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간에 대한 이해와 존중 ]
한 인간의 성격을 명확히 파악한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심리학계에서는 특정인의 성격이 타고난 것인지, 아니면 환경의 영향을 받아 형성된 것인지를 두고 해묵은 논쟁이 계속되었습니다. 20세기 내내 특성론자들과 상황론자들이 치열한 공방을 펼쳤으나 1980년대에 이르러 특성론자들이 승기를 잡았습니다.
'상황심리학'은 많은 사람들이 특정한 상황에서 평균적으로 어떻게 행동할지는 잘 예측할 수가 있었으나 개개인의 행동을 예측하는 데는 한계를 드러냈습니다. 예를 들어 대다수 사람은 권력자의 명령을 받으면 잘 모르는 타인에게 위해를 가할 수 있다는 사실이 각종 실험에서 드러났습니다. 하지만 중국의 손오공이 한국의 홍길동보다 그런 행동을 할 가능성이 더 높은지 낮은지는 예측하지 못합니다.
이에 반해 '특성론'은 사람의 성격이 내면적으로 이미 결정되어 있으므로 특정한 유형으로 분류할 수가 있다고 봅니다. 따라서 한 인간이 특정 유형에 해당한다면 그 사람의 성격과 행동을 예측할 수가 있다고 보는 겁니다.
특성론이 득세한 이유는 어떤 사람의 성격에 대해 우리가 원하는 명쾌한 답변을 얻을 수가 있고 우리가 알게 된 타인의 특성을 통해 그들의 정체성을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믿기 때문일 것입니다.
사람들은 다양한 성격 유형 검사를 통해 스스로를 내향형인지 외향형인지, 사고형인지 감정형인지 판단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친구나 앙숙에 대해서도 그 사람의 두드러진 특성을 특정 유형으로 분류해서 얘기하곤 합니다.
우리는 자신을 포함하여 영혼 깊숙이 은밀하게 내재해 있는 성격의 특성을 알면 그 사람의 행동과 업무 능력까지 예측할 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다 보니 현재 특성 중심의 성격 검사 종류는 2,500종이나 되고 시장 규모는 5억 달러에 달합니다.
특성론이 승기를 잡은 1980년대에 스탠퍼드대학교 대학원에 재학 중이던 '유이치 쇼다(Yuichi Shoda)'는 특성이나 상황의 관점이 아닌 특성과 상황이 상호작용하는 방식의 관점에서 인간의 성격을 규명해 보기로 했습니다. 쇼다는 뉴햄프셔주의 여름 캠프 프로그램에 참가한 아이들의 행동을 캠프 상담사 77명의 도움을 받아 1만 4,000시간 이상 관찰했습니다.
쇼다는 아동 한 명당 167시간에 달하는 방대한 자료를 꼼꼼히 분석한 후 특성론의 기본 신조를 정면으로 반박했습니다. 특성론에 따르면 한 인간은 외향형 아니면 내향형이지 둘 다일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쇼다의 조사 결과 실제로는 모든 아동에게 두 성향이 모두 있었습니다.
쇼다는 특성론의 대안으로서 이른바 ‘상황 맥락별 기질(if-then signature)’을 제시했습니다. 그의 이론을 적용하게 되면 만약에(if) 철수가 사무실에 있으면 그럴 땐(then) 아주 외향적이지만 만약에 철수가 스트레스를 받으면 그럴 땐 아주 내향적으로 변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쇼다의 ’맥락 속의 인간(The Person in Context)’이라는 책 제목이 명확히 보여주듯이 우리는 한정된 범위의 맥락 내에서 사람들과 알고 지냅니다. 나의 직장 동료와는 사무실에서만 알고 지낼 뿐 그 동료가 가정에서는 어떻게 행동하는지 잘 모릅니다. 그런가 하면 고교 동창과는 자주 만나 술을 마시지만 그 친구와 사무실에서 함께 회의할 일은 없습니다.
자식들과는 집에서 주로 만나기 때문에 학교에서 애들이 어떻게 행동하는지 자세히 모릅니다. 따라서 내가 알고 있는 사람들의 성격은 내가 그들과 접촉하는 매우 제한된 맥락 속에서 형성된 것입니다. 따라서 내가 접할 수 없는 상황적 맥락에서 드러나는 그 사람의 또 다른 성격은 내가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제한된 맥락에서 타인을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을 명심한다면 그들을 온전히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나에게는 매우 까탈스러운 직장 동료가 학교 친구들 사이에서는 의리 있고 자상한 사람일 수가 있습니다. 나에게 대놓고 갑질을 하는 거래처 직원이 실은 가정에서는 누구보다 온화하고 정이 많은 가장이자 남편일 수도 있습니다.
상황 맥락별 기질의 핵심을 이해하고 나면 직장 동료나 거래처 직원의 비호의적 성격을 함부로 판단하기가 힘들어집니다. 내가 알고 있는 특정인의 성격이 그와 접하는 제한적 시공간의 맥락에서 형성된 불완전한 것임을 자각한다면 넓은 도량으로 타인을 더 깊이 이해하고 존중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런 이해와 존중은 타인과의 관계를 원활하게 해줄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성공과 행복을 가져다주는 행운의 열쇠가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사)지역산업입지연구원 원장 홍진기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