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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미국의 귀환과 미-태 관계의 (불완전한) 부활
한동안 동아시아에 대한 관심이 시들해 보였던 미국이 2021년 1월 조 바이든(Joe Biden) 행정부 출범과 함께 해당 지역과의 연계 강화에 나서면서 바이든 대통령, 카멀라 해리스(Kamala Harris) 부통령, 토니 블링컨(Antony Blinken) 국무장관, 로이드 오스틴(Lloyd Austin) 국방장관 등 미국 정부 고위급 인사들이 차례로 역내 각국 순방 일정에 나서고 있다. 여기서 미국은 당초 싱가포르, 베트남, 필리핀 등 친미 성향이 강한 국가만을 방문 대상으로 고려했으나(Poling, 2021), 중국의 부상을 견제할 필요성이 날로 높아지면서 태국,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등 중립 성향의 국가에 더해 캄보디아 등 친중 성향의 국가도 포섭 대상에 포함시켜 고위급 인사 방문을 주선하고 있다. 이러한 행보를 바탕으로 미국이 이루고자 하는 목표는 기존 규칙에 기반한(existing rule-based) 국제 질서를 유지해 민주주의, 인권, 자유무역, 그리고 미국 패권에 우호적인 현 체제의 변화를 막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처럼 미국이 아시아와의 연계 강화를 다시금 추진하고 있다는 사실은 태국에 있어 2014년 쿠데타 이후 경색된 미-태 관계에 재차 활력을 불어넣을 수 있는 기회로 작용한다. 태국 군부가 정권을 장악한 당시 미국은 대외지원법(Foreign Assistance Act) 규정에 의거해 태국을 대상으로 한 군사지원을 중단하고 양국 관계의 수준도 하향조정한 바 있다. 다만 도널드 트럼프(Donald Trump) 전 대통령이 백악관에 입성한 이후로는 버락 오바마(Barack Obama) 행정부 시기의 엄격한 대응이 다소 완화되었는데, 인권 문제에 상대적으로 미온적 반응을 보였던 트럼프 전 대통령과 예하 관료들은 태국의 인권침해 현황이나 민주적 퇴보에 대한 비판을 삼가면서 양국 정부 간의 관계 강화를 도모했다. 그 결과 쿠데타의 주역이었던 쁘라윳 짠오차(Prayut Chan-o-cha) 태국 총리는 트럼프 전 대통령의 초청을 받아 태국 정부수반으로서는 12년 만에 처음으로 2017년 10월에 백악관을 방문하게 되었다(VOA, 2017). 하지만 이러한 상징적 행보가 미-태 관계의 실질적 개선이라는 결과로 충분히 이어지지는 못했다. 트럼프 전 대통령이 태국을 방문하겠다는 쁘라윳 총리와의 약속을 지키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2017년에 최초로 참석했던 아세안(ASEAN) 정상회의에도 두 번 다시 자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쁘라윳 총리는 “미국이 자국만의 문제에 골몰하면서 아세안과의 거리가 벌어진 듯하다”라는 한탄과 함께 “태국의 제일가는 파트너는 중국”이라는 발언을 내놓기도 했다(Time, 2018).
그렇다면 태국을 비롯한 동남아시아 지역에 대한 접근을 강화하려는 바이든 대통령의 노력이 위와 같은 인식을 바꿔놓을 수 있을까? 일단 현재 미국 행정부 고위 관계자들은 동남아시아와 긴밀한 관계를 형성하고 싶다는 의사를 꾸준히 밝히고 있는데, 그중에서도 바이든 대통령은 2021년 화상으로 열린 아세안 정상회의에 참석하고, 2022년에는 미국-아세안 특별 정상회의도 주재한 바 있다. 또한 로이드 오스틴 미 국방장관은 2022년 6월 태국을 방문한 자리에서 양국 군대의 상호운용성 강화에 대한 관심을 피력했고, 태국의 전력 현대화 과정도 미국이 지원하고자 한다는 의사를 표명했다(Strangio, 2022). 뒤이어 7월에는 지난 2021년 12월에 방문을 계획했다가 코로나19 감염 사태로 일정을 취소했던 토니 블링컨 미 국무장관도 새로운 일정으로 태국을 찾아 양국 정부 지도층 간에 안보 및 무역 현안을 논의했고, 이 자리에서 전략적 동맹·파트너십 코뮈니케(Communiqué on Strategic Alliance and Partnership)와 공급망 회복탄력성 강화에 관한 양해각서(Memorandum of Understanding on Promoting Supply Chain Resilience)를 체결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하지만 상기한 긍정적 변화에도 불구하고 태국 대외정책의 방향이 친미 성향으로 크게 돌아설 가능성은 적다. 물론 태국의 입장에서도 미국과의 관계 개선이 외교 분야에서의 행동반경을 넓히는 기회를 제공해주기는 하지만, 여타 동남아시아 국가와 마찬가지로 태국 또한 미-중 경쟁에서 특정국을 편드는 일에 조심스러운 입장이기 때문이다. 태국이 이와 같은 입장을 보이는 이유는 다음의 두 가지 맥락에서 설명해볼 수 있다. 첫째, 태국은 전통적으로 국가적 생존과 독립을 보장하는 데 목적을 둔 유연하고 실용적인 대외정책, 통칭 ‘대나무 외교(Bamboo Diplomacy)’에 의존해온 역사가 깊기에 앞으로도 해당 기조를 쉽사리 포기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Poonkham, 2022, pp. 1-4). 둘째, 태국이 정치 및 경제적 차원에서 중국과 맺고 있는 관계가 지난 수년간 이전보다 훨씬 긴밀해졌다. 중국은 비민주적 행태에 반발해 태국 정부를 외면하던 서방 국가들과는 달리 군부의 정권 장악이나 인권 실태 악화에 별다른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기에, 태국은 투자와 인프라, 기술 지원 등 분야에서 서방 대신 중국에 대한 의존도를 점차 늘리는 모습을 보였다. 따라서 태국이 지금 서방 측으로 편 갈아타기를 시도하기에는 잃을 것이 너무 많아졌고, 최악의 경우 중국의 보복조치에 노출될 가능성도 있다는 점도 태국의 노선 변경을 막는 요소로 작용한다.
2. 좋은 친구 미국, 하지만 그 위에는 제일가는 파트너 중국
태국의 대외정책은 지난 수십 년간 모든 국가와의 친선을 유지한다는 목표를 표방해왔다. 이와 같은 태도는 상대적 소국의 입장에서 단일 국가에 미래를 모두 맡기기보다는 모든 진영과 돈독한 관계를 이어가면서 정세 변화에 따라 생존에 유리한 방향을 선택하는 것이 옳다는 관념에 기반한다(Dhiravegin in Poonkham, 2022, pp. 27). 논란의 여지는 있지만, 상기한 유연외교 기조의 큰 뿌리는 미국의 리처드 닉슨(Richard Nixon) 행정부가 베트남 문제는 베트남인들에게 맡기고 미군은 해당 지역에서 철수한다는 방침을 밝힌 1970년대 전후에서 찾을 수 있다. 당시 미국의 철수 발표로 난처한 상황에 처한 태국 외교계는 자국의 생존 보장을 위해 강대국 사이의 등거리 외교에 돌입함과 동시에 공산주의 진영과의 관계도 정상화하고자 했으며(Poonkham, 2022, pp. 16), 각국과의 관계에 차등을 두기 시작한 1970년대 후반에 들어서도 태국 외교계는 모든 진영과 우호적 관계를 유지한다는 주요 목표를 끈질기게 추구했다. 이처럼 모든 국가와의 친선 유지가 태국 대외정책의 기반을 형성하고 있는 상황을 고려하면, 태국 외교계에서 서로 비슷한 지위에 있는 국가들 중 어느 하나를 더 좋은 친구라고 특정하는 일은 거의 보기 힘들다.
그렇다면 이 사실을 모를 리 없는 쁘라윳 총리가 중국을 제일가는 파트너로 추켜세운 것은 어떤 연유에서일까? 가장 간단하게는 총리 자신의 대외관계 경험 부족에서 나온 실언이라고 설명해볼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설사 실언이라 하더라도 해당 발언은 태국 정·재계 엘리트층이 중국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는지를 충분히 보여주는 사례로 볼 수 있다. 물론 중국이 태국의 핵심 파트너라는 생각 자체는 태국의 정치 엘리트층에서 이전부터 힘을 얻어왔지만(Zawacki, 2017), 중-태 관계가 지금처럼 급속히 가까워진 결정적 이유는 2014년 태국 군부의 쿠데타 당시 미국이 군사지원을 중단하는 강경책을 쓰면서 거리를 두자 중국이 미국을 대신해 태국 대외관계의 불가결한 파트너로 급부상했기 때문이다(Rosen 2014; Han 2018).
중-태 관계의 발전은 비단 대외정책 이외에도 여러 분야에서 찾아볼 수 있다. 먼저 경제 부문에서 중국은 아세안 및 미국과 더불어 태국의 핵심 교역국으로, 태국의 대중(對中) 무역액은 2010년부터 2019년까지 대미(對美) 무역액을 추월한 바 있다(Bank of Thailand, 2022). 외국인직접투자(FDI) 규모를 살펴봐도 태국 투자위원회(Thailand Board of Investment)를 경유한 중국의 투자 액수는 2017년부터 2019년까지 10배로 성장하는 등 여타 국가에 비해 큰 폭으로 증가했다(Siam Commercial Bank, 2019). 한편 태국을 대상으로 한 중국의 무기 수출액도 2014년부터 2018년까지 5배로 늘어났으며(Muramatsu, 2022), 2016년부터는 전차와 잠수함, 기타 병기 판매 실적을 바탕으로 중국이 태국의 최대 무기 공급원으로 등극했다. 여기에 더해 태국은 자국 북동부와 동부에서 진행되는 고속철도 건설 및 운영 사업에서도 중국 기술 도입을 결정했고, 이 과정에서 경쟁입찰 과정을 별도로 거치지도 않았다(Sawasdipakdi, 2021). 마지막으로 양국의 정·재계 인사들이 상호 밀월관계를 유지하고 있다는 점도 중-태 양국 간의 거리를 더욱 좁히는 요소로 기능한다.
하지만 태국이 그간 얼마나 중국과 가까워졌는지를 가장 분명히 보여주는 사례는 태국 국내에서 나타나는 반중 감정에 중국이 대응하는 방식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태국에서 중국에 비판적인 의견이 등장할 때마다 중국 측은 단순히 여론 차원에서의 오해를 해소하는 데 그치지 않고, 태국 대중을 훈계하면서 중국이 타국에 베푸는 아량과 지원을 상기시키는 경향을 보인다. 일례로 태국에서 중국산 코로나19 백신인 시노백(Sinovac)의 효능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자 중국 대사관은 페이스북에 올린 글에서 이와 같은 의혹이 중국산 백신에 대한 모함이자 깎아내리기 시도라는 반응을 내놓으며 태국 대중과 정면충돌을 불사하는 태도를 보였으며, 시노백에 대한 비판은 태국의 코로나19 극복을 지원하고자 하는 중국의 선의에 대한 공격에 해당한다는 표현을 덧붙이기도 했다(Kom Chad Luek, 2021). 다만, 중국 대사관의 반박보다 더욱 놀라웠던 것은 아누틴 찬비라쿨(Anutin Charnvirakul) 태국 부총리(Deputy Prime Minister) 겸 공중보건장관(Minister of Public Health)의 반응이었는데, 그는 시노백 비판이 마치 형제와도 같은 중-태 관계를 훼손할 수 있다고 지적하면서 “형제는 서로를 비판하지 않는다”라는 표현까지 써가며 태국 대중에 자제를 요청하는 모습을 보였다(Matichon, 2021). 해당 사례는 비단 중국을 제일의 파트너로 호칭한 쁘라윳 총리뿐만 아니라 태국의 정치 엘리트층 전반에도 중국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인식이 널리 퍼져있음을 시사한다.
3. ‘대나무 외교’는 여전히 유효한가?
그렇다면 한편으로는 역내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는 중국, 다른 한편으로는 동남아시아 복귀를 꿈꾸는 미국과 마주한 태국은 이전처럼 양 강대국 사이에서 균형을 유지할 수 있을까? 물론 가능성 자체는 충분히 존재한다. 지난날의 외교사에서 태국은 특히 여러 강대국이 자기 편 늘리기를 시도하는 상황에서 외세 압력 사이의 궁극적 균형을 유지할 수 있는 능력을 분명히 보여준 바 있다. 다만, 이미 중국의 영향권 안으로 깊숙이 편입된 것처럼 보이는 태국 정치 엘리트층이 양대 세력 간 균형 유지에 얼마나 의욕적으로 나설지는 아직 미지수로 남아있는 상황이다. 먼저 중국은 서방 진영과는 달리 태국과의 협력사업에서 높은 수준의 투명성을 요구하지 않기 때문에, 태국 정치인의 입장에서는 부패를 용인하는 태도를 보이는 중국을 선택함으로써 더욱 많은 이익을 얻을 수 있다. 설령 부패 문제를 차치하더라도, 태국 정부는 이미 이른바 큰형님 격인 중국의 심기를 건드릴 만한 이슈에 선제적으로 대응해 문제의 싹을 자르려는 태도를 자주 보여주고 있다. 이 점을 고려하면 미국과의 연계 강화를 환영하는 듯한 태국의 최근 모습은 아마도 단순한 친선의 의사표시일 뿐, 대외정책 측면에서 눈에 띄는 변화를 가져오지는 않을 공산이 크다.
하지만 현재 나타나고 있는 미-중 경쟁이 극도로 심화되어 둘 중 하나를 반드시 선택해야만 하는 시점이 도래할 경우, 대나무 외교에 의존하던 태국은 지금까지와는 다른 차원의 실질적 위기에 처하게 될 수 있다. 만약 이러한 상황이 실제로 전개된다면 태국의 선택은 아마도 해당 시기에 권좌에 앉은 이가 누구인지에 따라 결정될 것으로 보인다. 먼저 현재 집권 중인 태국 군부는 실질적 이익과 이념적 동질성 측면에서 미국보다는 중국에 친근감을 느껴 친중 행보를 펼 가능성을 점쳐볼 수 있다. 반면 향후 진보 진영이 정권을 탈환할 경우를 가정하면, 규칙에 기반한 질서를 옹호하는 미국의 입장에 태국도 함께할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높을 것으로 예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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