셔츠 24회
한 참이나 그렇게 보낸 후 여자가 주방에서 덜그럭 거리더니 쟁반에 술 한 병과 함께
두부김치를 내 온다. 그리고 그 앞에 앉아서 술을 따른다. 그의 잔과 여자의 잔에, 그는
무슨 말을 먼저 해야 할지 고민한다. 어떻게 서두를 꺼내야 할지 막막할 뿐이다. 아니
사회생활을 하면서 대화를 한다는 것이 이렇게 어렵다는 것을 지금 깨닫는 것이다.
“왜 오셨는지는 알아요. 하지만 묻지 않으시는 것이 좋을 것 같아요.”
여자가 그를 쳐다보면서 말한다.
“아니, 아무리 그렇더라도”
그의 말이 더듬어진다. 그 다음 말이 생각나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속에서는 그가 할
말이 꿈틀 거리고 있었다. ‘어떻게 된 거지요?’ ‘그녀는 어디 갔나요?’ ‘다쳤나요?’ ‘다른
곳으로 이사 갔나요?’ ‘아니 내가 싫다고 하던가요?’ ‘나를 만나는 것이 부담스럽다고 하
던가요?’ ‘다른 남자 친구가 생겼나요?’ ‘혹시 백화점에서 잘린 것은 아닌가요?’ 심지어
죽었나요?’ 하는 질문까지 목안에서 맴도는 것이다.
“그냥, 동생이 선생님을 만나면서 고민을 많이 하는 것 같았어요. 선생님을 만나면 즐
겁고 행복하고 하지만 선생님을 만나고 돌아서면 아버지와 학창시절의 선생님 모습이
떠올라서
힘이 든다고,”
그는 여자의 말을 들으면서 목이 마르다는 생각을 한다. 앞에 있는 물 컵을 들어 단 숨
에 마신다. 하지만 그가 목마른 것은 물이 아니었다. 그는 다시 잔을 들어 술을 한 입에
털어 넣는다. 그래도 목은 말랐다. 마른 목안에는 뇌 속에서 생성된 단어들이 가슴으로
내려가다가 울컥거리는 가슴의 되받아치기에 입안으로 올라와 어정거리고 있다. 물기 없
는 말들은 이사라던가 사표라던가 남자친구라던가 내가 싫다, 라던가 하는 것들이 접속어
를 찾지 못하고 서로 엉키며 설키여 제 멋대로 돌아다니다가 다른 단어와 부딪쳐 웅성거
리고 있었다.
“동생이 지난달에 마지막으로 여기 왔었어요. 그리고 다음 달에 선생님께 셔츠를 다 보내
드려야 하겠다고 하더라고요. 제가 물었어요. 왜 그러냐고. 마음이 변했느냐고?”
그가 고개를 들어 여자의 얼굴을 보자 여자는 급히 손으로 눈 가를 훔친다.
“동생은 선생님이 싫어서가 아니었어요. 그냥 선생님께 다가서는 마음을 다잡느라고 애를
많이썼지요. 하지만 이곳에 있어서는 그럴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지요. 선생님을 떠나는 것이
선생님을 위해서 가장 좋은 것이라는 판단을 했는지 제게 와서 떠나겠다고 했어요. 회사에
사표도 냈다고하면서, 제가 물었어요. 어디로 갈 것인지를. 하지만 동생은 대답을 하지 않았
어요. 그냥 멀지 않은 곳이지만 이곳으로 오기는 쉽지 않은 곳이라는 말만 했어요. 그날
동생은 술을 많이 마셨어요. 그리
고 저와 함께 잤는데 밤새 잠을 못 이루는 것 같았어요. 동생이 뒤척이는 바람에 나도 잠을
시원하게 자지 못했거든요. 하지만 나는 다시 말을 할 수 없었어요. 동생의 마음이 어떨까
생각하니 그 어떤 말도 할 수가 없었지요. 그러고 나서 일주일도 안 돼서 동생에게서 전화가
왔어요. 떠난다고요.”
10
계속 울리는 핸드폰 소리에 눈을 뜬 그는 한 손으로 머리를 만지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목
이 마르다. 그는 전화를 무시하고 냉장고에 가서 물부터 찾아 꿀꺽꿀꺽 마신다. 거실이고 방
이고 엉망이었다. 언제 청소를 했는지, 언제 술을 안 마셨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물을 마
시고 침대 곁으로 오는데 전화 벨 소리가 멎는다. 그는 다시 몸을 돌려 거실로 나가서 창을
가로막은 블라인드부터 걷는다. 비가 조금 내리고 있었다. 우산을 쓰려면 귀찮을 것 같고 쓰
지 않으면 불편 할 것 같을 정도로 비가 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