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로데의 믿음
사도행전 12:1-17 26, 320, 364, 287
성경에는 믿음의 사람들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많은 믿음의 사람들 가운데 13-15까지 불과 세 절로 아주 짧게 아이 로데의 믿음을 소개 했습니다. ‘로데’란 이름은 하녀들에게 붙여진 흔한 이름으로 마리아의 집에서 심부름하는 여자 아이입니다. 그런데 본문에 내용을 종합해 보면 로데는 사도들이나 예루살렘 성도들보다 믿음이 더 좋았습니다.
예루살렘교회가 구제하는 일로 양분화가 되어 서로 다투었지만 집사 일곱을 세우므로 조용해졌습니다. 그런데 외부로부터 박해를 받게 되었습니다. 예루살렘교회는 종교적인 박해로 유대종교의 지도자들이 스데반을 돌로 쳐 죽였습니다.(8장) 이제는 정치적인 박해로 헤롯 왕이 야고보를 죽였습니다.(12장)
이때의 헤롯은 아기 예수 나실 때 많은 어린 아이를 학살한 헤롯 왕의 손자입니다. 헤롯 왕은 유대인들로부터 환심을 사기 위해 교회를 박해하기 시작했습니다. ‘헤롯이 손을 들어’(1)라는 말은 왕이 직접 교회를 박해를 하였다는 말입니다.
헤롯은 교회 지도자 몇 사람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먼저 가장 존경받는 야고보를 죽였습니다. 베드로와 함께 고기 잡다가 예수님의 제자가 요한의 형제 야고보입니다. 야고보를 아무 이유도 없이 죽였습니다.(2) 야고보를 죽였더니 유대인들이 좋아하는 것을 보고 베드로를 죽이면 유대인들로부터 더 많은 지지를 받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를 죽이기 위해서 잡았지만 무교절라 죽일 수가 없었습니다. 무교절은 최대 명절이기 때문에 옥에 가두었다가 명절이 지난 후에 죽이려고 했습니다. 베드로는 이미 종교지도자들에 의해 두 번이나(4:3; 5:18) 투옥되었고 세 번째로 투옥 됩니다.
베드로가 두 번째 투옥되었을 때 주의 사자가 옥문을 열고 탈옥 시켜주었다(5:18)는 것을 알고 헤롯은 군인 열여섯 명을 네 명씩 4조를 짜서 네 명이 지키도록 했습니다. 베드로의 양쪽 팔에는 쇠사슬로 두 군인들의 매였습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탈출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암시 줍니다. 그만큼 베드로가 중요한 인물임을 의미합니다.
그때 교회는 베드로를 위하여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야고보를 잃고 베드로마저 잃게 된다면 교회에 치명적인 타격이 될 것이기 때문에 위기의식을 가지고 온 교회는 하나님께 매달렸습니다.
주께서 사자가 나타나서 군인들 틈에 끼여 깊이 자고 있는 베드로를 쳐서 깨웠습니다. 쇠사슬은 풀리고 옥문들이 열리고 천사를 따라 큰 길까지 나왔습니다. 그제야 베드로는 정신을 차리고 교인들이 기도하고 있는 마리아의 집으로 달려 왔습니다.
그 집은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최후의 만찬을 잡수시던 마가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이며 오순절 성령 강림하심으로 성령 충만한 역사가 일어나고 초대교회가 시작된 집입니다. 교인들이 자주 모여 기도하는 집입니다.
로데가 대문 두드리는 소리를 듣고 나갔습니다. 베드로라는 사실을 알고 너무 기뻐서 대문을 열어 주는 것도 잊어버리고 달려와 기도하는 사람들에게 베드로가 살아 돌아왔다고 알려 주었습니다.
로데가 얼굴을 보지 않고 음성만 들어도 베드로라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는 것은 평소에 그만큼 베드로와 친밀한 사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로데가 문을 여는 것도 잊어버린 것은 그만큼 안에서 기도하는 사람들이 베드로가 살아 돌아오기를 얼마나 간절하게 기도하였다는 것을 로데는 알았기 때문에 베드로가 살아서 돌아왔다는 것을 빨리 알려주고 싶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어른들은 로데를 보고 ‘미쳤다’고 말했습니다. 미쳤다고 말한 것은 베드로가 살아서 왔을 리가 없다는 강한 부정적인 말입니다. 기도하는 어른들의 마음속에는 베드로가 죽지 않고 살아오기를 위해 간절히 기도를 하면서 베드로가 살아서 돌아올 수가 없다는 아주 강한 부정적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미쳤다고 말했습니다. ‘미쳤다’는 말은 정신 이상자라는 말입니다.
그래도 로데는 ‘참말이라’(15)고 하니 그들은 ‘그러면 그의 천사라’고 말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사람들마다 지켜주는 수호천사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베드로가 살아서 올 수가 없으니 그의 천사가 왔다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기도의 모순을 보게 됩니다. 안 된다는 부정적인 생각으로 기도를 하는 것을 봅니다.
그러나 계속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습니다.(16) 베드로는 자신이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으로 탈옥하게 된 것은 빨리 교인들에게 알리고 싶었으며 또한 걱정과 불안 속에 있을 교인들을 안심 시키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계속 문을 세차게 두드린 것입니다.
문 두드리는 소리를 듣고 교인들이 문을 열었습니다. 베드로가 서 있는 것을 보고 깜작 놀랐습니다. 그들은 베드로가 살아 돌아오기를 위해 기도하면서 돌아오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습니다. 오늘의 교회에도 이와 같은 모순된 기도를 많이 하고 있습니다. 기도를 하면서도 속으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것 입니다. 하물며 기도한 대로 응답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기도의 응답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세상을 오래 살아 온 어른들은 이미 세속에 물들어 있기 때문에 믿고 기도를 한다고 하지만 자신의 생각대로 이루어질 수 없다는 부정적인 생각을 많이 합니다. 어린 아이는 순수합니다. 깨끗하고 때 묻지 않았습니다. 아이들은 기도한 것을 하나님이 들으신다고 믿습니다.
로데의 나이를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본문에 내용을 보면 열 살이 채 되지 않은 일곱, 여덟 살 정도가 되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가르치지 않아도 스스로 할 일을 찾아서 할 수 있는 나이, 어른들이 시키는 심부름도 할 수가 있고 또 대문을 열어 주고 손님을 영접 할 수 있을 정도의 나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이’는 어른들이 하는 것을 보고 따라 하며 배웁니다. 열 살이 넘은 소녀는 어른들을 속이기도 하지만 열 살이 되지 않은 아이는 속일 줄도 모릅니다. 로데는 어른들이 자주 마리아의 집에 모여서 말씀을 나누고 기도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교인들이 하는 이야기를 듣고 교회에 큰 어려움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왕이 야고보를 죽이고 이제 베드로를 죽이려고 잡아 갔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야고보나 베드로는 로데가 이미 여러 번 보았고 가까이 지냈기 때문에 잘 압니다.
그리고 어른들은 베드로를 위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어른들은 다른 날보다도 더 간절하게 기도하는 모습을 보니까 여사로운 일이 아닌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로데도 어른들 틈에 끼여서 어른들이 하는 것처럼 기도를 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성경에는 로데가 기도했다는 말씀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로데가 기도하지 않고 기도하는 장난이나 치고 놀았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어른들처럼 베드로가 살아서 돌아오게 해 달라고 간절하게 하나님께 기도를 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손을 모으고 기도하는 로데의 기도는 순진하고 간절했을 것 입니다.
세속에 때 묻은 어른들은 기도하고도 믿지 않았지만 로데는 기도한 대로 의심하지 않고 믿었습니다. 어른들은 아이를 보고 ‘네가 뭘 안다고’ 말하며 무시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불신의 마음으로 기도하는 어른들의 기도보다 아이들의 기도를 더욱 귀하게 여기십니다.
로데는 교인들이 모여서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을 듣고 자연스럽게 예수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기도를 가르쳐 주지도 않아도 어른들이 기도하는 것을 보고 배웠습니다. 기도하라고 하지 않아도 스스로 했습니다.
‘세 살 버릇이 여든 간다’는 속담처럼 어렸을 때 듣고 배운 것은 그의 일생에 큰 영향을 줍니다. 그래서 조기 교육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신앙교육도 어려서부터 해야 합니다. 어려서부터 교회 다니고 신앙생활 하신 분들은 어른이 되어서도 변함이 없는 믿음 생활을 합니다.
성장한 사람에게 예수 믿으라고 해도 잘 듣지 않습니다. 그러나 어린 손자 손녀는 손잡고 교회에 가자고 하면 좋아 하며 따라옵니다. 저도 어려서 할머니께서 손을 잡고 교회에 데리고 다녔습니다. 예배시간에는 할머니 곁에 앉아 졸다가 잤습니다. 철야기도를 하실 때 옆에서 방석을 깔고 잤습니다.
하나님께서 누구의 기도를 들어 주시겠습니까? 누구의 기도가 더 힘 있는 기도라고 생각하십니까? 제 생각으로는 어른들의 부정적인 마음으로 기도한 것보다는 거짓이 없는 순진한 아이 로데의 기도가 더 힘 있는 기도라고 생각합니다.
베드로를 위해서 기도한 어른들은 누굽니까? 예수님의 제자들이요 오순절에 성령 충만함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기도를 하면서도 살아서 돌아오리라 고는 믿지 않았습니다.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이중 삼중 철문으로 철통같이 닫친 깊은 지하에 갇혔을 뿐 아니라 군인들과 쇠사슬로 함께 묶여 있는 베드로가 살아온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것 입니다. 살아왔다는 말을 들었음에도 믿지 않았습니다.
오늘의 교회에도 어른들의 기도보다 어린 아이의 기도가 더 순진한 기도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른들은 어린 아이가 기도하는 것을 장난치는 것으로 여기며 웃습니다. 장난처럼 기도하는 아이의 기도를 하나님께서 들으신다는 것은 생각도 못합니다.
아이들은 가르쳐서 배우기도 하지만 어른들이 하는 것을 보고 더 많은 것을 배웁니다. 그래서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본이 되어야 합니다. 성경에도 로데가 기도했다는 말씀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어른들의 기도를 하나님께서 들으셨다는 말씀도 없습니다. 그러나 본문 전체를 보면 어른들의 기도보다는 아이 로데의 기도를 들으시고 하나님께서 응답하신 것이 아닌가를 생각해 봅니다. 어디까지나 저의 생각입니다.
성경에는 어른들이 하지 못한 일을 어린 아이가 믿음으로 한 것을 여러 곳에 말씀하고 있습니다. 블레셋 장군 골리앗의 고함소리에 이스라엘의 군인들은 두려워서 흩어졌습니다. 사울 왕도 두려워했습니다. 형들도 두려워하는 골리앗을 어린 다윗은 ‘여호와께서 너를 내 손에 넘기시리니 내가 너를 쳐서 네 목을 베리라’고 하며 골리앗을 쳐서 죽이고 이스라엘을 구원하였습니다.(삼상17:46)
나아만의 나병을 고칠 수 있도록 도와준 사람은 어른이 아닙니다. 이름도 밝히지 않은 한 어린 소녀였습니다.(왕하5:2) 나아만은 자신을 불행하게 만든 아람 군대 장관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린 소녀는 나아만에게 복음을 전했고 나병도 고침을 받도록 했습니다.
굶주린 오천 명이 배부르게 먹고도 열두 바구니가 남게 하는 기적을 베풀 때 사용한 떡을 누가 바쳤습니까? ‘한 아이가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바쳤습니다.(요6:9) 어른들 가운데 정말로 떡이나 고기를 가진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을까요? 많은 사람들은 자기 먹을 떡과 고기를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어른들은 예수님에게 내 놓지 않았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마태와 누가복음에는 제자들이 ‘우리에게 떡이 있다’(마14:17;눅9:13)라고 말하므로 마치 제자들 자신들이 가진 것처럼 말했지만 요한복음에 ‘여기 한 아이’(요6:9)라고 했습니다. 이것만 봐도 제자들까지도 아이가 바친 것을 크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제자들이 천국에서 누가 크냐고 다투는 것을 보시고 예수님께서는 한 어린 아이를 가운데 세우고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와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니라”(마18:3,4)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른들에게 어린 아이가 되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어른이 아이가 될 수 없습니다. 어린 아이와 같이 되라고 하셨습니다.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라고 하셨습니다. 어린 아이와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예수님께서 말씀 하셨습니다. 우리는 어린 아이와 같이 되지 아니하므로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는 불행이 없어야 합니다. 어린 아이 같이 자기를 낮춥시다.
우리 모두 어린 아이 같이 자기를 낮추고 겸손해서 천국에 들어가서 영생복락을 누립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