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숙하면서 낯선 인간관계 속의 ‘나’
중어중문학과 2016101141 강수정
‘낯선 철학하기’ 과제를 위해 나는 우리에게 가깝지만 여전히 낯선 ‘경제’에 대하여 과제를 시작하기로 했다. 그러다 강의시간에 교수님께서 보여주셨던 EBS다큐 프라임 ‘자본주의’를 보게 되었고 그 영상에서 아담스미스, 칼 마르크스 등 세상을 바꾼 경제철학자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나는 ‘경제’를 연구한 그들보다 인간에 대하여 꾸준히 관찰한 ‘아담스미스’, 인간에 대하여 깊은 애정을 가진 ‘칼 마르크스’와 같이 ‘사람’에 대한 관찰을 해온 그들에게 더욱더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어쩌면 ‘경제’보다 우리와 가깝지만 어느 순간 낯설어 질 수 있고 여전히 어려운 ‘사람’. 더 나아가 ‘인간관계’에 대하여 과제를 시작하기로 했다.
1. ‘사람’이란 무엇인가?
어학사전에서 정의되는 ‘사람’이란 ‘인간’의 동의어로 ‘생각을 하고 언어를 사용하며, 도구를 만들어 쓰고 사회를 이루어 사는 동물(‘사람’ 「네이버사전」)’이라고 한다. 백과사전에서는 ‘사람 또는 호모 사피엔스(라틴어: Homo sapiens)는 두 발로 서서 걸어 다니는 사람과의 영장류 동물이다.(‘사람’ 「위키백과」)’로 정의하고 있다.
내가 생각하는 ‘사람’이란 수많은 생각들을 하고 살아가며, 다른 존재들과 끊임없이 어떠한 관계를 맺는 존재. 이라고 생각한다. 만약 ‘생각’을 하지 않는다면 ‘사람’이라고 볼 수 없는 걸까? 생각을 하지 않는 잠깐의 시간은 있을 수 있지만 우리가 살아가면서 아무런 ‘생각’이라는 것 없이 살아갈 수 는 없다. 흔히들 ‘제발 생각 없이 살지 마!’라는 말을 많이 듣는 사람조차 삶에 대한 진지한 고민은 해본 적 없을 수는 있어도 그 외의 다양한 생각들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어떠한 관계’를 맺지 않는다면 그것은 ‘사람’이라고 볼 수 없는 걸까? 이때 우리는 흔히 ‘관계’라고 한다면 사람과 사람사이의 일만을 생각하는 경우가 많지만 어학사전에서 정의되는 ‘관계’란 ‘둘 이상의 사람, 사물, 현상 따위가 서로 관련을 맺거나 관련이 있음. 또는 그런 관련.’, ‘어떤 방면이나 영역에 관련을 맺고 있음. 또는 그 방면이나 영역.’(‘관계’ 「네이버사전」)으로 굳이 사람과 사람사이 에서 일어나는 일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인간관계’로 따로 정의가 될 수 있다.
2. 인간관계 속에서의 ‘나’
-익숙함의 속에서 느끼는 낯설음. ‘인간관계’
우리의 삶은 항상 사람을 만난다는 ‘익숙함’의 세계 속에서 서로의 얼굴조차 모르는 즉,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이 들어오게 되면 그 사람에 대한 ‘낯설음’을 느끼기 시작한다. 이러한 낯설음을 경험하게 되면서 또한 그 낯설음이 점점 익숙함으로 바뀌는 과정에서 까지 우리는 ‘인간관계’에 대한 수많은 어려움을 겪기도 한다.
낯선 사람과의 만남이 아무렇지도 않은 사람이든 어려움을 느끼는 사람이든 또는 외향적인 사람이든 내향적인 사람이든 우리 모두는 인간관계의 어려움을 느끼게 되기 마련이다. 학교 공부, 시험 같은 경우에는 정해진 답이 존재하기 때문에 그 답을 찾아가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면된다. 틀리든 틀리지 않든 그 답은 우리에게 직접 보이게 된다. 그러나 인간관계란 것은 정해진 답이 있는 것도 아니고 본인만이 열심히 노력한다고 해서 해결되는 문제가 아닐 뿐만 아니라 노력한다고 해도 그 성과가 딱히 분명하게 나타나는 것도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저마다 인간관계에 대한 어려움을 가지고 있다.
인간관계에서의 어려움을 느끼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다. 물론 본인에게 문제가 있다면 의지로서 문제를 해결 할 수 있겠지만 세상엔 본인의 의지만으로는 해결될 수 없는 문제들 또한 많이 존재한다.
- 익숙한 나에게서 느껴지는 낯설음.
‘이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이 사람은 괜찮은 사람인가?’, ‘상대방에게 비춰지는 나의 모습은 어떠한가?’ 등 이렇게 우리는 인간관계를 시작하면서 수많은 생각과 고민을 하게 되고 쉽사리 풀리지 않는 문제들로 인해 그 과정에서 자기 자신의 모습을 숨기기도 하고 속이기도 한다.
주도적이며 다양하고 많은 사람들과 만나 왁자지껄한 분위기 속에서 함께 놀고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 조용한 분위기 속에서 소수의 사람들과 만나 이야기를 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다. 우리는 흔히 전자를 적극적인 사람, 후자를 소극적인 사람으로 분류한다.
‘외향적’이라는 것은 에너지를 외부 활동을 통해서 충전을 하는 것을 ‘내향적’이라는 것은 내부로부터 에너지를 충전하는 것을 말한다. 내향적인 것과 소극적인 것은 자세히 보면 다른 개념으로 ‘소극적’이라는 것은 ‘스스로 앞으로 나아가거나 상황을 개선하려는 기백이 부족하고 비활동적인. 또는 그런 것.(‘소극적’ 「네이버사전」)‘으로 정의 된다. 우리 사회는 흔히 내향적인 사람들을 보고 ‘소극적이다.’라고 말하며 적극적일 것을 강요한다.
끊임없이 인간관계를 넓힐 것을 중요시 하는 사회의 분위기는 그러한 것에 큰 의미를 가지지 않는 사람들에겐 많은 스트레스를 주게 된다. 그 중 하나가 바로 ‘내가 잘못된 것인가?’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며 자기 자신을 바꾸려고 하면서 시작되는 스트레스 이다.
소위 사회가 말하는 적극적인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나는 과거에 ‘내가 잘못된 것인가?’라는 질문으로 시작하여 ‘내가 변해야만 하는 거구나.’라는 결론을 내리고 내 자신을 바꾸려고 노력했던 적이 있었다. 대화에서 말을 이끌어 나가기보단 상대방의 말을 듣고 공감하는 것에 더 익숙했지만 다른 사람과의 만남에서 내가 더 많이 이야기 하려고 했으며 소수의 사람들과 만나는 것에 더 익숙했지만 여러 사람들과 만나는 자리를 좋아하려고 했다. 하지만 이러한 인간관계를 계속해서 이어간 결과 항상 오늘 일을 돌이켜 보면서 ‘도대체 왜 그랬을까’하는 후회도 많이 했고 무엇보다도 나의 하루하루가 힘들다는 생각과 내가 진짜 ‘내’가 아닌 것 같은 생각에 많은 자책감과 함께 자심감 또한 떨어지게 되었다. 익숙했던 내 모습이 아닌 어느 순간 낯설어져 버린 내 모습과 마주치게 되어버린 것 이다.
결국 나는 인간관계 속에서 낯설어져 버린 나를 버리고 익숙한 나로 돌아가기로 결심을 하게 되었고 더 이상 이로 인한 스트레스를 받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나와 가장 가까운 존재인 ‘나’에 대한 낯설음을 느끼면서까지 외부에서 원하는 모습으로 변하지는 않겠다고 다짐하며 있는 그대로의 ‘나’로 생활하려 했다. 아직도 사회가 원하는 ‘인간관계에 적극적인 사람’이 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은 외부의 의한 강요가 아닌 하나의 목표로서 남아 있지만 하루하루를 후회와 자책으로 보냈던 과거와 달리 생활에 편안함을 느낄 수 있게 되었고 진정한 내 본 모습을 찾은 기분에 잃어버린 자신감도 찾게 되었다.
이렇듯 ‘인간관계’속에서 외부에서 원하는 사람이 되려고 하다보면 어느새 낯설어져버린 ‘나’에 대하여 실망도 많이 하게 되고 그로인한 스트레스도 받게 된다. 우린 우리가 원하는 모습. 즉 낯선 내가 익숙한, 본래의 모습의 나로 돌아가게 되면서 인간관계에 대한 어려움과 스트레스로 속에서 다른 길을 찾아 갈 수 있게 될 것 이다.
3. 익숙한 낯설음에 대하여.
-과제를 마치며.
익숙하다는 것과 낯설다는 것은 어찌 보면 모순된 개념일 수 있다. 그리고 평소에는 익숙했던 것 들이 어느 순간 낯설어진다는 것은 무섭기도 하다. 하지만 위에서 말했듯 우리는 항상 가장 가까운 곳에서 익숙한 낯설음을 느낄 수 있다. 나와 다른 사람을 이어주는 어떠한 인간관계 속에서도 자신의 내면에서도 충분히 ‘익숙함’과 ‘낯설음’을 경험할 수 있으며 그것이 곳 익숙한 낯설음이 되는 것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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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호모 사피엔스라고 해서 '생각'하는 존재로 규정되었던 내가 사실은 아무 생각 없이 살고 있다는 점에서 '호모 사피엔스'가 낯설게 느껴질 수도 있지요. 나 자신에 대해서도 그렇다는 점을 잘 써내려 간 점이 인상적이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