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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턴가(아마도 진시황부터?) 책을 읽고 나서 독후감이 아닌
줄거리를 요약하는 버릇이 생겼습니다.
책을 읽어도 채워지는게 없다보니 그렇게라도 복습을 하려는건지,
아니면 읽을때의 감동과 읽고난후의 아쉬움을 좀 더 오래 붙들고 싶어 그러는건지...
오랜 시간동안 다산 연구에 몰두한 지은이의 정성과 수고스러움이
고스란히 밴 책이어서 대부분 본문에 있는 내용을 그대로 담아 보았습니다.
줄여놓고 보니 너무 허술하지만
한편 보는 사람 입장에서는 길어 보일수도 있겠다 싶습니다.
'꼬리글 권한' 이 없어짐을 다행으로 여기며 올립니다.^^
하얀 표지위에 빨간 동백꽃
보름동안 집과 사무실을 오가며 부대끼느라 검은때가 껴서
곱게 화장을 하듯 깨끗이 닦아놓고 한 장 찍었다.
다산 정약용...
'크신 분' '존경스러운 분'
다산과 뗄레야 뗄 수 없는 분 정조대왕...
'멋진 분' '존경하는 분'
시인, 문장가, 경학자 이면서 실학자, 사상가, 과학자, 의원, 암행어사, 목민관,
그리고 공학도이자 건축가...
비교적 최근에 읽었던 평전 가운데「펄벅평전」이 있다.
평전을 읽는내내 그녀의 열정에 탄복해마지 않았던 기억이 생생하다.
평전을 읽을때면 생각하곤 한다.
'나는 왜 평전을 읽는가...'
그들이 살았던 시대를 책을 통해서나마 함께 살아보고 싶어서...?
시대를 앞선 그들에게서 여름 소나기처럼 시원스런 삶의 메시지 하나 구하고자...?
나 또한 열정을 사랑하지만
어려움 앞에서 더욱 열정적으로 살았던 그들을 통해
편리와 안일과 단순함에 익숙해 지려는 오늘의 나를 자극해 보는 것이다.
혼탁하고 어지러운 한 시대를 바로 세우고자 평생 큰 뜻을 심은 다산의
학문과 문학, 민족과 국가, 그리고 핍박받는 이땅의 힘없는 백성을 향한 사랑...
남도여행 이후 다산초당 가는길에 만났던 춘란 만큼이나 그리워진 크신 그 이름을
유배지에서 다시 만나려고 생각하니 여행을 앞둔 그것처럼 마음이 분주해진다.
밑빠진 독에 물붓기하는 우를 조금이나마 덜고 복습도 할겸
지은이를 따라 다산의 유배지 곳곳에 남겨진 크신 족적을 따라가 보기로 한다.
책표지 뒷면
●유년시절
1762년 경기도 광주군 초부면 마현리에서 아버지 정재원, 어머니 해남 윤씨(고산 윤선도 후손)의
4남 1녀 가운데 4남으로 출생
다산은 일곱살 어린 나이에 어머니를 여읜다.
본격적으로 부친으로부터 공부를 배우기 시작한 것은 아버지가 연천 현감으로 있을 무렵으로
기록에 나오는 다산의 시는 일곱 살 때부터 전해진다.
작은 산이 큰 산을 가렸네
멀고 가까움의 지세가 다른 탓이지
다섯 글자로 된 두 구절의 시를 본 아버지가 놀라며 말하기를,
"분수分數와 소장消長에 밝으니 역법曆法이나 산수算數에 능통하리라"
먼 산과 가까운 산의 지세를 볼줄 아는 어린 아들의 분별력을 읽어낸 아버지의 판단이
훌륭하다 하지 않을 수 없다. 훗날 한강의 배다리나 수원화성을 축조하는 업적을 달성하는데
역법과 수리에 능통했음이 큰 도움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 청년 다산
다산은 열다섯살에 서울의 명문가 홍씨 집안에 장가를 들고,
열여섯에 성호 이익의 저서를 읽고 깊은 감명을 받아 학문의 스승으로 삼는다.
같은 해에 전라도 화순 현감으로 발령을 받은 아버지를 따라 화순으로 내려가는데,
화순에서 무엇보다 뜻깊었던 일은 동림사東林寺에서 둘째형인 정약전과 함께 독서를
한 일로 회갑을 맞은 해에 동림사에서 독서하던 시절을 회상한 글이 있다.
옛날 무술년 겨울 아버님께서 화순 현감으로 계실 때인데 나와 둘째형은 동림사에서 독서했다.
40일만에 나는 <맹자> 한 질을 모두 읽었다. 미묘한 말과 뜻에 허락해 주심이 많기도 했다.
얼음물로 세수를 하고 이를 닦으며 눈 내리는 밤에 잠을 못 이루고 토론을 계속했는데 요순시대
의 이상사회를 이룩하는 데 대한 이야기들이었다.
<선중씨정약전묘지명>
동림사 옛 터 입구에는 화순 출신의 강동원 씨가 '정약용 선생 독서기비'를 세워
청년 다산의 큰 꿈을 기리고 있다.
이밖에도 화순 생활에서 얻은 수확으로 당대의 큰 선승이자 학승이던 연담蓮潭 유일(1720~99)
과의 만남이 있다. 훗날 강진에서의 유배시절 많은 승려들과 어울리며 차를 마시고 유교와 불교
가 어우러져 학문을 논하기도 하는데 그가운데 가장 절친했던 아암 혜장惠藏 선사의 스승이 바로
유일스님이다.
화순 시절 무등산에 올라 지은 시가 있다.
무등산은 뭇 사람 우러러보는 곳
산꼭대기 험준한 곳엔 해묵은 눈이 있다
태곳적의 모습을 고치지 않아
본디대로 쌓여 있어 의연하구나
여러 산들 모두 섬세하고 정교하여
깎고 새긴 듯 뼈마디 드러났네
오르려 할 때는 길도 없어 멀고 멀더니
멀리 걸어오니 낮게 느껴지네
모난 행실 쉽게 노출되지만 지극한 덕 깊어서 분별하기 어렵네
<무등산에 올라서>
1783년 수물두 살의 젊은 나이에 좋은 성적으로 진사과에 합격한 다산은
그로 인해 정조대왕과 만날 수 있었고 성균관에 들어가 하고 싶은 공부를 마음껏 하면서
궁중의 귀중한 도서들을 열람할 수 있었다.
1789년 1월 다산의 나이 스물여덟에 마침내 문과에 급제한다.
과거에 합격한 다음해인 스물아홉 살 2월에 6명이 정원인 한림회권翰林會圈에 뽑히는
영광을 안았으며 곧바로 예문관藝文館 검열檢閱에 임명되었다.
이 무렵 글잘하고 학문을 좋아하는 정조대왕은 규장각을 신설해 유능한 문신들이
계속 학문에 전념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특히 3년동안 특별교육을 시키는 초계문신
제도를 실시 했는데 다산도 여기에 들어 각종 시험에서 높은 점수를 받아 정조대왕으로부터
여러차례 상을 받기도 한다.
다산의 나이 서른한 살(1792년)에 부친상을 당한다.
나의 선친께서 조정의 지우를 받아 두 고을의 현감, 한 고을의 군수, 한 부의 도호부사, 한 주의
목사를 지냈는데 모두 치적이 있었다. 비록 약용과 같은 불초한 사람으로서도 그분을 따르며
배워서 다소간 들은 것이 있었고 보아서 깨달았던 것도 있었으며 물러나 이를 시험해 봄으로써
다소간 체득한 것들이 있었다.
『목민심서』서문
일곱개의 아치 수문이 돋보이는 수원화성 화홍문...
수원화성 남문인 팔달문...아직 수원화성에 가보질 못해 급조한 사진^^
홍문관 수찬이던 다산이 부친상을 당해 고향인 마현에서 여막廬幕을 짓고
형제들과 함께 거처하던중에 정조대왕의 명에 따라 수원화성을 설계하고
거중기를 창안하여 화성을 축조 하는데 드는 경비 4만냥을 절감하였다.
● 암행어사 다산
부친상이 끝난뒤 홍문관 교리가 된 다산은 정조로부터 경기도 암행어사 발령을 받는다.
30대 초반의 젊은 나이에 경기 북부 7~8개 군의 민가와 산야를 돌아본 경험은 다산의 일생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피폐한 농촌의 실상을 샅샅이 살피고 돌아와 자신이 직접 보고 느낀바를
시로써 재현했다.
시냇가 허물어진 집 뚝배기처럼 누웠는데
겨울 바람에 이엉 걷혀 서까래만 들쭉날쭉
묵은 재에 눈 덮여 아궁이는 썰렁하고
어레미처럼 뚫린 벽에 별빛이 비쳐든다
집 안에 있는 물건 몹시도 쓸쓸하니
몽땅 팔아도 7,8푼이 안 되겠네
개꼬리 같은 조이삭 세 줄기 걸려 있고
닭창자 같은 마른 고추 한 꿰미 놓여 있다
깨진 항아리 뚫려 새는 곳 헝겊으로 발라 막고
떨어져나갈 시렁대는 새끼줄로 얽어맸다
놋수저는 지난번에 이장에게 빼앗기고
무쇠솥은 엊그제 옆집 부자가 앗아갔다
검푸르고 해진 무명이불 한 채 뿐이라서
부부유별 따지는 건 마땅치도 않구나
어린것들 입힌 적삼 어깨 팔뚝 나와 있으니
태어나서 바지 버선 입어보지 못했으리
큰아이는 다섯 살에 기병으로 올라 있고
작은애도 세 살에 군적에 묶여 있다
두 아이 군포세로 500푼 바치고 나니
빨리 죽기나 바랄 판에 옷이 다 무엇이랴
갓난강아지 세 마리 애들과 함께 자는데
호랑이 밤마다 울밖에서 으르렁대네
남편은 산에 가 나무하고 아내는 방아품 팔러가니
대낮에도 사립문 닫혀 분위기 비통쿠나
아침 점심 다 굶다가 밤에 돌아와 밥을 짓고
여름에는 늘 솜누더기 겨울엔 삼베적삼 걸친다
들냉이 싹도 깊이 박혀 땅 녹기를 기다리고
이웃집 술 익어야 지게미나마 얻어먹지
지난봄에 꾸어 먹은 환자가 닷 말이라
이때문에 금년은 정말 못살겠구나
나졸들 문밖에 들이닥칠까 겁날 뿐
관가 곤장 맞을 일일랑 걱정도 하지 않네
아아! 이런 집들이 온 천지에 가득한데
구중궁궐 깊고 깊어 어찌 모두 살펴보랴
직지사란 벼슬은 한나라때 벼슬
고을 수령도 마음대로 처벌했지
폐단의 근원 본디 어지러워 바로잡히지 않고
공수,황패 다시 나와도 뿌리뽑기 어려우리
먼 옛날 정협의 <유민도> 본받아
애오라지 시 한 편 베껴 가지고 임금님께 돌아갈까
「적성촌에서」
다소 길지만 늦가을 찬서리 만큼이나 한기가 도는 농촌의 실상이 한 편의 시에
그대로 드러나 있음에 전문을 옮겨 보았다. 조선후기 삼정의 문란이 극에 달해
농민들이 겪는 생활고는 처참하기 그지 없었다. 훗날 강진에 유배시에 썼던 「애절양」
에서도 드러나듯이 「적성촌에서」에는 군정과 환곡의 폐해가 얼만큼 농민들을 피폐하게
만드는지 적나라하게 그려져있다.
● 다산과 천주교
1784년 3월 이승훈이 영세를 받고 북경에서 귀국하면서 이땅에도 본격적으로 천주교가 번지기
시작한다. 같은해 4월 다산은 형수의 4주기 제사를 마치고 서울로 가는 배를 타고 오던 중 형수
의 친정아우인 이벽에게서 천주교 관계서적을 받아 읽게 되고 천주교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다.
이렇듯 형제가 한때 천주교 관계서적을 읽었다는 사실과
이후 이벽과 상종하면서 더 많은 책을 읽고 천주교에 마음을 기울인 일이
훗날 다산의 집안이 너무도 큰 화란을 당하는 계기가 된다.
1794년 12월 중국인 주문모 신부가 위장한채 조선에 입국하여 조선인 신도들의 도움을 받아
전교 활동을 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입교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진사 한영익의 밀고로 쫒기는
신세가 되어 숨어 지내다가 1801년 3월 스스로 의금부에 찾아가 자수한다.
임금의 총애를 한 몸에 받는만큼 다산을 시기하는 반대파의 비방도 한층 더 심해졌다.
이때 마침 동부승지에 제수됨에 따라 다산은 이를 기회로 여겨 동부승지 벼슬을 사양하는
상소를 올리면서 자신이 그동안 천주교 신자라는 비방과 모함을 받았던 전말을 상세히 써서
임금에게 올렸다.
저는 이른바 서양의 천주교에 대해 일찍이 그 책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보았다는 것이
어찌 바로 죄가 되겠습니까. 말을 박절하게 하지 않으려고 '책을 보았다' 했지 진실로 책만 보고
말았다면 어찌 바로 죄가 되겠습니까. 대개 일찍이 마음 속으로 기뻐하여 사모했고 내용을 거론
하며 남에게 자랑했습니다. 본원本源과 심술에 기름이 스며들고 물이 젖어들며 뿌리가 박히고
가지가 얽히듯 해도 스스로 깨닫지 못했습니다. 대저 한번 이와 같이 되면 이것은 맹자 문하의
묵자요, 정자 문하의 불교 선파禪派 입니다. 대질大質이 훼손되고 본령이 그릇 되었으니 미혹에
빠짐이 깊고 옅은 것이나 개과천선의 빠르고 늦은 것은 논할 것도 없습니다.
비록 그러하나 증자가 말하기를 "나는 정도正道만 얻고 죽으면 그만이다"라고 했는데, 저 또한
정도를 얻은 후에 죽고자 하오니 한마디 말로써 스스로를 밝히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제가 천주교 책을 본 것은 대개 약관 스물의 초기였습니다. 그 무렵에는 원래 일종의 풍조가
있어 천문과 역상을 말할 수 있는 사람이나 농정이나 수리의 기구에 대해 말하고 측량과 추험
推驗의 법을 말할 수 있는 사람을 세속에서는 서로 전하면서 해박하다고 했습니다. 저는 그때
어려서 속으로 그런 소리를 듣는 것을 몹시 바랐습니다. 그러나 성품이 경솔하여 무릇 어렵고
깊고 교묘하고 세밀한 것에 속하는 글은 본디 세심하게 연구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거친 찌꺼기의 영향에서는 끝내 얻은 것도 없이 도리어 죽고 사는 말들에 얽히고
극벌의 경계에 귀를 기울이고 비뚤어지고 변박辯博한 글에 현혹되어 유교의 별파別派로 인식
하고 문원文垣의 기이한 감상鑑賞으로 보아 남과 담론할 때는 감추고 꺼리는 바가 없었고,
남들이 배척하는 것을 보면 부족하고 비루해서 그러리라 의심했으니 본뜻을 따져보면 대체로
색다른 지식을 넓히고자 해서였습니다. 그러나 저는 영달에만 뜻을 기울이고 매달려서 성균관
에 들어온 뒤로 오로지 뜻을 모아 공부한 것은 과거 과목이었습니다. 매달 보는 과제, 열흘마다
치르는 시험에 응시하기를 새매가 먹이를 집으려는 듯이 정신을 쏟았으니, 이런 점으로 보면
진실로 그쪽으로 기울일 그런 정신자세는 아니었습니다. 더구나 벼슬살이에 나간 뒤로야 어찌
정도가 아닌 방외方外의 글에 마음을 쓸 수가 있겠습니까.
해가 오래고 깊어갈수록 마침내 다시는 마음 속에 왕래하지 않아서 막연히 지나간 그림자처럼
느꼈는데, 어찌 그 명목을 한번 세워 청탁을 분별하지 못하고 고지식하게 지금껏 벗어나지 못했
겠습니까. 헛된 명예만 좋아하다가 실재의 화禍를 받는다는 것은 저를 두고 이른 말입니다.
....이하 생략...
「변방사동부승지소」중에서...
자신의 일을 해명하는 상소여서 「자명소」라고도 하는 이 장문의 명상소문은 명쾌한 논리와
사리가 분명하여 정조대왕은 물론이거니와 반대파로 부터도 명문으로 인정을 받은 상소문이다.
이로써 그동안 다산에게 씌워졌던 천주교 신자라는 오명은 어느정도 씻기게 되는 셈이다.
● 목민관 다산
장문의 상소를 올린 다음해 다산은 임금의 특명으로 황해도의 곡산 도호부사로 발령이 났다.
어린시절 아버지를 수행하면서 고을 다스리는 법을 익힌데다 지난날 금정역 찰방이라는 지방관
벼슬 경험이 있던 다산은, 혈기 왕성하던 30대 후반을 황해도의 작은 고을 곡산谷山에서 3년동
안 목민관으로서 백성들을 사랑하는 자애로운 통치를 베풀게 된다.
곡산에 와서 가장 먼저 이계심李啓心 사건을 훌륭한 판결로 해결한 다산은 기존의 관행이나 악습
에 의해 고을민에게 착취의 소지가 있는 제도를 하나하나 없애거나 개혁하기 시작했다.
그 가운데 눈에 띄는 제도가 있으니 귀양와서 지내는 자들에 대한 생계 대책이 없음을 안타깝게
여겨 화전세火田稅 100여 결을 기금으로 한 겸제원兼濟院 이라는 제도를 만들어 잠자리와 먹을
것을 유배온 사람들에게 제공했다.
또한 다산은 백성들이 질병으로 고생하거나 죽어가는 것을 못내 안타깝게 여겨 홍역을 치료하는
데 큰 도움이 되는 의서를 저술했으니 바로 『마과회통』痲科會通 12권이다. 많은 백성들이 홍
역으로 고통받고 죽어가는걸 안타깝게 여긴 다산의 따뜻한 가슴에서 우러나온 책이라 할 수 있다.
훗날 강진의 다산초당에서 완성되는 공직생활의 성서 『목민심서』는 바로 곡산에서의 실제
경험을 토대로 하여 쓰여지게 된다.
● 정조대왕의 승하
정조대왕과 채제공의 각별한 보호와 보살핌으로 세력이 유지되던 다산일파는 조선시대 마지막
남인 정승 채제공이 세상을 떠난뒤 곧바로 정조대왕이 승하하는 청천벽력같은 일이 벌어진다.
임금이 붕어崩御하면 천붕지통天崩之痛이라고 해서 '하늘이 무너진 아픔을 당했다'고 한다.
정조대왕의 죽음이야 말로 다산에게는 하늘이 무너지는것과 같다고 할 수 있겠다.
나는 포의로 임금의 알아줌을 맺었으니 정조대왕께서 총애해주시고 칭찬해주심이 동료들에서
훨씬 넘어 있었다. 앞뒤로 상을 받고 서책,구마廐馬, 무늬있는 가죽, 진귀한 여러 물건을 내려
주신 것을 이루 다 기록할 수가 없다. 기밀에 참여해 듣도록 허락하시고 생각한 바가 있어서
글로 조목조목 진술해 올리면 모두 즉석에서 윤허해 주셨다. 일찍이 규영부에서 교서 일을 맡고
있을 때에는 맡은 일에 실수해 잘못을 해도 책망하지 않으셨으며, 매일 밤 진수성찬을 내려주셔
서 배불리 먹게 했다. 내부內府에 비장된 서적을 각감閣監을 통해 청해보도록 허락해주신 것 등
은 모두 남다른 대접이었다.
「자찬묘지명」
● 장기현으로 유배당하다
1800년 6월에 정조대왕이 승하하고 열한 살의 어린나이로 순조가 왕위에 오르자 대왕대비
정순왕후가 수렴첨정을 하게되면서 부터는 절대적인 왕권이 정순왕후의 손에 들어간다.
1801년(순조 원년) 1월에는 천주교도들을 역적죄로 다스린다는 법령을 반포하고 잡아
들이기 시작하는데 이때 다산도 약전,약종, 두 형과 함께 붙들려 국문을 받게된다.(신유박해)
그리하여 같은해 2월에 다산은 경상도의 바닷가 마을인 장기현으로 유배를 떠나고,
둘째형 약전은 전라도 신지도로 유배 되었으며 셋째형인 약종은 국문에서도 자신이 천주교
신자임을 굽히지 않고 장렬히 순교한다.
후미지고 외딴 바닷가 마을에 도착해 반겨주는이 하나 없는
외롭고 쓸쓸한 마음을 시로써 표현했다.
습한 데서 봄을 나니 마비증세 일어나고
북녘에서 길들인 입맛 남녘 음식 맞지 않네
비방인 창출술이나 담그려는데
아이 머슴 괭이 메고 가며 고향이 어디냐고 묻더라
「장기의 귀양살이에서 본 풍속」 17
병석에서 일어나니 봄이 다 지나
수심 많은 이내 몸은 여름밤이 길기도 해
잠깐 사이 목침 베고 대자리에 누우니
문득 집 생각 고향 생각 간절해라
부싯돌 쳐서 불 붙이니 관솔 그을음 새까맣고
문을 열면 대밭에서 퍼지는 기운 서늘해라
아스라이 소내 위에 비치는 달빛
흐르는 그림자 서쪽 담장을 비추겠지.
「밤」
다산의 18년 유배생활 가운데 장기에서의 7개월이 가장 힘든 시기였음을 그가 남긴 글을
통해 알 수 있는데, 이는 처음 유배를 당한 곳이어서 적응하기도 힘들었을뿐 아니라,
역적죄인 이라는 죄명으로 인하여 행동에 많은 제한이 따르기도 했을 것이다.
하지만 다산은 이내 유배지 생활에 적응하고 멀리 떨어져 있는 두 아들에게 공부를 게을리
하지 말것을 당부하는 진심어린 편지를 보내고, 경상도 토속어를 살려 농촌 풍물을 생생하게
시로 표현 했으며, 『촌병흑치』라는 의서를 저술하기도 했으나 안타깝게도 분실되어 전해지지
않는다.
● 장기에서 강진으로
신유년 천주교 박해의 전말과 향후 조선의 천주교 재건을 위한 방책을 흰 비단에 적어 북경의
주교에게 보내려다 적발된 「황사영 백서」사건으로 인하여 당사자인 황사영은 1801년 11월
스물일곱의 나이로 대역부도의 죄명으로 능지처참이라는 극형에 처해진다.
이 사건으로 인해 당시 장기와 신지도에서 유배 생활을 하던 다산과 형 약전이 다시 서울로 압송
되었다가 같은해 11월 또 다시 유배지가 바뀌어 형제가 함께 유배지로 가던중 나주 박남정 주막집
삼거리에서 형제는 생전에 다시 만날 기약이 없는 슬픈 이벌을 한다.
초가 주막 새벽 등불 푸르스름 꺼지려는데
일어나 샛별 보니 이별할 일 참담해라
두 눈만 말똥말똥 둘이 다 할말 잃어
애써 목청 다듬으나 오열이 터지네
흑산도 아득한 곳 바다와 하늘뿐인데
그대는 어찌하여 그 속으로 가시나요
「박남정 주막집의 이별」
그렇게 목이 메어 말을 잇지 못하고 하염없이 눈물만 흘리며
형 약전은 흑산도로 다산은 강진으로 각자의 길을 떠난다.
강진 백련사 동백
북풍이 하얀 눈 휘몰듯이 나를 몰아붙여
남쪽 강진의 주막까지 밀려왔네
다행이 낮은 산이 바닷빛을 가리고
좋을씨고 대숲이 가는 세월 알리네
장기獐氣 때문에 옷이야 덜 입지만
근심 때문에 술이야 밤마다 느네
나그네 근심 덜 일 하나 있으니
동백꽃이 설 전에 활짝 피었네
「객지에서의 회포」
강진으로 유배되어 처음 지은 시로 보인다.
해가 지고 봄이 와도 봄인 줄 모르다가
새소리 날로 달라 봄인가 싶네
비만 오면 향수가 등나무처럼 얽히고
겨울 지낸 이내 몸 댓가지처럼 여위었네
세상도 보기 싫어 방문은 늦게 열고
오는 손님 없을 줄 알아 이불 더디 갠다오
무료함 없애는 법 아이들이 알아내서
의서에 따라 술을 담가 한 단지 부쳐 왔네
천 리 먼 길에 종 아이가 가져온 편지 받고
초가 주막 등잔 아래서 홀로 긴 한숨 짓노라
어린 아들 학포조차 아비를 탓했건만
병든 아내 옷 꿰매 보냈으니 상기도 남편 사랑하나봐
음식 기호 생각해 멀리 찰밥 싸서 보내고
굶은 사람 구하려고 철투호를 새로 팔았다네
답장 바로 쓰려 하니 달리 할말 없어
산뽕나무나 수백 그루 심으라 채근했지
「새해에 집안 편지를 받고」
겨울에 강진으로 와서 첫 봄을 맞았지만 쓸쓸하기 그지없는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모습과
고향집에서 가져온 첫 편지를 받고서 두고온 가족들 생각에 가슴 아파하는 모습이 여과없이
쓰여진 시 속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
이 세상에 있는 사물 가운데에는 자연상태로 존재하여 좋은 것이 있는데 이런 것은 오히려
기이하다고 떠들썩하게 말할 필요가 없다. 다만 파손되거나 찢어진 것을 가지고 어루만지고
다듬어 완전하게 만들어야만 공덕을 바야흐로 찬탄할 수 있듯이 죽을병에 걸린 사람을 치료해서 살려야 훌륭한 의원이라 부르고 위태로운 성城을 구해내야 이름난 장수라 일컫는다.
여러 대에 걸친 명문 집안의 고관 자제처럼 좋은 옷과 멋진 모자를 쓰고 다니며 집안 이름을
떨치는 것은 못난 자제라도 할 수 있는 일이다. 이제 너희들은 망한 집안의 자손이다. 그러므로
더욱 잘 처신하여 본디보다 훌륭해진다면 이것이야말로 기특하고 좋은 일이 되지 않겠느냐.
폐족으로서 잘 처신하는 방법은 오직 독서하는 일 한 가지밖에 없다. 독서라는 것은 사람에게
가장 중요하고 깨끗한 일일 뿐만 아니라 호사스러운 집안 자제들에게만 맛을 알도록 하는 것도
아니고 촌구석 수재들이 심오함을 넘겨다 볼 수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반드시 벼슬하던
집안의 자제로서 어려서부터 듣고 본 바도 있는데다 중년에 재난을 당한 너희들 같은 젊은이들이
진정한 독서를 하기에 가장 좋은 것이다. 그네들이 책을 읽을 수 없다는 것이 아니라 뜻도 의미
도 모르면서 마냥 책만 읽는다고 해서 독서를 한다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의원이 3대를 계속해오지 않았다면 그 의원 집 약을 먹지 않듯이 문장도 그렇다. 돌이켜보면
내 재주가 너희들보다 조금은 더 나을지 모르지만 어려서는 방향을 알지 못했고 나이 열다섯에야
비로소 서울 유학을 해보았으나 이곳저곳 집적거리기만 했지 얻은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므로 내가 지은 시나 문장은 아무리 맑은 물로 많이 씻어낸다 해도 끝내 과거 답안 같은 틀을
벗어날 수 없고 조금 괜찮은 것일지라도 관각체館閣體의 기운을 면할 수 없는 것이다.
열 살 때 지은 학연의 글을 나는 스무 살 적에도 짓지 못한것 같고 근래의 지은 글은 지금의
나로서도 미치지 못하는 것이 더러 있으니 이것은 네가 효과적으로 공부하는 길을 택했고 견문이
조잡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겠느냐. 내 생각에는 너는 이미 진사도 되고 과거에 급제할 만한 실력
이 족히 된다고 본다. 글을 알면서도 과거 때문에 오는 제약을 벗어나는 것과 진사가 되고 급제
한 사람이 되는 것 중 어느 편이 나은 일인가는 말하지 않더라도 잘 알 것이다. 지난번에 말했
듯이 가문이 망해버린 것 때문에 오히려 더 나은 처지를 이룩할 수 있다는게 바로 이런 것이 아니
겠느냐.
너희들 가운데 학포의 재주와 역량을 보면 큰애보다 주판 한 알쯤 부족할 듯하나 성품이 자상하
고 무엇이든지 생각해보는 사고력이 있으니 진정으로 열심히 책 읽는 일에 온 마음을 기울이면
어찌 형님을 따를 수 없다고 하겠느냐. 근래에 둘째의 글을 보니 조금 나아졌기에 내가 알 수 있
었다.
「두 아들에게」
다산이 유배지에서 두 아들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거의 매번 독서할것을 강조하고 있다.
어떤 책을 읽어야 하는지 조목조목 가르쳐 주는 편지에서는 우리의 역사를 제대로 배우고
알아야 함을 강조하는데 묘비문, 서간문, 상소문, 잡록 등도 읽어 역사의 이면을 들여다
볼 수 있기를 바랬다.
● 다산학의 산실 다산초당
다산초당...이른봄 다산초당 연못에는 동백이 붉게 피어있다.
처음 강진에 유배왔을 당시에는 찾아주는 이 하나 없는 쓸쓸하고 초라한 주막살이 였지만,
읍내 아전들의 자제들을 가르치고 당대의 학승들과 교류하면서 부터 서서히 유배지에서의
쓸쓸함과 적막함에서도 벗어날 수 있었다.
또한 다산 아래 귤동橘洞 마을에 해남 윤씨의 도움으로 다산초당에서 지내면서 부터는 본격적으로
학문을 연구하고 저술 작업에 들어가게 된다.
다산의 18 제자들을 길러낸 곳 또한 다산초당이니 이른바 다산학의 산실이랄 수 있겠다.
이때부터(1808년) 해배시까지(1818년) 10년동안을 다산초당에서 지내면서 저술한 책만
해도 수백권에 달한다.
사뿐사뿐 새가 날아와
우리 뜨락 매화나무 가지에 앉아 쉬네
매화꽃 향내 짙게 풍기자
꽃향기 그리워 날아왔네
이제부터 여기에 머물러 지내며
가정 이루고 즐겁게 살거라
꽃도 이제 활짝 피었으니
열매도 주렁주렁 맺으리
「매조도梅鳥圖」
다산의 나이 쉰 세살(1812년)에 시집을 가는 외동딸에게 아내가 보내준 치마폭을 잘라서
그림과 함께 시를 담아 보냈으니 딸을 생각하는 아버지의 극진한 마음이 그대로 드러난다.
명命과 도道 때문에 성性이라는 명칭이 있게 되었고 자기와 남이 있기 때문에 행行이라는
이름이 생겼으며, 성과 행 때문에 덕德이라는 명칭이 있게 되었다. 그러므로 성만 가지고는
덕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원덕原德」
착한 인간의 본성만 제대로 지키면 만 가지 일이 해결된다는 주자학의 성리학적 사고로부터,
아무리 훌륭한 성품이나 덕성을 갖추었다 해도 그것만으로는 어떤 역할도 할 수 없으며 선한
성품을 행동으로 옮겨야만 덕이 될 수 있다는 '성性+행行=덕德' 이라는 사유체계가 다산을
통해 실학사상의 본질로 자리잡아갔다.
인의예지仁義禮智라는 것도 행동과 일로 실천한 뒤에야 비로소 본뜻을 찾을 수 있으며
측은惻隱이나 수오羞惡하는 마음도 안에서부터 나오는 것이다. 이理를 말하는 사람은 인의예지
를 각각 낱개로 떼어놓고 이것들이 마음 속에 감추어져 있다고 하는데 이는 틀린 말이다.
마음속에 있는 것은 측은이나 수오의 근본일 뿐이니 이것을 인의예지라고 불러서는 안된다.
『대학』의 명덕明德이나 인의예지에 대해 현격한 차이가 나는 학설을 자신의 철학사상이라고
표명했다. 이처럼 인간의 사고가 바뀌어 일하고 행동하는 철학이 가슴에 담겨 있어야 세상이
변할 수 있다고 믿고 바른 덕이란 바로 실천 가능한 효孝,제弟,자慈라고 단정해 실천할 수 있는
유학의 체계를 세우게 된다.
1817년 해배 1년을 남기고 『경세유표』 45권을 미완으로 남긴 채 『목민심서』저술에 들어가
1818년 9월 14일 해배 직전에 48권을 완성하고 다산을 떠나 마현리 고향집으로 돌아오게 된다.
소나무숲 아래 누워 있는 하얀 바위
바로 내가 거문고 타던 곳이라네
산사람 거문고 타다 걸어두고 가버리니
바람 불자 거문고줄 절로 우노라
다산초당에 머물던 시절 다산을 도왔던 해남 윤씨 일가에 시집보냈던 외동딸이 낳은 외손자
윤정기尹廷琦의 문집 『방산유고舫山遺稿』에 '외조부 다산공의 시' 라고 되어있는 시다.
비록 세상에 나아갈 수 없는 유배지에서의 삶이었지만 나라와 백성을 아끼는 마음을 놓지않고
백성과 나라 모두를 살려낼 수 있는 경국제세經國濟世의 학문적 업적을 이룩한 그에게서 마치
신선의 경지에 오른것과 같은 평온한 마음이 한 편의 시를 통해 전해져 온다.
일생동안 500여편의 방대한 저술을 통해 인간으로서 지켜야 할 도리에서부터 백성 모두가 잘
살고 나라가 부강해 질 수 있는 길을 뜨거운 가슴으로 호소했던 다산은 1836년 4월 일흔다섯을
일기로 마현리 뒷산에 잠든다.
첫댓글 와~ 무재님과,.^^* 새삼 내 책꽂이의 7권의 목민심서를 쳐다 봅니다. 깨끗합니다.-.-+. 어쩌다 한 번씩 읽게 되면 너무 현실과의 괴리감에 그러한 듯 싶기도 하고,ㅎㅎ초록님의 도 다른 다산과 만나며 쓰다듬어라도 보게 됩니다.. 꼬릿글 권한이 다행스럽다는 마음에 웃습니다..아주 조금이나마 내 마음을 알아 줄 것같아서
...^^*....조용한 시간에 다시 또 읽어 볼까 합니다..이렇게 좋은 책 이렇게 쉽게 읽을 수 있어 긴 글이 반가운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