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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월24일
말씀: 엡4:11-12
제목: 직분의 유익(8)
교회란 주님께서 머리가 되시고 우리를 교회 몸으로 그리고 각자 지체로 유기체적으로 연합되어 있다는 사실을 말씀드려왔습니다. 그러면서 그 의미에 대해서도 말씀을 드렸는데요, 머리에서 명령하면 몸이 그에 따라 명령대로 행하게 될 때 그 행한 것으로 인해 온몸이 온전해지고 또 건강하게 삶을 살아가듯이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가는 삶을 통해 하나님이 계획을 이루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하나님이 이루시는 것이지만, 그것을 우리가 한 것처럼 대우하시며 보상을 하겠다는 의미로서 우리를 세우시고 직분을 주셨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우리는 흔히 하나님이 나를 구원해주셔서 정말 감사해서 이 은혜를 어떻게 갚을까 해서 봉사하고 헌신하는 것으로 생각할 때가 참 많았습니다. 물론 이 말이 틀린 말은 아니지만, 이것보다 훨씬 큰 약속이 있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그것은 그로 말미암아 나타난 결과물을 우리의 것으로 인정해주는 은혜야말로 엄청난 것입니다. 그래서 전도도 내가 복음의 말씀을 전하지만 구원은 주권자이신 하나님의 결정권에 달려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 공을 모두 우리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 보상은 우리의 언어로 물리적인 현상으로 설명될 수 없는 것의 보상입니다.
단순히 내가 이런 좋은 일을 해서 천국에서 상급을 많이 받는다는 의미를 뛰어넘어 왜 우리를 구원하시고 직분을 주셨는가 하는 점에서 이 부분을 이해 하셔야 왜 하나님이 나에게 이런 사역을 맡겼는가? 이런 사명을 주셨는가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마25:31절부터 말씀을 보면, 예수님이 오셔서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양은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고, 이제 양은 보상을 하고 염소는 심판을 합니다. 그런데 보상이 아주 단순하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인데요, 그 할 수 있는 일이 우리가 신경을 좀 쓰면 가능한 일입니다. 이런 이야기지요, 36‘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얼만큼 일상에서 단순한 것 이었느냐 하면 이 말을 할 때 의인이 어떻게 대답합니까?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이런 일을 했습니까?’하고 묻습니다. 하나님이 40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이 하찮게 여겨지는 일까지 너희가 순종하면 그것이 내게 한 것으로 인정해주겠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악인, 즉 염소들은 이런 것조차 하지 않았다는 말이지요.
그래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이 교회를 그리스도 피 값으로 사서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시고 우리를 유익하게 하며, 완전하게 하려고 부른 기관인데요, 이 교회의 중요성을 우리가 확인해야 할 뿐만 아니라 그렇게 부름을 받은 자들의 유익과 하나님 계획을 이루기 위해서 교회 안에서 이 직분을 주신 것입니다.
분명히 교회에서는 중요한, 즉 드러난 직책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사도, 선지자, 복음 전하는 자, 목사와 교사라고 할 수 있고 고린도전서12장에서 나와 있는 것처럼 각종 은사가 교회에 필요합니다. 교회에 은사가 있으면 그 은사가 무엇인가에 집중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교회를 통해 무엇인가를 하시고자 하는 계획이 있음을 알아야 됩니다. 우리를 그냥 내버려 두지 않으시고 직접 간섭하고 계시구나 하는 것을 은사를 통해 알 수 있다는 말입니다.
설교를 준비해서 설교하는데, 말씀의 은사를 주셔서 설교하고 있습니다마는 불만인 것은 하나님이 간섭하신다는데, 왜 이런 감동들이 신자에게는 나타나지 않으냐는데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은사로 기적으로 간섭하심에 대해서는 하나님이 이렇게 간섭하셨구나 하고 감동하지만, 목사를 세우고 교사를 세우고 장로나 권사님이나 집사를 세우는 일이 얼마나 더 대단한 일인가에 대해서는 무감각합니다.
우리가 직분을 잘 못 이해하는 경우가 많은데, 예를 들어 목사는 직분자를 세울 수 있는 질서 가운데 권리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을 대신하고 있는 것처럼 마음대로 집사를 세운다든지, 권위를 앞세워 개인적인 요구를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어떤 경우는 아예 전도지에 ‘우리교회는 장로 빨리 주는 교회’라고 쓰고 전도하는 경우도 옛날에는 있었습니다. 이게 직분의 부작용이지요. 직분이 권위, 감투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이런 현상은 하나님이 ‘친히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복음전하는 자로 목사와 교사로 세웠다’는 것임의 직분의 의미를 모르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입니다. 사람이 장로를 세우고, 권사를 임명하고 하는 것이지만, 결국 그 모든 것은 하나님이 친히 하셨다는 말씀을 우리는 깊이 세겨야 이 직분을 사명으로 받아들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고전1:26-29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직분을 ‘깜’이 못 되는데 맡기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것은 사람의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이 다르다는 관점에서 이해하셔야 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능력으로 실력으로 직분을 감당하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하고 있는 대목입니다. 하나님은 부르실 때 유능한 사람을 쓰시지 않고 곤란한 인물을 들어 쓰셔서 조개 안에 핵을 넣어 진주를 만들 듯이 사람을 변화시키기도 합니다. 주로 목사가 이런 쪽이 아닌가 싶습니다. 우리가 직분을 가지는 최고의 목적은 그것으로 인해 순종하는 삶으로 동원하는 것입니다. 내가 장로가 되어서 권사가 되어서 무엇을 해야 할지 깨닫는 부분이 참 많습니다. 그 직분 때문에 예배를 소중히 여기고 교회를 소중히 여기고 성도들 앞에 굽신거리고 하는 것은 복입니다. 우리가 직분을 감당하면서 신앙이 클 때도 많습니다. 내가 해서 될 일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 방법이 참 이상합니다. 내가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이것을 해야 하는데 능력이 없음을 깨닫고 기도하는 것 아닙니까? 내가 한 일이 없는데 이룬 것입니다. 세운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감사합니다. 내가 한 것이 없는데 이런 일이 이루어졌네요, 그렇게 이야기할 수 있겠지만 하나님은 그것 ‘네가 했다’라고 인정을 해 주는 기쁨이 이 직분 속에 감추어진 비밀입니다.
참 놀라운 것은 ‘하나님이 하심’을 누가 알게 되냐 하면 직분자들 입니다. 왜냐하면, 이분들이 애쓰고 힘쓰기도 하고 기도하며 하나님께 매달려 무릎을 꿇고 가슴 조리며 염려와 애타하는 신앙생활을 했기 때문입니다. 전도를 하는 사람이 전도 새 신자가 오면 기쁜 것입니다. 전도에 힘쓰지 않고 무관심한 사람들은 새 신자가 와도 별 감동이 없습니다. 건축을 하고 입당예배를 드리는데 막 우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건축하면서 마음이 조리고 애타한 사람들입니다. 정말 우리 교회는 하나님이 세우지 않으면 세우지 못하는 건물이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감격이 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말 직분자의 감격과 영광이 어디에서 나오느냐 하면 하나님이 망하는 결론을 요구하시며 비천하고 실패하고 밟히는 과정을 우리에게 요구하실 때입니다. 욥은 그렇게 밟혔다고 나중에 곱으로 복을 받은 사람이지만, 그런데 밟히고 밟히다가 죽은 사람들도, 죽기까지 충성하여 십자가에 죽는 수모와 고통과 처절함도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다는 그것까지 인정할 수 있습니까? 이것이 인정될 때 하나님의 일하심을 볼 수 있습니다. (사실 이것이 우리에게 어려움 일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 지혜와 지식의 근본은 하나님이 일하시는 것이 늘 옳다고 인정하고 마음으로 항복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앙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원하시면 인도하시면, 원하고 인도하는 대로 늘 기쁜 마음으로 좇아가는 것입니다. 그것 외에 우리의 가장 중요한 깨달음은 없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종말을 고하고 끝이라고 생각하면 이 말씀을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어떻게 밭아 감추인 보화를 보지 않고 전 재산을 팔아 밭을 살 수 있겠습니까? 옛날에는 은행이 없어서 금, 은 보화를 밭이나 땅속에 감추어 놓고 전쟁터로 떠난다든지, 사고로 죽게 되면 주인 없는 보화가 땅에 감추어진 경우가 흔히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감추인 보화를 발견하지 않고서 즉, 필요를 모르고 전 재산을 팔아 이 땅을 살 수 없는 것이란 말입니다. 전 재산을 팔아 살 수 있는 자는 밭에 감추인 보화를 본 자 아닙니까? 마찬가지로 보화는 천국을 비유한 것인데, 그러니까 천국을 발견한 자만이 자기 생애를 바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즉, 하나님의 일하심을 늘 옳게 여겨 마음에 항복하며 주의 길을 걷는 자입니다.
그다음에 우리가 직분에서 실질적으로 직분에 대한 필요성을 인식하는 것과 직분의 소명과는 다르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누군가 선교사로 나가야겠다, 누군가 우리 교회 장로님이 있어야겠다, 권사님이 많이 세워져야겠다, 이런 필요성을 느끼는 것과 그래서 그 사람이 그 일을 하여야겠다는 것과는 다릅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많은 일에 이렇게 해야 하는데, 하는 필요성을 느끼지만 그렇게 못살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루에 최소한 성경을 몇 장 봐야겠다, 기도를 몇 분 이상해야겠다, 최소한 어떻게 살아야겠다는 것을 알지만 그대로 지키기란 쉽지 않습니다. 우리가 머리로 이해하는 것과 실천하는 것과는 큰 간격이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훈련이 뒤따라야 하고 많은 시행착오와 쓴맛을 봐야 돌아오는 것입니다. 소명은 이런 것과도 더욱 다릅니다. 하나님이 나를 무엇으로 쓸 것인가 하는 것은 하나님께 여쭈어봐야 하고 그분의 허락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는 이런 두 면에서 참 많이 약합니다. 그런데 신비한 것은 이런 부족함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또한 교회에서 신앙생활 하면서 여러 가지 불평이 있고 이해 되지 않은 부분들이 있다 하더라도, 이런 일로 인해 하나님께서 그 모든 것으로 아름다운 수를 놓으시고 기적을 창출해 내신다는 사실입니다.
우리의 실력을 내놓고 지혜를 내놓아야 일이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부족하고 우리의 못난 것밖에 내놓을 것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엮어서 기적을 창조해 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우리가 바벨탑을 쌓지 말고, 즉 하나님을 떠나 세상 것으로 힘을 삼지 말고, 하나님께 맡겨 그의 음성에 순종하며 그의 뒤를 쫓기로 하는 겸손한 믿음의 자리에 서는 것이 중요하고 그 전제조건이 우리에게는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리고 난 다음에는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이끄시고 다루시는지에 대한 신비함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그 전제조건이 있을 때, 우리의 못난 몸뚱이를 들어 쓰셔서 우리의 나그네 인생 가운데 놀라운 기적들을 이루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이 중요한 사실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이런 것이 다양하게 연결되어 설명할 수 있는 내용입니다. 우리가 회개함으로 하나님께 돌아와 그 분앞에 무릎을 꿇으면 그분이 우리의 주인 된 삶을 분명히 엮어가는 것을 체험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므로 믿는 자, 하나님의 자녀들이 애쓰며 집중해야 할 것은, 바로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한 번 더 참으시고 잠깐이라도 성경 말씀에 귀 기울이시고, 마음에 하나님이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뜻을 붙들고 있으면 하나님이 교회를 통해 우리의 가진 것으로가 아니라 우리의 실력과 노력으로 말미암지 않고 하나님이 무엇을 이루기로 하셨다는 것을 믿고 잠시 기다려 보십시오. 놀라운 일들이 벌어지는 것을 보시게 될 것입니다.
거기에 죽었던 영혼이 일어나며, 그렇게 쓸모없어 보였던 사람들이 하나님의 쓰임을 받으며, 열방에서 영혼들이 돌아오는 것으로 인해 찬송과 영광이 있음을 보게 될 것입니다. 나도 모르게 이웃의 아픔을 위해 기도하며, 내 원수를 위해 기도하는 자신을 보게 될 것입니다.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부인이 구역장 하는 꼴이 보기 싫어서 구역모임 있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 전화해서 급하다고 인감도장 가져오라고 하든 남펀이 남자 구역의 권찰이 되어서 구역예배에 안 왔다고 하면 그날 불벼락을 치고 하루에도 몇 번씩 전화해서 확인하고 이렇게 되더라는 것입니다. 얼마 안 남았습니다. 우리가 그런 일을 보게 될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이 기회를 놓치고 있습니다.
우리가 힘을 모아서 주를 위해서 무엇인가를 하는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불러 유익케 하며 성장케 하며 완전케 하여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게 하려고 우리 중에 누구는 이쪽에서 서서 안내도 하고 자리 정리도 하고, 누군가는 저쪽에 서서 새로오신 분들을 위해 예배에 설명도 하고 누군가는 청소로 교사로 성가대로 찬양대, 식사 당번, 새 신자 섬김이 재정 등으로 서 있는 것으로 인해 기쁨이 있고 신기하게도 감사가 있고 그래서 우리는 서로 세우며, 서로 서로가 사랑하며 깊어지는 단계로 끌고 가심으로 인해 하나님이 지금 일하게 계시는 것을 보는 기쁨이 있습니다. 이런 것들로 인해 알게 되는 참 놀라운 일들이 있습니다.
우리 교회는 참 추운 편이라 한겨울이 되면 미안한 마음이 많이 들곤 합니다. 천정이 높아서 추위가 더한 것 같고 또 교회가 넓어서도 그렇고 더군다나 수요예배 같은 경우는 사람들도 많이 모이지 않으니까 더 추운 상황입니다. 그런데 수요예배에 나와서 앉아 있어요. 제정신이 아니고서야 그 추운데 어떻게 앉아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앉아 있어요. 이게 은혜요 내가 옛날을 생각해보면 이게 기적 아닙니까? 어떻게 보면 몇 년 사이에 기적을 본 것도 아니고, 기억할 만한 체험, 간증할 만한 일들이 없었는데도 여기 앉아 있다는 사실에 놀라서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장로를 주시며 권사를 주시며 집사를 주십니다. 한 사람에게 장로로 주셨다는 것을 귀하여 여겨서야 합니다. 장로들을 존경하라고까지는 요구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이 사람들을 하나님이 세우신 분이라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우리는 존경과 신뢰와 순종을 마땅히 보내야 합니다. 하나님의 하심에 대한 우리의 태도이며, 또한 하나님께서 한 사람을 들어 쓰셨을 때는 우리가 보기에 혹 미흡한 면이 있을지라도 하나님께서 이 사람을 교회의 적합한 자로 세웠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요, 여러분들도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을 귀중히 쓸 것이라는 기대를 하십시오. 동시에 모든 직분은 필수적입니다. 선택이 아님은, 하나님 나라에서 누구든지 그 유업을 물려받아야 하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이 영명교회에 한 신자로 또한 한 직분자로 보내주셨습니다. 내가 와서 선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내신 것입니다.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게 하려고 이런 준비를 해 놓으신 분입니다.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은 이런 직분을 허락함으로써 얼마나 신속하게 일 처리를 하느냐, 어떤 목적을 이루는데 협력하느냐 하는 차원에서보다, 서로 일들을 이루기 위해 말들이 안 맞고, 상처도 받고, 실수도 함으로써 일을 이루는 것보다 그 과정 속에서 그 인간들이 얼마나 미흡한가, 모자란 것을 확인시키고 회개케 하고, 돌이켜 보게 함으로써 더 많은 이익을 얻기를 원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것 때문에 직분을 안 맡으려고 합니다. 갈등하기 싫고 싸우기 싫고 신경쓰기 싫어서 직분을 안 맞겠다고 하는데, 하나님은 우리를 충만한데 이르게 하는 방법이 이런 방법을 통해서입니다.
학교에서 제일 말썽을 부리고 공부도 안 하고 문제아를 반자을 시키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제 반장이 되니까 수도 없고 망썽을 부릴 수도 없고 열심히 공부하는 계기가 되고 모범적인 학생이 되는 계기가 되는 것처럼 직분은 그런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는 것도 아셔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맡기시는 것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족하지만 힘들지만 신경쓰이는 일이고 스트레스가 있는 일이지만 주신 사역을 맡아 수고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직분 때문에 이런 은혜가 있어야 합니다. 사도바울이 이런 말씀을 했습니다. 빌4:13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우리가 일반적으로 능력이란 남들보다 뛰어난 일을 하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한계를 뛰어넘는 것으로 이해를 하는데요, 그런데 바울은 지금 감옥에서 이 서신을 쓴 것입니다. 빌립보 성도들이 감옥에 있는 바울을 찾아 면회 왔을 때 말씀입니다. 이 말은 좌절과 고생 끝에 이런 일을 이루었다 할 때 이 말을 해야 하는데, 바울은 여러 고생을 해서 이제 드디어 감옥에 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감옥에 와서 하는 소리가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능력은 자기 소원을 이루거나 이익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여기서 ‘모든 일’은 하나님이 맡기신 일입니다. 하나님이 맡기신 일이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복음을 위해 하나님이 맡기신 일이라면 감옥에도 갈 수 있고 매도 맞을 수 있고 어떤 험난한 일이나, 어떤 수모도 당하는 일에도 기꺼이 감수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요즘은 직분을 그렇게 생각 안 합니다. 직분이 내 유익이 되고 축복이 된다고 그러는데 그렇게까지 힘들게 스트레스받고 신경 쓰면서 보장되지 않은 축복을 받기 싫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경 쓰이고 귀찮고 힘들고 분쟁이 있을 것 같고 또 다툼이 있는 것에 서기 싫어서 직분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그런데요, 바울은 하나님이 맡겨주셨기 때문에 이 맡겨주신 직분 때문에 갈등이 있어도 좋고 힘들어도 좋고, 감옥에 가도 좋고 죽어도 좋다는 것입니다. 왜요? 이게 주님의 일인데 주님이 함께하시고 이루시는 계획은 내가 어떻게 되어도 엄청난 것임을 아는 것입니다. 여기에 직분의 신비함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은 바로 어떻게 이어서 생각할 수 있느냐 하면 직분은 우리를 위해 준비해 놓은 것이라는 점입니다. 그리고 모두의 유익을 위해서입니다. 이것은 놓치면 안 됩니다. 우리가 아무리 미흡하더라도 아무리 힘들고 고통스럽다 할지라도 그것으로 우리에게 유익 되게 하십니다. 어떤 유익을 만들어내시는 분이심을 믿습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분이 그가 만들겠다고 하면 못 만들 것이 어디 있습니까? 하시겠다면 방해할 자가 없습니다. 이것이 어디로 이어지느냐 하면 성도를 온전케 하고,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 다음 시간에 함께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