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압살롬의 복수
삼하 13:23-29
23 만 이 년 후에 에브라임 곁 바알하솔에서 압살롬이 양 털을 깎는 일이 있으매 압살롬이 왕의 모든 아들을 청하고
24 압살롬이 왕께 나아가 말하되 이제 종에게 양 털 깎는 일이 있사오니 청하건대 왕은 신하들을 데리시고 당신의 종과 함께 가사이다 하니
25 왕이 압살롬에게 이르되 아니라 내 아들아 이제 우리가 다 갈 것 없다 네게 누를 끼칠까 하노라 하니라 압살롬이 그에게 간청하였으나 그가 가지 아니하고 그에게 복을 비는지라
26 압살롬이 이르되 그렇게 하지 아니하시려거든 청하건대 내 형 암논이 우리와 함께 가게 하옵소서 왕이 그에게 이르되 그가 너와 함께 갈 것이 무엇이냐 하되
27 압살롬이 간청하매 왕이 암논과 왕의 모든 아들을 그와 함께 그에게 보내니라
28 압살롬이 이미 그의 종들에게 명령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이제 암논의 마음이 술로 즐거워할 때를 자세히 보다가 내가 너희에게 암논을 치라 하거든 그를 죽이라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것이 아니냐 너희는 담대히 용기를 내라 한지라
29 압살롬의 종들이 압살롬의 명령대로 암논에게 행하매 왕의 모든 아들들이 일어나 각기 노새를 타고 도망하니라
삼하 13:23-29 / [압살롬이 암논에게 보복하다] 다말이 암논에게 강간당한 뒤 2년이 지나서였다. 다말의 친오빠 압살롬이 에브라임 성읍 근처에 있는 바알하솔에서 양털을 깎게 되었다. 그곳은 예루살렘에서 북쪽으로 7킬로미터 이상 떨어진 지점에 있었고 거기에 압살롬의 토지가 있었다. 양털을 깍을 때에는 큰 잔치를 베푸는 풍습이 있었기 때문에 압살롬은 왕자들을 모두 초대하였다. 그러나 왕세자인 암논의 초청은 왕의 허락이 필요하였다. 24) 그래서 압살롬은 왕을 찾아가 이렇게 아뢰었다. `아버님, 마침 제가 양털을 깎게 되었습니다. 이 축제에 아버님께서 직접 가까운 신하들과 함께 참여해 주시기 바랍니다.' 25) 그러나 왕은 아들의 초청을 사양하였다. `내 아들아, 꼭 그렇게 할 필요가 있느냐? 우리가 모두 내려간다면 네게 짐이 될 것이다' 그래도 압살롬이 계속 간청하자 왕은 자리에서 일어나 작별인사를 하며 `그만 돌아가라' 고 하였다. 26) 그러자 압살롬이 다른 청을 드렸다. `아버님께서 정 못가시면, 맏형 암논이라도 같이 가게 허락해 주십시오!' 그러나 왕은 이것도 거절하였다. `꼭 그렇게 할 이유가 무엇이냐?' 27) 그러나 압살롬이 계속 왕을 조르는 바람에 왕이 결국 그의 청을 들어주어 암논을 비롯한 모든 왕자들이 압살롬의 술잔치에 참여하게 되었다. 압살롬은 성대한 술잔치를 준비해 놓고 28) 다른 한편으로는 자기의 부하들에게 다음과 같은 명령을 내려놓았다. `암논이 술 기운이 돌기 시작하여 기분이 좋아질 때에 내가 너희에게 신호를 보내겠다. 너희는 그 순간을 놓치지 말고 그를 쳐죽여라. 너희는 조금도 두려워하지 말고 이 거사를 단행하여라. 그 책임은 내가 모두 지겠으니 오직 너희는 용기를 내어 내가 시키는 대로만 하여라' 29) 압살롬의 부하들은 상전의 명령대로 대번에 암논을 쳐죽였다. 사태가 이쯤 되자 다른 왕자들은 저마다 허둥지둥 자기 노새를 찾아 타고 달아나 버렸다.
아버지인 다윗이 간음을 범하지 않았거나, 우리아를 살해하지 않았더라면 아들인 암논과 압살롬은 선한 사람이 될 수 있었을까요? 다윗이 다말을 강간한 암논을 징계했다면 압살롬의 복수를 막을 수 있었을까요? 이러한 질문들에 대한 확실한 답은 없습니다. 다만 폭력과 불의는 곪은 상처와 같이 사람이나 사회를 약화시킬 뿐만 아니라 결국에는 그것을 파멸시킨다는 사실입니다.
압살롬의 계획(23-27) 암논이 다말을 강간한 사건이 있은 지 2년이 지났습니다. 다말에게는 고통과 부끄러움의 시간이었겠지만, 압살롬에게는 복수를 준비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압살롬은 에브라임 근처에 있는 ‘바알하솔’에서 양의 털을 깎았습니다. 당시에 양털을 깎는 일은 특별한 일이었을 뿐만 아니라, 잔치를 벌이고 즐거워하는 시간이기도 합니다(삼상 25:2-8). 압살롬은 다윗 왕과 다른 왕자들을 잔치에 초청합니다. 압살롬은 먼저 왕에게 잔치에 참여해 줄 것을 요청합니다. 그런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왕은 초청을 거절합니다. 압살롬은 왕에게 그렇다면 왕자들이라도 보내달라고 요청합니다. 왕의 명령에 의해 암논을 포함한 왕자들이 압살롬의 잔치에 참석합니다. 압살롬이 암논에게 직접 참석을 요청했다면 아마도 암논은 참석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압살롬은 다윗을 이용합니다. 이것은 암논이 다말을 강간하기 위해 다윗을 이용했던 것과 같습니다. 모든 준비는 끝났습니다.
압살롬의 복수(28-29) 압살롬은 명령했고, 종들은 순종했습니다. 종들은 주인의 명령을 따라, 암논만을 집중하여 공격했습니다. 왕자를 죽이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왕자에게는 많은 경호원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암논을 보호하는 경호군사들과 압살롬 사이에서 큰 싸움이 일어났을 것입니다. 살인극이 벌어진 아수라장에서, 다른 왕자들은 두려움과 공포 속에서 도망갑니다. 그들이 무사히 도망갈 수 있었던 것은 처음부터 살해 대상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압살롬은 오직 암논만을 노렸습니다. 압살롬은 복수를 이루었습니다. 이 사건을 조금 더 들여다본다면, 압살롬이 암논을 살해한 것은 단지 다말에 대한 복수만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암논이 제거됨으로써 압살롬은 다음 왕위 계승자의 자리에 가까이 다가섰습니다. 다말 사건은 그에게 명분을 제공했던 것입니다.
적 용 : 말로하는 교육보다 몸으로 보이는 교육이 더욱 강력하고 오래 갑니다. 가족들에게 몸으로 보여준 잘못된 가르침은 없었습니까?
예수님이 위대한 구세주인 이유는 죄인들을 용서했기 때문만이 아니라 죄악 된 삶으로부터 우리를 구출했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자신이 용서하신 사람들을 바꿔 놓으십니다.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단지 죄의 형벌에서만 아니라 죄악된 삶의 방식에 안주하도록 하여 사람을 죄의 노예로 만드는 죄의 권세로부터 구원하십니다. 즉 죄인들을 용서하신 후 그들 몸에 배인 죄의 습관대로 살도록 방치한다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가장 모독적인 자존심입니다.
< 설 교 >
그 일에 후에 이 일이 있었느니라
삼하 13:37-39
사람들이 흔히 정의를 외치지만 그 잣대가 자기와 상관이 없는 사람을 잴 때는 몰인정과 무자비한 반면, 자신이나 자기와 관계된 사람들을 잴 때는 관대하고 자비로울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어느 시대, 어느 누구에게나 공평한 잣대와 저울로 그 사람의 생각과 마음과 삶을 헤아리시고 계시는 분이시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두려워해야 할 것은 사람의 잣대로 재는 평가가 아니라 공의로우신 하나님께서 나의 생각과 삶을 어떻게 저울질하시는가 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이 보다 더 정직하고 올바르게 살아가야 할 가장 큰 이유이며, 그러한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가는 자만이 패역한 세대에서도 남을 핑계하거나 사회의 구조적인 모순을 핑계하지 않고 하나님 앞과 사람 앞에서 정의롭고 정직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원동력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의로우신 하나님을 믿으며 살아가는 사람도 때로는 속 좁은 인간의 생각으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헤아리기 때문에 믿음이 흔들리고 불신자와 다름이 없는 삶을 살게 될 때가 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바로 오늘 말씀의 주인공 다윗에 대한 사건일 것입니다. 그것은 다윗은 그처럼 큰 죄를 범하고서도 별 일없이 잘 살도록 내버려두시는가? 왜 다윗만 특별한 대우를 하시는가? 하는 생각입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도 때로는 불공평하게 느껴지고, 하나님을 믿는 신앙만이 삶의 원동력이요, 그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정직하게 사는 삶만이 최선이라는 생각을 확신하지 못한 채, 때로는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도 불공평해 보일 때가 종종 있다는 것입니다.
과연 하나님도 불공평하시게 사람을 차별하시거나 일을 처리하시는 경우가 있으신가? 아니면 그것은 속 좁은 우리의 오해인가 하는 것을 오늘 성경 말씀을 통해서 좀더 하나님의 정의로우심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정립하는 은혜의 시간이 되시기 바랍니다.
1. 하나님 아버지의 정의와 사랑
오늘 우리 중에 사랑이 많고 마음이 너그러운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남의 아내를 가로채고 그 남편을 고의로 적지에 배치하여 전사하도록 살인교사를 한 다윗을 용서할 수 있을 만큼 넓은 마음을 가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그와 같은 다윗이 나단 선지자의 책망을 듣고 즉시 자리에서 내려와 철저하게 회개를 하였을 때 하나님은 지체하지 않으시고 즉각 다윗의 죄를 사하여 주시겠다고 선포하셨음에 대해서 우리가 이미 지난 삼하 12장의 말씀을 통해서 살펴보았을 것입니다.
(삼하 12:13) 다윗이 나단에게 이르되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 하매 나단이 다윗에게 대답하되 여호와께서도 당신의 죄를 사하셨나니 당신이 죽지 아니하려니와
그 이유는 하나님이 다윗의 죄를 묵인하신 것이 아니라 다윗이 철저하게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회개를 하였기 때문임을 유명한 시 51편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그 하나님은 다윗에게만 그렇게 우대하시는 것이 아니라 동일한 사랑으로 오늘 저와 여러분의 죄도 그렇게 사해주시기 위해 우리의 죄를 대신하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윗에게 사죄만을 선포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대를 저버린 죄에 대한 응분의 징계가 있을 것을 사죄보다 먼저 경고하신 정의로우신 하나님이십니다.
(삼하 12:10) 이제 네가 나를 업신여기고 헷 사람 우리아의 처를 빼앗아 네 처를 삼았은즉 칼이 네 집에 영영히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고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마치 자식에 대한 어머니의 사랑과 같다면 하나님의 공의는 아버지의 매와도 같다고 비유할 수 있습니다.
자식에 대한 사랑은 부모가 자식을 위해 필요를 공급해 주시는 것만이 아니라 자식의 잘못을 징계하는 것도 역시 부모의 사랑인 것처럼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에게 내리시는 징계는 고통스러울 수 있으나 역시 사랑임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 하나님은 일찍이 다윗에게 그와 같은 사랑의 징계를 경고하신 적이 있습니다.
(삼하 7:14) 나는 그 아비가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니 저가 만일 죄를 범하면 내가 사람 막대기와 인생 채찍으로 징계하려니와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회개한 다윗을 지옥에 보내시지는 아니하시지만 징계까지 없는 것으로 특별 대우를 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내리신 징계의 채찍은 무엇입니까?
지금까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잘못된 편견 중에 하나는 하나님의 축복과 징계를 너무 물량적인 것만으로 오해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사람은 잘먹고 잘살고 오래 살고 출세하는 것인 반면, 하나님의 징계는 가난과 질병과 사고와 죽음이라는 공식으로 모든 인생사를 풀어가려고 한다는 점입니다.
그러한 관점에서 보면 다윗은 엄청난 죄를 범하고도 하나님의 징계가 아니라 변함 없는 축복을 받고 살아가는 특권층으로 오해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나단에게 징계를 경고하신 이후에도 다윗은 여전히 전쟁에서 패배가 아닌 대승리를 하였으며 집안과 신변에 별 이상이 없음을 성경에서 볼 수 있습니다.
(삼하 12:29) 다윗이 모든 군사를 모아 랍바로 가서 쳐서 취하고 (삼하 12:30) 그 왕의 머리에서 보석 있는 면류관을 취하니 그 중량이 금 한 달란트라 다윗이 머리에 쓰니라 다윗이 또 그 성에서 노략한 물건을 무수히 내어오고 (삼하 12:31) 그 가운데 백성들을 끌어내어 톱질과 써레질과 도끼질과 벽돌구이를 하게 하니라 암몬 자손의 모든 성을 이같이 하고 다윗과 모든 백성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니라
그와 같은 다윗에게 백성들은 여전히 인기가 있었고 나라는 안팎으로 견고하여만 갔습니다. 그렇다면 범죄한 다윗에 대한 하나님의 정의는 실종된 것입니까? 결코 아닙니다. 계속 유효합니다. 다만 잠시 집행을 유예하셨을 뿐이고 다만 우리의 생각과 다른 방법으로 다윗을 징계하시는 것이 바로 오늘 성경 말씀입니다.
(삼하 13:1) 그 후에 이 일이 있으니라 다윗의 아들 압살롬에게 아름다운 누이가 있으니 이름은 다말이라 다윗의 아들 암논이 저를 연애하나
여기서 "그 후에 이 일이 있으니라"는 말씀은 바로 하나님이 다윗에게 징계가 있을 것을 경고하신 후 하나님은 먼저 변함 없는 사랑으로 다윗을 승리하게 하신 이후 변함 없는 공의로 다윗을 이렇게 징계하셨다는 뜻입니다. 그것이 바로 자식을 통한 징계입니다.
사람이 결혼을 한 후 자녀를 갖게 되면 그 다음부터 삶의 중심 축이 자신이 아니라 자식이 됨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수고하며 돈을 버는 궁극적인 목적이 어디에 있습니까? 자식의 앞날을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을 위해서 먹고 입을 것이 충분히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물질에 대한 집착을 쉽게 버리지 못하는 이유 중에 하나가 자식 때문입니다.
부모의 행복이 어디에 있습니까? 아무리 자신이 부귀권세를 다 소유한 성공자라고 할지라도 방탕한 자식을 둔 부모의 마음에는 항상 어두운 그늘이 있는 까닭은 자식의 성공이 부모자신의 성공보다 더 기쁘며, 자식의 실패가 부모 자신의 실패보다 더 아픈 것이 부모의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인간관계에서 지고의 사랑을 부모의 사랑으로, 하나님이 그의 자녀된 우리에 대한 사랑도 부모의 사랑으로 나타내시기 위해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게 하신 것입니다.
그 동안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베푸신 사랑은 아버지 하나님의 물 부듯 하는 사랑이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이 그 하나님의 사랑을 저버리고 제 멋대로 살면서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것을 얼마나 가슴아파 하시는지를 전혀 염두에 두지 않고 자기 좋은 대로, 자기 감정대로 산 것 중에 하나가 바로 밧세바 사건이며 하나님은 그것에 분노하셨습니다.
(삼하 12:10) 이제 네가 나를 업신여기고 헷 사람 우리아의 처를 빼앗아 네 처를 삼았은즉 칼이 네 집에 영영히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고
이제 하나님은 다윗에게 그 하나님의 아픈 심정을 그의 아들 암몬과 압살롬의 사건을 통해서 뼈저리게 체험하게 하심으로 육신의 아픔보다 더 큰 고통을, 물질의 손해보다 더 큰 손실을, 자신의 죽음보다 더 비통한 자식의 죽음을 경험하게 하시는 것이 바로 오늘 성경 말씀입니다.
2. 잘못된 생각
다윗에게는 여러 명의 아내와 아들들이 있었는데 그 중에 아들 암논은 아히노암에게서 난 맏아들이었습니다. 다윗은 그술 왕 달매의 딸인 마아가에게서 압살롬와 다말을 낳았습니다.
그러므로 암논과 압살롬과는 어머니가 다른 이복형제요 다말은 이복남매간이 되는 사이입니다. 모세의 율법에는 이 같은 경우 결혼을 금하였습니다.
레 18:9 너는 네 자매 곧 네 아비의 딸이나 네 어미의 딸이나 집에서나 타처에서 출생하였음을 물론하고 그들의 하체를 범치 말지니라 레 18:11 네 계모가 네 아비에게 낳은 딸은 네 누이니 너는 그 하체를 범치 말지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암논은 그가 사랑해서는 안될 다말에 대한 욕망을 마음에 품기 시작하였습니다. 물론 암논 자신도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그것을 표현할 길이 없어서 상사병이 날 정도였습니다.
(삼하 13:2) 저는 처녀이므로 어찌할 수 없는 줄을 알고 암논이 그 누이 다말을 인하여 심화로 병이 되니라
암논이 해서는 안 되는 잘못된 욕망과 생각에 사로잡혀 상사병을 앓고 있을 때 악한 마귀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간교한 요나답을 붙여 주었습니다.
(삼하 13:3) 암논에게 요나답이라 하는 친구가 있으니 저는 다윗의 형 시므아의 아들이요 심히 간교한 자라
여기서 간교하다는 말의 뜻은 선한 일이 아니라 악한 일에 있어서 지혜로운 것을 가리키는 말로 교활하다는 뜻입니다.
요나답은 이새의 셋째 아들인 시므아의 아들로서 암논과는 사촌관계인데 성경에는 그를 가리켜 친구라고 한 것을 보면 친척이상의 절친한 사이임을 뜻합니다. 그러나 다윗과 요나단과 같은 이상적인 친구가 아니라 차라리 친구가 아니었으면 서로가 좋았을 악연이었습니다.
사자성어로 유유상종(類類相從)이란 말이 있는 것처럼 그 사람이 어떤 친구를 가지고 있는가를 보면 그 사람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교활한 요나답은 암논을 부추기고 그 욕정을 해결할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까지 가르쳐 주는 모사꾼 노릇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와 같이 간교한 요나답이 아니라 그 말을 듣는 암논에게 있었습니다. 암논은 더 이상해서는 안될 생각을 발전시켜 그것을 이루기 위해 친구에게 도움을 청하여 친구의 그릇된 말을 따라간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들도 예외가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누구에게나 한 두 명 이상의 친구가 있을 것입니다. 문제는 나에게 있는 친구는 나와 어떤 사이며, 나는 그 친구에게 무슨 말을 나누고 무슨 일에 함께 어울리는가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오래된 친구라고 할지라도 그 친구를 따라 지옥에 가려고 하지말고 그 친구를 천국으로 데리고 가는 친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잠 17:17) 친구는 사랑이 끊이지 아니하고 형제는 위급한 때까지 위하여 났느니라 (잠 27:6) 친구의 통책은 충성에서 말미암은 것이나 원수의 자주 입맞춤은 거짓에서 난 것이니라 (잠 27:17) 철이 철을 날카롭게 하는 것같이 사람이 그 친구의 얼굴을 빛나게 하느니라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징계를 경고하신 후에 어떻게 그것이 시작이 되었는가 하는 것을 우리가 잘 살핌으로 올바른 축복관을 정립할 수 있습니다.
다윗이 외적인 전쟁에서 승리만을 축복의 전부인 것처럼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진정한 축복이 무엇입니까?
다윗과 그의 자녀들이 올바른 신앙, 올바른 생각, 올바른 친구를 사귀면서 바르게 살아가는 것이 진정한 축복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다윗과 그의 아들들이 아무리 호의 호식을 하면서 살아갈지라도 해서는 안될 생각, 사귀어서는 안될 친구들과 어울리며 살아가는 것은 그 무엇보다 큰 징계임을 우리는 명심해야 합니다.
(시 1:1)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3. 잘못된 행동
암논이 자신의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면서도 나쁜 친구 요나답이 가르쳐준 방법을 실행에 옮김으로 다윗의 가문에는 하나님이 경고하신 것과 같은 본격적인 파란이 시작되었습니다.
암논은 일시적인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아버지 다윗을 속이고, 강압적으로 다말을 강간하였을 분 아니라 자기 욕구를 채우고 나서 후회를 하고 괴로워 한 것이 아니라 마치 다말이 무슨 잘못을 한 것처럼 강제로 추행을 하고 강제로 내쫓는 악독한 일을 하였습니다.
(삼하 13:14) 암논이 그 말을 듣지 아니하고 다말보다 힘이 세므로 억지로 동침하니라 (삼하 13:15) 그리하고 암논이 저를 심히 미워하니 이제 미워하는 미움이 이왕 연애하던 연애보다 더한지라 곧 저에게 이르되 일어나 가라
우리는 이와 같은 암논의 모습에서 누구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까? 그의 아버지 다윗과 같이 욕정에 사로 잡혀 앞뒤를 분간 못하는 다윗과 너무나 닮았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죄악의 대물림입니다.
타락한 인간은 자식에게 선을 가르치려면 많은 노력과 시간과 더불어 실패의 확률이 큰 반면, 죄는 가르치지 않고 매를 들고 막으려해도 잘도 배우고 따라서 하는 것입니다.
자식을 둔 부모들이 왜 자기 기분이나 감정대로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바로 악을 씨뿌리는 것이고 그 죄악을 대물림을 하고 재앙을 자초하는 일인가 하는 것을 오늘 성경에서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적에게는 강한 다윗이 자기 자식 암논의 그 같은 죄악을 알고서도 분통만 터뜨리고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못하는 나약한 아버지가 될 수밖에 없었을까요? 그것은 자신의 죄값이라는 죄의식이 그를 짓누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아버지로서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습니다. 자그마치 이 년이라는 세월이 흐르는 동안 최대의 피해자 다말은 고통의 세월을 보내었으며 압살롬은 복수의 칼을 예리하게 갈고 있었습니다.
(삼하 13:20) 그 오라비 압살롬이 저에게 이르되 네 오라비 암논이 너와 함께 있었느냐 그러나 저는 네 오라비니 누이야 시방은 잠잠히 있고 이것으로 인하여 근심하지 말라 이에 다말이 그 오라비 압살롬의 집에 있어 처량하게 지내니라
압살롬은 암논이 주도면밀하게 계획을 세워 다말을 강간한 것처럼 압살롬도 암논에게 복수하기 위해 주도면밀하게 계획을 세워 이스라엘 백성들의 동네 잔치 날인 양털 깎는 축제의 날에 암논을 초대하여 잔뜩 술에 취하게 하여 방심한 사이에 부하를 시켜 죽이게 하였습니다.
물론 그것은 암논이 저지른 죄에 대한 복수이지만 압살롬은 다윗이 두려워서 도망을 쳐버리고 다윗은 그와 같은 자식도 자식이라고 잊지 못해 그리워하며 그 아들 때문에 피눈물의 세월이 시작된 것입니다.
그래도 하나님은 불공평한 분이며 정의롭지 못한 분이라고 누가 망발을 하겠습니까? 하나님이 내리시는 가장 무서운 징계와 형벌은 불신앙과 부도덕한 생각과 생활을 하도록 방치해버리시는 유기인 것을 우리는 깊이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반면에 하나님의 가장 큰 축복은 육신적으로 얼마나 잘 먹고 잘 살고 사회적으로 출세하고 성공하는가 하는 것보다 더 나와 내 집과 자녀들이 신실하게 하나님을 믿으며,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알고 성경 말씀을 따라 올바른 가치관을 가지고, 선한 생각을 하고 좋은 친구들과 더불어 미래의 꿈을 가지고 건강하게 믿음 생활을 하는 것보다 더 큰 축복이 없음을 우리는 명심해야 합니다.
(수 24:15)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열조가 강 저편에서 섬기던 신이든지 혹 너희의 거하는 땅 아모리 사람의 신이든지 너희 섬길 자를 오늘날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시 1:2)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결 론
사랑하는 여러분! 사단은 아프거나 죽는 존재가 아닙니다. 항상 하나님처럼 살아서 하나님의 일을 훼방하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시험하고 유혹하여 파멸에 이르게 하려고 우는 사자처럼 먹이 감을 노리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의 가문의 치부를 이렇게 성경에 적나라하게 기록해 놓은 것은 자식을 키우는 부모의 책임과 더불어 만일 다윗처럼 자기 감정대로 살아가는 것은 죄악을 씨뿌리는 일이며 그 씨를 자녀들에게 대물림하게 된다는 사실을 경고하기 위함인 것입니다.
(히 13:7) 하나님의 말씀을 너희에게 이르고 너희를 인도하던 자들을 생각하며 저희 행실의 종말을 주의하여 보고 저희 믿음을 본받으라
오늘도 죄는 여러 가지 경로를 통해서 우리의 생각과 감정을 사로잡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암논처럼 악한 생각을 키워서는 안되며, 악한 친구들과 어울려서는 안되며, 악한 생각을 행동으로 구체화시켜서는 안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살아야 할 까요?
1)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시간과 기회를 선용하되 복 있는 사람처럼 하루하루를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며 기도하는 삶을 생활화해야 합니다. 새벽기도를 시작하십시오. 큐티를 배우고 시작하십시오. 건강한 신앙 생활을 보장하는 보약이요 수천년 묵은 산삼입니다.
2) 많은 사람을 사귀기보다는 전도하려고 하고 비록 수가 적을 지라도 나보다 믿음이 좋고 행실이 선한 친구를 가까이 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좋은 친구는 내가 잘못된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비록 듣기 싫어도 바른 말을 해주고 나의 믿음을 격려하고 나를 위해서 기도해주고 좋은 일을 하도록 도와주는 사람입니다.
만일 오늘 나의 주변에 그러한 친구가 있다면 그 사람은 마치 천군만마를 얻은 용장이나 다름이 없는 것입니다.
3) 물론 좋은 생각을 해야 하고 좋은 친구를 사귀어야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선하게 살아가도록 만만한 세상이 아닙니다. 무엇보다 절실하게 요청되는 것은 하나님을 믿고 성경을 잃고 설교 말씀을 들으면서 깨닫고 결심한 것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힘이 필요하지만 그 힘이 내 속에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말만 앞서고 마음먹은 대로 살아지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 힘의 근원이 바로 성령입니다. 그 성령이 바로 연약한 제자들을 강하고 담대한 복음의 전사들이 되게 한 원동력입니다. 그러므로 매일 매일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고 성령님은 은혜를 구해야 합니다. 그 것이 바로 성령 충만한 삶입니다.
(롬 8:5)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롬 8:6)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롬 8:7)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빌 4:7)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