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면장!” 나의 고향인 충청남도 청양에 사람들은 우리 아버님을 여태껏 이 면장이라고 부른다. 면장을 하신지 40년이 지나지만 아직도 “이 면장”이시다. 아버님도 그렇게 불리는 것을 그다지 싫어하시지 않으신다. 내가 서울에서 어쩌다가 고향사람을 만나면 ‘아버지께서는 잘 계세요?’ 하고 묻는다. ‘청양, 이 면장님 아세요? 제가 그 집 셋째 아들입니다’ 하면 ‘알다 마다 잘 알지 얘기를 들었지 아버님 성격을 닮아서 정치를 잘 할거야’ 하곤 한다.
우리 아버님은 일본 유학할 때를 빼고는 고향을 떠나서 살아 본 적이 없다. 지금까지 살고 계신 집은 팔십 년 가까이 된 일본식 함석집인데 너무 낡아서 보기가 흉할 정도다. 내가 어렸을 적에는 우리 동네에서 우리 집이 제일 크고 좋은 편이었다. 기와집이 몇 채 있었고 나머지는 모두 초가집들뿐이었다.
세월이 30~40년 지나다 보니 다른 집들은 대개 새로 지었다. 초가집은 한 채도 없다. 아파트도 생겼고 열립주택도 생겼다. 그런데 우리 집은 40년 된 그대로이다. 명절 때 고향에 와서 친구들을 만나면 ‘해찬아! 아버지 집이나 새로 지어드려라. 자식들이 서울 가서 잘 되었으면서 집이 그게 뭐냐? 어떤 날은 네 아버님께서 지붕에 올라가셔서 지붕을 고치시더라.‘ 하면서 핀잔을 주었다. 나 역시 친구들의 말이 없었더라도 당연히 그렇게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아버님께 한번 말씀을 드렸다. 집이 너무 낡아 위험하고 불편하니 조그맣게 새로 짓자고, 그러나 아버님께서는 요지부동이시다. ‘그럴 필요 없다. 네 어머니 불편하지 않게 부엌에도 수도를 연결시켰고, 화장실도 수세식으로 바꾸었다. 생활하는데 불편한 게 없으면 되었지 무엇 하러 새로 짓느냐’ 하시고는 화제를 아예 다른 곳으로 돌려 버리신다. 우리 형제들도 더 이상 어쩔 수가 없다. 당신께서 원체 완강하신데다가, 혹시 새로운 환경에 아버님께서 적응하지 못하시면 어쩌나 하는 우려도 들어 더 이상 얘기를 하지 못한다. 어머님께서는 약간 생각이 없지 않은 것 같은 표정을 하시는데 아버님의 성격을 잘 아시기 때문에 말씀을 안 하신다. 그걸로 집을 새로 짓는 것은 없었던 일로 끝이 난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아버님께서 면장을 하시면서 겪었던 얘기를 자주 들었다. 아버님이 자식들에게 들려주는 유일한 자랑거리였다. 아버님은 8.15해방을 고향에서 맞으셨는데 갑자기 다가온 해방이라서 면장을 할 만한 사람이 마땅치 않아 아버님이 면장을 하게 되셨다.
일본 유학을 하고 생활하다가 대동아전쟁이 극성을 부리자 할머니께서 무조건 고향으로 들어오라고 엄명하시는 바람에 돌아오셨다. 당시 충청도 두메산골인 청양에는 일본 유학까지 한 사람이 일할 자리가 전혀 없는 곳이었다. 그저 군서기 정도였다. 아버님은 어머니를 모시면서 군서기 일하셨다. 서른 살의 젊은 나이에서 서울이나 아니면 대도시로 가셨을 법한데 아버님께서는 그저 고향에 머무르셨다. 군서기를 하다가 해방이 되었는데 면장을 시킬 만한 사람이 별로 없었다고 한다. 면장을 하려면 글씨도 잘 쓰고 한문도 잘 읽고 공문서를 작성할 줄도 알고 해야 하는데 당시에는 그만한 사람들이 별로 없었다. 그래서 나온 말이 “알아야 면장을 하지”였다. 면장자리는 생겼는데 그 자리에 맞는 사람이 없는 것이다. 동네 유지들이 있었지만 일자무식이라는 말이 있듯이 글자는 한글이든 한문이든 잘 모르니 면장을 못 시키는 것이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아버님께서 서른 두 살 젊은 나이에 면장을 맡게 되셨다. 해방이 되어 일본에서 같이 공부한 친구들은 대부분 서울에 가서 관직을 하나씩 맡았는데 아버님은 고향에서 면장 직을 맡으신 것이다. 아버님 성격에 딱 맞았다는 것이다. 본디 성품이 번잡한 것을 싫어하시는 데다가 이승만 정권을 탐탁스럽게 여기지 않으셨기 때문에 정부수립 이후에도 고향을 떠나 보신 적이 없다. 해방 후부터 4.19혁명이 날 때까지 10년 이상 면장을 하셨는데, 처음 임명직 면장 보다는 자유당 말기에 야당 후보로 선출된 면장을 했을 때가 더 좋았다 말씀하셨다. 자유당 말기에 실시된 지방자치제 선거에서 집권당이 갖가지 부정선거를 했는데도 몰표를 얻어서 당선된 얘기 시작되면 끝이 없었다. 나는 아직도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다.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 여섯 살 때쯤이다. 아버님께서는 청양시장 한쪽에 면 공관을 세우셨다. 면 공관 상량식 날이었다. 아버님은 온 식구들을 데리고 가셔서 고사를 지냈다. 커다란 돼지 머리를 상위에 올려놓고 큰절을 하시던 아버님의 진지한 모를 표정이 지금도 선하다. 면 공관이 세워지자 그 곳에서 영화를 자주 상영했다. 새 영화가 들어오면 시발택시가 요란하게 선전을 하면서 울 동네를 돌아 다녔다. ‘한국영화, 시네마스코프, 총천연색 주연에 허장강, 김승호... ’ 마이크로 선전하면서 전단을 뿌리고 다녔다. 동네 꼬마들은 차 뒤를 쫓아 다니는 그것만으로도 신나고 재미있는 놀이였다. 당시 청양 사람들에게는 면 공관이 유일한 문화 공간이었다.
1991년 봄 국회에서 지방자치법 처리할 때 제일 먼저 떠오른 생각이 아버님 얘기였다. 아버님은 자유당 때부터 지자제를 계속 실시했으면 지금은 훨씬 나아졌을 거라는 말씀이었다. 일본이 지방자치제를 일찍부터 잘해왔기 때에 저 만큼 발전했다는 말씀이셨다.
아버님께서는 면장 일에 아주 충실하셨다. 자전거를 타고 동네 곳곳을 다니시는 게 업무이자 취미였고 운동이었다. 퇴근해서 집에 계시다가도 비가 쏟아지면 퍼런 군용우비를 입으시고 자전거를 타고 동네를 한 바퀴 둘러보시곤 했다. 큰 냇가에 있는 뚝 방에 이상이 없는지 살펴보시고는 비가 그만 그쳐야 할 텐데 하시면서 걱정을 하시곤 했다.
아버님의 면장 이야기도 나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91년 입법 당시에 당시 여당인 민자당에서는 가능한 한 지자제를 안 하려고 했다. 당시 내무부에서도 지자제를 하면 금방 나라가 망할 것처럼 주장했다. 안기부에서도 외국에서는 지자제를 거의 실시하지 않는 것처럼 외국 자료를 왜곡하기도 했다. 나는 당시에 원내 부총무 일을 하면서 김원기 총수와 김대중 총재께 지자제를 시작하는 것이 다른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당시에 김영삼 민주당총재는 중간평가를 강하게 주장했는데 평민당의 김대중 총재를 중간 평가 실익이 없다고 판단하시고, 대신 지자제를 하자는 입장이었다. 그때 지방자치법이 만들어져 의회가 먼저 구성되고 95년에 단체장 선거까지 실시되어 지자체가 인정되었다. 지자제 실시 후에 일선의 읍면동에서 주민에게 제공하는 서비스가 많이 좋아져 가고 있는 것을 보면서 입법의 의미를 다시 느낀다. 물론 부작용이 어느 정도 있기는 하지만 지자제 이후에 이른바 관(官)의 모습이 달라지고 있는 것이다.
내가 보기에 우리 아버님에게는 시골 면장이 딱 맞는 직책이셨던 것 같다. 성품이 온화하면서 어떤 일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시기에는 적절하지 않으셨다. 단. 겁은 많으신 편이셔서 다른 사람들처럼 독립운동을 하시지도 못하셨다. 그렇다고 일제에 굴복하거나 붙어 친일 하기도 싫으셨던 것 같다. 아버님의 학교졸업앨범을 보면 수많은 일본이름 가운데에 한국이름이 서너 명 있다. 그 중의 하나가 아버님 이름 李寅鎔이다. 아버님께서는 창씨개명을 끝까지 거부하셨다. 내가 초등하교 때 李寅鎔 이라고 아버님 이름을 앨범에서 보았는데 그때는 그 의미를 잘 알지 못했다. 아버님도 구태여 그 의미를 자식들에게 얘기해 주지 않으셨다.
나중에 커서 역사를 배워 사회생활을 하면서 그 의미를 다시금 깨달았다. 왜정 치하에서 창씨개명을 하지 않고는 사회에서 출세하기가 쉽지 않았을 터인데도 그렇게 하신 것을 보면 마음은 단단하셨던 것 같다. 독립운동을 할 용기는 없지만 출세하려고 성씨까지 바꾸지는 않겠다는 정도, 꼭 그 만큼이 아버님의 성품에 맞는 수준이었다.
아버님께서는 동경에서 공부하시던 시절을 얘기하시며 당시 동경 지식인들의 세태를 들려주시곤 했다. 보수적인 생각을 하는 사람들은 독립운동에 별로 관심을 갖지 않고 고시공부에 열중했고, 진보적인 생각을 하는 사람들은 비분강개하면서 토론을 많이 했다고 한다. 양쪽 모두 지주 집 자식들은 기생집에 자주 드나들었다고 한다. 어떤 때에는 고학하는 친구들한테 돈을 빌려 쓰고는 갚지도 않으면서 독립운동에 쓴 것처럼 둘러대는 사람들도 있었다고 하시면서 ‘다 사람 나름이라고’하였다. 아버님의 눈에는 그들이 별로 탐탁스럽게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그런지 아버님은 여태까지도 지식인들끼리 모여서 하는 일은 그다지 신뢰하지 않으시는 편이다. 거창한 명분과 소리를 내세우며 살아가는 잣대가 그에 따라가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버님께서는 어떤 사상이나 주의가 중요한게 아니라, 어떻게 사느냐가 중요하다는 얘기를 자주하셨다.
6.25전쟁 때도 목숨을 건질 수 있었던 것은 주민들한테 인심을 잃지 않았기 때문 이였다는 것이다. 6.25 전쟁이 나고 인민군이 쳐들어오자 관직에 있었던 사람은 대부분 도망을 갔는데 아버님은 가족들만 인근에 있는 산골로 피신시키고 당신은 피난을 가지 않으셨다. 인민군이 청양을 점령할 때 인민재판을 하고 납북을 해 가는데, 아버님께서는 주민들이 옹호해주었기 때문에 전혀 화를 입지 않으셨다. 청양군 인민위원장이 ‘이 면장은 면인 들의 신망을 받은 면장 이라고 변호해주어 인민군들도 어쩔 수가 없었다고 한다. 아버님은 인민군 책임자에게 러시아 작가 솔로호프의’개척되는 처녀지‘ 라는 소설 이야기를 해주며 주민들에게 만행을 부리지 말라고 오히려 타일러 보냈다는 얘기를 가끔 하시곤 했다. 일본서 공부 할 때 읽은 러시아 소설이 아버님의 목숨을 건지는데 한 몫을 한 것이다. 6.25 전쟁이 끝나고 인민 위원회에서 일했던 사람들이 북으로 도망간 뒤에 그 가족이나 친인척들은 고향에 살면서 여러 가지로 시달렸다.
좌일 집안으로 찍힌 집 자녀들은 취직을 하고 싶어도 신원보증을 서주는 사람이 없었다. 그럴 때 그 사람들이 유일하게 의지할 사람이 이 면장 이었다. 아버님은 ‘그 자식들이 무슨 죄가 있느냐’ 며 기꺼이 신원 보증도 해주고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상담을 해주시곤 했다.
언제나 아버님의 좌우명은 ‘경우 바르게 살아라’ 였다. 아버님은 당신이 80평생 무엇에 집착하거나 얽매여 살아오지 않으셨기 때문에 자식들에게도 무엇을 특별히 요구하는 법이 거의 없었다. 어찌 보면 너무 무관심한 게 아닌가 하고 느껴질 정도로 자식들일에 관여하지 않으셨다. 대학까지는 공부 시켜줄 테니 그 위로 나머지는 스스로 알아서 하라는 방침이었다. 나는 학교 다니면서 ‘공부 좀 해라’는 말을 한번도 들어 본 적이 없다.
초등학교 6학년 때의 일이다. 청양 시골 초등학교에서 서울에 있는 중학교에 진학하려면 공부를 꽤 잘하고 열심히 해야 했다. 대전 중학교나 서울의 유명한 학교에 가려면 전교에서 1~2등을 해야 했다. 나는 형들이 서울에 있어서 서울에 있는 중학교를 가려고 스스로 공부를 열심히 했다. 하루는 밤 열두시가 되도록 수련장의 문제를 풀고 있는데 아버님은 잠자리에 누워계시다 일어나셔서 전등 높이를 낮게 조절해주시고는 ‘웬만큼 하고 자거라’하시고는 다시 주무시는 것이었다. 자식들이 하는 일을 도와주는 점도 그것이 아버님의 입장이었다. 또 하루는 내가 동네 친구들하고 놀다가 크게 싸운 적이 있었다. 그 바람에 옷이 찢어지고 흙탕물에 젖고 얼굴에는 피가 나고 엉망이었다. 그 꼴로 집에 들어가다 아버님 눈에 띄었다. 그러더니 ‘너 그게 무슨 꼴이니’ 하시기에 나는 속으로 되게 혼나겠구나 생각하면서 “애들하고 놀다가 그랬어요” 했더니 아버님은 더 이상 아무 말씀도 안 하시고는 볼 일을 보러 나가신다. 혹시 밤에 돌아오셔서 무어라고 하실까 봐 나는 대충 씻고, 옷을 갈아입고는 일찍부터 잠을 자버렸다. 아버님께서는 그 후에도 단 한번 말씀이 없으셨다.
중학교 때의 일이다. 나는 청양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의 덕수 중학교에 진학했다. 시골 초등학교에서는 공부를 꽤 잘했는데 서울 덕수 중학교에는 커트라인 꼴찌로 입학했다. 서울과 시골은 그 만큼 차원이 달랐다. 그때의 경험이 그 후에 내가 일하는데 은연중에 영향을 미친다. 우물 안 개구리라는 말이 있듯이 자기가 속한 세계가 세상의 전부가 아니다. 단 다른 세계, 더 차원이 높은 세계가 있다는 생각을 버리지 않는다.
나는 아버님 곁을 떠나 형제들끼리 서울에서 생활하고 공부했기 때문에 방학만하면 그날은 시골에 갔다. 방학하는 날은 아예 책가방과 옷 가방을 갖고 학교에 갔다가 종례가 끝나면 곧바로 서울역에서 장향선 열차를 탔다. 예산까지 기차를 타고 가서 거기서 청양 가는 버스를 갈아탔다. 기차로 세 시간, 버스 타고 1시간 반 거의 다섯 시간 가까이 걸렸다. 지금은 직행 고속버스가 생겨서 세 시간도 안 걸리지만 당시에는 한나절을 가야만 했다.
한번은 학교 성적표가 아주 좋았기에 집에 도착하자마자 성적표부터 꺼내 아버님께 드렸더니, 아버님은 한번 쭉 훑어보시고는 ‘통학 하는데 버스 복잡하지 않더냐?’ 고 엉뚱한 질문을 하셨다. 기대 밖의 질문이었다. 학교 성적을 물을 줄 알았는데 나는 심통이 나고 어이가 없어서 ‘버스는요. 버스는 텅텅 비어서 다녀요. 손실이 별로 없어요.’ 라고 퉁명스럽게 대답하고는 ‘버스가 복잡하기는 뭐가 복잡해’ 하고 속으로 중얼거리며 밖으로 놀러 나가 버렸다.
그러시던 아버님께서 나에게 꼭 한번 당신의 의사를 분명히 드러내 보이신 적이 있었다. 고등학교 3학년 때의 일이다. 대학입시 준비에 여념이 없을 때인데 수학 점수가 아주 나빴다. 한 자리 숫자를 넘기지 못했다. 다른 과목은 최상위권에 속하는데 수학이 엉망이라서 전체 석차가 뒤로 밀리곤 했다. 수학과목 하나만 보충하면 되겠다 싶어 하루는 결석계를 내고 시골에 갔다. 아버님 어머님한테 말씀 드려 수학과목만 과외공부를 하려고 어머님께 수학 과외를 해야겠으니 돈 좀 보내주시라고 말씀을 드렸다. 좀처럼 무슨 부탁을 안 하는 자식이었는지라 어머님은 그렇게 해보자고 선뜻 승낙하셨다. 그런데 아버님께서 일언지하에 단호하게 거절하셨다. ‘집안형편이 너를 과외 공부 시킬 정도가 되지도 못하거니와, 설령이 형편이 된다 해도 과외공부를 할 필요는 없다. 네 스스로 깨치고 터득해서 공부를 해나가야지 과외 공부를 해야 할 정도면 그건 별 소용이 없다. 사회에 나가서도 별 쓸모가 없다. 올라가서 네 스스로 열심히 하고 모르면 형들한테 물어봐라’ 그걸로 이상 끝이었다. 나는 하는 수 없이 서울로 돌아 왔다. 돌아오는 기차 속에서 괜히 하루만 날렸다는 생각, 그리고 대학입시 시험 수학공부를 형들이 어떻게 도와준단 말인가. 참 뭘 모르셔, 하면서 서울에 왔다. 그 후 수학점수를 올리려고 꽤나 열심히 했지만 난 성과가 없었다. 다행히 서울공대에 합격하긴 했지만 수학을 모르니 대학 공부를 따라가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서 이듬해 문리대 사회학과를 시험을 다시 치게 되었다. 정치하는데도 사회학과가 훨씬 도움이 되니 결과적으로는 잘된 셈이었다. 세용지마라고나 할까
내가 결혼을 할 때도 아버님께서는 아무런 의견이 없으셨다. 대학까지 보냈으니 나머지는 네가 알아서 하라는 입장 이였다. 데모를 하든, 취직을 하든, 결혼을 하든
결혼을 해야 하겠다고 말씀을 드렸더니 사돈 될 집이 무엇을 하는 집인지, 형편이 어떠한지에 전혀 관심이 없으셨다. 단지 형제가 몇이고 건강하냐는 말씀만 하셨다. 이남 이녀에 막내딸이고, 고향은 울산이고, 학교는 이대 사회학과를 졸업했다고 말씀 드렸더니 ‘네가 평생 함께 살 사람이니 네 뜻대로 해라. 경상도 여자들은 음식 솜씨가..’ 하시면서 말꼬리를 흐리셨다. 그것뿐이었다.
결혼을 하고 나서 내 아내는 시아버님의 아주 다정한 ‘말 벗’이 되었다. 아내는 시아버님의 담백하고 가식 없는 삶을 매우 좋아했고 시아버지는 ‘유족한 집에서 살다가 가난한 집에 시집온 며느리가 데모만 하고 다니는 남편 때문에 고생이 작심하구나’ 하는 눈빛으로 대하셨다. 가끔 아내와 함께 시골에 가면 며느리가 타드리는 커피 한잔에 아주 만족스러운 표정이시다. 아내는 서울에서 있었던 일을 미주알고주알 시아버지께 말씀 드린다. 나는 그냥 앉아 있기만 하면 된다. 어쩌다 상활 설정이 틀리면 그 대목만 정정해준다.
그렇게 다정한 말벗이었던 아내가 시아버님한테 꾸지람을 들은 적이 있다. 내가 감옥살이 하는 동안 딸 현주를 시골에 맡겨 키웠기 때문에 아내가 자주 내려갔다.
어느 겨울날 아이 기저귀를 빨아서 부엌에 걸었는데 아버님은 그것을 보시고는 ‘기저귀는 마당에 내다 걸어야지 부엌에 거는 게 아니다’ 라면서 단호한 어조로 말씀 하시더라는 것이다. 그렇게 다정하셨던 분께서 그 대목에서는 마치 판사처럼 말씀하신 것이다.
결혼 한지 20년, 아내가 시아버지를 만난 지 20년, 그 20년 동안 단 한번도 섭섭하거나 불편하거나, 거북스러운 때가 없었다. 현주가 이제 우리나이로 20살이 되었는데 현주는 할아버지를 보면 편안한 마음을 갖는다. 모녀가 하는 얘기를 들어 보면 시아버지 할아버지에 대한 느낌이 거의 같다. 현주는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시면 정말 크게 울 것 같다고 한다.
어렸을 때 할아버지가 자전거에 태우고 냇가의 뚝 방을 돌던 사진을 보면 정말 그런 느낌이 든다. 세 살짜리 손녀를 위해 자전거에 안장을 별도로 만들어 놓고 시골길을 조심스럽게 돌아오시는 할아버지의 표정에서 한가로움과 편안함을 느낀다. 그래서 현주는 요즘에도 할아버지에 관련된 심부름을 시키면 그것은 거절하는 법이 없다. 다른 일은 좀처럼 시켜도 안 하는데 ‘할아버지 자리 펴 드려라. 차 끓여 와라’ 해도 두말없이 벌떡 일어난다. 마음이 통하는 손녀와 할아버지다.
요즘에는 현주도 그렇고 아내도 할아버지가 걱정이다. 100살까지는 충분하실 것 같더니 지난해부터 건강이 눈에 띄게 약해지시기 시작했다. 겨울에 한번 넘어지신 뒤로 그러하다. 그래서 병원에 가서 진찰을 자주 하시고, 평생 안 드시던 한약재도 대려 드신다.
말씀하시는 것도 예전 같지 않다. 판단력은 비슷하신데 사실 자체를 혼돈하거나, 돈의 단위를 틀리신다. 자유당 시절의 물가를 말씀 하실 때도 가끔 있다.
올해 86세 이시니 그럴 법도 하다. 그 동안 원체 건강하시고, 마음 편하셨다가 요즘에 건강이 나빠지시니 새삼스럽게 걱정이 되는 것이다.
우리 아버지에 대한 생각과 느낌을 정리하면서 나 자신이 아버지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는 것을 절감한다. 개인적인 사생활에서는 은연중에 영향을 미쳤지만 사회적인 활동에서는 보다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내가 대학에 다니며 데모 할 때도 별 말씀이 없으셨다. 그러나 입장은 분명하셨다. 아버님은 학생들이 데모를 안 할 수 없는 세상이라고 판단하고 계셨다.
1972년 가을, 갑자기 10월 유신이 선포되고 학교가 휴교했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조치였다. 학교가 문을 닫아 나는 고향에 갔더니 아버님께서는 ‘학생들은 다 고향으로 갔니? 휴교가 끝나면 학생들이 어떻게 할 것 같으냐?’ 고 물으시는 것이었다. 거두절미하게 하시는 말씀에 나는 크게 당황했다. 유신이 옳지 않다고 생각은 했지만, 그에 대응할 것까지 생각하지는 못하고 있었다. ‘휴교했다고 다들 고향으로 갔단 말이냐!’ 하는 물음으로 들렸다. 만약 옆에 계시던 고모님이 (아버님의 누님이신데 4.19때 외아들을 잃고 우리 집 근처에 혼자 살고 계셨다.) ‘기왕에 내려왔으니 며칠 묵고 올라가라’고 하시지 않았으면 그 길로 다시 상경해야 할 판이었다. 아버님은 당신 스스로 무엇을 하지는 않지만 어느 때 누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직관적으로 느끼시는 것이다. 내가 약 20년 동안 학생운동 재야운동을 하면서도 부모님이나 집안형제들에게 심리적으로 큰 부담을 느끼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그러한 아버님의 성품과 생각이 집안에 깔려 있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친구들이 부모님들이 말리고 형제들에게 피해를 주기 때문에 민주화 운동을 하면서 가족들에게 죄를 짓는 것 같은 심정으로 했다. 그 부담이 여간 큰 게 아니다.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친구들이 많았다. 대부분이 그런 어려움을 이겨가며 싸우는데 나는 부모 형제의 도움을 받아가며 했으니 운동의 어려운 맛을 훨씬 덜 겪은 셈이다.
74년 4월 민청학련 사건으로 처음 구속되던 날이 아버님의 환갑날이었다. 고향에서 환갑잔치를 해야 하는데 아버님은 ‘요즘에 환갑잔치 하는 건 촌스러운 짓’ 이라고 하시면서 서울을 오시는 바람에 큰 형 집에서 식구들끼리 모여 아침을 같이 하도록 되어 있었다. 나는 그 날 동숭동에 있었던 서울 문리대 교정에서 시위를 하다 붙잡혀 동대문 경찰서에 붙잡혀 갔다. 효도는커녕 집안 분위기만 망친 셈이다.
구속되어 재판을 받는데 서대문 구치소를 한번 면회를 오시고, 재판정에 한번 와 보시고는 별거 아니라는 듯이 그 후에는 면회 하러 오시지도 않으셨다. 대전 교도소에서 징역을 살고 있는데 옆서 한 장이 날아 왔다. ‘추운 겨울에 동상 걸리지 않도록 해라. 윗사람들 공경하고 아랫사람들에게 잘해라 애비 씀’ 딱 세줄 이었다. 나는 그 엽서를 받아 보고 웃었다. 아버님의 모습 그대로였다. 더 이상 별 얘기가 필요 없다는 것이다.
일년 만에 석방되어 고향으로 갔다. 그랬더니 뜻 밖에도 아버님은 ‘몇 시에 자느냐, 몇 시에 일어나느냐, 밥에는 콩이 얼마나 들어 있느냐, 세수와 목욕을 어떻게 하느냐, 배는 고프지 않았느냐, 반찬은 무엇을 주느냐’ 등등을 물어 보셨다. 그렇게 궁금하시면 면회를 오셔서 알아보시지 징역 다 살고 나왔는데 그제서야 물으시는 것을 보면, 자식 걱정도 있었겠지만 교도소 생활 그 자체가 궁금하셨던 것 같다. 한참 궁금하신 것을 다 물어 보신 뒤에 ‘유신체제가 한 참 오래 갈 것 같다. 박정희가 보통내기가 아니다. 건강에 주의해라’ 하시고는 어머니가 개소주를 내리려고 걸어 놓은 가마솥에 불을 지피러 나가셨다. 그리고는 어디서 구하셨는지 오소리 기름 한 병을 갖고 들어오셔서 ‘너는 담배를 많이 피워 기관지가 나쁜데 이거 서울에 갖다 놓고 먹어라’고 주시는 것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아버님과 박정희는 동시대인 이었다. 왜정 때 태어나서 대학을 다녔다. 아버님은 고향에서 군서기, 면장, 야당을 하시면서 사셨고, 박정희는 교사를 하고, 일본군 장교를 하고, 5.16 쿠데타를 하고, 대통령을 하고 유신체제를 만들었다. 한 시대를 살면서 살아가는 자세와 길이 전혀 달랐다. 20세기, 식민지시대 냉전체제의 나라에서 살면서 두 분의 길이 그렇게 달랐다. 사회가 삶의 조건을 만들지만 그 조건을 받아들이는 자세는 사람에 따라 크게 다르다.
1980년 서울의 봄 그 해 6월에 나는 또 다시 구속되었다. 10.26 김재규에 의해, 박정희 대통령이 피살된 뒤 1980년은 군부독재의 재창출이냐 민주화의 길이냐를 가르는 시기였다.
80년 봄에 구속되자 아버님의 태도가 전혀 달랐다. 구속되고 며칠이 지나자 아버님께서 면회를 오셨다. 혼자 오신 게 아니라 아내와 함께 오셨다. 시아버지와 며느리가 자식과 남편을 보러 오신 것이다. 구속된 후 첫 상면이었다. 나는 이미 수사를 다 끝내고 기소된 상태에서 마음이 편했던 지라 태연스런 마음으로 면회장에 나갔다. 면회실에 들어서면서 아버님의 얼굴을 처음 보는 순간 내 마음이 움찔했다. 아버님의 표정이 단단히 굳어 있었다. 깊은 수심이 깃들어 있었다. 평생 처음 보는 표정이었다. 좀처럼 내색을 잘 하지 않으시는 분인데 이번에는 달랐다. 첫 말씀은 ‘몸은 괜찮으냐?’ 였다. ‘아주 좋아요’ 짧게 대답했다. 사실 몸은 좋지 않았다. 합동수사 본부에서 심하게 구타를 당하여 온몸이 결리고 쑤시고, 두 다리는 마비되었다가 풀어져 힘이 없었다.
나는 아버님의 표정이 완전히 굳어 있는 것을 보면서 사태가 심각하다는 것을 다시 느꼈다. 내가 전망하는 것보다 심각한 듯 했다. 광주에서 수천 명이 살상 당했고, 전혀 정통성이 없는 군부가 권력을 장악했으니 아버님은 사태가 매우 위험하다고 느끼신 것 같다.
‘재판을 잘 받아라. 언동에 신중해라’는 말씀을 여러 번 하셨다. 박정희 유신체제 때는 안 그러시더니 전두환에 대해서는 살의(殺意) 같은 것을 느끼셨다고나 할까
나는 마음을 가다듬고 말씀 드렸다. ‘너무 걱정하실 것 없어요. 어짜피 시간은 한 3년 걸릴 것 같아요. 피를 흘렸기 때문에 그냥 끝나진 않을 거예요. 큰 판이 벌어질 거예요’
아버님과 나의 대화가 너무 심각해서 아내는 끼어들 틈이 없었다. 결혼 한지 1년 반, 현주의 백일을 갓 지나고 나서 구속되었기 때문에 사실 재판 걱정보다는 가족에 더 미안했는데 아내한테는 별로 말을 하지 못했다.
그 해 여름 이른바 ‘김대중등 내란 음모자’ 들은 넉 달 동안 비상 보통 고등 군법회의에서 재판을 받았다. 아버님은 아내와 함께 한번도 빠지지 않고 방청을 하셨다. 유신체제 긴급조치 때는 면회 한번 안 오시고, 재판정 방청을 한번도 안 오셨던 분이셨는데, 80년 봄에는 전혀 달랐다. 예의 지켜보시는 것이었다.
재판은 처음부터 엉터리로 진행되었다. 짜인 각본대로 재판 절차를 끝내려는 의도가 역력했다. 법정 안에까지 경비병들이 들어와 있고, 검찰은 논고 문을 빨리빨리 읽어내려 갔다.
내란음모 일당인 문익환 목사, 이문영 교수, 고은 시인, 한승헌 변호사 등의 재야인사, 그리고 나, 이신범, 송기원 등의 학생(복학생) 들은 재판부와 진행에 응하면서도 전두환 세력을 인정할 수 없다는 태도로 재판에 임했다. 고은 시인의 발언은 재판정을 완전히 갖고 노는 수준이었다. 검찰이 ‘고은 피고인은 평소에 유신체제에 반대하는 등 반정부적 태도를 가졌죠?’ 하고 물으니까 고은 선생님은 ‘나는 닿뚜간에 가서 닿누고 오줌 누울 때도 유신체제를 반대 했오’ 답변하자 재판정은 웃음바다가 되어 버렸다.
표면적으로는 삼엄한 분위기 이면서도 검찰과 재판부에 대한 피고인들의 태도는 한편으로는 냉소적이고 또 한편으로는 진지하게 대응해 나갔다.
그러던 어느 날 이었다. 검찰 측 증인이 엉터리로 답변하고 있는데. 갑자기 ‘이게 뭡니까. 재판을 하려면 제대로 해야지’ 하고 큰소리가 났다. 목소리가 어찌나 큰지 재판정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깜짝 놀랐다. 나는 그 순간 아버님의 목소리라는 것을 느끼고 뒤를 돌아다 보았다. 아버님이 방청석에서 일어나 ‘공산당만도 못한 놈들’ 하고 소리를 지르셨다.
군인들이 달려들어 아버님을 밖으로 끌어내고 있었다. 나는 아버님께서 저렇게 흥분하시고 소리 지르시는 것을 난생 처음 보았다. 나는 직감적으로 위험을 느꼈다.
아버님께서 걱정하시던 사태가 나한테 벌어진 게 아니라 아버님한테 벌어진 것이다. 모든 가족이 이곳 저곳에서 아우성을 했다. 군인들이 총을 들이 대며 가족들을 끌어냈다. 우리는 재판을 거부했다. 한참이 지난 후에 가족들이 다시 법정으로 들어 왔다. 재판을 계속하기로 했다. 분위기는 그 전보다 더 삼엄했다.
나는 그날 재판을 마치고 교도소로 돌아와 생각을 많이 했다. 일찍 잠을 청하려고 했으나 잠이 오지 않았다. 나는 한참 만에 잠들었다. 그날 밤에 헌병들이 아버님을 산속으로 끌고 가는데 아버님은 아무 말 없이 끌려가시다가 뒤를 한번 힐끔 돌아보시는 꿈을 꾸었다.
6.25때 인민군에게도 끌려가시지 않았는데...
다음날 오전 나는 법정에 들어서자마자 아버님을 찾았다. 다행이었다. 아버님은 그 전날 있었던 일은 까맣게 잊으신 듯 아내와 함께 태연자약한 모습으로 앉아 계셨다. 편안한 모습이셨다.
재판이 끝나고 나는 연고지인 서울, 충청도, 부산 세 곳에서 가장 먼 곳인 안동교도소에서 징역을 살았다. 따라서 아버님이 면회 오시기가 어려웠다. 청양에서 오려면 10시간은 걸렸다. 아내가 보내주는 가족사진을 통해서만 아버님을 볼 수 있었다.
내가 서른 살 된 해의 생일날에 아내와 현주 그리고 어머니가 면회를 왔다. 생일날이라고 몇 가지 음식을 갖고 왔다. 교도관들도 생일날이라고 면회시간을 더 할애해 주었다.
한참 동안 이런 얘기 저런 얘기를 했다. 현주는 이제 세 살이 되어 저 혼자 이리 저리 돌아다녔다. 제 아비에게는 별 관심이 없었다. 아빠인지 아저씨인지 구분이 안가든 모양이었다. 징역을 2년쯤 살았으니 아비를 잊어버린 것이다. 어머니는 건강만 걱정하시고, 아내도 자신의 운명으로 받아들이는 태도였다. 면회를 끝내고 우리는 헤어졌다.
나는 교도소 안으로 들어가다가 뒤를 돌아보았다. 내 눈앞에 세 여자의 등이 보였다.
어머니, 아내, 딸. 어머니께서는 딸 현주를 등에 업고 계셨고, 아내는 내 옷 보따리와 책 보따리를 두 손에 들고 있었다. 한 사내를 감옥에 남겨두고 돌아가는 세 여자의 모습을 보면서 나는 울컥 눈물이 솟았다. 나는 빠른 걸음으로 방으로 돌아와 울었다. 한 시간 가까이 엉엉 울었다. 그냥 울었다. 북받치는 울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한참 지난 뒤에 아내가 넣어주고 간 사진을 보았다. 할아버지가 현주를 자전거에 태우고 뚝방 위에서 찍은 사진이었다. 할아버지와 손녀의 모습이 정겨웠다. 평화로운 모습이었다. 현주에게는 아버지 보다 할아버지가 더 따뜻하고 포근한 남자였다.
그런 징역을 꼭 900일 동안 독방에서 살고 집으로 돌아 왔다. 아버님의 얼굴에 주름이 훨씬 깊어진 것을 보고 ‘우리 아버님께서도 이제 늙어 가시는구나.’ 하는 느낌을 떨칠 수 없었다. 그런데 아버님의 말씀은 그와 딴판이었다. 저녁을 먹고 가족들이 모여 그 동안 겪은 얘기들을 나누는데 아버님께서는 예상치 못했던 것을 말씀 하셨다. ‘내란 음모 사건으로 재판을 받는 사람들의 자세가 그리 당당해 보이지 않더라. 모두 다 내란 음모를 안 했다고 주장하는데 주력하지, 전두환 정권을 내쫓아 보내겠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별로 없더라. 설훈이가 조금 미숙하긴 해도 큰 소리는 잘 치더라. 왜정 때 독립 운동하던 사람들은 기개 있게 재판을 받다가 처형당하곤 했는데.. 자기 나라 주민을 수천 명이나 살상한 정권을 그런 정도의 자세로 과연 몰아 낼 수 있을까?...’
아버님은 그 후에도 전두환 정권은 일제 식민 통치 체력보다도 더 극악무도하다는 말씀을 자주 하셨다. 광주에서의 살상은 말 할 것도 없고, 그 혈육들의 부정. 부패가 역대 어느 정권 때 보다 심하다는 것이다. 내가 재야에서 활동할 때 아버님은 우리 집에 자주 들러 ‘현명하게 싸워라. 극악한 사람들이라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 고 하셨다.
현주는 할아버지만 오시면 아주 반가운 그리고 정겨운 마음으로 할아버지를 모셨다. 청양에서 어렸을 때 찍은 사진의 분위기가 금 새 만들어지는 것이다.
벌써 거의 20년 전의 일이 되었는데, 20년의 세월은 사실을 180 ̊ 바꾸어 놓았다.
그 재판으로 김대중 수리는 사형선고를 받았고 나는 10년 선고를 받았다. 문익환 목사는 20년 이문영 고두은 고은시인 등등 대부분 10년 이상의 징역을 선고 받고 복역한 뒤 함께 석방 되었다.
그 뒤로 세월이 흐르면서 ‘88년에는 광주 민주화 운동 진상규명 청문회가 있었는데 내가 그 청문회에서 주로 활동했다. 1995년에는 특별법이 만들어져 당시의 신군부가 모두 구속되어 재판을 받아 내란음모죄로 형을 선고 받았다.
나는 지난 5월 국무위원자격으로 광주 망월동 국립묘지에서 있는 기념식에 참석했다. 김대중 내란 음모일당으로 받은 보상금 1억2천3백만 원으로 5월 정의상을 제정하여 해마다 사회 정의를 잘 실천하는 사람에게 주기로 했다. 첫 수상자는 실업자들을 위해 희망의 집을 운영하고 있는 이재정 신부에 돌아갔다.
당시 신군부가 역사의 피고인이 되었고, 우리 일당은 집권 세력이 되었는데, 그 세월강을 건너는데 거의 20년이 걸렸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버님의 걱정은 의미가 있었다. 걱정하셨던 대로 당시 신군부는 실제로 김대중 선생을 사형에 처하려 했다. 그 후에 밝혀진 미국 쪽 증인이나 자료로 입증된다.
만일 그렇게 되었더라면 지금의 세상은 어떻게 되었을까? 그 일당은 또 어떻게 되었을까?
아버님은 ‘87년 대통령 선거 때 김대중 후보 선거운동을 했다. 아버님의 외삼촌 (이상철, 민주당 정부에서 체신 내무부 장관을 했고, 청양에서 세 번 당선되어 6대 국회 부의장을 지내셨다) 선거 사무를 많이 보셨기 때문에, 그리고 청양면장을 오래 하셨기 때문에 청양에서는 거의 영향력이 있으셨다. 김대중 후보가 당선될 가능성은 별로 없었다. 특히 청양에서는 김대중 후보의 지지가 많지 않았는데도 아버님께서는 선거운동을 열심히 하셨다. 직접 마이크를 잡고 연설을 하시고, 각종 유인물을 차에 싣고 다니시면서 나누어 주었다. 일흔 넷의 나이를 잊은 듯이.
아버님은 김대중 후보를 언론에서만 안 것이 아니고, 80년 재판 광경을 다 보셨기 때문에 확신을 갖고 뛰셨다. 김대중씨 만한 정치인 없고, 그 사람이 당선되어야 지역감정을 해소시킬 수 있다고 판단하셨다. 결과는 패배였다. 아버님께서는 실망하셨지만 누구를 탓하지는 않으셨다. 당신이 할 일은 했을 뿐이라는 생각이셨다.
사실 아버님은 무엇에 집착하시는 성격이 아니다. 단 무엇을 바라지도 않으신다.
4.19 혁명 이후에도 그랬다. 자유당 정권이 무너지고 민주당이 집권하자 외삼촌이신 이상철의원께서 민주당 정부의 내무부 장관이 되셨다. 외삼촌은 아버님을 일본으로 유학시켜 주신 분이었다. 그 때문에 아버님은 1950년대 내내 외삼촌의 청양 선거 사무장 역할을 하셨다. 우리 집이 민주당 지구당 사무실이었다. 4.19후에 외삼촌이 공주군수를 맡으라고 하셨다. 아버님은 거절하셨다. 군수 할 생각이 없으셨다. 고향을 떠나실 생각도 없으셨다. 그러면 청양 군수를 받으라고 하셨다. 청양군수에는 생각이 있으셨다. 그래서 인사 발령을 하려던 참에 5.16이 나버렸다. 우리 아버님이 받을 수 있는 가장 높은 관직이었는데 무위로 돌아갔다. 그 후에는 한번도 그런 기회가 없었다.
국회의원이 될 기회는 한번 있었다. 1976년 이상철의원께서는 정계를 은퇴하셨다. 청양지역구는 다른 사람에게 넘겨야 했다. 그래서 아버님 보고 하라고 하셨다. 청양에서 인심도 얻은 편이고 집안 내력도 그러하니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아버님은 당신이 정치를 직접 하기는 싫다고 하시면서 사양하셨다. 대신 다른 사람을 추천했다. 면장이나 군수까지는 생각이 있으신데 그 외에는 생각이 없으셨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이 면장”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1988년 내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 할 때, 말씀을 드렸다. 아버님께서는 역시 별 말씀이 없으셨다. 어머님은 생각이 달랐다. ‘데모는 해도 정치는 하지 마라. 데모하고 다니면 너 혼자 고생하면 되지만 정치하면 온 가족이 시달린다’ 하시면서 반대하시는데, 아버님은 ‘잘 알아서 해라’는 말씀뿐이셨다. 정치에 대해서 잘 알고 계신 두 분이신데 자식을 대하는 태도는 달랐다.
아버님의 생각은 어떤 점에서 매우 독특하다고 할 수 있다. 정치가 얼마나 번잡스럽고 복잡한 가를 아버님은 잘 아신다. 꼭 정치의 필요성을 환히 아신다. 그러면서도 아니 그렇기 때문에 당신께서는 직접 정치를 안 하셨다. 그런데 자식이 정치를 하겠다는 것을 말리시지는 않으신다. 간단히 말해서 공적으로는 필요성을 인정하고, 사적으로는 번잡한 것을 싫어하시는 독특한 성격이시다. 그런 것을 잘 판단하시고 그대로 살아가신다.
선거가 끝나고 당선되어 고향에 갔더니, 아버님은 아주 반가워하시면서 동네 친구분들에게 점심이나 한번 사야겠다는 말씀하셨다. 당신의 환갑, 칠순 때는 잔치를 못하게 하시던 분이 이번에는 동네 친구분들에게 점심을 내겠다는 말씀에 나는 의아하면서도 아주 반가웠다. 아마 아버님이 한 턱 쓰시기는 그게 처음이셨을 것이다. 동네 사람들도 깜짝 놀랐을 것이다. 이 면장 집에서 잔치를 하기는 처음이기 때문이다.
내 기억으로는 할머니 장례식 이후에 동네 사람들을 아버님이 손수 부르시기는 처음이다.
내가 청양에서는 오랜만에 서울대에 입학해서, 동네에 경사가 났다고 하면서 한턱 잘 쏠 줄 알았는데, 그때도 그냥 지나갔다. 어머님만 가까운 분들 몇 사람 점심을 샀다.
모처럼 우리 아버님이 손님을 추천하니까 수백 명이 오셨다. 내 지역구도 아닌데 지역구보다도 더 축하하는 분위기였다. 어머니와 누나들이 떡을 해내고 전을 부치고 그야말로 잔치였다. 아버님도 크게 만족하시는 모습이었다. 찾아오는 친구분들에게 술을 따르시고, 당신은 원래 술을 전혀 입에 안 대시는데 친구들에게는 ‘많이 드셔!’ 하면서 술을 권했다.
잔치를 마치고 서울로 오려고 하는데, 아버님의 말씀이 있었다. ‘정치를 잘해라. 정치하면서 부정한 돈은 받아 먹지 마라. 내가 면장 하면서 돈 한 푼 안 받았기 때문에 6.25때도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옆에 계시던 고모님도 ‘그래 깨끗하게 해라. 네 할아버지도 잘했다. 네 아버지 말씀을 잘 새겨들어라’ 하시면서 거들었다. 아버님과 고모님 누가 이씨 집안사람 아니라고 할까 봐 말씀 하시는 게 똑 같다.
두 분께서는 오랫동안 야당 하는 집안에서 한결 같이 그렇게 살아 오셨다.
고모님은 아버님보다 더 하다. 4.19때 외아들을 잃고는 4.19 유가족이 되시어 혼자 사셨다. 동생인 우리 아버님이 유일한 의지였다. 유가족 연금을 단박 모으시고 당신은 과일 봉투를 부쳐서 판돈으로 생활하셨다.
95년에 돌아가셨는데, 그때까지 35년 동안 모은 예금이 7천만 원이나 되었다. 그 돈의 이자로 청양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조금씩 주셨다. 당신이 잃은 아들대신 청양 아이들을 챙기시다가 돌아가셨다. 그 돈을 지금은 아버님께서 관리하고 계신데, 이제 아버님도 정리하실 때가 되어 우리 형제들이 관리를 맡아야 할 것 같다.
그런 두 분의 말씀을 들으면서 정치를 시작한 게 나에게는 큰 도움이 되었다. 정치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역시 세상의 규범이다.
막상 정치를 시작해 놓고 보니까 비용을 감당하기가 힘들었다. 지구당 운영비만해도 만만치 않았다. 사무실 임대료, 상근사무장 임금, 여직원 급여, 사무실 운영비가 국회의원의 세비보다 더 많았다. 거기에 관혼상제 축의금, 조의금, 신장 개업하는 집에 보내는 화환비등이 아내가 운영하는 서점에서 버는 돈을 다 먹어버렸다. 달마다 돈에 쪼들리다 보니 자칫하면 정치를 하다가 인생을 망치기 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단호하게 결단을 내렸다. 꼭 필요한 최소의 경비를 제외하고는 모든 지출을 없앴다. 화환을 일체 안보내기로 했다. 결혼식장에서 불과 20~30분 세워 놓는데 5~10만원이나 드니 낭비도 그런 낭비가 없었다. 조화도 가정이 극도로 어려운 집에만 보냈다. 지역 주민 집에 문상을 가보면, 찾아오는 이도 별로 없고, 자녀들도 별로 없는 쓸쓸한 상가가 더러 있다. 그런 집에는 조화 하나를 보내주는 것이 진정으로 큰 위로가 되었다. 요즘은 조화대신 초 두루가 들어 있는 조 촉을 보낸다. 장례기간 동안 쓸 수 있어서 실용적이다. 신장개업이나 환갑, 교회 등의 행사에는 축전을 보내는 정도로 대신한다. 그렇게 줄이니까 처음에는 비난이 많았다. 당원 시켜주니까 인사도 없고 고마운 줄 모른다고 1~2년 동안은 비난이 계속 되었다. 그러다가 원칙을 계속 지키니까 비난이 서서히 없어지고, 오히려 그렇게 해야 한다는 쪽으로 바뀌어 갔다. 이제는 당연한 것이 되었다.
우리 국회의원들이 의정 활동으로 주민에게 보답하기 보다는 물질적인 것으로 환심을 사는 풍조 때문에 처음 몇 년 동안은 참 힘들었다. 옛날 세끼를 다 못 먹던 시절에 밥을 사주고, 비누나 고무신을 주던 관행이 1만불 소득이 된 시대에 와서는 뷔페를 먹이고 갈비를 먹이는 방향으로 번졌으니 안타까운 일이다. 빈약한 사람들 보다는 멀쩡한 유한계층 사람들이 오히려 더 요구하는 편이다.
이런 풍운에서 정치를 하다 보니 빛이 서서히 늘기 시작했다. 국회에서 나오는 세비와 정책연구비 외에 최소한 한 달에 500만원 이상 부족했다. 13대 때는 후원회 제도가 없어서 공식적으로 비용을 해결할 방법이 없었다. 어쩌다 친지들이 조끔 씩 도와주었고, 당 총재가 조금씩 주었다.
하루는 김대중 총재가 집으로 부르시기에 갔더니, 비용을 어떻게 조달 하느냐고 물으셨다. 그럭저럭 해결하는데 아주 힘들다고 말씀 드렸다. 그랬더니 안주머니에서 백만 원짜리 수표를 몇 장 주시면서 ‘이 의원은 부정한 돈을 받지 말라! 꼭 필요하면 나한테 말해라’ 라고 이르셨다. 어찌나 고맙던지 사양도 안하고 덥석 받았다. 그 후에도 총재님께서는 이따금씩 비용을 주시면서 의정활동을 잘 하라고 말씀 하셨다. 13대 때는 제도 자체가 아예 잘못되어 있었다. 정책연구비 200만원, 세비 190만원 그것이 공식적인 수입이니 자기 돈 없이는 의정활동이 불가능 했다.
의원 3년째가 되니깐 빛의 이자를 내기 위해 빛을 내야 하는 지경이 되었다.
장사하는 사람들이 망하는 단계이다. 어음을 할인해서 다른 어음을 막는 꼴 이다. 하는 수 없이 여러 번 생각하다가 아버님께 전화를 드렸다. 직접 뵙고 말씀을 드리기 염치가 없어서 전화로 말씀을 드렸다. 고향에 있는 선산을 담보로 해서 은행에서 삼천만 원만 융자를 받으면 안되겠느냐고 조심스럽게 말씀 드렸다. 증조할아버지 증조할머니, 할아버지 할머니의 산소가 있고 아버님 어머님의 가 봉물이 준비되어 있는 조그만 산이었다.
나는 고등학교 때 수학 과외를 해야겠다고 말씀 드렸을 때, 거절하신 것처럼 ‘그건 안 된다’고 하시리라고 예상하고 한번 말씀 드려 본 것이다.
그런데 뜻밖에도 아버님은 쉽게 허락해 주셨다. ‘정치를 하다 보면 별수 없다. 그렇게라도 해야지’ 하시면서 수속을 밟아 놓을 테니 며칠 뒤에 내려오라고 하셨다. 나는 말을 꺼내놓고도 차마 고향에 가지 못하고 있었는데, 아버님한테서 전화가 왔다. 융자를 받아서 통장에 넣어놓았으니 내게 와서 가져가라는 것이었다. 함평 영광 보궐선거에 지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집에 들렸더니 근저당 설립 비를 빼고 남은 돈 2천9백7십만 원이 들어 있는 통장과 도장을 내주셨다. ‘정치한답시고, 막심한 불효를 하는 구나‘하는 초라하고 부끄러움을 느꼈다. 서울로 오는 차 속에서 어머님의 말씀이 생각났다 ‘데모는 해도 정치는 하지 마라’ 그리고 ‘잘 알아서 해라’는 말씀 밖에 하시지 않는 아버님의 마음속은 정말 헤아릴 수 없다는 생각도 했다.
요즈음에도 우리 아버님은 새벽에 일찍 일어나셔서 동네 마당을 다 쓸고 다니신다. 눈이 쏟아지는 겨울날이면 더욱 일찍 일어나신다. 동네 눈을 다 치우고 나서야 집안 마당을 치우신다. 그러시면서 아무 말씀이 없으시다. 다만 건강에 좋다는 말씀만 하실 뿐이다.
올곧은 삶을 사시는 부자간의 모습이 잔잔한 감동으로 다가옵니다. DJ님과 함께 고난 속에서도 정도를 걸어온 이해찬님이 새 존경스럽고 믿음직합니다...민주주의와 개혁의 중단없는 전진을 위해,야바위꾼같은 손핵꾸는 쳐다보지도 말고 부디 김근태,정동영,천정배,한명숙..여러 훌륭한 지도자들과 합심, 딴날당의 됨됨이 찌그러진 자들의 가증스런 도전을 물리치기를 기원합니다
첫댓글 이해찬이 오래전 썼던 아버지에 관한 이야기이더군요. 김대중 전 대통령님 이야기도 좀 나오고 제가 차기 대통령 후보로서 강력히 지지하는 이해찬 의원님 글이라 퍼 왔습니다.
아~ 정말 잘 읽었습니다~
올곧은 삶을 사시는 부자간의 모습이 잔잔한 감동으로 다가옵니다. DJ님과 함께 고난 속에서도 정도를 걸어온 이해찬님이 새 존경스럽고 믿음직합니다...민주주의와 개혁의 중단없는 전진을 위해,야바위꾼같은 손핵꾸는 쳐다보지도 말고 부디 김근태,정동영,천정배,한명숙..여러 훌륭한 지도자들과 합심, 딴날당의 됨됨이 찌그러진 자들의 가증스런 도전을 물리치기를 기원합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마지막 몇 구절이 저를 눈물나게 하네요^^ 퍼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