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치홍 金致洪 (1880 ~ 1910)】 "심남일, 박민홍, 박사화 의병부대 참전"
1880년 전라남도 영암군(靈巖郡) 종남면(終南面) 신원촌(新元村)(현 시종면 신흥리)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김해(金海)이며 이명으로 김치홍(金致弘)·김동필(金東弼)을 사용하였다. 「수형인명부」에는 의병 참여 당시 전남 나주군(羅州郡) 마산면 박포리에 거주하면서 농업에 종사하고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1908년 전라도 나주군·함평군(咸平郡)·영암군·보성군(寶城郡)·장흥군(長興郡)·강진군(康津郡) 등에서 위세를 떨진 심남일(沈南一) 의병부대의 기군장(起軍將)으로 참여하였다. 그리고 박민홍(朴珉洪), 박사화(朴士化) 의병부대에서는 제1초(第一哨) 십장(什長)을 맡아 1909년 중순까지 활발히 활동하였다.
【김치홍 金致洪 (1880 ~ 1910)】 "심남일 의병부대 기군장, 박민홍, 박사화 의병부대 참전"
1907년 10월부터 이듬해 1월까지 호남지역 의병전쟁은 기삼연(奇參衍)이 주도한 호남창의회맹소(湖南倡義會盟所)를 중심으로 활발히 전개되었다. 그러나 1908년 2월 2일 기삼연이 붙잡혀 사망하였다. 그 해 3월 29일 김율(金律)도 붙잡혔고 선봉장을 맡은 김태원(金泰元) 역시 4월 25일 사망하였다. 이로 인해 기삼연 휘하의 의병부대 활동은 일시적으로 위축되었다. 그러한 가운데 김율의 부장인 심남일(沈南一)이 의병부대 전열을 재정비하였다. 의병대장에 심남일, 선봉장(先鋒將)에 강무경(姜武景)·임민선(任萬善)·장인보(張仁甫), 중군장(中軍將)에 안찬재(安賛在)·박사화(朴士化), 후군장(後軍將)에 노병우(盧炳友)·나성화(羅聖化)·최우평(崔友平)·김성재(金聖載), 도통장에 김도숙(金道淑), 통장(統將)에 유치선(柳致先)·공진숙(孔盡淑), 군량장에 이세창(李世昌), 호군장에 강달주(姜達周)·정관오(鄭官午), 기군장(起軍將)에 장문연(張文然)·이덕삼(李德三) 등을 비롯해 서기(書記), 도포(都砲), 집사(都執事), 모사(謀事), 부장 등의 편제를 갖추었다.
이때 기군장에 임명되어 여러 차례 전투에 참여하였고, 친일 부호로부터 군자금을 모집하며 밀정 처단 활동을 전개하였다. 1908년 10월 2일부터 1909년 1월 11일경까지 심남일 의병부대 소속으로 약 60여 명의 의병을 인솔하여 전라남도 영광군(靈光郡)과 능주군(綾州郡)(현 화순군(和順郡))등지에서 일본 군경과 여러 차례 교전하는 등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아울러 이 기간 의병부대의 물적 기반이 되는 군자금의 조달을 위해 노력하였다. 특히, 1908년 11월 8일 심남일 휘하의 의병 50명을 이끌고 총기 30정으로 무장한 상태로 전라남도 능주군 돌정(乭亭)에 거주하는 기봉여(奇鳳汝) 집에 군자금 모집을 위하여 나섰다. 그 결과 5,000냥을 군자금으로 모았다. 1909년 2월 10일경에는 부대원 2명과 함께 전라남도 영암군 곤이종면(昆二終面) 성재동(星才洞)에 거주하는 이사유(李仕有)로부터 군자금 차출을 요구하여 돈 10원을 징집하였다.
심남일 의병부대는 효과적인 대일 투쟁을 위해 다른 부대와 연합하기도 하였다. 1909년 1~2월 사이 나주 일대를 중심으로 가장 왕성한 활동을 전개하던 박민홍(朴珉洪) 의병부대와 연합활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박민홍은 심남일 혹은 전해산(全海山) 휘하에서 의병활동을 하다가 분진하여 1909년부터 나주에서 독자적인 의병부대를 편성하여 활동하였다. 이때 박민홍 의병부대의 제1초(第一哨) 십장(什長)에 임명되어 의병전쟁을 수행하였다. 박민홍 의병부대 휘하에서 총기 15정으로 무장한 30여 명 규모의 의병부대를 이끌었다. 1909년 1월 11일부터 4월에 이르는 기간 나주군내에 활동하였다. 1909년 2월 26일 남평군(南平郡) 덕룡산 전투에서 심남일 의병부대의 선봉장을 맡은 강무경 의병부대와 연합해 일제 군경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그러나 다음날인 2월 27일 일본 군경 영암수비대와 금산군(錦山郡) 일대에서 교전 중 박민홍을 포함한 20여 명이 전사하면서 박민홍 의병부대는 사실상 해체되었다.
이후 다시 심남일 의병부대 소속으로 활동하였다. 심남일 의병부대는 다른 부대와 연합하기도 했으나 상황에 따라 여러 개의 소규모 부대로 나누어 활동하기도 하였다. 의병부대의 소규모화는 활동 지역을 확대하고 일제 군경의 추적을 효과적으로 피하려는 목적에서 추진되었다. 부대의 분화 시기는 1909년 봄을 전후한 시기였고, 분화된 의병부대는 기존 심남일 의병부대의 지도부가 지휘를 맡는 경우가 많았다. 1909년 4월경부터 8월까지는 박사화 의병부대의 휘하에서 총기 12정을 휴대한 약 30명 남짓의 소규모 부대의 제1초 십장으로 임명되어 주로 전라남도 영암군내에서 활동하였다. 박사화 의병장은 1909년 일제 군경의 의병 탄압이 강화되면서 부하들과 함께 귀순 의사를 표시하였으나, 결심을 바꾸어 다시 의병활동을 하다가 동년 10월에 붙잡혔다.
1908년 10월 심남일 의병부대에 가담한 이후 여러 차례 전투는 물론 친일 부호로부터 군자금 모금을 하면서 의병부대의 활동을 밀고하려 했던 친일 밀정을 처단하였다. 전라남도 영암군 종남면(終南面) 화수동(花水洞) 동장 김치수(金致水)가 의병부대의 활동에 대해 험담을 하고 일본 관헌에게 밀고하려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에 이복근(李復根)·김행규(金行圭)와 함께 1909년 7월 상순경 고막등(古幕登) 뒤쪽 산중에서 그를 처단하였다.
밀정 처단 등의 의병활동을 하던 중 1909년 9월부터 일제의 ‘남한대토벌작전(南韓大討伐作戰)’이 본격화되면서 호남 지역 의병들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이 이루어졌다. 그 결과 당시 호남의병을 이끌었던 심남일·전해산·강무경 등 주요인물을 비롯해 많은 의병들이 체포되거나 죽임을 당하였다. 이러한 때 1909년 9월 나주의 영산포(榮山浦)에서 일본 헌병대에 붙잡혔다.
이 일로 1910년 6월 13일 광주지방재판소에서 소위 폭동 및 살인·강도의 명목으로 교수형을 받았다. 이에 불복해 항소하였지만, 1910년 7월 23일 대구공소원에서 여러 증거가 충분하다는 이유로 기각되었다. 다시 상고하였지만, 1910년 8월 23일 상고심에서도 최종 기각되면서 교수형이 확정되어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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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결문(대구공소원, 1910. 7. 23) [판형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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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결문(고등법원 형사부, 1910. 8. 23) [판형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