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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칼럼] IAEA 음모론… 75년 전에도 그랬다
노정태 경제사회연구원 전문위원·철학
입력 2023.07.17. 03:20업데이트 2023.07.17. 08:40
https://www.chosun.com/opinion/chosun_column/2023/07/17/FAKAJOPXR5FMZFMFL7KVMGIFY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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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제헌의회 선거를 보라
UN이 승인하고 주도한 선거
좌파는 “美 꼭두각시”라며 거부
IAEA는 UN 산하 독립 기구
못 믿겠다며 탈퇴한 북한도
日 정부에 매수됐다는 음모론자도
같은 세계관 사람들 아닌가
라파엘 그로시 국제원자력기구(IAEA) 사무총장이 지난 9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더불어민주당 후쿠시마 원전오염수 해양투기저지 대책위원회와의 면담에서 생각에 잠겨 있다./뉴스1
“(IAEA) 보고서 내용이 근거도 없고 증거도 없는 맹탕이라고 말해야 한다.” 지난 5일, IAEA 그로시 사무총장 방한을 앞두고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윤석열 대통령을 향해 내놓은 메시지다.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IAEA 불신론’이다.
이런 생각은 이 대표 혼자만의 것이 아니다. 야권 정치인과 지지층 사이에 두루 퍼져 있다. 한 야권 지지 인터넷 언론은 ‘일본 정부가 IAEA를 매수했다’는 식의 음모론을 유포하는 기자회견을 열기까지 했다. 일본과 IAEA가 ‘짜고 치는 고스톱’을 하고 있다는 발언도 나왔다.
이들은 왜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선동을 계속해 나가는 걸까? 과학적 사실만 놓고 보면 중학교 2학년 학생도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이들은 설득되지 않는다. 이것은 과학의 문제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다. 특정 정치 세력이 공유하는 세계관의 문제가 바닥에 깔려 있는 것이다.
잠시 대한민국 헌법 전문을 펼쳐보자.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고 명시되어 있다. 여기서 핵심 어휘는 ‘대한국민’이다. 대한‘민국’이 존재하기 전, 이미 대한‘국민’이라는 주권자들이 있었고, 그들이 새로운 나라를 만들어냈다는 건국 서사다.
3·1 운동이 발생하게 된 배경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국제연합의 전신인 국제연맹의 창시자였던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이 민족자결주의를 주창했다. 각 민족은 자신의 정치적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권리가 있으며, 이 권리는 다른 민족의 간섭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이다.
1차 세계대전의 승전국이자 세계 초강대국인 미국이 새로운 국제 질서를 제시하고 있었다. 이것은 천자의 나라 중국을 중심으로 주변의 다른 나라들을 조공의 대상으로 삼는 중국식 국제 질서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었다.
베스트팔렌 조약 이후 형성된 근대적 주권국가 체계를 전 세계에 동등하게 적용해야 한다는 원칙론에 식민지 조선인들은 즉각 호응했다. 3·1 운동은 단지 일제 치하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것이 아니었다. 일본의 지배에서 벗어나, 중국의 망령을 떨쳐내고, 미국이 제시하는 새로운 국제 질서에 동참하고자 하는 거대한 몸부림이었다.
대한민국은 그 출발부터 새로운 국제질서의 산물이었던 셈이다. 이는 대한국민이 대한민국을 형성해온 역사를 돌이켜보면 더할 나위 없이 분명하다. 한국이라는 나라는 새로운 국제질서가 만들어낸 최초이자 최고의 작품인 것이다.
해방된 한반도에 단일 정부를 수립하기 위해 두 차례에 걸쳐 열린 미소공동위원회는 결국 실패로 귀결되었다. 미국은 1947년 10월 유엔 총회에 한반도 문제를 상정했다. 그리하여 호주, 캐나다, 중국, 엘살바도르, 프랑스, 인도, 필리핀, 시리아 등 8국 대표로 구성된 유엔한국임시위원단(UNTCOK)이 1948년 1월 9일 서울에 입국했다.
단독선거를 통해 새로운 정부를 이루는 길은 결코 평탄하지 않았다. 좌파 계열의 정치, 사회 단체들은 선거 보이콧을 넘어 폭력과 테러로 새로운 정부 수립을 막으려 들었다.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이 38선 이북으로 가지 못한 건 소련의 반대 때문이었지만, 유엔은 그저 미국의 꼭두각시일 뿐이라며, 그러니 분단의 책임은 미국에 있다고 억지를 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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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이 벌어지자 유엔 회원국 중 21국이 군대 파견을 신청했고 그중 16국이 실제로 병력을 보냈다. 반대로 북한의 편에서 전쟁을 한 나라는 소련과 중국뿐이었다. 유엔의 선거로 만들어진 나라 대한민국은 유엔의 전쟁으로 지켜낸 나라이기도 했던 것이다.
오늘날의 현실로 돌아와 보자. IAEA는 원자력의 군사적 이용을 막고 평화적 이용을 장려하는 국제연합 산하 독립기구다. 대한민국은 1956년부터 창설 회원국으로 가입해 있다.
반면 북한은 IAEA와 동전의 양면을 이루는 NPT를 향해 “비확산체제가 오로지 미국의 입장만을 대변해 왔으며 비핵국가들에 대한 간섭 수단으로 이 조약기구를 활용하고 있다”며 불만을 터뜨리더니, 결국 NPT와 IAEA에서 모두 탈퇴해버렸다.
IAEA를 못 믿겠다고 우기는 사람들을 보면 문득 궁금해진다. 그들은 유엔이 주도한 제헌 국회의원 선거를 어떻게 생각할까? IAEA가 일본 정부에 매수되었다는 음모론과, 유엔이 미국의 꼭두각시이며 대한민국에 ‘정통성’이 없다고 비난하는 ‘해전사’(해방전후사의 인식) 세계관을, 별개의 것으로 볼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