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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문수-차명진-장기표의 족적
부부가 위장취업자: 민주노총은 도시산업선교회가 공산혁명 수행을 실천하기 위해 길러 낸 폭력집단이다. 1964년 빨갱이 목사 300명이 도산(도시산업선교회)를 만들고, 대학생들을 위장취업자로 양성하여 기업에 보냈다. 인명진이 그 원흉 중의 하나다. 위장취업자 제1기가 손학규, 그 뒤를 이어 김문수가 탄생했다. 이들은 기업에 위장 취업하여 가장 어리고, 가장 순진하고 배우지 못한 사람을 찍어서 6개월 정도에 걸쳐 의식화 교육을 시켜 기존 노조를 분쇄한 후 기업을 도산시켰다. 김문수는 양심 고백응 해야 한다. 부부가 합쳐서 몇 개의 기업을 도산시켰는지. 2010.8.31. 경기도 제2청사 간부 차명진 역시 386운동권 출신이요 간첩단이 만든 민중당 간부(구로갑지구당 사무국장)였고, 당시로는 악질적인 위장취업자였고 김문수 의원 보좌관 등의 전력을 가지고 있다. 그의 부인도 위장취업자라 한다. 회의에서 “남북 관계가 미묘하고 북·중 관계도 심상치 않은 시점이지만 남북이 공생할 수 있는 사업은 필요하다.”면서 “남북관계의 기본은 유무상통(有無相通)으로, 있는 것을 서로 나누는 게 바람직하다”며 인도적 차원의 대북 쌀 지원 필요성을 거듭 제기했다.
경기지사 김문수는 10월 11일과 12일에 걸쳐 아래와 같은 요지의 말들을 했다.
“헌법이 북한 주민을 우리 국민으로 규정하고 있기 때문에 북한에 있는 주민은 우리가 먹여 살려야 한다. 탈북자들도 한국으로 넘어오면 주택 사주고 생계비를 지원해주지 않느냐, 북한에서 미처 탈북하지 못한 북한의 주민들에게도 쌀 정도는 지원해 주는 것이 헌법에 부합되는 일이 아닌가. 북한은 절대로 핵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고 쉽게 붕괴되지도 않는다. 그래도 우리는 북한 주민을 먹여 살려야 한다. 남북관계에서 쌀을 빼면 아무 것도 할 것이 없기 때문에 군량미로 쓰인다 해도 주어야 한다.”
10월 11일에 한 김문수 발언
2010.10.11. 세종호텔에서 열린 세종포럼 초청 강연에서 김문수는 이래와 같은 발언을 했다.
"자유민주주의를 얘기하면서 북한이 비핵화하기 전에는 무조건 쌀을 줘선 안 된다는 주장이 있는데 이는 가능하지 않다. 남북관계의 실천적 전략을 고려할 때 대북 쌀 지원은 자연스러운 것으로 봐야 한다"
"북한이 쌀을 군량미로 쓸 것이란 시각도 있지만 그렇게 치면 남북관계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 견해차는 있겠지만 그 정도는 자연스러운 지원으로 본다"
"북한은 '좌'를 빙자한 세습 독재체제일 뿐이다. 남북한처럼 특이한 이념 대립관계에 있는 나라가 또 어딨겠나. 자유민주주의를 인식은 하되 북한에 대한 실천적 전략을 가져야 한다"
“자회담을 통해서도 북한은 핵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시간은 북한과 중국 편이다. 탈북자들이 매일 넘어오지만 북한 체제는 그리 간단히 무너지지 않을 것이다.”
"나도 좌파운동을 해봤지만 인간의 생각이란 게 무섭다. 북한이 3대 세습을 해도 아무도 들고일어나질 않는다. 인간이 언제 저항하고 복종하는지 제대로 공부해야 한다"
"중국은 사회과학연구원에서 당과 국가의 미래전략을 짜는데 우리는 국가 장기전략을 고민하는 연구소가 없다"
10월 12일에 한 김문수 발언
이어서 다음 날인 12일, 그는 MBC라디오 ‘손석희의 시선집중’과의 인터뷰에서 이래와 같이 말했다.
“정세에 따라 남북관계가 천안함 사건이나 군사적인 정세, 여러 가지 변화가 있지만 현재는 일부 문제가 있다. 우리 헌법에도 북한이 우리 대한민국으로 돼 있는데 북한이 대한민국의 일부이고 국민들도 탈북자가 우리나라에 오더라도 국적 취득은 자동으로 된 것으로 본다. 남한에 정착하는 주택을 드린다든지 생계비 지원을 하는 것만 하지 않더라도 우리 국민으로 보는데 그만큼 북한 주민이 우리 국민의 일부이기 때문에 당연히 여러 가지 인도적 지원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특히 쌀을 지원한다는 것은 사람이 먹어서 생존을 유지하는 문제기 때문에 다른 개성공단처럼 돈을 번다든지 또 금강산처럼 관광을 한다는 것하고 밥을 먹는다는 것 하고는 차원이 다르다.”
“북한주민도 우리 대한민국 국민의 일부라는 점을 생각할 때 수해를 입고 어려운 북한 주민을 우리가 남아도는 쌀로 도와주는 것은 이상할 게 없다.”
2009년에 행한 김문수 지사의 대북지원
2009년 8월 초, 경기도는 민간단체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에 경기도 예산 10억원을 주었고,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은 경기도 지원금에 자체 모금액을 더해 중국에서 옥수수 4,200t을 9월 1일에 북한에 주었다. 경기도는 2007년부터 식량 지원을 포함해 양묘장, 접경지역 말라리아 공동방역 등 대북사업을 추진하고 있으며 남북 관계가 경색된 그동안에도 식량을 제외한 양묘, 의약품을 지원해 왔다. 연합뉴스에 의하면 경기도는 2009년 대북사업 예산으로 60억 원 가량을 편성해 놓고 있다 한다.
경기도민은 땀 흘려 세금을 냈고, 9월 1일 그 세금을 북한에 지원해 주었다. 그리고 9월 5일 북한으로부터 물 폭탄 세례를 맞고 6명이 생명을 잃고 수억 원대의 피해를 보았다. 경기 지사는 피 같은 국민의 세금을 북한에 주었고, 그 세금을 낸 경기도민은 이렇게 처절하게 당했다. 그래도 김문수는 북한에 대해 원망 한 마디 안 했다.
2012년 7월 14일, "박정희 정권 시절 자동차 공장, 포항제철 설립, 경부고속도로 건설을 반대한 것은 그때 내 생각이 잘못된 것"이라고 '고해성사'를 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박정희에 대해 “독재자인 것은 틀림없다"고 못 박았다. "5ㆍ16은 정당하지 않은 방법으로 박정희 당시 장군을 비롯한 군인들이 권력을 빼앗은 역사적 사건이다
2009.8.19. "우리 김대중 대통령께서는 대통령이기 이전에 우리나라 민주화의 상징이고 선도자이셨다. 김 전 대통령은 세계적 지도자 가운데 한 분으로 남북통일을 위해 많은 노력을 하셨고 대통령으로서도 훌륭한 업적을 남기신 분이었다. 김 전 대통령의 민주화에 대한 염원과 남북통일에 대한 의지를 국민 모두 마음에 새기고 잘 실천해야 할 때이다. 특히 지난해 10월27일 중국 선양에서 김 전 대통령을 만났던 때를 떠올리며 김 전 대통령이 당시 "통일은 북한의 경제적 자립과 점진적인 개방을 통해 이뤄져야 한다"고 조언했던 말을 떠올리며 "아주 분명하고 확고한 어조로 남북관계 개선을 위해 노력해 줄 것을 주문하던 김 전 대통령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출처 : 업코리아(http://www.upkorea.net)
청년시절의 족적
완전히 ‘행동하는 운동권’으로 변신한 그는 대학 2학년 때 교련 반대, 한일조약 반대 등에 적극 참여했다가 끝내 제적됐다.
“박정희 대통령이 전국적으로 190명의 대학생을 짤랐는데, 거기에 내 이름이 낀 거예요. 고학년은 다 빼주고 저학년 위주로 제적시켰어요. 그때 난 장티푸스에 걸려 시골 가서 40도가 넘는 고열에 연일 피를 쏟고 누워있는데 제적이 된 거에요. 설상가상으로 곧바로 '징집영장'까지 나왔어요. 몸이 아파 사경을 헤매는데 학교는 짤리고, 영장까지 나오니 정말 막막하더군요.”그는 앓아 누워 있던 집에서 국군보안대 요원들에 의해 강제로 차에 태워져 국군통합병원으로 끌려갔다. 반송장 상태였던 그에게 군의관이 물었다. “아픈데 없지.” 초췌한 모습의 김문수가 답했다. “아이고, 장티푸스에 중이염까지 걸려서 죽겠습니다.” 김 지사의 하소연에 군의관이 정밀 진단 결정을 내렸고 징집 면제 판정을 받고 풀려났다. 이 점은 검증이 필요한 부분이다.
김근태 ‘구로공단’ 취업 주선…청계천 등에서 근로자 의식화 교육
학교에서 제적당한 김문수는 고향에서 야학과 농민운동을 하면서 소일했다. 그러나 한계가 많았다. 겨우 21살의 청년이 동네 어른들을 상대로 농촌계몽운동을 하니, 아예 인정하지 않는 분위기였고 결국 서울로 올라왔다. 김문수는 이후 우여곡절을 거쳐 두 번의 제적과 두 번 투옥되었다가 25년 만에 대학을 졸업했다. 노동운동은 김근태와 안병직 교수의 영향이 컸다. 안 교수는 김문수가 진로를 고민하면 “너 대학이 중요하냐, 대학 보다 더 중요한 게 사회, 나라를 바로 잡는 것”이라며 노동운동을 권했고 김근태는 구로공단 취직을 주선했다. 청계천도 그의 활동무대였다. 청계천 노조 간부들에게 노동법을 가르치면서 노동현장 분위기를 익혔다. 그는 청계천의 한 미싱공장에 취직했다가 74년 복학했다.
“청계천이 정말 힘든 곳이었습니다. 본래는 복학하지 않을 생각이었는데, 엄마와 형님이 서울에 올라와서 ‘뭘해도 좋으니까 학교는 들어가서 졸업하라’고 애걸복걸하더군요. 나도 데모만 했지, 제대로 못 다닌 것 같아 복학해서 학교 운동권의 핵심으로 활약했습니다.”
안병직 교수는 물론 유인태 전 의원, 신철영 경실련 전 총장, 박재완 청와대 수석, 김병곤 전 민청련 의장 등이 당시 김 지사와 함께 활동한 사람들이다. 75년 면도칼과 지퍼 생산업체인 한일공업 보일러공으로 위장취업해 꼬박 6년을 작업했다.
차명진과의 만남
한편, 1979년 서울대 정치학과에 들어간 차명진은 경제철학회라는 이념 서클에 들어가 의식화 공부에 빠졌다. 그해 10월 박정희 대통령의 18년 장기 집권이 끝났고 이듬해엔 5공 신군부의 한파가 서울의 봄을 덮쳤다. 차명진은 정보부에 끌려갔고 강제 징집되어 강원도 산골짜기 부대로 갔다. 제대하고 복학한 후 차명진은 노동운동에 뛰어들었다. 현장에서 활동하다 보니 김문수라는 ‘지도자의 이름’이 들렸다고 한다. 차는 김을 찾아가 “당신은 나의 지도자다. 당신을 따라 노동운동을 하겠다”고 했다. 그때부터 차는 김의 그림자가 되었고 위장취업 투쟁을 시작했다. 부천철탑공장, 주안공단의 전선제조업체, 구로공단의 대한광학 등에서 그는 노동자를 조직하고 파업을 지원했다.
김문수가 서울노동운동연합(서노련)을 결성하자 차명진도 조직원이 되었다. 서노련은 86년 5월 3일 노회찬등과 함께 인천에서 폭동을 주도했다. 폭도시위대는 5공 독재 타도와 노동권 쟁취를 외쳤고, 집권 민정당 지구당사와 경찰차량이 불에 탔다. 김문수가 잡혀가자 심상정(전 민노당 의원)이 서노련을 이끌었으며 차명진은 중앙위원이 됐다. 차명진은 서노련의 해고자복직투쟁위에서 지금의 부인을 만났다. 부인은 서울대 출신으로 위장취업 3년 선배였으며 지금은 사회복지사가 되어 노인요양시설에서 일한다. 차명진은 간첩단이 만든 민중당 간부(구로갑지구당 사무국장)였고, 위장취업자였고 김문수 의원 보좌관을 했다.
장기표 김대중은 4.10일, 5.1일, 5.10일 3회에 걸쳐 북악파크에서 문익환, 예춘호, 장기표, 심재권 등 이른바 김대중내란음모 집단을 이끌고 전국 폭력시위에 의한 국가전복 계획을 수립하고 김대중의 혁명내각을 구성했다. 이어서 5.12일 17:00시, 국민회의 지도부, 김대중, 문익환, 예춘호, 이문열, 한완상, 한승현, 서남동, 이해동, 심재권, 장기표, 이헌배, 계훈제 등이 북악파크호텔에서 또 다시 회동하여 투쟁방향을 논의했다.
장기표-심재권의 보고내용: “전국 26개 대학의 학생회장단 45명이 5.11.15:00시부터 5.12.09:00시까지 서울대 학생회관에서 철야회의를 통하여 계엄령해제와 정치일정의 명백한 발표를 촉구하고, 학원사태 해결을 위해 국무총리 면담을 촉구한다는 사항을 결의하였으며, 이어 5.16. 전국대학학생회장단은 이화여대에서 회의를 열어 새로운 투쟁방법을 협의키로 하였는데 앞으로 학원시위가 확산될 것이 전망됩니다”
김대중: “과도정부를 장악하고 있는 유신잔당들이 민주화에 역행하여 정권을 계속 잡으려는 음모를 하고 있다. 민주화운동의 목표는 민주정부를 수립하는데 있다. 서울대, 연대, 고대 등 명문대학의 동정을 잘 살펴보라”
장기표: “각 대학이 일정한 날을 정하여 동시에 각목과 화염병을 사용하는 폭력시위를 과격하게 벌여 희생을 각오하면서 민중의 호응을 얻어 정부중요부서를 점령하게 되면 4.19와 같은 무정부상태가 되는 데 이를 계기로 민주세력의 구심인물인 김대중 선생을 사태수습인물로 내세워 학생과 민중을 설득하면 정권장악이 가능합니다. 저는 심재권과 함께 각 대학 학생회장단에 영향력이 있는 복학생들을 규합, 학생폭력시위를 주도하겠으니, 선생께서는 이문영에게 과도정부 구상을 미리 시켜주시기 바랍니다.” 김대중: “알았다”
5월15일은 서울역에 10만 시위대가 모여 버스로 경찰을 깔아 죽이는 정도에 이르렀다, 이 장면을 본 국민, 언론, 군인들은 계엄을 물계엄이라 비아냥거렸다. 대통령, 국방장관, 계엄사령관, 보안사령관, 대부분의 군 지휘관들은 5월 14일 및 15일 양일간의 소요가 극렬함의 정도로 보나 규모로 보아 경찰력의 한계를 훨씬 넘어서는 것이라 판단했다.
서울역시위에 극도로 고무된 김대중은 5월16일, 제2차 민주화촉진국민선언문을 발표했다. 5월22일을 기하여 군인, 경찰을 포함한 전국의 무든 국민은 검은 리본을 달고 전국적으로 봉기하여 정부를 전복할 것이라는 최후통첩이었던 것이다. 5월 22일로 계획돼 있는 소요는 국민연합 등 소위 재야정치 단체들과 전국 59개 총학생회장단회의의 연대 하에 이루어지는 대대적인 민중봉기요 사실상의 정부전복 기도로 보았기 때문에 마지막 보루인 계엄군에 의한 대대적인 대책이 절실하다고 생각했다.
강삼재 기조 실장의 권유로 여당 입문'…"학생운동권 멤버들이 추천"
서노련 활동이 쇠락하면서 김문수와 차명진은 노동운동의 한계를 인식하기 시작했다. 장기표 등과 함께 89년 빨갱이정당 민중당을 창당했다. 92년 총선에서 민중당은 처절한 참패를 겪은 후 안병직 교수의 조언으로 두 사람의 극렬좌익빨갱이들은 ‘자본주의 정당’ 민자당(한나라당의 전신)으로 화려한 변신에 성공, 지금 그 당에서 지사와 의원이 되어 있다. 차는 김의 지역구(부천 소사)를 물려받았다.96년 총선은 당시 여당이던 민주자유당이 공천 물갈이와 함께 각계의 전문가들을 대거 영입하던 시기였다. 김영삼 대통령 쪽에서 김문수에게도 제안이 왔다. 강삼재 기조 실장이 접촉 창구였다.
2011년 6월 24일자 동아일보에는 김문수와의 인터뷰 기사가 났다.
“나를 아직도 빨갱이로 의심… 박정희 같은 처지” “나는 고 박정희 전 대통령과 비슷한 처지다. 남로당 출신의 박 전 대통령은 집권 중 야당으로부터 ‘빨갱이 근성을 버리지 못했다’는 비판을 많이 받았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현재 내가 그 꼴이다. 하지만 박 대통령은 산업화뿐만 아니라 의료보험과 산재보험 등을 도입한 지도자로 보편적 복지는 다했다. 나처럼 무한 돌봄 사업 등 밑바닥과 소통한 사람이 누가 있느냐. 나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흑백논리에 갇혀 있고 사고가 단세포적이라 좌우를 아우르는 나 같은 사람의 컬러풀한 사고를 이해 못한다.”
북한에 바치는 김문수의 사랑 시
다음은 2007년 정월 초하루 새벽 12시 30분, 임진강 자유로를 달리며 지었다는 “저 캄캄한 곳으로”라는 제목의 시. 제야의 종 임진각 평화의 종을 치고 돌아오는 자유로 임진강 너머에는 불빛이 없네 요란한 비보이 한국가요 대전의 화려한 무대 밤하늘을 수놓는 폭죽이 화려하건만 임진강 너머 저 곳에는 캄캄한 어둠뿐이네 인기척도 없네 저 캄캄한 곳으로 나는 가고 싶네 저 캄캄한 곳을 생각하면 내 눈에는 눈물이 흐르네 저 캄캄한 곳 사람들 나는 손잡고 싶네 깡마른 절망의 가슴 따뜻이 안아주고 싶네.
2010.4.22. 김동길 교수가 김문수에 바치는 용비어천가
3월 26일에 다한 천암함 폭침, 온 국민이 울면서 국민을 의심하고 있을 때인 4월 22일, 김동길 교수는 김문수를 에 용비어천가를 바쳤다. “80여 년을 살면서 여러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내가 만난 그 다양한 인물들 중에 항상 기억될 만큼 깊은 인상을 남긴 사람은 몇 되지 않습니다. . . 김문수, 사람들이 많이 모인 자리에서 그는 서슴지 않고 이런 말을 했습니다. ‘무슨 부탁이라도 있으면 가져오세요. 그러나 돈만은 가져오지 마세요.’ - 그렇게 말한 어느 도의 도지사가 있습니다. 나는 그가 이 나라의 대통령이 되는 날을 학수고대합니다. 그의 이름은 김문수!“
태극기로 뭉치고, 헌법으로 싸우고, 진실로 이기자! 대한민국 만세, 국군 만세, 자유통일 만세! '김정은 사살(射殺)'과 함께 北 전역 15분 이내에 초토화된다! 미국의 군사작전 계획: '크롬 돔' 작전의 비밀 -金泌材- [Why Times 단독] 김정은 참수드론, 군산에 이미 4대 배치완료 대한민국에 오늘날과 같은 사이비 막가파식 민주독제가 나타나다니... 태극기로 뭉치고, 헌법으로 싸우고, 진실로 이기자! 대한민국 만세, 국군 만세, 자유통일 만세! 우주권자의 섭리에 의거 죽을자는 죽고 산자는 점점 잘 살게 되리라. 오늘 하루 지금 이순간에 최선을 다하라. 내일은 내일 걱정하라. 그러나 내일은 오늘보다 더 잘 될 것이다. 이 세상은 매일 매일 조금씩 더 좋게 변화 발전해 나가리라. 긍정적인 생각이 세상을 더욱 좋게 변화 발전시켜 나가리라. 우리 모두 다 함께 더불어 잘 살 수 있고 상생상승할 수 있는 대한민국과 인류공동운명체의 지구촌 한가족을 만들어 나가야 한다. 대한민국의 절대지상목표는 국조단군의 건국이념 弘益人間 在世理化로 民主法治 正義國家 이룩하고 祖國統一 故土回復하여 世界平和 人類幸福을 달성하는 것이다. 나의 생각은 반드시 현실로 이뤄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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