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럴 해저드 골프장에 숨어있냐?”
신용불량자 심금 울린 한 판사의 글 화제
서울지방법원의 한 파산부 판사가 쓴 글이 화제가 되고 있다. 서울지법 파산부의 문유석 판사가 법원 내부 회보인 <법원사람들> 5월호에 기고한 ‘파산이 뭐길래’라는 글을 통해 파산 신청자들의 생생한 사례와 더불어 개인 파산자를 ‘모럴 해저드’(도덕적 해이)로 몰고 있는 사회 분위기를 통렬히 비판했다. 이 글이 ‘신용불량자클럽’ 등 파산의 위기에 놓인 사람들이 자주 가는 인터넷 게시판에 ‘퍼 나르기’ 되면서 많은 신용불량자들의 눈물을 자아내고 있다.
문 판사의 글에는 △병원비로 불어난 카드빚을 감당 못한 한 택시 기사가 법원을 찾은 사례 △친언니에게 빚보증을 서 주고, 돈을 주다가 카드 돌려막기를 하는 신세가 됐고, 파산 신청까지 오게 된 사례 △채무자가 파산 신청을 해, 빚을 돌려받지 못하게 된 채권자가 이의신청을 했다가 채무자의 재기를 빌어주며 이의신청을 취하한 사례 등 파산사건을 담당하며 본 생생한 사례들이 담겨있다.
문 판사는 자신의 글의 통해 “신용불량자 400만이 어떻고 쉽게 숫자로 이야기하지만, 그 한명 한명은 숫자가 아니고 피가 흐르는 사람”이라면서 “400만명이 신용불량자면, 최소한 400만 가정이 빚으로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이며, 그 중 상당한 수의 가정은 빚을 감당하지 못하고 파괴되어 아이들이 가정의 보호를 받지 못한 채 거친 세상으로 던져지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문 판사는 부모가 없거나 형편이 어려운 가정의 여자아이들을 보호해주는 한 시설에서 “사채업자가 깡패 보내서 돈 갚으라고 협박할 때 어떻게 해야 돼요”, “사업하다가 부도를 내서 감옥에 가면 빚 다 갚을 때까지는 못나오는 건가요” 같은 질문을 받았다면서, “아이들에게서 엄마 아빠를 빼앗아 간 것은 바로 돈이었다”고 답답한 심정을 토로했다.
문 판사는 대부분의 파산자들이 세가지 종류에 해당된다고 말하고 있다. “빠듯하게 먹고 살다가 실업, 질병 등으로 감당할 수 없게 된 사람들, 먹고살아 보려고 이것저것 해 보다가 망해버린 사람들, 자기 앞가림만 겨우 하는 처지에 부모형제, 친지의 빚보증을 어쩔 수 없이 섰다가 같이 망한 사람들.”
문 판사는 ‘모럴 해저드’는 말은 이렇게 ‘통역’된다고 말했다. “마이너스 대출 받고, 현금서비스를 받아 학원비, 병원비, 유치원비를 내다가 월말 카드대금소지서를 감당하지 못해 파산은 고사하고 카드대금 연체 1회라도 되면 인생 끝장이라고 두려워한 나머지… 돌려막기를 시작하고 카드깡을 해가며 카드대금을 갚아도 원금은 난공불락…써보기라도 한 돈은 반도 안 되고 나머지는 다 이자, 연체료인 상황이 되자 벼랑 끝에서 뛰어 내리는 심정으로 빚을 탕감 받고자 법원을 찾는 것.”
그는 “남의 돈으로 흥청망청 쓰고는 자기 먹을 것은 다 숨겨놓고 호화생활 하며 파산 신청하는 사람들은 어디에 가야 찾을 수 있는 것”이냐고 반문하며 “골프장 ‘헤저드’안에 숨어 있”냐고 비판했다.
그는 한국개발연구원(KDI)의 연구 자료를 인용하며 “신용불량자의 증가는 IMF 시대 경제위기와 구조조정을 거치면서 시작됐지만 이를 확대시킨 것은 1999년 현금서비스 한도규제 폐지”라고 지적하고 있다. 즉, “생활수준을 더 낮출 수 없었던 사람들에게 일단 돈을 쓰게 해 주고, 돌려막기로 파산을 모면하며 버틸 수 있게 온갖 카드를 발급해 주며 업계 1위, 외형 1위가 되기 위해 노력한 것”이 신용불량자와 파산자 급증의 원인이라고 지적한 것이다.
문 판사는 “신용불량자의 급증은 주로 신용카드회사의 ‘도덕적 해이’에 기인한 것으로 해석된다”면서 “모럴 해저드라는 말은 이럴 때 쓰는 것”이라고 통렬히 비판했다.
문 판사는 또 “2004년도에 처리한 면책사건의 면책율은 98.6%”라며 “한 사람 한 사람 놓고 보면 다 힘들게 살아 온 사람들”이라고 말하고 있다. 글의 마지막에 문 판사는 이렇게 말한다. “빚 갚으라고 아빠 멱살을 잡던 험상궂은 아저씨의 기억도, 엄마가 보고 싶어 남몰래 베개를 적시고 마는 눈물도 영원이 사라지도록 진짜 마술이라도 배워왔으면 좋겠다”고. 하지만 평범한 판사가 할 수 있는 것은 기록을 뒤적이다가 “파산을 면책한다”고 ‘주문’을 외울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전문> 파산이 뭐길래 문유석 서울중앙지방법원 판사 |
법원가족 여러분, 언론에서 신용불량자 문제가 심각 하다는 말을 많이 들으셨죠? 처리하시는 파산사건, 개인회생사건도 많이 늘고 있구요. 파산부에서 1년여 근무하면서 나름대로 느낀 것들이 있어, 감히 두서 없는 글을 써 봅니다.
1. 몇몇 사건들
A씨는 어떤 중소기업의 경영자였는데, IMF 시절 거래처들의 연쇄부도를 못 견디고 부도를 냈습니다. 그런데, 회사자금을 빌릴 때 대표이사 개인도 연대보증을 하도록 금융기관들이 요구하기 때문에 회사의 빚이 모두 대표이사 개인의 빚이 되었습니다.
살던 집은 경매로 넘어가고 실업자가 되어 친지 집을 전전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보증채권자인 금융기관이 A씨가 재산을 은닉하고 있다면서 면책에 이의를 제기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기록을 보니 초등학생에서 중학생 정도 되는 세 따님이 있길래, 심문 도중 자녀들은 어느 학교에 다니고 있는지를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잠시 머뭇거리더니, 글쎄, 런던에서 음악학교를 다니고 있다는 겁니다.역시 흔히들 말하듯, 사업은 망해도 사업가는 다 재산을 빼돌려 잘 먹고 잘 살고 있구나 싶더군요.
이후 재산은닉여부, 학비 등 조달경위에 대한 심리가 계속되었습니다. 그런데, 뜻밖의 사실이 속속 밝혀졌습니다. A씨의 어린 세 따님은 세계대회에서도 여러 번 수상했던 음악 영재들로, 학비 및 기본생활비를 충당할 만한 금액의 영국정부장학금 등을 받고 있었고, 주말이면 교회에서 반주자로 일하며 생활비를 보태고 있었습니다.
애들 엄마는 식당에서 월 100만 원 정도 받으면서 일을 하고 있고, 사는 집도 허름한 월세집이었습니다. 채권자는 서울에 홀로 남은 애들 아버지가 재산을 숨기거나 처자식에게 돈을 보낸 어떠한 증거도 제출하지 못했습니다.
그 얼마 후, 또 다른 사건이 있었습니다. B씨는 택시기사를 한동안 하다가 그만두고, 실업자 생활을 한 지 오래 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기록을 뒤지다보니 신용카드내역서에 ‘코코’ ‘발리’ 등의 야릇한 이름이 자주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술집인 것 같았습니다. 남의 빚은 안 갚으면서 술집에서 방탕한 생활을 하다니! 신문에 자주 나오는 소위‘모럴 해저드’가 이런 거로구나.
그런데, 심문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파산자는 그야말로 피골이 상접하고 병색이 완연한 병자였습니다. 중증 호흡기질환 장애인이며, 말하는 것도, 오래 앉아 있는 것도 힘들어했습니다. 방탕한 생활은커녕 일상적인 생활도 어려워 보였습니다. 사연은 이러했습니다.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택시기사로 일하며 살아가던 B씨는 어느 날 갑자기 쓰러져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습니다. 급성 호흡기 질환으로 대수술을 몇 차례나 받고, 1년 가까이 병원에 장기 입원해야 했고, 돌볼 친지도 없어 간병인까지 두어야 했습니다. 수천만 원이 훌쩍 넘어가 버린 병원비 등은 온갖 신용카드를 발급 받아 메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퇴원 후에도 살길은 막막했지만, 막연히 카드대금이 연체되어 신용불량자가 되면 큰일난다는 생각에 또 다른 카드를 발급 받아 앞의 카드를 막는 돌려 막기를 반복하다보니 고액의 카드수수료와 연체이자로 빚은 금새 두 배로 늘어 버렸습니다.
더욱더 카드결제대금이 부족해지자 파산자는 예전 동료인 택시회사 노조원들에게 조합원 회식 등으로 단란주점에 갈 때 자기 신용카드로 계산을 하고 결제일에 돈을 자기에게 달라고 부탁을 한 것입니다. 사적으로 ‘카드깡’을 한 셈이죠.
결국 밑빠진 독에 물은 채울 수 없게 마련이고, 예정 된 파국이 찾아와 더 이상 어떤 방법으로도 카드대금고지서를 해결할 수 없게 되었고, 신용불량자 낙인은 물론 채권추심원들 등쌀에 시달리다 못해 파산신청을 한 것입니다.
저는 솔직히 안타깝고, 화가 났습니다. 방탕한 생활은커녕 빚의 반은 병원비, 나머지 반은 온갖 카드수수료, 연체이자로, 결국 손에 한 번 만져보지도 못한 돈을 갚느라 심신이 다 황폐해진 채 비로소 법원을 찾은 이 답답한 아저씨에게. 그리고, 이 지경인 사람에게 끝도 없이 신용카드를 발급해 주고 사용하게 한 카드회사들에게…답답한 사람은 또 있었습니다. C씨는 학원강사로 일하던 여자분입니다. 결혼하였고, 어린 아들도 있습니다. 학원강사 수입으로 넉넉지는 못해도 가족들이 먹고사는 데는 큰 지장이 없어 보이는데, 왜 파산부를 찾게 되었을까요. C씨의 빚은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100% 친언니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C씨만큼 교육을 받지도 못하고, 이상하게도 식당이고 뭐고 먹고 살아보려고 시작만 하면 망하곤 하는 언니를 위해 C씨는 빚보증도 여러 건 서주고, 돈도 주고, 그러다 결국 자기도 카드돌려막기를 하는 신세가 되고도 또 현금서비스를 받아 언니에게 건네주었습니다.
저는 너무 답답해서 C씨에게 왜 이 지경이 되도록 대책 없이 언니를 위해 빚을 졌느냐고 물었습니다. 대답은, 어려서부터 홀어머니 밑에서 어렵게 단둘이 자란 친자매였기에, 도저히 살아 보려고 애쓰는 언니를 나 몰라라 할 수 없었고, 자기도 너무 힘들어 모질게 맘을 먹어 보아도, 늙으신 어머니가 언니를 이번 한번만 더 도와 주라며 눈물을 보이면 견딜 수 없어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되뇌이며 카드를 긁었다는 것입니다.
어렵고 힘든 것은 빚진 사람들만이 아닙니다. 돈을 빌려 준 사람들도 힘들기는 매한가지인 경우가 많습니다. D씨 사건의 경우입니다. D씨는 자수성가하여 가구공장을 경영하던 분입니다.
IMF 당시 부도를 냈다가 힘들게 재기하여 어렵게 어렵게 공장을 운영하다가 불의의 화재로 공장과 재고가구가 모두 불타 수억 원의 피해를 입고는 좌절하고 말았습니다. 하루아침에 알거지가 된 그를 안타깝게 여긴 거래업체 분들은 대부분 그가 재기하기를 빌어 주며 빚을 탕감하여 주었습니다. 그래도 남은 금융기관 빚을 감당할 수 없어 면책신청을 한 사건이었습니다.
그런데, 정작 금융기관들은 아무런 이의도 안 하는데, 비교적 소액채권자인 자재대금채권자 E씨가 강력하게 면책에 이의를 제기하는 것이었습니다. 게다가 E씨는 화재 전 까지 D씨와 형님아우하며 지내던 사이였다는데 말입니다. E씨가 주장하는 이의사유들은 법적으로는 면책불허가사유가 될 만한 것들이 아니었으므로 간단히 배척하면 그만인 듯도 보였습니다.
하지만, 화재로 알거지가 된 사람도 억울하지만, 돈을 떼이는 사람도 억울할 것이라는 생각에 쌍방을 모두 불러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서로 감정이 상당히 악화되어 있었습니다.
E씨의 말씀은 이랬습니다. D씨가 불의의 사고를 당한 것은 안타까웠다. 하지만, 사고 이후에 좀처럼 연락도 없다가 면책신청을 했다기에 연락을 해서 그런 신청을 하려면 미리 상의라도 했어야 하는 거 아니냐고 했더니, 야박하다며 되려 화를 내기에 심한 말다툼을 하게 되었고, 감정이 많이 상하여 이의신청을 하게 된 것이다. 이번에는 D씨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화재 이후 좌절해 있다가, 살아 보려고 고시원 생활에 부부가 일용직을 전전하며 재기해 보려고 발버둥을 치느라 미처 E씨 마음까지 헤아릴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저는 D씨에게 물었습니다. 면책을 받게 되면 법적으로는 E씨를 비롯한 거래업체 사람들의 빚을 안 갚아도 됩니다. 하지만, E씨를 비롯한 거래업체 사람들도 어렵기는 매한가지인데, 그 마음의 빚도 안 갚고 사실 수 있겠습니까. D씨는 대답했습니다. 아닙니다. 면책이 아니라 무슨 결정을 받던, 앞으로 열심히 일해서 아주 적은 돈이라도 벌게 되면 제가 피해를 끼친 분들께 갚으며 살아가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자, D씨의 말씀이 E씨에게 겉치레가 아닌 진심으로 받아들여졌는지, E씨는 흔쾌히 이의신청을 취하하겠다고 하시면서 D씨의 재기를 빌어 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도 감정표현이 서투른 40대 후반의 두 아저씨는 바로 옆에 앉아 있으면서도 계면쩍어 서로 뭐라고 이야기를 건네지 못하고 각자 저에게만 이렇다 저렇다 어눌하게 말씀을 하시더군요.
이런 사건들을 하나씩 하나씩 거치며, 그렇게 저는 파산부 판사가 되어 갔습니다.
2. 천사들과의 만남
지난 연말의 일입니다. 동료들과 함께 한 작은 집을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네다섯 살부터 초등학생, 일부 중고생까지 여자아이들 20여 명이 서로 의지하며 살아가는 곳이었습니다. 이 곳은 부모님이 안 계시거나, 계시지만 경제적인 능력이 없어 아이를 돌볼 수 없는 가정의 자녀들이 자립할 수 있도록 학교도 다니고, 함께 도와가며 살아가는 가정공동체입니다.
수녀님이신 원장님과 선생님들, 그리고 후원자분들의 사랑과 정성으로 아이들은 여느 아이들 못지 않게 밝고 맑게 크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작은 집이지만, 깨끗하고 아늑했구요.
말로만 듣던 판사 아저씨들이라니 호기심이 가득하면서도 쭈뼛거리는 아이들. 한 판사님이 열심히 준비한 간단한 마술 몇 가지를 선보였더니 비로소 환호성이 터지더군요. 선물도 전달하고, 다같이 앉아 피자도 나누어 먹고, 서로 인사도 나누었습니다.
하지만, 숫기 없는 판사들이 처음 본 여자아이들과 금방 터놓고 이야기를 나누기는 난망. 더구나 좁은 공간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다 보니 다소 아쉬운 채로 일어서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한 아이가 제게 무슨 할 말이 있는 듯 머뭇머뭇거리기에 할 말이 있으면 해 보라고 했더니, 판사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돼요? 라고 묻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지 않아도 일어서기에 아쉬움이 많았던 저는 남아서 그 아이와 이야기를 나누기로 했습니다. 판사가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인지도 설명해 주고, 학교생활 열심히 하고 책도 많이 읽으라고 해 줘야지......정도 생각을 갖구요.
그런데, 시간이 흐르자 한 아이씩, 한 아이씩 제 주변에 아이들이 둘러앉아 이것저것 물어보고, 또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서로 다투어 저에게 이것저것 물어보기 시작하는데, 이 어린 여자아이들이 무엇을 판사에게 물어볼 것 같으세요?
사채업자가 깡패를 보내서 돈 갚으라고 협박할 때 어떻게 해야 돼요?
교통사고로 사람을 치어 다치게 했는데, 물어 줄 돈이 없으면 몇 년이나 감옥에 있어야 해요?
사업을 하다가 부도를 내서 감옥에 가면 빚 다 갚을 때까지는 못 나오는 건가요?
저는 어리석게도 이 집에 흐르는 안온한 분위기와 밝은 아이들의 모습만 겉으로 보고는 이 아이들이 짊어지고 있는 어느 어른들보다 가혹한 삶의 무게를 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 아이들에게서 가정을, 엄마 아빠를 빼앗아 간 것은 그 무엇도 아닌 바로 돈이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신용불량자가 400만이라고 쉽게 숫자로 이야기하지만, 그 한 명 한 명은 숫자가 아니고 피가 흐르는‘사람’이고, 그 한 사람 한 사람에게는 가정이 있고, 부모형제가 있고 아이들이 있습니다. 400만 명이 신용불량자면, 최소한 400만 가정이 빚으로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이며, 그 중 상당한 수의 가정은 빚을 감당하지 못하고 파괴되어 아이들이 가정의 보호를 받지 못한 채 거친 세상에 던져지고 있는 것입니다.
정신 없이 아이들의 질문에 가능한 한 알기 쉽게 답해 주려고 애쓰고 있는데, 아이들 중 가장 어려보이는 네 살 정도의 아이가 제 주변을 맴돌더니 괜히 제 어깨도 만지작거리고, 눈이 마주치면 웃음을 보이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언니들이 하는 이야기 같은 것을 알아들을 나이도 아닌 이 꼬마아가씨는, 여자들만 사는 이 집에서 기억조차 희미해지는 아빠의 모습을 제게서 찾았던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제가 재작년 법원회보에 제 딸아이 육아이야기를 썼었는데 기억하세요? 이제 일곱 살, 다섯 살인 두 딸아이를 키우는 아빠로서, 이 예쁜 꼬마아가씨도 안 쓰럽지만, 이 아이의 아빠 가슴은 어떨지 생각하니 견디기 힘들었습니다.
맘속으로는 억장이 무너지고 있었지만, 값싼 감상과 동정 따위는 필요 없어 보일 만큼 아이들이 자기들이 짊어지고 있는 운명에 대하여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있었기에, 저는 이들을 아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어른에게 법률상담하듯이 제가 아는 것들을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그래도, 다행히 이 얘기 저 얘기 하다보니 헤어지기 전에는 보다 진지한 토론도 잠시나마 할 수 있었습니다.
- 동방신기에서 누가 제일 멋진 것 같니? 아저씨는 믹키유천이 모자 쓴 스타일이 멋지더라.
- 에이, 아저씨. 유노윤호가 최고예요.
3. 모럴 해저드?
아이들과 이야기하던 중, 파산면책제도에 대하여 제가 잠시 이야기해 주었더니 한 아이가 그러더군요. 에이, 그런게 있으면 누가 빚을 갚겠어요?
세상은 참 재미있습니다. 빚 때문에 남들과 다른 어린 시절을 보내고 있는 이 순진한 아이가, 사람들이 빚 안갚을까봐 걱정하는 유식한 어른들과 똑같은 말을 합니다. 저 말을 유식하게 하면 바로‘모럴 해저드’아닙니까.
유식한 말들을 실제 사람의 삶과 연관지어 보려면 통역이 필요합니다. 예를 들어볼까요? ‘소비의 하방경직성’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소득이 줄어든 주제에 종전 소비수준을 유지하려는 성향이 강하여 빚이 늘어난다는 거죠. 그런데 대부분의 평범한 사람들이 경제적으로 어려워지면서도 유지하려 하는 종전 소비라는 것은 실제로 어떤 것들일까요?
그것은 아이들이 너무나 좋아하는 친구들과 선생님이 있는 유치원을 그만두게 하느냐이고, 남들 고액과외 시킬 때 아이들 동네 학원이라도 보내며 공부 잘해서 나중에는 부모보다 잘 살기를 바래 왔는데, 그나마 그만두게 하느냐이고, 노환으로 병원 출입이 잦으신 고향 부모님께 병원비와 용돈 보태시라고 보내던 10만 원을 계속 보내느냐 마느냐의 문제입니다.
하물며 우리보다 한참 잘사는 미국사람들도 200만 명 가까이 파산신청을 한답니다. 하버드 법대의 엘리자베스 워런 교수 모녀가 쓴 ‘맞벌이의 함정’이라는 책을 보면, 특히 맞벌이하는 중산층 파산이 심각해지고 있답니다.
도시치안이 불안해지고 공교육이 부실화되자, 비교적 안전하고 좋은 학교가 있는 주택가 집값이 천정부지로 뛰고, 맞벌이에 필수인 유아보육비를 비롯 유치원비, 애들 교육비, 의료비가 모두 높아져, 사치는커녕 부부가 뼈빠지게 일해서 자식은 남들만큼 교육시켜 보려고 지출하는 돈이 소득의 거의 대부분이어서 미래의 위험에 대비할 여유자금이라고는 없고. 아슬아슬하게 꾸려가는 이 생활이 실업, 질병 등 충격에 쉽게 파산지경에 몰리고 만다는 것입니다.
남의 이야기 같으십니까?
서울중앙지방법원의 근래 면책율은 99%입니다. 판사들이 우표에 소인 찍듯이 사건만 들어오면 곧바로 면책 도장 찍어주고 있냐구요?
얼마 전에 법원장님께서 판사들에게 저녁을 사주시면서 건의사항이 있으면 하라시길래, 제가 그랬습니다. 법원건물은 전기배선이 안 좋은 것 같다. 밤 11시가 되어도 밤 12시가 되어도 도통 불이 꺼지질 않는다. 좀 수리해 주셨으면 좋겠다. 그렇게 심리해서 면책한 비율이 99%입니다. 주역을 공부해서 파산자가 동남방에 금항아리를 묻어 놓았는지 풀어보아야 하나요?
아직까지는 파산자들은 대부분 세 가지 종류입니다. 빠듯하게 먹고 살다가 실업, 질병 등으로 감당할 수 없게 된 사람들, 먹고살아 보려고 이것저것 해 보다가 망해버린 사람들, 자기 앞가림만 겨우 하는 처지에 부모형제, 친지의 빚보증을 어쩔 수 없이 섰다가 같이 망한 사람들.
도대체‘모럴 해저드’의 표본인 남의 돈으로 흥청망청 신나게 쓰고는 자기 먹을 것은 다 숨겨 놓고 호화생활을 하며 파산 신청하는 사람들은 어디에 가야 찾을 수 있는 것입니까. 골프장 ‘해저드’ 안에 숨어 있나요?
4. 마법책
아이들과 만났을 때, 한 판사님이 보여준 마술 중 아이들이 가장 좋아한 것은 마술그림책이었습니다. 한 번 스르륵 넘길 때는 아무것도 없다가, 다시 한 번 처음부터 넘기니 예쁜 그림이 나타나고, 또 다시 처음부터 넘기니 색깔이 칠해져 있고. 저도 호그와트에라도 가서 진짜 마술을 배워왔으면 좋겠습니다.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그 아이들에게 환하게 웃는 엄마아빠가, 친구들 집같은 평범한 가정이, 작지만 예쁘게 꾸민 자기 방 한 칸이 나타나도록. 그리고 빚갚으라며 아빠 멱살을 잡던 험상궂은 아저씨의 기억도, 엄마가 보고 싶어 남몰래 베개를 적시고 마는 눈물도, 소풍때 엄마아빠와 온 학교친구들 곁에서 느낀 부러움도 영원히 사라지도록 말이죠.
하지만, 평범한 머글인 판사들이 할 수 있는 마법은 한 가지뿐입니다. 손에 골무를 끼고 종일 기록을 뒤적이다가, 컴퓨터 자판을 눌러 주문을 외웁니다.
주 문「파산자를 면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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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버투데이 2005-05-30] 정용상 기자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