬 속으로 돌려보낸다. 그렇게 수필은 놀이를 추억하는 글이 아니라, 놀이가 다시 몸을 얻는 순간을 기록한 사건의 문서가 된다.
다대포 바닷가에 부산수필문학협회 회원들이 모였습니다. 찰랑이는 바닷물이 우리가 앉은 계단형 방파제를 찰싹이며 핥고 있었습니다. 파래는 물결을 타고 일렁이며 초록을 우려내고, 우리는 따사로운 햇볕을 즐기며 권대근 교수님의 문학특강을 들었습니다. 호모 사피엔스의 본성을 한껏 살려 집중하였습니다. 한흑구가 보리는 고개를 숙인다고 한 것이나 염상섭이 청개구리의 내장에서 피어오르는 더운 김을 보았다는 것, 누군가 나팔꽃이 밤에 피었다고 한 부분에 대해 진지하게 메스를 가하였습니다. 무료하던 일상도, 요양원에 간 친구 생각도, 떠나지 않는 허리 통증도 잊어버릴 정도로 재미있나 봅니다. 매사 시큰둥한 이즈음에 활기찬 질의응답이 이어진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생각을 요리조리 굴리고, 새로운 예를 찾다보니 놀이처럼 다가왔던 것이지요.
<오징어게임> 중에서
들뢰즈의 말처럼, “사건은 주체에 귀속되지 않고, 배치 속에서 발생한다.” 바로 이 점에서 수필 <오징어게임>의 전환은 급작스럽지만 필연적이다. 활기찬 질의응답은 토론의 성과로 귀결되지 않고, 곧장 신체의 움직임으로 이행된다. 질문은 해답을 요구하지 않고, 다음 사건을 촉발하는 신호로 기능한다. “왜 재미있었을까”라는 물음은 설명의 문턱에서 멈추고, 그 자리에 비석이라는 물질적 장치가 들어선다. 이는 사유의 실패가 아니라, 사유가 다른 형식으로 몸을 얻는 순간이다. 비석이 상자에서 꺼내지는 장면은 단순한 놀이의 시작이 아니라, 배치의 전환을 알리는 사건적 징후다. 언어와 개념이 중심이던 장에는 이제 손의 감각, 거리의 계산, 몸의 균형이 개입한다. 손뼉의 박자와 바다의 파도 소리는 신체의 리듬을 동조시키고, 구경꾼의 시선은 놀이판의 긴장을 증폭시킨다.
이 모든 요소들은 어떤 개인의 의도나 능력과 무관하게 얽히며 하나의 전개체적 아장스망을 구성한다. 여기서 놀이는 누구의 소유물도 아니며, 오직 배치가 작동할 때만 발생하는 사건으로 존재한다. 이 과정에서 주체는 점점 희미해진다. “내가 잘해야 한다”는 생각은 박수와 탄식 속에서 분해되고, 대신 던지는 동작 자체가 리듬에 포섭된다. 성공과 실패는 개인의 평가가 아니라, 놀이판 전체의 파동으로 흡수된다. 누군가 비석을 맞히면 환호가 터지고, 빗나가면 탄식이 흐르지만, 그 감정들은 특정 인물에게 귀속되지 않는다. 그것들은 장 안을 순환하는 강도의 변주일 뿐이다. 결국 이 장면에서 수필은 놀이의 의미를 말하지 않는다. 대신 놀이가 어떻게 집단적 리듬으로 확장되고, 사유의 장에서 신체의 장으로 이동하는지를 사건적으로 제시한다.
질의응답의 활기는 놀이의 예비 단계였고, 비석이 등장하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설명될 필요가 없는 순수한 발생이 된다. 이렇게 수필은 독자를 분석의 자리에서 밀어내고, 어느새 그 놀이판의 한 자리에 세워 놓는다. 특히 다음 장면은 이 수필이 도달한 전개체적 사건성을 가장 또렷하게 보여준다. 바닷가 마을에 모인 ‘아이들’은 실제의 연령으로만 보면 노년의 작가들이지만, 사건의 층위에서는 더 이상 특정 연령이나 사회적 위치로 규정되지 않는다. 동서남북, 사방치기, 얼음땡, 딱지치기와 같은 놀이 이름들의 열거는 단순한 추억 소환이 아니라, 놀이의 규칙과 리듬이 연속적으로 호출되는 강도의 목록이다. 여기서 놀이는 하나의 특정 게임이 아니라, 몸에 저장되어 있던 여러 놀이의 기억들이 한꺼번에 깨어나는 전개체적 장으로 펼쳐진다.
바닷가 마을에 아이들이 모였습니다. 엄마가 부르러 나올 때까지 동서남북, 사방치기,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달팽이, 삼팔선, 꼬리잡기, 얼음땡, 제기차기, 실팽이, 죽방울, 딱지치기, 공기놀이, 고무줄놀이에 열을 올리던 꼬마들이 모였습니다. 사회에서 제몫을 든든히 하였고, 이제는 은퇴하신 대단한 분들이 옛 실력을 뽐내었습니다. 단체장을 지낸 과거의 영광도, 교수라는 직함도 다 벗어버리고, 개구쟁이 아이가 되어 한쪽 다리를 번쩍 들며 비행기 자세로 비석을 날려 보냈습니다. 나는 잘못 던진 비석이 계단을 개구리처럼 뛰어내려도 날쌔게 잡아왔습니다. 육십 대 아줌마의 뚝심이 빛나는 순간이지요. 그것이 바닷물에 빠질까 봐 막내인 내가 회장이라고 몸을 사릴 계제가 아니었습니다.
<오징어게임> 중에서
이 문장이 지시하는 것은 회상이 아니라 정체성의 일시적 무효화다. 사회적 직함과 이력은 개인의 본질이 아니라, 특정한 배치 속에서만 작동하는 표식임이 드러난다. 놀이가 시작되자 그 표식들은 기능을 상실하고, 대신 ‘놀이 근육’이라는 비개인적 힘이 전면에 떠오른다. 이는 과거로 되돌아가는 노스탤지어가 아니라, 들뢰즈가 말한 시간의 비선형적 접속이다. 과거의 아이는 기억 속에 보존된 이미지가 아니라, 현재의 신체를 통해 다시 사건으로 발생한다. 이때 신체는 설명되지 않고, 수행된다. 한쪽 다리를 번쩍 들어 비행기 자세로 비석을 던지는 동작, 계단을 뛰어내리는 비석을 날쌔게 낚아채는 몸놀림은 기술의 재현이 아니라, 사건에 의해 촉발된 즉각적 반응이다.
“육십 대 아줌마의 뚝심”이라는 표현 역시 개인적 성취를 자랑하는 문장이 아니라, 강도가 신체를 통과한 흔적을 유머러스하게 기록한 것이다. 막내라는 위치나 회장이라는 직책조차 이 순간에는 고려 대상이 아니다. 놀이판 안에서 중요한 것은 역할이 아니라, 강도에 응답하는 몸이다. 알베르 카뮈의 말처럼, “진정한 반항은 삶을 긍정하는 데서 시작된다.” 이 수필의 놀이 역시 체제에 대한 직접적인 저항이나 사회비판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대신 그것은 나이 듦, 역할, 쇠락이라는 질서에 맞서는 생명의 긍정으로서의 사건이다. 놀이는 시간을 거슬러 과거로 도피하지 않고, 현재의 신체를 통해 다른 가능성을 열어젖힌다. 이렇게 발생한 전개체적 사건 속에서, 개인은 잠시 사라지고, 오직 살아 있는 몸들의 리듬만이 바닷가에 남는다.
3. 윤슬처럼 번지는 사건
- 의미 없는 기쁨의 정치학
결승 장면에서 승패는 중요하지 않다. 이 수필의 결승 장면에서 승패는 서사의 목표가 아니다. 경기의 긴장감은 분명히 고조되지만, 그것은 누군가를 가려내기 위한 장치라기보다 강도를 최대치로 끌어올리기 위한 과정에 가깝다. “타탁!” 하고 울리는 소리, 비석 탑이 무너지는 순간의 경쾌함, 연장전으로 이어지는 흐름은 결과를 향한 직선적 서사가 아니라, 놀이판 전체의 리듬을 증폭시키는 파동이다. 들뢰즈의 관점에서 보면, 이 결승은 경쟁의 종착지가 아니라 사건이 가장 농밀해지는 지점이다. 우승자가 등장하지만, 그의 승리는 개인적 성취로 고정되지 않는다. “바람을 안고 달리며 춤을 추는” 장면에서 신체는 트로피를 소유하는 주체가 아니라, 강도가 넘쳐흘러 감당하지 못하는 매개체가 된다. “세계의 바다에서 아이가 춤을 춥니다”라는 문장은 승자의 이름이나 나이를 지운 채, 놀이의 순수한 상태를 호출한다. 이때 ‘아이’는 특정 인물이 아니라, 사건 속에서 일시적으로 출현한 비인칭적 형상이다.
K작가의 동작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타탁! 소리도 경쾌하게 비석 탑이 무너집니다. B작가도 만만치 않습니다. 결승전은 5판 3승인데 연장전에서 다시 붙었습니다. 마지막 한 개, 다음은 가위 바위 보로 결정할 판이 되었습니다. 잠들어있던 놀이 근육을 깨워 K작가가 유연한 동작으로 팡파르를 울립니다. 환호가 터지고 우승자가 이리 저리 바람을 안고 달리며 춤을 춥니다. 세계의 바다에서 아이가 춤을 춥니다. 승리는 저리 즐거운 것일까요. 진행자가 금시계를 협찬하고 시상까지 하였습니다. 상품을 받은 이도, 탈락한 이도 한바탕 웃음으로 십 년의 젊음을 선물 받은 것 같았습니다.
<오징어게임> 중에서
이 문장은 결승의 의미를 단번에 무력화한다. 승리의 보상으로 주어진 금시계보다 더 중요한 것은, 승자와 패자를 가르던 경계가 웃음 속에서 동시에 사라진다는 사실이다. 여기에는 교훈도, 감동의 결론도, 도덕적 메시지도 없다. 대신 웃음이라는 순수사건이 남는다. 들뢰즈가 말한 ‘순수사건’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그것은 설명되지 않고, 평가되지 않으며, 어떤 목적에도 봉사하지 않는다. 다만 발생하고, 번지고, 전염된다. 이 웃음은 개인의 감정이 아니라, 놀이판 전체를 관통하는 정동의 파동이다. 승자에게서 시작된 환호는 탈락자에게, 구경꾼에게, 바닷물의 찰랑임으로까지 확산된다.
마치 윤슬이 햇빛을 받아 수면 위에서 잘게 흩어지듯, 기쁨은 특정 주체에 머무르지 않고 공간 전체로 퍼져 나간다. 그래서 이 기쁨은 ‘의미 없음’에도 불구하고, 혹은 바로 그 의미 없음 덕분에 정치적 힘을 갖는다. 이 정치성은 대의를 주장하지 않고, 체제를 비판하지도 않는다. 대신 경쟁과 효율, 성과와 보상의 논리가 일상화된 세계 속에서, 아무것도 증명하지 않아도 되는 기쁨의 가능성을 잠시나마 실현한다. 승리하지 않아도 웃을 수 있고, 탈락해도 젊어질 수 있다는 경험은, 그 자체로 기존 질서의 규칙을 느슨하게 만든다. 이렇게 수필 <오징어게임>은 의미를 생산하지 않는 대신, 기쁨이 발생할 수 있는 조건을 배치함으로써, 윤슬처럼 번지는 사건의 정치를 완성한다.
영화 <오징어게임>은 추억 속으로 달려가는 기차표입니다. 대진표가 짜였습니다. 비석을 받쳐놓고 한 개를 걸쳐놓았습니다. 몇 걸음 떨어져서 비석 하나를 던져서 목표를 맞춰 무너뜨리면 됩니다. 내 차례가 되어 한껏 견주고 던졌습니다. 비석은 바닥에 꼬나 박더니 나동그라집니다. 두 번째도 역시 꽝이었습니다. 할수록 분위기가 고조되었습니다. 생명의 어머니라는 바닷물이 응원하는데도 쉽지가 않습니다. 박수와 탄식이 낭자하니 길 가던 이들이 하나 둘 고개를 들이밀었습니다. 오징어게임이 세상을 풍미한 뒤라 모두들 뭐하는지 척 보면 압니다. 구경꾼들도 함께 분위기를 탑니다. 역시 우리는 한 민족입니다.
<오징어게임> 중에서
“구경꾼들도 함께 분위기를 탑니다. 역시 우리는 한 민족입니다.” 이 문장은 흔히 오해되기 쉬운 지점이지만, 이 수필에서 그것은 민족주의적 동일성의 선언이 아니다. 혈통이나 역사, 정체성을 호명하는 문장이 아니라, 지금 이 자리에서 동일한 리듬에 접속했다는 감각의 표현에 가깝다. 즉 ‘한 민족’이라는 말은 개념이 아니라 정동의 상태를 가리킨다. 들뢰즈의 관점에서 보면, 이는 동일한 정체성의 공유가 아니라, 강도의 동시적 감염이다. 비석을 던지는 몇 명의 몸짓은 곧 놀이판을 넘어 길 가던 이들의 시선과 호흡을 끌어들인다. 누가 이기고 지는지 알지 못해도, 무엇을 걸었는지 몰라도 상관없다. 중요한 것은 박수와 탄식이 교차하는 순간의 리듬이며, 그 리듬이 구경꾼의 몸까지 파고든다는 사실이다. 이렇게 사건은 참여자와 비참여자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공간 전체를 하나의 확장된 놀이판으로 재구성한다.
윤슬의 비유가 여기서 다시 의미를 얻는다. 윤슬은 중심이 없다. 어디서 시작되었는지 알 수 없고, 한 점에 머무르지도 않는다. 햇빛과 물결이 만나는 순간마다 새로 생겨나며, 수면 전체로 퍼진다. 이 수필에서 웃음과 흥도 마찬가지다. 그것은 특정 인물의 감정이 아니라, 바다와 사람, 놀이도구와 구경꾼의 시선이 얽히며 발생한 비인칭적 사건이다. 그래서 웃음은 소유되지 않고, 누구의 공로도 되지 않는다. 이 지점에서 사건은 사회적 의미를 띤다. 그러나 그것은 이념의 수준이 아니라, 감각의 수준에서 작동하는 정치성이다. 경쟁과 성과, 관전과 평가로 분절된 일상의 질서 속에서, 낯선 이들까지 같은 분위기에 “타게” 만드는 힘, 바로 그것이 사건의 정치다. 이 정치에는 구호도, 주장도 없지만, 잠시나마 세계를 다른 방식으로 조직한다. 결국 이 장면에서 수필은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우리는 같은 민족이어서 웃는 것이 아니라, 함께 웃고 있기 때문에 하나의 장에 속한다고. 그렇게 사건은 개인을 넘어, 집단을 넘어, 공간 전체로 번지며, 바닷가를 하나의 살아 있는 놀이의 장으로 바꾸어 놓는다.
Ⅲ. 로그아웃
- 놀이의 사건성, 수필의 새로운 윤리
송명화의 수필 <오징어게임>은 놀이의 의미를 설명하지 않는다. 놀이가 왜 중요한지, 무엇을 가르치는지, 어떤 교훈을 주는지를 끝내 말하지 않는다. 대신 이 수필은 놀이가 다시 일어나도록 언어를 배치한다. 바다의 소리, 신체의 움직임, 웃음의 파동을 문장 속에 배열함으로써, 독자가 읽는 동안 하나의 정동적 장에 접속하게 만든다. 이것이 바로 들뢰즈적 사건의 존재론이 문학에서 작동하는 방식이다. 문학은 의미를 전달하는 도구가 아니라, 사건을 발생시키는 장치가 된다. 타고르의 구절, “끝없는 세상의 바닷가에 아이들이 모여 떠들고 춤을 춥니다”는 이 수필의 주제를 요약하는 문장이 아니다. 그것은 이미 발생한 사건이 남긴 잔향, 다시 말해 울림이다. 여기서 ‘아이들’은 특정 연령이나 인물을 가리키지 않는다. 그것은 놀이가 통과해 간 자리에서 잠시 모습을 드러낸 놀이하는 생명 그 자체다. 그래서 이 수필의 아이들은 기억 속에 머무르지 않고, 현재의 바닷가와 현재의 신체 속에서 다시 출현한다.
이 지점에서 수필의 윤리는 전통적인 교훈의 윤리와 갈라선다. 이 글은 묻지 않는다. “우리는 왜 놀아야 하는가?” “놀이가 우리에게 무엇을 주는가?” 대신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지금, 놀이가 일어났다.” 그 사실 하나로 충분하다는 태도, 이것이 바로 사건의 윤리다. 들뢰즈가 말한 것처럼, 사건은 의미를 요구하지 않는다. 그것은 평가되거나 해석되기 전에, 이미 삶을 조금 다르게 만들어 놓는다. 이러한 글쓰기에서 수필은 더 이상 체험의 고백이나 정서의 전달에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독자에게 무엇을 느끼라고 지시하지 않으면서도, 독자의 신체와 감각에 직접 작용한다. 읽는 동안 독자는 관찰자가 아니라, 어느새 그 놀이판의 한 자리에 서 있다. 박수와 탄식, 웃음과 리듬이 문장을 넘어 독자의 몸으로 전이된다. 의미는 남지 않을지 모른다. 그러나 힘은 남는다. 이 힘이 바로 놀이의 사건성이며, 동시에 오늘날 수필이 도달할 수 있는 새로운 윤리이자 미학적 가능성이다.
오징어게임
많은 것을 내주었습니다. 그래도 나이 제한 없이 편짜고 놀이하던 어릴 적 친구들을 그리워하는 마음만은 아직도 싸매고 있습니다. 그 속에서 진한 우정이 자라고, 승리의 기쁨과 승복의 태도도 배웠거든요. 세계적으로 흥행한 영화 「오징어게임」 속 놀이터는 타고르가 꿈꾸고 우리가 그리워하던 유토피아가 아닙니다. 이기지 않으면 실제로 죽임을 당하는, 놀이정신이 망가진 비참한 디스토피아입니다. 영화를 본 이후 섬뜩한 두려움에 꿈자리가 뒤숭숭하던 밤도 있었어요. 그런데도 세계적으로 흥행에 성공하고, 지구촌을 들썩이게 한 힘이 궁금해집니다. 호모 루덴스, 인간의 놀이 본능을 명중시켰기 때문이 아닐는지요.
다대포 바닷가에 부산수필문학협회 회원들이 모였습니다. 찰랑이는 바닷물이 우리가 앉은 계단형 방파제를 찰싹이며 핥고 있었습니다. 파래는 물결을 타고 일렁이며 초록을 우려내고, 우리는 따사로운 햇볕을 즐기며 권대근 교수님의 문학특강을 들었습니다. 호모 사피엔스의 본성을 한껏 살려 집중하였습니다. 한흑구가 보리는 고개를 숙인다고 한 것이나 염상섭이 청개구리의 내장에서 피어오르는 더운 김을 보았다는 것, 누군가 나팔꽃이 밤에 피었다고 한 부분에 대해 진지하게 메스를 가하였습니다. 무료하던 일상도, 요양원에 간 친구 생각도, 떠나지 않는 허리 통증도 잊어버릴 정도로 재미있나 봅니다. 매사 시큰둥한 이즈음에 활기찬 질의응답이 이어진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생각을 요리조리 굴리고, 새로운 예를 찾다보니 놀이처럼 다가왔던 것이지요.
진짜 놀이판을 벌였습니다. 아침에 지하철을 타고 오면서는 오징어게임을 한다는데 내가 무슨 놀이를 할 수 있을까 심란했다는 말씀을 하십니다. 몸을 쓰는 힘든 경기를 하지 않나 걱정하셨다는 뜻이겠지요. 진행자가 놀이도구를 꺼내들었을 때 모두 한바탕 웃었습니다. 조그마한 비석 세 개가 상자에서 나왔습니다. 송림 안 야외공연장에서 다대포 후리소리 공연을 본 뒤라 그런지 전래놀이가 더 기꺼운 것일까요. 청년들이 펼쳐놓은 그물의 벼릿줄을 당기던 그 패기를 갖고 와서 더 신나게 손뼉을 쳤습니다. “에에 산자아, 에에 산자아아”, 멸치를 후리는 일은 힘 드는 노동이지만 소리로 흥을 실어 놀이처럼 즐기기도 했나 봅니다. 은빛 윤슬이 잔멸치의 파닥임처럼 잘게 반짝였습니다. M작가의 은빛 머리칼도 햇빛 아래 참 고왔답니다.
영화 <오징어게임>은 추억 속으로 달려가는 기차표입니다. 대진표가 짜였습니다. 비석을 받쳐놓고 한 개를 걸쳐놓았습니다. 몇 걸음 떨어져서 비석 하나를 던져서 목표를 맞춰 무너뜨리면 됩니다. 내 차례가 되어 한껏 견주고 던졌습니다. 비석은 바닥에 꼬나 박더니 나동그라집니다. 두 번째도 역시 꽝이었습니다. 할수록 분위기가 고조되었습니다. 생명의 어머니라는 바닷물이 응원하는데도 쉽지가 않습니다. 박수와 탄식이 낭자하니 길 가던 이들이 하나 둘 고개를 들이밀었습니다. 오징어게임이 세상을 풍미한 뒤라 모두들 뭐하는지 척 보면 압니다. 구경꾼들도 함께 분위기를 탑니다. 역시 우리는 한 민족입니다.
K작가의 동작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타탁! 소리도 경쾌하게 비석 탑이 무너집니다. B작가도 만만치 않습니다. 결승전은 5판 3승인데 연장전에서 다시 붙었습니다. 마지막 한 개, 다음은 가위 바위 보로 결정할 판이 되었습니다. 잠들어있던 놀이 근육을 깨워 K작가가 유연한 동작으로 팡파르를 울립니다. 환호가 터지고 우승자가 이리 저리 바람을 안고 달리며 춤을 춥니다. 세계의 바다에서 아이가 춤을 춥니다. 승리는 저리 즐거운 것일까요. 진행자가 금시계를 협찬하고 시상까지 하였습니다. 상품을 받은 이도, 탈락한 이도 한바탕 웃음으로 십 년의 젊음을 선물 받은 것 같았습니다.
바닷가 마을에 아이들이 모였습니다. 엄마가 부르러 나올 때까지 동서남북, 사방치기,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달팽이, 삼팔선, 꼬리잡기, 얼음땡, 제기차기, 실팽이, 죽방울, 딱지치기, 공기놀이, 고무줄놀이에 열을 올리던 꼬마들이 모였습니다. 사회에서 제몫을 든든히 하였고, 이제는 은퇴하신 대단한 분들이 옛 실력을 뽐내었습니다. 단체장을 지낸 과거의 영광도, 교수라는 직함도 다 벗어버리고, 개구쟁이 아이가 되어 한쪽 다리를 번쩍 들며 비행기 자세로 비석을 날려 보냈습니다. 나는 잘못 던진 비석이 계단을 개구리처럼 뛰어내려도 날쌔게 잡아왔습니다. 육십 대 아줌마의 뚝심이 빛나는 순간이지요. 그것이 바닷물에 빠질까 봐 막내인 내가 회장이라고 몸을 사릴 계제가 아니었습니다.
다대포 바닷가에 노년의 작가들이 모였습니다. 몰운대를 돌며 청청한 소나무 숲에 풍진을 모두 떨어내었습니다. 얼굴에 화색이 돌고, 점점 눈빛이 살아납니다. 공부하느라 일하느라 그러다가 나잇값에 얽매이고 기운이 쇠해져서 별로라며 내쳤던 놀이 근성이 감성을 깨웁니다. 바이러스 공기 감염을 걱정하며 미루고 미루다가 어렵게 모인 자리였습니다. 수십 년 시간을 거슬러 놀다 보니 추위도 잊었습니다. 바닷물은 찰싹이며 어른아이들을 격려합니다. 방역에 지친 세상이 힘을 차릴 때도 되었습니다.
“끝없는 세상의 바닷가에/ 아이들이 모여 떠들고 춤을 춥니다”, 타고르의 시집 기탄잘리 속 한 구절을 외워봅니다. 기탄잘리는 ‘신에게 바치는 송가’라는 말이라지요. 우리의 웃음소리가 윤슬을 타고 놉니다. 물결을 타고 멀리멀리 퍼져나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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