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당 안의 흡연실
1분 앉으면 1분 부처 - 니시지마 와후(西禳 和夫)
주말엔 누워서 지낸다. 소파와 뒤엉켜 한가롭게 시간을 마셔버리는 게 여가선용이다. 가뭄에 콩 심듯 책을 보며 인생의 길을 찾고, 가뭄에 굶듯 텔레비전을 보며 세상의 환(幻)에 취한다. 요즘은 아무 데서도 메이저리그 중계를 하지 않아 서운하다. 불교TV까지 훑고 난 새벽녘, 리모컨으로 채널을 이리저리 휘젓는다. 가끔 일본의 여러 볼거리와 맛집을 소개하는 방송이 걸린다. ‘화려하면서도 정갈하다’, ‘인공과 자연의 콤비가 완벽하다’, ‘가장 동양적이면서도 가장 서양적이다’ 운운. 일본의 풍광엔 형언하기 힘든 아우라가 있다. 식민지배에 대한 민족적 반감을 상쇄하고도 남음이 있다. 마약도 아닌 것이 교묘하게 사람을 홀린다.
다만 리포터들의 가식적인 대화는 귀에 거슬린다. ‘나는 당신에게 친절하기 위해 태어났다’는 듯한 억양엔 ‘나를 계속 귀찮게 하면 참다못해 너를 죽여 버릴지도 몰라’라는 내공이 묻어난다. 그렇다고 루스 베네딕트의 『국화와 칼』을 읽은 티를 낼 것까지는 없다는 생각. 이색적인 말투를 ‘평화를 사랑하면서도 전쟁을 숭상하는’ 극단적 양면성의 증거로 제시한다면 견강부회다. 『국화와 칼』은 태평양전쟁 막바지, 일본 점령을 목전에 둔 미 국무부의 의뢰로 작성한 일종의 보고서다. 효과적인 통치를 위해 일본인들의 속내를 떠보자는 심산이었다. 진주만 공습의 참상과 공포, 적개심에 물든 이성은 왜곡과 과장, 일반화의 오류에 감염되기 쉽다. 어느 시인 말마따나 급하면 ‘나뭇잎조차 무기로’ 사용하는 게 인간이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칼에게 국화의 잔가지를 쳐내는 재미 이상의 것을 요구하기 마련이다. 여하튼 나의 일상은 그들과 별 관계없이 흘러간다. 꽃꽂이를 즐기지 않으며 과일은 주로 아내가 깎는다.
재작년 한일불교문화교류대회 취재차 5일간 홋카이도(北海島)에 머문 적이 있다. 일본 조동종(曹洞宗)의 본산인 중앙사(中央寺)는 1873년에 창건됐다. 삿포로 도심 한복판에 있는 절이다. 법당과 요사가 복도로 연결된 구조다. 밖으로 나가지 않아도 가옥과 가옥을 옮겨 다닐 수 있다. 비가 많이 내리는 기후를 반영한 조치다. 내부는 일본인들이 없으면 못 사는 다다미방이다. 오색찬란한 불단(佛壇)엔 부처님께 공양하는 밥인 마지(摩旨)가 놓였다. 큼지막한 놋그릇에 쌀밥만 수북하게 담아 진상하는 우리의 풍습은 상징성이 부각됐다. 부처님의 거대한 법력을 경배하면서 보시의 푸짐함과 애틋함을 에둘러 표현한다. ‘밥이 보약’이란 해묵은 정서까지. 반면 일본의 마지는 실제적이다. 개다리소반에 밥 한 공기와 너덧 가지의 찬을 낸다. 금방이라도 먹을 수 있는 진짜 식사다. 당구공만한 밥에 갓난아기 주먹만한 찬, 일본인들의 소식 습관을 반영한다. 법당 실내 한구석에 마련된 ‘흡연실’은 양촌리 어린이가 처음 구경하는 스모나 가부키처럼 생경하다. 관념적 예경과 실용적 생활의 뒤죽박죽.
니시지마 와후는 말년에 머리를 깎았다. 출가(出家)라고 표현하기 애매한 게, 멀고 먼 산중의 절로 몸을 숨기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더불어 가족과 재산을 포기하지 않아도 되는, 비교적 녹록한 선택이다. 대처승 관습 덕분이다. 일본은 아들이 아버지의 사찰을 물려받고 스님이 스노보드를 타거나 고깃집을 운영해도 그다지 화제가 되지 않는 나라다. 동경대 법대 출신의 30년 ‘증권맨’ 니시지마는 스님이 되기 전부터 좌선(坐禪)에 관심이 많았다. 선가(禪家) 고유의 정결과 검소, 탐구의 자세를 경영에 접목해 유명해졌다. 사찰 주지이자 대기업의 고문이라는 특별한 이력의 내막이다. 사실 일본에는 현직에서 물러나 승려로서 여생을 보내는 오피니언리더들이 상당수 존재한다. 조금 색다른 은퇴설계 혹은 고도로 숙련된 명예욕이랄까. 이룰 것 다 이루고 누릴 것 다 누린 뒤에 말하는 무소유는 부러우면서 불쾌하다.
한 생각이 말했다. ‘내 목이 어디로 갔지?’
무사도란 죽음을 발견하는 것. - 엽은(葉隱)』
일본인들의 과잉 친절은 사무라이(侍)들로부터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시종일관 굽실거리던 공포의 세습이란 짐작. 가마쿠라 막부(幕府)가 성립되면서 일본은 본격적인 무인정권의 시대에 접어들었다. 조정의 힘은 약화됐고 천황은 칼잡이들의 눈치를 봐야 했다. 권력의 비호로 무럭무럭 성장해온 불교계 역시 살생에 함구하면서 화를 면했다. 사무라이들은 윗사람을 보호하고 아랫사람을 살육하는 방식으로 지위를 보존했다. 살인은 일상이었고 합법이었다. 천하를 거머쥔 그들은 새로운 시대에 맞는 새로운 불교를 원했다. 호넨(法然)이 연 정토종(淨土宗)이 대표적이다. 호넨은 무사의 아들이었다. 그는 ‘나무아미타불’을 열심히 외기만 하면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의 제자 신란(親鸞)은 승려의 대처(帶妻)를 금하는 계율마저 깼다. 심지어 경건한 부부생활이 성불을 가져다준다고 꾀었다. 일본불교는 자신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을 결코 홀대하지 않았다. 설혹 부처님에게 등을 돌리는 한이 있더라도.
특히 무사들은 선(禪)에 각별한 애정을 보였다. 무사도의 교과서인 『엽은(葉隱)』이나 『오륜서(五輪書)』는 단순한 폭력이 아닌 마음의 수양을 강조했다. 칼은 잊을 만하면 찾아오는 지진과 함께 삶의 무상(無常)을 교육했다. 선(禪)은 무상이 삶의 진면목이란 덕담으로, 끊임없이 죽음을 강요하거나 감내해야 하는 이들의 불안을 위로했다. 막부의 주인은 부단히 바뀌었지만 칼의 권세는 견고했다. 무사들은 복잡한 사유와 형식을 거부한 채 단박에 깨우치려는 선사들을 페르소나로 삼았다. 활인검(活人劍)의 교훈을 빌미로 잔인을 꾸몄고 무모를 가렸다. 활(活)이냐 살(殺)이냐에 따라 까마득하게 달라지는 감정과 처지는 고려하지 않았다. 한 생각 끊으면 성불(成佛)이듯 베거나 베이면 그만이었다.
중국인들은 선(禪)을 찬(chan)이라고 읽는다. 불교가 태동한 인도에서는 디야나(dhyana). 한국의 조계종은 ‘Seon’이란 이름으로 간화선을 해외에 알리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하지만 세계적으로 선은 일본어 발음인 젠(Zen)이라고 불린다. 스즈키 다이세쓰(1870~1966) 덕분이다. 그는 1910년대부터 유럽과 미국을 순회하며 선과 일본문화를 강연, 세계적인 불교학자로 떠올랐다. 백인들은 서양의 이성에선 찾아보기 힘든 직관과 비움의 미학에 매혹됐다.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스즈키는 메이저리그에 빠르고 정확한 일본야구를 선보인 스즈키 이치로다. 20세기의 스즈키는 미국인들에게 선의 종주국이 일본이라는 인식을 심어줬다. 아쉽게도 그때는 ‘박찬호’와 같은 존재가 없었다. 일본의 불교학자들은 ‘불교는 인도에서 싹터 중국에서 꽃을 피운 뒤 일본에서 열매를 맺었다’는 제국주의적 발언을 거침없이 내뱉고 즐겼다. 한국은 그저 외양간의 소똥에 붙은 파리로 여겨지던 시절이다.
이겨서 다 갖거나, 져서 죽거나
선(禪)과 전(戰)이란 글자에 공통된 것은 단(單)이다. 누구든지 어떤 때에도 오직 하나다. - 이시다 고쿠류(石田黑龍) 스님의 태평양전쟁 당시 잡지 「대승선」 기고문
홋카이도가 일본사에 편입된 때는 메이지유신 직후인 1869년이다. 천황의 특명을 받은 개척사(開拓使)들은 가오리처럼 생긴 섬의 면면을 살피며 이용가치를 셈했다. 황금어장이 있었고, 무엇보다 러시아의 사할린과 마주해 북벌의 거점으로 삼기에 좋았다. 섬은 서울의 강남과 같이 철저한 계획도시로 꾸며졌다. 바둑판을 본떠 땅을 갈랐고 유럽과 미국의 건물을 베껴 지었다. 붉은 벽돌을 차곡차곡 쌓아 만든 삿포로맥주 공장과 옛 도청 청사에서는 탈아입구(脫亞入歐, 아시아를 극복하고 유럽과 어깨를 나란히 한다)의 열망을 볼 수 있다.
신(新) 헌법은 신불분리(神佛分離)를 선언했다. 천황을 부처님으로부터 떼어놓아 독자적인 신성과 권위를 부여하는 대신 부처님은 강등시켰다. 사무라이들은 결코 천황에게 칼끝을 겨누지 않겠으며, 열도의 바깥에서만 성질을 부리겠다는 암약(暗約)으로 칼을 지킬 수 있었다. 억조창생은 천황 앞에 정렬해 엎드렸고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근대화에 성공했다는 긍지는 무력과 자본을 만나 광기로 번성했다. 신정부의 목표는 일본의 입지를 천신(天神) 아마테라스 오오카미의 후손인 신무천황의 성세로 되돌려 놓는 것이었다. 신의 나라. 천황의 실체는 완벽하게 은폐됐고 말씀과 장식으로만 대중 앞에 섰다. 러시아를 물리치고 한반도를 훔쳤을 때 그들은 ‘까라면 까’의 위력을 실감했다. 1차 세계대전에서 승전국의 지위를 획득하고 1940년 올림픽을 유치하게 됐을 때 신국(神國)은 낙원의 입구까지 도달했다. 그러나 바벨탑은 거기서 무너졌다. 천황은 맥아더라는 강한 인간 앞에서 본디 자신은 나약한 인간이었음을 실토해야 했다.
살아남기 싫은 자들은 할복으로 천황에게 용서를 빌었고, 살아남고 싶은 자들은 새롭게 등장한 강자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다만 이전보다 훨씬 완곡하고 신사적인 방식으로. 각각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LA 다저스, 신시네티 레즈의 유니폼을 복사한 듯한 요미우리 자이언츠, 주니치 드래곤즈, 히로시마 카프의 유니폼(지금은 달라졌지만), 아울러 영어로 표기한 선수의 이름에서 입구(入歐)의 새로운 버전인 입미(入美)를 본다. 그리고 ‘메쿠도나루도(Mcdonald).’ 태생적으로 안 되는 발음을 꾸역꾸역 구강에 밀어 넣는 노력은 카멜레온의 고달픈 변신을 닮았다. 먹고살아 보겠다고, 용쓰는구나.
1917년 조선총독부에 의해 일본불교 시찰단이 최초로 파견됐다. 「조선불교총보」의 기자로 동행했던 권상로 스님은 도쿄의 정경을 보고 문화적 충격을 받았다. “승강기로는 도솔천궁을 십분의 일이나 갔다 오고 비행선으로는 극락세계를 이분의 일이나 갔다 온 것 같다”며 얼얼한 기분을 표현하고 있다. 세상의 환(幻)에 취해 있던 한국 불교계의 단면이다. 우리의 근대는 외세에 의한 근대였고 습격당한 근대였다. 정신을 차렸을 때 이미 나라는 남의 손에 넘어간 뒤였다. 그러나 증오하고 거부하기에 외세는 너무나 아름답고 강했다. 물 건너온 것들에 대한 동경은 유행이 바뀌고 정권이 갈려도 움츠러들지 않는다. 영어(英語)가 영어(囹圄)해버린 학교. 카드 빚 눈부신 청담동 명품거리. 불성(佛性)은 입시 얻어먹기도 버겁다.
벚꽃이 떨어질 때 세상은 아름답다. 누군가 죽어줘야 또 누가 산다.
---------------- 장영섭 ː 1975년 서울에서 태어나 연세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했다. 2002년 불교신문에 기자로 입사해 현재 취재차장으로 재직 중이다. 지은 책으로는 44인의 조계종 고승들과 대담한 내용을 엮은 『그냥, 살라』, 스님들의 교육기관인 ‘강원(講院)’의 어제와 오늘을 이야기한 『떠나면 그만인데』, 전국 42곳 사찰에 깃든 풍물과 역사에 관한 인문학 에세이 『길 위의 절』, 조사선(祖師禪)의 핵심에 대해 기술한 『공부하지 마라-선사들의 공부법』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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