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을 사회적 동물이라고 말 하지만, 다른 사회적 동물과는 전혀 다른 사회적 특성과 문제점들을 가지고 있는데, 그 원인은 다른 사회적 동물들은 다만 본능에 따라 사회를 구성하는 것에 비하여 인간은 언어문자(言語文字)를 사용하는 분업과 관습과 지식과 철학과 종교 등에 의해서 사회체제를 구성한다는 차이점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대개의 동물들이 먹이 사슬 가운데에서 삶의 목적을 우성종족번식을 목적으로 하는 단 한 가지에 국한하는 것인데 대하여 인간은 분업에 의한 다양한 역할 담당과 풍요한 삶을 누리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는 점에서 분명한 차이가 있다 하겠다.
인간사회에서 분업과 관습과 지식과 철학과 종교에 대하여 인간의 개인적 및 사회적 목적 양방면을 모두 여하히 만족하게 이루어 나가게 할 것인가 라고 하는 측면이 근원적인 문제점이 된다고 볼 수 있다. 이 같은 문제점으로부터 “평등. 자유. 책임. 의무. 정의” 등과 같은 개념이 필요하게 되지 않았는가 하는 생각이지만, 이 모든 이념들의 근본은 ‘인간적 형평성’이라는 한 가지에 귀결된다고 본다.
인류사회발달과정에 있어서 국가사회의 초기에는 일반적으로 봉건주의적 전제정치가 성립하였었는데, 그리스의 경우에는 온난한 기후와 풍요한 생산물과 도리아인의 노예제도에 의한 노동으로부터 해방된 비교적 안정되고 여유 있는 시간의 확보와 함께 소단위의 폴리스라는 폐쇄적 집단사회의 특성으로부터 직접민주주의사회형태가 발생하였고, 이와 같은 사회적 조건으로부터 자유. 평등. 책임. 의무. 정의 등에 대한 사색의 문예(文藝)와 철학(哲學)과 정치(政治) 등의 헬레니즘문화를 발생하여 발전하게 되었다고 본다.
비교적 개인의 자유가 보장되었던 그리스의 소규모 폴리스가 전제군주의 거대한 조직적 무력에 멸망하였으나, 그리스 폴리스의 개인과 사회 사이에 있어서의 문예와 철학 그리고 정치적 정신은 유일신(唯一神)의 말씀을 절대적 명령으로 신앙하는 기독교(헤브라이즘)에 들어가서 기독교 신앙을 자유와 평등과 책임과 의무와 정의에 대하여 사회화하는 교리해석에 기초가 되었다. 구약의 전쟁의 신으로써 유일신이었던 하나님의 뜻을 인류에 대하여 평등과 자유의 사랑이라고 박애주의로 해석하여 선언한 예수 그리스도의 기독교가 출현 한 때가 로마 대제국이 그리스(B.C. 8세기에 성립)를 속국으로 점령한 시기(B.C. 27년경)를 전후 한 때라고 보면, 예수 그리스도 기독교 출현과 유태교(헤브라이즘)와 그리스사상(헬레니즘)과의 지리적 및 시대적으로 충분한 연관관계가 분명해 질 것으로 생각된다.
이상과 같이 서구세계에 있어서 그리스 폴리스의 철학적 및 정치적 과제가 인간적 형평성의 문제였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기독교의 박애사상 역시 구약성서에 대하여 인간적 형평성 실천에 관한 나름대로의 해법이었다고 볼 수 있다.
한편 동양에서의 불교는 인도의 그때까지의 카스트(사성계급) 제도에 대하여 석존이 인간의 본래평등성을 선언하였는데, 불교의 발전에 따라서 출가수행자와 재가수행자의 두 가지의 사회적 의의가 나타나게 되었다.
출가수행자는 인간적 형평성을 깨달은 경지를 본분으로 하여 깨닫지 못한 중생을 깨달음으로 이끌어 가는 불교의 스승의 입장을 사회적 역할로 실현하는 것이라면, 재가수행자는 사회의 각 분야에 임하여 있는 그대로 출가승을 중심으로 인간적 형평성을 깨달아 사회화하는 공부인의 입장을 사회적 역할로 실현하는 것이라고 말 할 수 있다. 따라서 출가수행자는 250이 넘는 계목(戒目)을 율(律)의 성격으로써 수계(受戒)하는 반면에, 재가불자는 5 가지의 계목을 그것도 정혜(定慧) 수행의 조행(助行)의 성격으로 수계하게 되는 것이지만, 출가나 재가나 깨달으면 그 계와 율에 구속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참 뜻을 자유롭게 실현하게 된다 한다. 불교의 이 같은 “계와 율의 깨달음에 대한 가르침”의 성격은, 오늘 날 서구정신이 발전시켜 온 민주국가윤리가 지니고 있는 근본적인 문제점을 해결할 수 있는 해법을 가진다.
사실 21세기 미국의 민주주의는 서구 기독교 구약의 율법적(헬레니즘)인 성격에 대하여 그리스 폴리스의 자유. 평등. 정의의 실현(헬레니즘)의 시민정신이 투쟁하여 온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이는 기독교 구약의 율법정신과 예수그리스도의 그리스 인간관의 신약과의 대립이며 화해가 불가능한 투쟁이라고 함축 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 날의 민주사회에서 실정법(rule)을 중심으로 하는 판검사와 변호사 등의 법집행형태나 삼권분립과 지방자치제 등의 정치형태가 모두 이 같은 공식으로부터 파생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곳에는 영원한 투쟁만 있을 뿐 화해란 있을 수 없다. 왜 그런가 하면 예수그리스도의 기독교가 하나님의 독생자라고 하는 것과 같이, 그 근본에서 말씀의 율법종교로부터 탈피 할 수 있는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이에 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기독교윤리의 보편적 근본이념으로서 인류애를 지칭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근거로 성립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사랑’에 인간적 주체성에 대한 분명한 자각(自覺)이라고 하는 독자성의 논리가 결여되어 있다고 볼 수 있으며, 또 같은 이유로 하여금 ‘사랑’을 유일신의 기독교 이외에는 성립하지 않는 것이라고 하여 보편성을 상실하는 대립정신으로 “땅 끝까지 전도”를 선언하게 된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그리스도의 ‘사랑’이라는 개념이 그리스 폴리스의 민주정신에서 그 뿌리를 찾는 것이 옳다고 한다면, 이 ‘사랑’이라는 개념을 그리스 폴리스의 민주시민장신에 되돌려 주어야 마땅한 것이라고 생각되며, 그것을 억지로 구약의 유일신에게 종속시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 기독교의 집단이기주의적 고집에 지나지 않은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 같은 기독교의 무리한 논리는 개인으로 하여금 모든 사적 견해를 접어 두고 사회의 목적하는 바를 위해서 헌신하는 윤리를 획일적이며 형식적으로 강요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것으로서, 자유와 평등과 정의를 본질로 하는 인간으로 하여금 ‘야누스’리든가 ‘지킬박사와 하이드’ 같은 2 중적 인간성을 사회성으로 가지게 하는 근본 요인이 되어 있다 하겠다.
기독교의 말씀을 계율로 성립하는 가르침은 마치 불교의 출가승의 수행과 같은 성격을 가진다. 이론적으로는 계율을 모두 지키면 바람직한 사회를 이룰 수 있다는 것이 되지만, 실재로 기독교의 서구세계를 1000년 동안 통치했었던 기간은 암흑시대라 할 만큼 비인간적인 문화를 보이고 있다. 오히려 꼭 같은 기독교를 두고서도 르네상스 이후의 미켈란젤로나 바흐 같은 예술가의 작품이 비잔틴 예술보다 더 인간적으로 풍요한 정서를 표현하고 있다는 것과 같다.
기독교가 역사적으로 가장 대표적으로 지탄받는 것이 십자군원정과 같은 무력정복이나 또는 마녀사냥과 같은 비인간적 사건일 것이다. 이 같은 기독교의 비인간성은 오늘 날의 사회에서도 형태를 달리하여 자행되고 있는 것은, 그것이 말씀 중심의 기독교 윤리의 개인과 사회에 관하여 화해불가능의 이중인격성(二重人格性)의 괴리 부분이 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보는데, 민주사회의 정치가나 사업가와 같은 지도층 인사의 인격이 일반적으로 사기성이 다분하고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한다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사회풍토가 그것을 여실하게 증명하고 있다 하겠다.
21세기의 민주사회에 있어서도 실질적으로 시민들이 주인이 되지 못하고 당파와 세력을 따라서 우왕좌왕하면서 줄서기를 하고, 또는 조직의 상부 몇몇이 국민을 자기들 마음먹은 대로 조종 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실재로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이유는 계(戒)와 율(律) 즉 실정법(實定法)에 대하여 “그 법을 위반하는가? 아니면 잘 따르고 있는가?” 라는 것만을 관습화하여 가릴 뿐, 그 법의 참 뜻을 깨닫는 교육이 민주사회에 전무(全無)하기 때문이라고 말 할 수 있는데, 그것이 그럴 수밖에 없는 근본적인 이유가 바로 “기독교의 율법과 예수 그리스도와의 화해불가능”에 있다는 것이다.
지금까지도 유태교는 예수 그리스도를 메시아로 인정하지 않고 있지만, 기독교에서는 예수와 관련하는 말씀을 구약에 대하여 신약이라고 하여 유일신인 하나님의 적자라고 신앙하고 있는데, 왜 그런 일이 일어나는가 하면 예수의 그리스적 ‘사랑’이 우주의 근본이며 인간의 근본성품이라는 것을 증명할 만한 이론을 별도로 찾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고 본다. 따라서 유일한 신(神)?의 절대적인 말씀?에 의거하여 그 ‘사랑’이 가장 근본인 것임을 밝힐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라고 본다. 그러나 그럼으로 하여금 오히려 그 ‘사랑’은 그 본래의 취지를 지키지 못하고 말씀의 노예로 타락하게 되고 말았던 것이다.
“계와 율의 참 뜻을 깨달음에 대한 가르침”인 불교는 바로 이상과 같은 서구사회의 기독교적 모순성에 대하여 그것을 해결하는 해법이 된다 하겠다.
문제의 발단은 사회적 목적을 위해서 개인적 자아의 실현은 무시해도 좋다고 하는 측면과 사회적 목적이 개인의 자아의 실현 바로 그것의 연장선상이어야 한다. 라는 것의 차이점에 있다고 본다.
인류의 사회적 발전과정에서 기독교를 비롯한 모든 종교적 사회에는 이 양자를 중심으로 변증법적 발전을 이룩해왔었다고 보는데, 필자가 분석해 보지는 않았지만 대체로 불교가 흥했었던 국가나 시기에는 변증법적 현상이 거의 없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다. 예를 들면 화랑의 호연지기 함양을 위한 수련이라든가 개인적인 이해관계를 전혀 염두에 두지 않은 화랑 관창의 살신성인적 행위와 같은 것이나 신라의 임금이 퇴위를 하면 출가한다든가 그 무덤을 백성의 안위를 위해 바다에 수장한다는 것 등과 같은 것이 모두 사회와 개인에 구별을 하지 않은 정신에서 가능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하여 때와 장소와 상대를 가리지 않고 누구나 싸움에 나가서는 살신성인적으로 자신을 돌보지 않고 사회를 위해서 목숨을 던져야 한다. 라는 등을 획일적으로 강요한다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에 따르는 처벌이나 비난을 받을 것이라는 등의 실정법이나 관습이나 또는 그렇게 해야 한다고 획일적으로 강요하는 사람도 없는데, 본인의 마음에서 저절로 우러나와서 하는 행동이어야 한다는 것이 문제의 중요한 핵심인 것이다.
위와 같은 정신을 구구절절하게 삶의 다양한 방면에서 이야기체로 써 놓은 것을 불교에서 본생담(本生談)이라고 하여 석존이 이 세상에 태어 날 때 까지 전생(前生)에 행하였던 보살행으로 기록하고 있다.
더욱 근본적인 문제는 이 ‘사랑’의 실천이다.
요즈음 초중고생들에게 수행평가에 해당하는 의무적 봉사활동시간이 주어져 있다. 또 얼마 전에 듣기로는 어떤 기업에서도 봉사활동을 사원의 고과평가에 반영한다고 하는 소리를 들은 것 같다. 오죽 답답하면 그런 제도를 두었을까. 하는 생각도 들지만 그런 활동이 시회에 얼마나 도움이 될 것이며 또 사회구성원에게 얼마나 사랑을 일깨울 수 있겠는가 라고 생각 할 때에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한다고 대답을 할 것이다. 오히려 사회의 부조리와 모순을 정당화하는 곳에 기여 할 것이라는 우려를 표명하고 싶은 것은, 그 발상이 단순히 기독교적인 것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기독교의 ‘사랑’의 실천에 대한 근거를 구약의 말씀이 아닌 그 무엇으로 대체해야 하는데, 그것을 하느님의 만든 자연법에 대하여 과학적 이론에서 구하고자 한 발상이 현대에 접어들면서 광역우주론과 양자역학의 분야에 많은 노벨상을 수상하게 된 이유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것도 허사가 될 지경에 이르렀다. 왜 그런가 하면 과학이론이란 것이 언어를 기초로 해서 성립하는 이론이성의 분야이기 때문이다. 이 말을 불교적으로 하면 의식의 대상이 되는 경계(境界)로써 언어적 명상(名相)을 기초로 하여 과학이 성립한다는 것인데, ‘사랑’의 참 된 근원은 언어를 떠나 있는 것이라고 불교는 가르치기 때문이다.
불교에서는 ‘사랑’에 대하여 ‘자비(慈悲)’라고 하지만, 이 자비심의 근원을 자각(自覺)하는 것이 기독교의 모든 모순을 해결하는 것이며, 그 자비를 그 어떤 말이나 그 어떤 존재에도 의지하지 않고 자기 자신의 마음으로부터 직접 열반의 심성(心性)을 인간적 형평성으로 자각하게 하는 이론과 구체적인 실천 수행방법이 바로 불교의 깨달음의 내용이 되는 것이다...^^
첫댓글죄송하지만 기독교의 사랑이라는 개념을 전혀 모르시는 분이 쓰신 글인듯하네요.유일신 이라는 것을 예로드셔서 기독교에 대해 모르고 있는 분들에게도 잘못된 지식을 전달하는 중이십니다.다른것은 차후에 한번 올리기로 하지요.불교의 해탈의 경지에 오르기위해선 속세의 인연을 끊어야하며 도를 행하며 수련해야하지요.
보통사람으로써는 도저히 이뤄낼수 없는 것이 그 도의 경지 해탈의 경지가 아닌가요?게다가 속세와 인연을 끊고 자비를 구한다니요...적어도 기독교에선 슬퍼하는 자와 같이 슬퍼하고 기뻐하는 자와 같이 기뻐하라고 합니다.자신이 믿고 따르는 무엇인가를 올바르게 전달하기 위해서 글을 올리는 것은 옳지요.하지만
다른 종교를 꼭 끌어들여야만 설득력이 좀더 생긴다면 그것또한 모순입니다.그 자체로 완벽한것을 왜 그래야합니까. 정보를 전달하기위해선 많은 노력을 하시고 비판하시려거든 알고 하십시오.그래야 그 다른 부류의사람들까지도 설득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어디가나 잘못 가르치고 잘못 이해하며 잘못 행하는 이들
있습니다.기독교인이라고 하는 사람들중엔 모범이 안되는 예도 있습니다.그 사람들이 자신이 신자라고 얘기하지만 절대로 인정받을 수 없습니다.나 자신과 남은 속여도 한분은 절대 속아넘어가지 않는다고 했지요... 모든이들에게 행복과 구원을 준다는 종교들을 믿어도 그로 인한 전쟁들을 보며 우리는 느껴야합니다.
제 가 기독교를 모른다고 하셨는데, 위 글에서 제가 무엇을 안다고 쓴 글은 없으며 기독교의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을 역사적으로 살펴 보았고, 오늘 날 민주주의가 가지는 문제점의 근원이 그 같은 기독교 자체의 내적 모순에 있지 않는가 하는 문제를 제기 했으며, 불교에 그 해법이 있다는 주장을 했을 뿐입니다.
이런 문제 제기는 21세기 지구촌시대를 맞이하여, 핵무기나 환경파괴 등의 인재와 천재에 대해서 인류 멸망을 염려하는가 하면, 또는 극심한 빈부차이에 의해서 아프리카 등의 세계계인구의 절반이 기아에 허덕이는 등 많은 문제점이 상존하는데, 그 원인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 보기 위해서 쓴 글입니다.
첫댓글 죄송하지만 기독교의 사랑이라는 개념을 전혀 모르시는 분이 쓰신 글인듯하네요.유일신 이라는 것을 예로드셔서 기독교에 대해 모르고 있는 분들에게도 잘못된 지식을 전달하는 중이십니다.다른것은 차후에 한번 올리기로 하지요.불교의 해탈의 경지에 오르기위해선 속세의 인연을 끊어야하며 도를 행하며 수련해야하지요.
보통사람으로써는 도저히 이뤄낼수 없는 것이 그 도의 경지 해탈의 경지가 아닌가요?게다가 속세와 인연을 끊고 자비를 구한다니요...적어도 기독교에선 슬퍼하는 자와 같이 슬퍼하고 기뻐하는 자와 같이 기뻐하라고 합니다.자신이 믿고 따르는 무엇인가를 올바르게 전달하기 위해서 글을 올리는 것은 옳지요.하지만
다른 종교를 꼭 끌어들여야만 설득력이 좀더 생긴다면 그것또한 모순입니다.그 자체로 완벽한것을 왜 그래야합니까. 정보를 전달하기위해선 많은 노력을 하시고 비판하시려거든 알고 하십시오.그래야 그 다른 부류의사람들까지도 설득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어디가나 잘못 가르치고 잘못 이해하며 잘못 행하는 이들
있습니다.기독교인이라고 하는 사람들중엔 모범이 안되는 예도 있습니다.그 사람들이 자신이 신자라고 얘기하지만 절대로 인정받을 수 없습니다.나 자신과 남은 속여도 한분은 절대 속아넘어가지 않는다고 했지요... 모든이들에게 행복과 구원을 준다는 종교들을 믿어도 그로 인한 전쟁들을 보며 우리는 느껴야합니다.
리아나님의 꼬리글을 읽어 보니, 님은 위의 본문에 써 있는 글도 제대로 다 읽지 않으셨거나 아니면 한글 독해력이 매우 부족하거나 양자간에 한 가지라고 생각됩니다.
먼저 불교의 해탈의 경지에 오르기 위해서는 속세의 인연을 끊어야 한다고 하셨는데, 그것은 리아나님이 정말 불교를 모른다는 것을 단적으로 증명해 주는 말입니다. 혹시 주변에 불교를 조금이라도 아는 분이 계시면, <유마거사>라는 사람이 누구냐고 물어 보시면 알 것입니다.
제 가 기독교를 모른다고 하셨는데, 위 글에서 제가 무엇을 안다고 쓴 글은 없으며 기독교의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을 역사적으로 살펴 보았고, 오늘 날 민주주의가 가지는 문제점의 근원이 그 같은 기독교 자체의 내적 모순에 있지 않는가 하는 문제를 제기 했으며, 불교에 그 해법이 있다는 주장을 했을 뿐입니다.
이런 문제 제기는 21세기 지구촌시대를 맞이하여, 핵무기나 환경파괴 등의 인재와 천재에 대해서 인류 멸망을 염려하는가 하면, 또는 극심한 빈부차이에 의해서 아프리카 등의 세계계인구의 절반이 기아에 허덕이는 등 많은 문제점이 상존하는데, 그 원인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 보기 위해서 쓴 글입니다.
앞으로의 21세기는 인류가 자신의 종교에 얽메어서는 안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토인비 등의 미래학자들이 모두 한결같이 지구촌시대에는 국가간 대립보다는 종교간의 대립이 가장 무서운 것이라 했기 때문입니다.
종교간의 대립이 없어지려면 먼저 시민들이 무조건 자기 종교를 옹호만 할 것이 아니라 각 종교간의 특성을 예리하게 파악하여 쓸데없는 것은 버리고 꼭 필요한 것은 모두 한 곳에 모아서 잘 발전시켜 나가는 안목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천년만년 그렇게 끌려 다닐수는 없겠지요. 제가 쓴 글은 아주 작은 목소리의 힘없는 21세기 지구촌에 거는 "희망"의 내용을 몆줄의 글로 남겨두려는 것이라고 생각해 주었으면 하는 생각입니다...^^
좋은 게시물이네요. 스크랩 해갈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