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문학공원 원문보기 글쓴이: 개똥참외
이중섭 초상
불운의 천재화가 이중섭
김순진
언제가 되었든지 제주도를 여행하게 되면 꼭 <이중섭미술관>을 들러보리라 마음으로 다짐하곤 했는데 우연히도 너무나 빨리 제주도를 여행하게 되었다. 원래 ‘탐라전국합창축제’에 초대되어 제주도를 가게 되었기 때문에 1박만 하고 상경하려 했으나 이중섭미술관을 가보고 싶은 충동은 모든 일을 접고 1박을 더 하게 하였다. 제주공항 근처로부터 택시를 타고 서귀포시로 가자고 하니까 기사양반은 ‘5.16도로로 갈까요, 산업도로로 갈까요?’ 묻는다. 필자는 한라산 한 번 등반한 바 없는 사람이지만 어느 도로든지 지금 보고 싶고 만나고 싶은 것은 이중섭이지 제주 풍경이 아니기에 빨리 갈 수 있는 길을 물어 5.16도로를 달린다. 몇 굽이인지 모를 정도로 여러 굽이를 돌고 넘으며 한라산을 끼고 50여분 남짓 달리니 서귀포 앞바다가 눈이 들어온다. “아, 이중섭이 저 바닷가에서 놀던 아내와 아이들을 그리워하며 그림을 그렸구나.” 생각하니 필자는 택시에 내리기도 전에 눈물이 그렁해진다. 드디어 택시가 이중섭 거리라는 간판과 깃발이 나부끼는 주차장에 우리를 내려놓았다. 그러나 올라가는 입구를 알 수가 없었다. 기사님은 우리가 우물쭈물하는 사이 다시 타라더니 이중섭미술관이란 큰 입간판이 세워져 있는 곳 입구에 내려준다. 바람에 날릴까 촘촘히 새끼로 동여맨 초가집이 한 채 들어온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곳이 이중섭 가족이 밥을 끓여먹으며 전쟁 중이지만 행복한 시절을 보내던 곳이다.
사진 찍기를 좋아하는 나는 찬찬히 사진을 찍으며 입구로 향했는데 이후재 시인은 필자보다 등이 달아 있다가 나올 때 찍고 어서 들어가서 보자며 먼저 미술관 턱에 발을 올려놓는다.
입구에 들어서니 사물함이 있었다. 워낙 여행 가방이 무거운지라 열쇠를 렌트하여 짐 보관소에 가방을 넣어두고 카메라와 필기구를 가지고 미술관 내로 들어섰다.
노을 앞에서 울부짖는 소
화살표와 입구에서 매표를 하는 아가씨의 말에 따라 전시실로 들어서는데 ‘아, 불운의 한 예술가의 삶을 만나는구나!’ 생각하니 가슴이 메워지는 듯 무거워진다. 한참을 구경하고 있는 사이에 한 중년의 여자 분이 우리 곁으로 다가와 김광균 시인이 써준 전람회 초대의 글과 구상 선생이 주선하여 일본에 아내와 아이들을 만나러 갔다 온 이야기, 서울 적십자병원에서 만 40세의 나이로 숨져 행려병자로 처리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 필자는 하염없는 눈물이 흘렀다. 나중에 안 이야기지만 그 분은 서귀포시 동홍초등학교에 근무하고 있는 강춘생 교장 선생님으로 휴일마다 관람객들을 위하여 자원봉사활동을 하고 있다고 했다.
『仲燮의 예술이 어디다 뿌리를 박고 있는지는 모른다. 우리를 가로 막는 것은 헐벗고 굶주린 한 그루 나무 가지에 서린 그의 슬픔과 生長하는 姿態뿐인데 이 메마른 나무를 중심으로 그가 타고난 것을 잃지 않고 길러온 四十年을 모두어 個展을 가지는 것은 그로 보나 우리로 보나 즐겁고 뜻 깊은 일이다. 앞으로 그의 藝術의 生長과 方向은 그 자신의 일이나 모진 戰亂 속에서 어떻게 용히 죽지 않고 살아 이런 일을 했나 등이라도 한 번 두들겨 주고 싶다.
-김광균 시인』
두 아이와 물고기와 게
아, 또 눈물이 앞을 가린다. 나라의 국운이 한 천재 화가를 죽게 하였구나. 배곯고 굶어죽게 하구나! 그의 병명은 간염으로 판명되었으나 사실은 못 먹고 고생한데서 온 병이었다. 일찍 어머니를 여의고 살아온 필자에겐 자꾸만 동병상련의 마음이 든다.
이중섭 미술관을 대충 관람하고 이중섭이 살던 집터로 발길을 옮기니 평범한 시골 집에 툇마루가 우리를 반긴다. 잠시 걸터앉아 이중섭에 대한 담소를 나누다가 작은 부엌을 거쳐 이중섭이 생활했다는 작은 방을 들여다보았다. 부엌에는 육지에서는 차마 상상할 수 없으리만치 부뚜막도 없는 낮은 화덕에 작은 무쇠 솥 두 개가 얹혀있었고 방엔 이중섭의 사진 액자가 하나 덩그마니 놓여있고 벽에는 「소의 말」이라는 이중섭의 시가 ‘창남’이란 호를 가진 ‘현수언’이란 사람의 서예글씨로 쓰여 있었다.
아, 벼농사를 지을 수 없는 제주도에서 그리고 전쟁으로 식량배가 잘 드나들지 않는 섬에서 조와 바다 음식, 푸성귀로만 연명하였다면 그 생활은 어떠했을까?
부부
소의 말
이중섭
높고 뚜렷하고
참된 숨결
나려 나려 이제 여기에
고웁게 나려
두북 두북 쌓이고
철철 넘치소서
삶은 외롭고
서글프고 그리운 것
아름답도다 여기에
맑게 두 눈 열고
가슴 환히
헤친다
이처럼 이중섭에게 삶은 분명 외롭고 서글프고 그리운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세상이 아름답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맑게 두 눈을 열고 가슴을 환히 헤치면서 아름다운 세상을 바라보고 있다. 그러니 어찌 그처럼 맑은 그림 밝은 그림이 나오지 않았으랴.
화가 이중섭은 1916년 4월 10일 평안남도 평원군 조운면 송천리에서 태어났으나 5살 때 아버지를 여읜다. 그의 호는 大鄕이다, 그러나 처음에 사용한 호는 ‘흰 탑’이라는 뜻의 ‘소탑’이다. 그러다가 ‘소’자가 소리 느낌도 좋지 않고 작다는 의미로 읽힌다고 하여 다시 만든 것이 현재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대향大鄕’이다. ‘대향’이란 말은 사실 오산학교의 설립자 이승훈이 지향한 ‘大理想鄕’을 줄인 것입니다. 그 커다란 이상향이란 우리 조국을 독립되고 부강한 나라로 만들고자 하는 이승훈의 의지였다.
1931년 그는 오산학교에 들어가 도화교사 임용련을 만나 화가로서의 꿈을 키워나간다. 그리고 주변의 도움으로 1935년 일본을로 건너가 도쿄의 시립제국미술대학에 입학하여 공부하던 중 1936년 3년제인 사림문화학원으로 옮겨 미술공부를 계속한다. 1937년 일본 자유미술가협회 시회에 출품하여 호평을 받고 이후 1940년 서울에서 있은 제 4회 자유미술가협회 전시회에 「서있는 소」, 「망월」, 「소의 머리」, 「산의 풍경」 등을 출품하여 미술가로서의 입지를 세우며 1941년 조선신미술가협회 창립전과 제 5회 자유미술가협회 전시회에 망월 소와 여인을 출품하여 회우로 추대되어 정식 화단에 들어선다. 1945년 귀국하여 원산사범학교에서 교편을 잡으며 일본인 아내인 이남덕(마사코)여사를 아내로 맞이한다. 아내 이남덕 여사와는 세 아이들 두었으나 첫째 아이는 실패하고 두 아들(泰成, 泰賢)만 살아남아 현재 이남덕 여사와 함께 일본에 거주하고 있다.
망우리에 있는 이중섭의 묘
1946년 조선조형예술동맹에 가입하여 활발한 미술활동을 전개해 나가고 1950년 초, 원산 신미술가협회를 결성하고 회장이 됨으로서 한 화단의 리더로서의 면모를 보인다. 그러나 1950년 6.25전쟁이 터지고 더 이상 원산에서 기거할 수 없던 이중섭은 월남하여 종군화가로 활동하다가 신사실파(新寫實派) 동인으로 참여 한다. 그리고 그는 부산·제주·통영 등지를 전전하며 재료가 없어 담뱃갑 은박지를 화폭 대신 쓰기도 하며 멀리 서귀포로 내려와 피난 생활을 시작한다. 아마도 이때가 이중섭에게는 가장 행복한 시절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이때 「서귀포의 환상」, 「섭섬이 보이는 풍경」,「바닷가와 아이들」 등을 그려낸다.
1952년 아내가 전쟁과 생활고를 이기지 못하고 일본으로 떠나자 그는 전국을 떠돌며 부도노동 등을 하며 생계를 꾸려나가다가 서울이 탈환되고 그는 서울로 올라와 한남동 성림다방에서 개인전을 갖는 등 활발한 작품 활동을 전개한다. 그러나 그는 아내와 가족에 대한 그리움을 무엇으로 달랠 길 없어 편지와 화폭에 수많은 아이들과 여인을 등장시킨다. 그의 아내가 보낸 아고리는 아내가 붙여준 이중섭의 애칭이다. 그러던 중 김광섭 구상 시인 등의 주선으로 배표를 얻어 일본으로 건너가 아내와 아이들을 만나게 된다. 일본에서 돌아와 1954년에는 유강렬, 장윤성, 전혁림 등과 함께 4인전을 개최하고 진주에서도 개인전을 연다. 또한 6월에는 경복궁 국립미술관에서 개최된 대한미술전에 「닭」 2점과 「소」를 출품하고 천일백화점 개관기념 현대미술작가전에도 출품하며, 1955년 초에는 서울 미도파백화점에서 개인전을 하는 등 생애 최고의 활발한 작품 활동을 벌인다.
파란 게와 어린이
그러나 그의 작품활동은 애석하게도 거기까지다. 그는 일본에 보낸 처자에 대한 그리움과, 생활고가 겹쳐 정신분열병증세를 나타내기 시작 1955년 7월 병원에 입원하게 된다. 그 때 그는 스스로가 정신병이 아니란 것을 증명하기 위해 자화상을 그리는 등 새로운 의욕을 보이나 이미 그의 얼굴에는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우기 시작하고 급기야 1956년 9월 6일 서울 서대문에 있는 적십자병원에서 숨을 거두어 행려병자 처리되어 망우리 공동묘지에 묻히게 되고 차근호 작가의 묘비가 세워진다.
1972년에 서울 현대화랑에서 15주기 유작전과 작품집이 최초로 간행되었고 1978년에는 건국 30주년 기념훈장이 추서된다. 그리고 1986년 호암갤러리에서 이중섭 30주기 회고전 및 화집이 간행된다.
이중섭에 대한 제주시의 관심은 1997년 무렵이다. 그해 서귀포에 이중섭 거리가 제정되고 제주 신라호텔에서 이중섭 특별전이 개최되었으며 2002년에 서귀포 시립 이중섭미술관이 개관되어 2004년 9월 15일 제1종 전문 미술관으로 등록된다.
그러나 이중섭 미술관을 애써 찾아가는 사람들에게는 더없는 허전함이 밀려온다. 아, 이 정도 숫자의 작품을 보려고 몇 년을 마음 설레며 그 멀리서 비행기 타고 날아왔더란 말인가? 그의 수백 점에 이르는 그의 작품 중에 이곳에서 볼 수 있는 작품의 수는 카피 작품을 포함한다 치더라도 거의 소수이며 2층 갤러리에는 유명 작가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어 그나마 위안을 준다. 꼭 원본 작품이 아닌 사본이라 할지라도 애써 찾아온 관람자들에게 이중섭의 모든 작품을 보고 싶어 하는 욕구를 충족시켜줄 의무가 있다고 보며 미술관 측에 촉구하는 바이다.
물고기와 세 아이
이중섭의 작품세계를 바라보면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소와 벌거벗은 남자 아이들과 바닷가, 그리고 달이나 해에 관한 이야기다. 물론 이중섭의 그림에도 충분히 풍경도 있고 정물도 있으며 생활이 궁핍했을 때 담배 은박지에 그린 은박지 그림도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그러나 이중섭의 그림세계에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식민지와 6.25전쟁 등 대한 암울했던 세상을 향해 던지는 메시지와 아내, 아이들에 대한 그리움이다.
그의 ‘소’에 대한 그림을 살펴보자. 「노을 앞에서 울부짖는 소」만 보아도 그렇다. 노을이라는 것은 망국의 한이다. 물론 그림에 대한 정렬로 해석될 수 있겠으나 그렇게 해석한다면 울부짖음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우리나라에서는 볼 수 없는 「흰 소」나 「받으려는 소」를 그려낸 것 또한 그렇다. 희다는 것은 자유다, 그리고 머리로라도 받고 싶은 충동은 일제강점기에 대한 불신을 그려낸 것이라 할 수 있다.
그에 그림에 등장하는 어린이는 하나같이 발가벗겨져 있다. 그것은 무슨 이유일까? 필자는 그 이유에 대하여 일제와 전쟁에 대한 강제성을 지적한다. 스스로 벗겨진 것이 아니라 강제, 강압에 의해 벗겨져 헐벗은 아이들을 나타내려 했던 것은 아닐까? 「파란 게와 어린이」라는 작품을 자세히 관찰해보자. 철조망이 쳐져 있고 발가벗은 한 어린이가 파란 게를 실로 묶어 가지고 논다. 그리고 그의 얼굴은 정상적으로 그려져 있는 것이 아니라 뒤집혀서 입이 하늘 쪽으로 가게 그려져 있다. ‘파란 게’는 있을 수 없는 동물이다. 그러면 파란 색깔은 무엇을 의미할까? 예술에 있어 파란색은 상대적인 상실감과 재생에 대한 의지로 해석된다. 그러면 이미 이중섭은 이 그림을 그렸을 시절에는 이미 마음이 많이 다쳐있었다는 증거다. 또한 가족과 헤어져 있음에 합치고 싶은 마음, 즉 복원하고 재생하고 싶은 마음이 들어있는 그림이다.
서귀포의 환상
그에 그림에는 해나 달도 많이 등장한다. 그것은 희망을 그리려 함이다. 달과 까마귀라는 그림이 있다. 까마귀들이 달밤에 전선 위에 앉아 있다. 까마귀는 이중섭이나 서민을 나타낸 것이다. 암울했던 세상에 자신을 전장을 넘나드는 위험한 상황 하에 까마귀를 표시함은 그만큼 어두웠던 세상을 표현하려던 것은 아닐까? 필자는 늘 시를 쓰거나 가르칠 때 예술에는 희망의 메시지가 들어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비록 자신을 까마귀로밖에 표현할 수 없는 암울한 세상이었다 할지라도 달을 그림으로서 희망의 메시지를 주었다는 점이 이중섭의 그림이 지금 최고의 걸작으로 추앙받는 점이다. 그의 그림에는 희망이 있다. 아이들은 무엇인가? 물고기는 무엇이며 파도는 무엇인가, 복숭아밭은 무엇인가. 모두 희망을 상징하는 언어들이다. 「서귀포 환상」이나 「도원」이란 그림을 자세히 살펴보자. 전자에는 아이들이 새를 타고 날거나 후자에는 아이들이 나무에 매달려 있다. 무수한 과일이 떨어져 있고 나무에 달려있다. 그렇다. 적어도 배가 고팠던, 부두노동을 해야 입에 풀칠할 수 있었던 이중섭에게는 그림 자체도 먹을 것으로 보였는지 모른다. 그에게 환상이란 말은 오로지 자신의 두 아이를 충분히 먹이고 싶었던 것이리라.
이중섭이 살던 집
그가 아내에게 보낸 편지의 일부에 삽화로 그린 그림인 「길 떠난 가족」이란 그림은 너무나 흥겹다. 조상과 부를 뜻하는 소를 등장시킨 것은 부모에 대한 그리움일 런지 모른다. 그리고 잘 살고 싶은 충동일 런지 모른다. 가난과 전쟁과 억압으로부터 떠나고 싶었던 마음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그는 그 소를 앞에서 끈다. 함께 타고 가는 것이 아니라 앞에서 끈다는 것은 가족에 대한 책임이다. 소의 등에는 꽃다발이 얹혀있다. 그가 떠나려는 세상은 일본이나 한국, 전쟁 따위가 아니다. 그가 떠나려 했던 것은 스스로의 욕심에서부터, 스스로의 굴레에서부터 벗어나려는 욕망이다. 한 아이는 복숭아를 잔뜩 싣고 윗도리를 벗은 아내는 두 아이를 잡고 춤을 춘다. 또 다른 한 아이는 희망의 메신저인 비둘기를 날리려 하고 있다. 이 그림만으로도 이중섭은 충분히 동화의 세계에 산 사람이다.
언젠가 『로빙화』란 영화를 본 생각이 난다. 중국 영화인데 그림을 잘 그리는 한 아이가 ‘개가 달을 물어 달에 이빨자국이 생긴 그림’을 그려왔다. 할머니의 옛날이야기를 듣고 상상해서 그린 그림이란다. 교장선생은 정물을 똑같이 그리는 자신의 아들이 최고 잘 그린다고 세계아동미술대회에 내보내려 하지만 담임선생은 교장선생의 강압과 차별을 무릅쓰고 차밭에 벌레를 잡아야 하기 때문에 학교에 나오지 못하는 그 아이의 그림을 출품한다. 그 아이는 병이 들어 죽고 그 그림은 최우수상을 받는다.
이중섭은 그 아이다. 일본강점기와 전쟁 때문에 그림을 제대로 그릴 수 없었던 사람. 천재적인 예술성을 가졌음에도 자신의 작품세계를 크게 인정받지 못하고 떠나간 사람. 그러나 소와 해와 달과 복숭아와 여인과 아이와 물고기와 게와 바다! 어느 것 하나 뾰족한 소재 없이 善으로 희망으로만 치닫던 화가!
어떤 사람들은 말한다. 너무나 아이스럽지 않느냐고? 이런 게 무슨 최고 그림이냐고? 점부 소품만 있고 대작이 없다고.
그렇기 때문에 최고라는 것이다. 아이의 시각으로 그렸기 때문에, 상업성보다는 내실에 충실했기 때문에, 그 어려운 과정에서 그림 그리는 작업을 내동댕이치지 않고 은박지에라도 그림을 그리면서 살았기 때문에. 작품 하나하나에 깊고도 그윽한 우화가 들어있기 때문에 최고의 작품인 것이다.
가장 똑똑한 사람은 많이 알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 많이 상상하는 사람이란 어느 철학자의 말이 생각난다.
이중섭 미술관 전경
*지역사회에서 자원봉사자로 수고하시면서 우리 일행을 안내해주신 서귀포시 동홍초등학교 강춘생 교장선생님께 감사의 말씀을 드리며 글 소재의 일부를 이중섭미술관 홍보물에서 인용했음을 밝힙니다.
좌로부터 이후재 시인, 강춘생 동홍초등학교 교장, 그리고 필자.
이중섭 연보
1916년 -평남 평원군 조운면 송천리 742번지에서 아버지 李熙周와 어머니 安岳 李氏의 삼남매 중 막내로 태어남.
1920년 -5세 때 아버지 별세.
1923년 -평양시 종로보통학교에 입학. 이문리 외가에서 다님.
1929년 -평양고등보통학교에 응시했으나 낙방하고 평북 정주의 오산고등보통학교 입학. -임용련의 지도를 받음.
1934년 -오산고등보통학교 졸업. 일본제국미술학교 입학. 1년 수료.
1935년 -문화학원 입학.
1940년 -문화학원 졸업.
-일본 화단의 미술창작가협회에「소와 소녀」와 「불상」을 출품해 협회상을 받음.
1941년 -신미술가협회 결성. 서울 화신백화점에서 창립전을 가짐.
1942년 -미술창작가협회전에 「소와 어린이」출품.
1943년 -미술창작가협회전에 「망월」 3부작 출품. 태양상을 받음. 원산으로 돌아오다.
1945년 -일본인 처 이남덕과 결혼.
1946년 -구상 시집 <응향>사건에 연루, 표지화 작가로 문초를 받음.
-첫아들 디프테리아로 사망.
1947년 -8.15기념 전람회에 출품. 둘째아들 태현 태어남.
1949년 -셋째아들 태성 태어남.
1950년 -6 . 25 원산 신미술가협회 회장으로 선출. 12월 6일 남하.
1951년 -1월 제주도로 내려가다.
1952년 -2월 국방부 정훈국 종군화가단에 입단.
1953년 -부인은 생활고로 아이들을 데리고 도쿄로 건너감.
-시인 구상의 도움으로 선원증을 구해 도쿄에 갔으나 1주 만에 돌아옴.
-서울 한남동 성림다방에서 개인전 개최.
1954년 -화가 박생광의 초대로 진주에서 작품 제작.
-6월 대한미협전 「달과 까마귀」 출품.
1955년 -미도파 화랑에서 개인전. -대구 미공보관에서 개인전.
-7월 정신착란증세로 대구 성가병원 입원. 8월 수도육군병원 입원.
1956년 -청량리 뇌병원 무료 환자실에 입원.
-정신이상이 아니라는 진단을 받고 간장염 치료를 위해 서대문 적십자병원에 입원.
-이때 「자화상」그림.
1956년 -9월 6일 오전 11시 45분. 아무도 지켜보는 이 없는 가운데 홀로 숨을 거둠.
-이후 화장되어 망우리 공동묘지에 묻힘.
1957년 -차근호 작가에 의해 묘비가 세워짐.
1972년 -서울 현대화랑에서 30주기 회고전 및 화집 간행.
1997년 -서귀포에 서귀포시립이중섭미술관 개관
-제주 신라호텔에서 이중섭특별전 개최
2003년 7월 29일. 제2종 미술관 등록
2004년 9월 15일. 제1종 전문미술관 등록
출처 :월간 스토리문학 2007년 8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