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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점] 흙 묻은 장화
다쓰코가 묵고 간지 열흘쯤 지나서였다.
현관문을 여니 어딘지 집안 분위기가 달라진 느낌이 들었다. 뒤이어 요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여보, 이제 오세요!”
장지문이 열리며 나쓰에가 아기를 안고 나타났다.
“일찍 왔군.”
게이조는 내심 반가움을 금지 못했다. 나쓰에도 집을 그리워했을 것이라고 생각하니 언짢은 마음은 눈녹 듯 사라졋다.
“요코가 먹을 우유를 구하기가 여간 어렵지 않있거든요.”
“기차가 몹시 혼잡했겠군.
“네. 하지만 집에는 우유가 바로 손닿을 데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니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서 서둘러 돌아왔어요.”
“……….”
“자, 보세요. 많이 컸지요? 보채지 않아 정말 키우기 쉬운 아이에요.”
“………..”
“정말이에요. 좀처럼 울지 않아요.”
나쓰에는 요코를 게이조에게 넘겨주려고 했다. 게이조는 시큰둥한 얼굴로 나쓰에를 바라보았다.
“여보, 처음으로 요코가 집에 온 날이잖아요. 한번 안아 주세요.”
나쓰에는 그때서야 게이조의 기분이 언짢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요코를 유아용 침대로 안고 갔다. 도오루와 루리코가 쓰던 침대였다.
‘아기에 대한 이야기만 떠들고 도오루나 나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없군.’
게이조는 이 말이 하고 싶은 것을 꾹 눌러 참고 옆방에 가서 옷을 갈아입으려고 했다. 나쓰에가 따라 들어올 줄 알았는데,
“쓰기코, 아저씨 옷 갈아입는 것 좀 도와드려라.”
하고 말하는 그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순간 게이조는 화가 치밀었다. 전에 나쓰에는 게이조가 옷 갈아입는 것을 거들어 주지 않은 적이 단 한번도 없었다.
“아줌마 불러와.”
게이조는 옷장에 손을 대려고 하는 쓰기코에게 말했다.
“지금 아기 기저귀를 갈아주고 계신데요.”
쓰기코는 난처한 듯이 말했다. 게이조는 형용할 수 없는 외로움이 온몸으로 번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끝나면 오라고 해.”
게이조는 버티고 선 채 말했다.
“요코야, 요코야.”
도오루가 들뜬 목소리로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 안 돼. 도오루, 요코가 자고 있잖아.”
나쓰에가 부드럽게 타이르는 소리가 들렸다. 게이조는 언제 나쓰에가 방에 들어오려나 하고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기다리면서 여전히 옷장 앞에 버티고 서 있었다.
“오랫동안 불편하게 해 드려서 정말 미안해요.”
밤이 되어서야 비로소 나쓰에는 집을 비운 것에 대해 사과했다.
“응.”
‘뭐야, 이제서야.’
하고 게이조는 생각하면서도 나쓰에의 말 한 마디로 저녁때부터 쌓였던 불만이 스르르 녹는 것을 느꼈다.
“이불이 좀 눅눅한 것 같네요. 내일 잘 말려 놓을게요.”
나쓰에가 게이조의 이불 속으로 들어오며 말했다.
“좀 여윈 것 같군.”
“그래요?”
“응, 아니, 그렇지 않은 것 같기도 하고.”
“당신은 살이 좀 찐 것 같아요.”
나쓰에의 목소리가 정답게 들려왔다.
“응, 바람을 피우지 않았다는 증거지.”
나쓰에가 킥킥 웃었다.
“뭐가 우스워?”
“당신은 절대 바람을 피울 분이 아녜요.”
“얕잡아 보지 말라구.”
“마냥 풀어 줘도 바람은 못 피울 분이라니까요.”
“날 너무 믿는군.”
무라이의 길다란 손가락이 이상하게 머리에 생생히 떠올랐다. 게이조는 나쓰에를 힘껏 껴안았다.
바람이 약간 부는지 이따금 숲이 술렁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무언의 한때가 흘러갔다.
“역시 페치카는 따뜻하군요.”
나쓰에도 게이조도 몸이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다쓰코가 와서 자고 갔죠?”
“도오루가 아주 좋아했소. 양장을 하고 왔더군.”
“어머, 다쓰코가요? 어쩐 일일까?”
“심경이 변한 거겠지. 기모노 차림도 잘 어울리지만 다쓰코 씨는 양장이 더 잘 어울리는 것 같더군.”
“………..”
“다리가 예쁘더군. 가늘지도 굵지도 않고…….”
“…………”
“발목에 탄력이 있더군. 무용을 하기 때문일까?”
“다쓰코는 어디서 잤어요?”
“이층에서 도오루와 같이 잤소.”
“…………”
“왜 그래?”
“다쓰코가 그렇게 예뻤어요?”
“그래, 그 사람은 다리 맵시와 표정이 좋아.”
“싫어요.”
“………….”
“싫다니까요.”
“바보같이.”
게이조는 나쓰에의 눈가에 입을 맞추었다. 나쓰에는 말없이 게이조의 가슴에다 손가락으로 뭐라고 쓰고 있었다.
“무슨 소릴까?”
마루의 유리창에 부딪히는 희미한 소리에 게이조와 나쓰에는 고개를 들고 귀를 기울였다.
“어머, 눈일지도 몰라요.”
“눈? 그래, 그럴지도 모르겠군.”
나쓰에는 가만히 자기 자리로 돌아가,
“요코의 생년월일은 언제로 올렸어요?”
하고 물었다. 게이조는 자신도 모르게 입을 삐죽거렸다.
“……….”
“언제로 올렸는지 기억 안나요?”
“응………”
“정말 태평이시네요.”
나쓰에는 당연히 게이조가 출생 신고를 했을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게이조는 자기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기를 데려온 지도 벌써 40일 가까이 지났다. 아직 출생 신고를 하지 않았다고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출생 신고를 하려면 의사의 증명이 필요했다. 게이조는 의사로서 자기 지위를 이용하는 입장에 서게 되는 것이 망설여졌다. 그러나 단지 그런 이유 때문에 신고가 늦어진 것은 아니었다.
“곤란해요, 생일을 모르면………”
“그러나 지금 당장 생일을 알아 둬야 할 필요는 없잖소?”
“그렇지 않아요. 사람들이 언제 낳았냐고 물으면 모르겠다고 대답할 수야 없잖아요?”
“당신은 저 애를 역시 한동안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지 않을 생각이오?”
“네.”
“그럼 정말 40일 전에 낳았다고 할 참이오?”
“제가 낳은 아이라고 하려면 그럴 수밖에 없잖아요. 그렇지 않으면 날짜가 맞지 않는 걸요.”
“4개월이 지난 아이를 40일 전에 낳았다고 한다? 그건 좀 무리 아닌가? 남들이 보면 아마도 거짓말이라고 할 거요.”
“남들에게는 절대 보여주지 않을 거예요.”
“………..”
“여보, 요코가 우는 소리 들어본 적 거의 없죠?”
정말 요코는 울지 않았다.
‘사이시는 그 아이의 울음소리에 시달려서 신경 쇠약에 걸렸다고 들었는데…..”
역시 나쓰에는 아이를 잘 키우는 것 같았다. 게이조는 새삼스럽게 남녀의 차이를 실감했다.
“우유를 데워 올게요.”
나쓰에는 잠옷 위에 하오리(일본 옷 위에 입는 짧은 겉옷)를 걸치고 부엌으로 갔다.
게이조는 착잡한 마음으로 방구석에 놓여 있는 유아용 침대로 눈길을 돌렸다.
‘나는 저 애를 사랑해 주려고 맡았다. 그런데 요코라고 입밖에 내어 부르기도 싫다. 도저히 나쓰에를 따라갈 수 없다. 나쓰에는 저 애가 사이시의 자식인 줄 모르니 그럴 수밖에 없지. 알았다면 절대 맡지 않았을껄. 하지만 이런 한겨울에 나쓰에는 밤에 제대로 잠도 못 자고 일어나 우유를 데우고 기저귀까지 빨아 대야 하니 큰일이야. 난 그것을 말없이 구경만 해야 하나. 아무것도 모르는 나쓰에가 가엾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는다. 나쓰에는 그 날 무라이와 단둘이 있고 싶었기 때문에 루리코를 밖으로 내보낸 거야. 지금 나쓰에는 마땅히 받아야 할 벌을 받고 있는 거라구.’
나쓰에는 우유병을 손에 감싸듯이 하고 방으로 들어왔다.
“여보, 역시 눈이 와요. 벌써 하얗게 쌓였어요.”
“그래?”
게이조는 건성으로 대답하고는 일부러 자는 척을 했다.
아침 일찍부터 도오루가 요코를 보러 방으로 들어왓다.
“요코야, 요코야, 까꿍.”
도오루가 귀여운 목소리로 요코를 열심히 얼렀다.
아기가 하나 있는 것으로 이렇게 집안이 떠들썩한 것일까 하고 생각하며 게이조는 이불 속에 엎드린 채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도오루, 아이가 그렇게 예뻐?”
“네, 예뻐요. 루리코보다도 훨씬 더 예뻐요.”
“루리코보다도 더 예쁘다고?”
“네, 울지 않으니까요.”
게이조는 자기도 모르게 담뱃재를 요 위에 떨어뜨렸다.
도오루가 소년이 되어, 아니면 청년이 되어 만일 요코의 비밀을 알게 되면 그땐 대체 어떻게 될까 하고 생각하며 게이조는 도오루를 바라보았다. 신경질적으로 약간 눈썹을 찌푸리는 버릇이 있는 도오루가 청년으로 성장한 모습이 눈앞에 선하게 떠올랐다. 도오루는 자신을 쏙 빼닯았다. 그래서 게이조는 정의감이 강한 청년 도오루를 쉽사리 상상할 수 있었다.
‘하나밖에 없는 아들에게 일생 동안 원망을 들을 짓을 한 것이 아닐까?’
출생 신고를 하지 않은 것을 게이조는 내심 다행으로 여겼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떻게 해서든 저 아이를 다른 사람에게 넘겨줘야겠어.’
“도오루, 엄마 좀 불러와.”
“네.”
도오루가 방에서 뛰어 나갔다.
“부르셨어요?”
앞치마를 두른 나쓰에가 들어왔다. 게이조는 이불 위에 잠옷 차림으로 똑바로 앉아 있었다. 화가 난 듯한 남편의 모습을 보고 나쓰에는 약간 찔끔했다.
“저 애를 어떻게 할 수 없을까?”
“네?”
나쓰에는 남편이 하는 말을 잘 알아들을 수 없었다.
“아기가 있으니 시끄러워서 잠을 잘 수가 없소.”
“어머, 잠을 설치셨어요? 미안해요.”
나쓰에는 저자세로 나왔다.
“요코는 별로 울지 않는 편인데요. 그래도 주무시는 데 방해가 됐나 보군요.”
“울지 않는 어린애는 어쩐지 겁나. 아무튼 성가셔.”
“그럼 오늘밤부터 요코하고 전 이층에서 잘게요.”
“아니, 난 저 애의 부스스한 머리나 짙은 눈썹, 거기다 울지 않는 것도 싫다니까.”
“어머, 요코의 좋은 점만 골라서 싫어하시는군요.”
“어쨌든 까닭 없이 싫어. 여러 말 하지 말고 다카기에게 돌려줘요. 다행히 호적에도 아직 올리지 않았으니까.”
나쓰에의 얼굴색이 이내 새파랗게 변했다.
“아니! 아직 호적에도 올리지 않으셨군요?”
요코를 돌려주라는 말보다 호적에 올리지 않았다는 사실이 나쓰에에게는 더 큰 타격이었다.
“응, 아직.”
“지독한 양반! 정말 지독해……”
핏기가 가신 나쓰에의 입술이 바르르 떨렸다. 나쓰에는 찌르듯이 게이조를 쏘아보았다. 그 눈빛에 게이조는 질렸다. 지금까지 나쓰에의 이런 날카롭고 싸늘한 눈초리는 본 적이 없었다.
나쓰에는 게이조에게서 시설을 돌리지 않고 요코를 감싸려는 듯 침대 옆에 앉았다. 나쓰에의 그런 거동에는 섬끅할 만큼 요기가 서려 있었다 비로소 나쓰에가 만만치 않은 상대라는 것을 게이조는 이때 절실히 느꼈다.
게이조는 평소 상냥한 나쓰에에게 습관이 붙어 있었다. 나쓰에의 다소 고집스러운 성격이나 한번 주장하면 절대 물러나지 않는 면도 게이조는 귀엽게 생각되는 여자다운 일면이었다. 고집이나 심술을 부릴 때에도 나쓰에의 말씨나 태도에는 상냥하고 감미로운 데가 있었다.
“여보, 부탁이에요, 제발 부탁이에요. 저, 아기를 기르고 싶어요.”
하는 말을 상냥하게 조용히 몇 번이고 되풀이하는 나쓰에에게 어쩔 수 없이 게이조는 양보해 왔다. 그는 양보하면서도 기분이 언짢았다.
그러나 지금 나쓰에의 이런 싸늘함은 따뜻한 피나 눈물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게이조는 루리코가 죽은 직후부터 나쓰에를 미워한 것이 사실이었다. 무라이가 남긴 키스 자국이 아내의 흰 목덜미에 남아 있는 것을 보고 죽여 버리려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아내에 대한 사랑의 변형이라고 할 수도 있었다. 그런데 지금 나쓰에가 보여준 반응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온통 미움만을 맏고 있는 것 같아 게이조는 괴로웠다. 그는 자신은 나쓰에를 미워하지만 나쓰에는 자신에게 상냥하게 대해 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녀에게 존경과 사랑을 받고 싶었다.
이윽고 나쓰에는 말없이 방에서 나갔다.
‘요코를 돌려주라는 것은 씨도 먹히지 않는다.’
게이조는 침대로 다가가 요코를 빤히 바라보았다. 요코는 무심히 웃고 뭔가 말하려는 듯이 목구멍에서 소리를 내었다.
‘나는 이 애를 사랑할 것을 인간으로서 생애의 과제로 삼았지 않았는가.’
사이시를 닯은 눈썹 언저리를 바라보면서 그는 몹시 마음이 흔들리는 자신을 의식했다.
‘사랑한다는 것은 대체 어떤 것일까?’
게이조는 창 너머로 첫눈이 내린 뜰을 내다보았다. 새하얀 눈이 때때로 안개처럼 뿌옇게 바람에 흩날렸다.
‘나는 정말 이 애를 한평생 사랑하려고 하는 것일까?’
게이조는 요코라는 이름을 입밖에 내어 부르는 것조차 힘들었다. 사이시의 일이 마음에 걸렸다.
‘이 아이에게는 아무 죄도 책임도 없지 않은가?’
논리적으로는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도저히 안아 줄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웃는 요코에게 웃어보일 수도 없었다.
“식사하세요, 아빠.”
방 앞에서 도오루가 말해다.
나쓰에는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떨구고 식탁 앞에 서 있었다.
도오루가 말했다.
“아빠, 파파는 아빠란 뜻이에요?”
“응, 그래.”
“왜 파라라고 하는 거죠?”
“담배를 빡빡 피우니까 그렇지.”
쓰기코와 도오루는 웃었으나, 나쓰에는 쌀쌀한 눈초리로 흘끔 쳐다볼 뿐이었다.
“그럼 말이에요, 엄마는 왜 마마라고 하죠?”
“엄마는 말이지, 맘마를 만들어 주기 때문이야.”
“그럼 쓰기코 누나가 우리 엄마게요?”
게이조와 쓰기코는 소리내어 웃었다. 그러자 나쓰에가 말했다.
“도오루, 파파도 마마도 영어야. 맘마를 만들어 주기 때문에 마마라고 부르는 게 아니야.”
“흥, 그래도 난 담배를 빡빡 피우니까 파파고 맘마를 만들어 주니까 마마라고 하는 게 좋은데.”
도우루는 게이조를 보면서 말했다.
“그런 건 엉터리야, 도오루.”
나쓰에는 도오루에게 부드럽게 말했다.
게이조는 내키지 않는 식사를 얼른 마치고 옷을 갈아입기 위해 일어섰다. 나쓰에가 따라 들어왔다.
“괜찮아. 혼자 갈아입겠소.”
나쓰에는 말없이 게이조의 뒤에서 와이셔츠를 입혀 주었다. 그러고는 손을 그의 어깨에 얹으며 말했다.
“요코는 돌려줄 수 없어요. 만일 돌려준다면 전 죽어 버릴 거예요.”
게이조는 한시름 놓았다. 나쓰에가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보다는 차라리 날카롭게 항의해 오는 편이 훨신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잘못했소. 잠을 설쳐서 그랬던 모양이오.”
나쓰에는 무릎을 꿇고 앉아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양말을 신겨 주었다. 먼저 양말을 밖으로 뚜르르 말아서 발끝에 댄다. 그런 다음에 그것을 도로 풀면 된다. 신겨주는 쪽도 신는 쪽도 십 년 동안 길들여져 호흡이 잘 맞았다. 거의 40일 만에 나쓰에의 부드러운 허벅지에 발을 얹어 놓고 다시 양말을 신게 되자 게이조는 새삼스럽게,
‘부부는 부부로구나.’
하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양말을 신겨주고 신는 호흡이 아무리 잘 맞아도 지금 두 사람의 마음은 어딘가 엇갈려 있었다.
게이조는 밤의 부부 생활도 양말을 신겨주고 신는 것처럼 어쩌면 길들여져 있는 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부부의 참된 결합은 몸 이외에 더욱 깊은 마음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닐까? 우리 부부는 지금 성생활 이외의 또 다른 어떤 공감할 수 있는 것을 갖고 있는가?’
“어째서 여태 출생 신고를 하지 않으셨어요?”
게이조가 벗어둔 잠옷을 개면서 나쓰에가 물었다.
“왜 출생 신고를 하지 않았느냐고 따져 물으면 곤란해. 바빠서 그랬소.”
“바빠서라고는 하지만, 벌써 한 달도 더 지났잖아요?”
“음………”
게이조는 서둘러 변명할 말을 생각해 냈다.
“하긴 그렇군. 오늘내일 하는 사이에 어느새 그렇게 날짜가 지나갔나? 세월 한번 빠르군.”
“당신은 무엇보다 착실한 분이라 생각했는데요.”
나쓰에의 말쿠가 훨씬 부드러워졌다.
“아무렇게나 팽개쳐 두었던 건 아니오. 병원이라는 데는 살아 있는 인간을 상대하고 있으니까 말이오. 뜻밖의 사고도 자주 생겨요. 내 몸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다구.”
“바쁘다는 건 알고 있어요. 하지만 30분쯤 시간을 낼 짬은 있을 거 아니예요?”
나쓰에는 전에 없이 강경한 어조로 말했다.
“무슨 소리야, 병원이라는 덴 30분은커녕 점심 먹을 시간도 없을 정도로 바삐 돌아가는데.”
“……….”
“오전에는 외래 환자를 보고 오후에는 회진, 그 사이사이 짬을 내어 왕진도 다녀와야 하오. 그러니 청진기만 들고 있다고 의사 노릇을 할 수 있는 건 아니잖소?”
“………..”
“사무장이나 다른 과 의사, 약제사, 거기다가 엑스레이 기사의 이야기까지 들어줘야 한단 말이오. 그뿐인 줄 아시오. 간호사의 연애 문제에서부터 환자의 신상상담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에 응해 줘야 하는 판이오. 내게 짬이 나기만을 모두들 노리고 있어요.”
잠자코 고개를 숙이고 듣고 있던 나쓰에가 고개를 들었다.
“어머, 그렇게 바쁘세요? 힘드시겠어요. 전 전혀 몰랐어요. 정말 미안해요.”
나쓰에는 기분이 이상해질 정도로 부드럽게 사과하고 나서 말했다.
“잘 알겠어요. 그러면 오늘 제가 신고하러 갔다 올게요.”
게이조는 갑자기 구제라도 받은 것 같은 착잡한 마음으로 말했다.
“응, 그렇게 해준다면 좋겠소.”
그러나 나쓰에에게 출생 신고를 맡기는 것은 본의가 아니었다. 그는 무슨 기적이라도 일어나 요코를 어디 다른 곳으로 보내 버렸으면 하고 바랐다.
‘맡아 기를 수는 있지만, 호적에 올리는 것은 왜 이렇게 어려울까?’
게이조는 현관으로 나왔다. 장화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아빠, 장화는 무척 길어요, 그쵸?”
도오루의 말에 게이조는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 나쓰에를 보고 말했다.
“이 눈길에 당신이 간다는 건 무리요. 출근하는 길에 내가 시청에 들렀다 가겠소. 병원에는 조금 늦겠다고 전화해 줘요.”
“어머, 당신이 가주시겠어요?”
나쓰에는 갑자기 밝은 표정을 지었다.
“응, 일단 병원에 발을 들여놓으면 개인적인 일로 외출한다는 건 아주 어려우니까.”
출생 신고를 너무 늦추면 나쓰에가 요코의 신상에 대해 의심을 품게 되지나 않을까 해서 게이조는 그것이 두려웠다.
“미안해요, 바쁘신데.”
생기 있는 나쓰에의 목소리를 뒤로 하고 집을 나선 게이조는 간밤에 내린 첫눈을 밟으며 천천히 걸어갔다.
‘요코를 사랑하는 것이 내 일생의 과제라고 진심으로 생각했는데.’
게이조는 주제넘게 엄청난 문제를 안게 된 것을 그제서야 후회했다.
‘사랑한다면 호적에 올리는 것을 이렇게 망설일 리가 없다.’
게이조는 버스를 타고 내린 것도 의식하지 못했다. 버스에서 내려 길을 건너려고 할 때였다. 소리도 없이 웬 지프차가 게이조의 코끝을 스치고 달려갔다. 깜짝 놀라 멈춰 서자,
“헤이.”
하고 달리는 지프차 안에서 아직 소년 티가 가시지 않은 미국 병정이 히죽 웃으면서 외쳤다.
게이조는 요코의 문제에 정신이 팔려 하마터면 지프차에 칠 뻔한 자기 자신이 서글퍼졌다.
게이조는 시청의 낡은 문기둥 옆에 선 채 여전히 망설이고 있었다.
‘나는 요코를 정말 사랑할 수 있을까?’
또다시 눈이 펄펄 내리기 시작했다. 게이조는 코트 깃을 세웠다.
‘내 본심은 요코를 사랑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나쓰에에게 범인의 자식을 키우게 하고 싶었던 것이다. 나를 배신하고 무라이와 추잡한 짓을 한 나쓰에가 요코의 정체에 대해 알고 괴로워하는 것을 보기 위해 그 애를 맡은 것이다. 하지만 사이시의 자식인 줄 알고 키우는 내 쪽이 오랜 세월에 걸쳐 더 큰 괴로움을 겪게 될 것이다. 그건 이미 각오하고 있다. 지금 난 아무것도 모르고 요코를 키우고 있는 나쓰에의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위안을 받고 잇다. 나쓰에의 부정을 한때의 마음의 방황으로 여기고 어떻게 해서든 용서할 수는 없을까? 한 번은 나도 용서한 적이 있다. 난 루리코의 죽음을 미칠 듯이 슬퍼하는 나쓰에를 용서했다. 그런데 나쓰에가 진정으로 루리코의 죽음을 슬퍼했다면 다시 무라이의 품에 안겼을 리가 없다.’
게이조는 시청 앞을 왔가갔다하면서 생각에 잠겨 있엇다.
‘나는 단 한 번도 나쓰에 이외의 여자에게 손끝 하나 댄 적이 없다. 여자 환자는 여자로서 대하지 않았다. 무라이도 내가 나쓰에를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를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 나를 나쓰에와 무라이는 무참히 배신한 것이다.’
나쓰에의 흰 목덜미에서 발견했던 보랏빛 반점은 지금도 게이조의 가슴에 아프게 아로새겨져 있었다.
‘호적에 올릴 것인가, 말 것인가?’
게이조는 시청 문기둥에 몸을 기댔다.
‘이렇게 망설이고 있는 꼴을 다카기가 본다면 뭐라고 할까?’
게이조는 부끄럽기 짝이 없었다.
“뭐야, 이게 자네의 정체였나? 네 원수를 사랑하라고? 웃기는 소리하지마. 그보다 먼저 자네 마누라나 사랑하게. 바보 같은 자식.”
다카기의 커다란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정말 난 바보야. 제 자식을 살해한 범인의 자식을 맡아 기르고 재산까지 나눠주려 하다니. 네 원수를 사랑하는 말은 글자 수로는 불과 여덟 자밖에 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여덟 자는 얼마나 터누니없이 어리석고 심오한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일까?’
철저히 어리석은 자가 되어야 한다.
“그런 바보가 세상에 하나쯤 있어도 좋지 않은가?”
하고 다카기에게 했던 자신의 말이 생각났다.
‘이왕 바보가 된 김에 나쓰에의 부정도 너그러이 용서할 수 있지 않을까?’
갑자기 눈앞에 택시 한 대가 멎었다. 문이 열리더니,
“원장님, 오랜만입니다.”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무라이였다. 길다란 눈썹이 그 어느 때보다 더욱 검고 아름다웠다. 좀 야위어서 그렇게 느껴졌는지도 몰랐다.
“야, 오랜만이오. 이렇게 바깥바람을 맞고 다녀도 괜찮소?”
“괜찮을 리가 있나요? 그래서 가까운 시일 내로 도야로 갈 생각입니다.”
무라이는 문을 연 채 차에서 내리려고 하지 않았다.
“그 후로 각혈은 멎었소?”
게이조는 무라이의 붉은 입술을 바라보았다.
‘저 입술이 그 반점을 만들었군!’
“요즘은 각혈은 멎었어요. 병원까지 모셔다 드리지요.”
“아니, 지금 난 아기 출생 신고를 하러 왔어요.”
게이조는 무라이의 입술에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아참, 축하합니다.”
무라이의 뺨에 비웃는 듯한 미소가 떠올랐다.
“원장 사모님은 아이를 낳지 못할 텐데.”
무라이는 유카코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했다.
“글쎄, 축하를 받을 만한 일인지 어떤지 잘 모르겠소.”
“네?”
“실은 나쓰에는 불임 수술을 받았었지요. 임신이 될 리가 없다고 마음을 놓고 있었는데…..역시 그 수술도 실패하는 수가 있는 모양입니다.”
무라이의 얼굴에서 비웃는 미소가 사라졌다. 그는 가볍게 입술을 깨물고 의아한 눈초리로 게이조를 바라보았다.
“여자아이라서 나쓰에가 아주 좋아해요.”
무라이는 분명히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실망의 기색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그럼 몸조심해요.”
게이조는 무라이에게 등을 돌리고는 성큼성큼 시청 안으로 들어갔다.
출생 신고를 마치고 나서 이상하게 하루 종일 마음이 안정되어 오랜만에 기분 좋게 일을 할 수 있었다.
‘출생의 비밀을 지킬 것과 아이를 사랑할 것.’
게이조는 다카기와 했던 이 두 가지 약속을 상기하면서 어두운 길을 바삐 걸어가고 있었다.
아침에 내린 눈이 녹아 장화에 묻은 진흙이 묵직했다. 집이 가까워짐에 따라 게이조의 마음은 또다시 착잡해졌다. 누가 도와줬으면 하는 불안한 생각이 고독감을 안겨 주었다. 그리고 출발점에 선 마라톤 선수와도 같은 긴장감이 가슴을 짓눌렀다.
“여보, 신고했어요?”
하며 나쓰에가 현관으로 뛰어 나올까?
“무슨 신고 말이오?”
하고 한동안 딴전을 피우고 싶은 생각도 들었다.
“나쓰에, 신고하고 왔소!”
하고 큰소리로 외치고 싶은 생각도 들었다.
요코를 자신의 호적에 올리는 문제로 얼마나 망설이고 괴로워했는지 나쓰에는 짐작도 하지 못할 것이다.
‘앞으로 나는 요코 때문에 얼마나 괴로움을 당하게 될까? 출생의 비밀을 지키는 한 가지 일만으로도 얼마나 신경을 쓰게 될까? 그러나 나는 이미 이 길을 선택해 버렸다. 어떤 괴로움도 혼자서 참아 나가야 한다!”
게이조는 마음을 가라앚히고 현관문을 열었다.
피아노 소리에 단련된 나쓰에의 귀는 극도로 민감했다. 그녀는 언제나 현관문이 열리면 곧 맞으러 뛰어 나왔다. 그런데 오늘은 나쓰에도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 집안에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신고하고 왔소.”
하고 말하려던 게이조는 순간 맥이 풀렸다. 그는 시무룩해져 흙투성이가 된 무거운 장화를 벗었다. 흙이 손에 묻어났다.
거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복도를 사이에 둔 침실에서 밝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어머나, 알아보는 모양이야. 도오루, 한 번 더 손을 흔들어 봐.”
나쓰에의 목소리였다.
게이조는 장지문을 조금 열고 살그머니 안을 들여다보았다. 활짝 열고 들어가도 좋으리라고 생각했지만 어쩐지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나쓰에가 요코를 안고 있고 그 옆에 도오루와 쓰기코가 양쪽에서 들여다보고 있었다. 게이조는 장지문 앞을 떠나 코트를 걸친 채 거실 소파에 걸터앉았다.
다시 다같이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루리코의 일은 모두 다 잊어버렸나?’
게이조는 문득 서글픈 생각이 들었다. 강변에서 죽은 루리코를 안아 올렸을 때의 일이 생각났다.
‘가엾게도 루리코는 그 강변에 엎드린 채 죽어 있었다.’
또다시 커다란 웃음소리가 들려왔을 때, 게이조는 침실의 장지문을 열어젖혔다.
“뭐야! 왜 이리 시끄러워. 루리코가 죽은 지 일년도 되지 않았는데 뭐가 그렇게 재미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