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동묘는 중국 삼국지의 장수인 관우를 모시는 사당이다.
서울에는 북묘 남묘 등이 관우를 모시는 사당이나 북묘는 사라지고
남묘는 남대문 부근에 있다가 다시 사당동에 있었는데 해체되어 어디로 갔는지 필자는 알지 못 한다.
그 중에 하마비는 북묘와 남묘 그리고 동묘에 남아 있다.
동묘의 하마비는 2013년에 답사를 가니 하마비는 삼문 내부에 있어 하마비의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고
나중에 가니 동묘는 벼룩시장으로 바뀌여 혼잡하기 그지 없어 들어 갔다가 마음이 뒤 숭숭하여 나왔다.
아무리 그래도 중국의 역사 인물이지만 사당인데 사당이 노릇을 못하고 있으니 뭔가 허전 하였다.
그리고 2022년가시 가니 제대로 정비가 되어 있었다.
하마비는 내삼문 밖으로 나와 제 역할을 하고 있었다고 하지만 원래는 외삼문 밖에 있어야 하는데 하는 생각만 든다.
그리고 금잡인이 이라는 비는 좌우에 나란히 있어 야 하지만 떨어져 있었다.
2022년에 다시 가보니 하마비와 금잡인 이라는 비는 하마비와같이 있었다.
필자의 생각은 하마비와 금잡인의 비는 동일한 개념으로 보아야 할것으로 생각된다.
즉 금잡인 이라는 글은 2행의 글로 비에 새겨야 하나 금잡인 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따로 비를 세웠다고
해석되기에 그렇다,.
그러한 경우는 남관왕묘에서 같은 의미로 세운 하마비가 있기에 더 그렇다.
하마비에서 2행의 글이 있는 것은 경기전 하마비와 종묘의 하마비 이다.
그 중에 경기전에는 지차개하마 잡인무득입 이라는 글이 있다.
경기전 하마비에도 잡인은 들어오는 것은 금한다 되어 있기에 동묘와 남묘의 하마비외 다른 금잡인의 비도
같은 하마비로 보아야 한다 것이다.
그래서 필자가 새로운 해석을 하여 보면 동명이비-同名二碑나 동비이명으로 하마비로 불러야 한다고 생각된다.
왜 그럴까 하는 것은 필자가 하마비의 연구자이고 권위자 이기 때문이다.
금잡인이 보이는 하마비의 특징은 대부분 조선후기에 만든 것이고, 2행의 글이 보이는 하마비 또한 왕실과
관련이 있거나가 서울 지역 하마비에서만 특징이 있다.
뷱묘, 서묘나 하마비가 남았으면 더 많은 자료를 확보 할 수 있지만 북묘는 하미비만 남았고 금잡인 이라는 비는
보이지 않고 서묘는 행방불명이다.
일제강점기와 전쟁이라는 특수한 시대가 지나가고 난 뒤의 문화유산은 대부분 파괴되거나
자취를 감주기 마련인데 연구자료서는 많은 아쉬움이 남는다.
그리고 남묘가 있었다가 해체되어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는 아시는 분은 알려주기 바란다.
금잡인 대소인원 개하마로 읽어야 하고 비가 별도로 제작되어도 같은 의미로 하마비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
이 글의 주제이다.
하마비가 비록 중국에서 유래 되었지만 한반도에 남아 있기에 연구하고 조사하여야 한다는 생각을
했기에 이러한 생각을 하고 글을 쓰는 것이다.
하마비
옥산 이희득 지음
事大를 하였기에
大陸의 法度도
받아 들였네
여기서는 말에서 내려야하고
禮도 갖춰야 하는 곳
그러한 것은
海東에서 나오지않고
大陸에서 나왔으니 어찌할꺼나
돌기둥에 새겨진 글
밤 이면 이슬
낮 이면 붉은 太陽
벗 삼으며
옛 부터 내려온 이야기를
끊어지지 않는 세상사 처럼
풀어 놓는구나
犯馬하는 高官을 보고
下馬의 禮를 권하니
馬夫의 하품 소리
天里를 가는구나
여기서는 내려야 하느니
여기서는 禮도 갖춰어야 하느니
여기서는 揖도 해야 되느니
여기는 그런 곳이니라
옥산 이희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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