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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 시편 / 시편 36편 1-12절
찬송 / 316장 · 목마른 자들아
성서 / 요한복음 7장 37-39절, 에스겔 47장 1-6절
말씀 / 생수가 강물처럼 흐르는 사람
그가 나를 데리고 다시 성전 문으로 갔는데, 보니, 성전 정면이 동쪽을 향하여 있었는데, 문지방 밑에서 물이 솟아나와, 동쪽으로 흐르다가, 성전의 오른쪽에서 밑으로 흘러내려가서, 제단의 남쪽으로 지나갔다.(에스겔 47장 1절)
나를 믿는 사람은, 성경이 말한 바와 같이, 그의 배에서 생수가 강물처럼 흘러나올 것이다.(요한복음 7장 38절)
요즘 장마 끝에 날씨가 정말 무덥습니다. 모처럼 밖에 나서려다가도 후끈한 바람에 밀려 도로 들어와 주저앉곤 합니다. 습도가 90%에 이른다니까, 그야말로 습식 사우나 같은 열기지요. 이제 장마가 끝나면 더 더워지고 강력한 태풍까지 올 수 있다니 걱정입니다. 무엇보다 이 무더위가 기후 이변의 결과라 생각하면 더 안타깝고 두려운 마음이 들지요. 어쨌거나 이 여름 더위에 우리의 몸과 마음을 건강하게 잘 지켰으면 좋겠습니다. 태풍도 미리미리 잘 대비해서 사람들이 피해를 보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몸과 마음을. 그리고 이 땅 한반도를 평화의 은총으로 든든히 감싸주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우리는 요한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초막절 마지막 날에 하신 말씀을 함께 읽었습니다. 먼저 초막절은 어떤 절기일까요? 이스라엘 백성에게 초막절은 일곱째 달에 곡식을 거두고 나서 지키는 명절입니다. 한 해의 첫 달에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이집트에서 해방하신 것을 기리는 유월절이 있다면, 일곱째 달에는 그들이 가나안 땅에서 곡식을 거두게 하신 하나님의 은총에 감사드리는 초막절이 있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 초막절에도 이스라엘 백성은 ‘출애굽 역사’를 기억했습니다. 초막절은 어디서 지킵니까? 집과 성전 안에서 지키는 게 아니라 바깥으로 나가서 지켰습니다. 편안한 집을 나와 광장이나 들로 나가서, 초막을 짓고 거기서 이레 동안 지내는 것입니다. 그들의 조상들이 이집트에서 탈출하여 40년 동안 광야에서 지냈던 것을 다시 기억하고 재현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이스라엘 백성의 절기는, 그들을 해방하신 하나님의 은총을 ‘기억’하는 것으로 시작해서, 그들의 삶과 역사 속에 함께하시는 하나님의 은총에 ‘감사’하는 것으로 이어집니다. 특히 초막절에는 두 가지가 중요했습니다. 하나는 광야 40년을 잊지 않고 기억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출애굽 정신을 되새기고 실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반드시 실천해야 할 계명으로 ‘안식일 계명’을 주셨습니다. 안식일의 핵심은 평안히 쉬는 것입니다. 광장이나 들로 나가서 초막을 짓고 하나님의 은총을 기억하고 감사하며 평안히 쉬는 것, 그것이 초막절에 해야 할 일입니다.
그런데 이 초막절 규례에서 아주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레위기 16장 14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들은 이 절기에 당신들과 당신들의 아들과 딸과 남종과 여종과 성 안에 같이 사는 레위 사람과 떠돌이와 고아와 과부까지도 함께 즐거워해야 합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초막절은 당신들만의 명절이 아니라 함께 기뻐하는 명절이라는 말입니다. 진정한 안식은 혼자만 누리는 것이 아니라 모두 함께 누리는 것입니다.
초막절 얘기가 좀 길어졌지요. 어쨌거나 초막절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아주 주요한 명절이었습니다. 요한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세 번 올라가신 것으로 나오지요. 첫 번째는 유월절이었습니다. 유월절에 예루살렘에 가셔서 성전을 뒤집어 엎으셨지요. 그리고 두 번째가 초막절입니다. 세 번째는 유월절인데, 이때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게 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두 번째 예루살렘 방문 때 일어난 이야기입니다. 초막절 명절에 예수님께서는 처음에는 예루살렘에 가지 않으려 하셨습니다. 아직 때가 오지 않았다고 생각하셨지요. 그러다가 나중에 무슨 일인지 아무도 모르게 혼자 예루살렘에 올라가셨습니다. 아마 조용히 지내시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어떻게 성전에서 벌어지는 꼴을 그냥 두고 보실 수 있었겠습니까? 명절 중간쯤부터 사람들을 가르치시던 예수님은 바리새파 사람들과 부딪히며 논쟁을 벌였습니다. 그리고 초막절을 마지막 날이 되자 예수님께서는 큰 소리로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은 이 초막절 마지막 날을 명절의 가장 중요한 날이라고 말합니다. 이 초막절 마지막 날에 하신 이 말씀은 정말 아주 중요한 말씀이다, 그 말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명절의 가장 중요한 마지막 날에, 그것도 큰 소리로, 뭐라고 말씀하셨을까요? “나를 믿는 사람은, 성경이 말한 바와 같이, 그의 배에서 생수가 강물처럼 흘러나올 것이다.” 바로 이 말씀입니다. 먼저 예수님은 ‘목마른 사람은 다 나에게로 와서 마셔라’ 하고 목마른 사람들을 부르셨습니다. ‘목이 마른 사람들’입니다. 이 목마른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요? 그때가 일곱째 달이니까, 게다가 사람들은 집을 떠나 밖으로 나갔으니까, 날은 더운데 물이 부족해서 목이 말랐다는 얘기일까요? 그것은 아닐 것입니다. 여기 목마른 사람들은 그 속이, 그 마음이 타는 사람들입니다. 그 영혼이 갈급한 사람들이지요.
일찍이 예언자 아모스는 사람들이 모두 목이 말라 고통스러워한다고 외쳤습니다. 그런데 아모스가 말하는 목마른 사람들은 마실 물이 없어서 목마른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세상이 온통 불의와 불법과 부정과 거짓으로 가득해서, 사람들이 너무도 각박하고 막막하고 팍팍하고 사악해져서, 그래서 목이 마르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아름다운 처녀들도 젊은 총각들도 목이 말라 쓰러진다는 것입니다. 젊은이들에게 도무지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지독한 절망입니다. 타는 목마름입니다. 이 갈증을, 이 고통스러운 타는 목마름을, 어디서 누가 어떻게 해결해 줄 수 있을까요?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의 타는 목마름을 해결해줄 장소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의 모든 갈증을 시원하게 풀어 줄 장소, 거룩한 장소입니다. 그게 어디일까요? 바로 성전입니다. 오늘 우리는 예언자 에스겔이 꿈꾸었던 이스라엘의 희망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에스겔은 바빌론에서 노예로 살아가는 백성들에게, 지독한 갈증으로 시달리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이야기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시 갈라진 민족을 하나로 묶어주시고, 이스라엘을 괴롭히던 강대국들을 벌하시고, 참혹하게 무너졌던 거룩한 성전을 다시 회복해주신다는 것입니다. 에스겔은 그렇게 다시 세워야 할 새 예루살렘 성전의 설계도를 그립니다. 새 예루살렘과 예루살렘 성전의 희망입니다.
에스겔의 성전 설계도는 정말 감동적입니다. 모든 것이 완벽하게 빈틈없이 복구됩니다. 성전의 지성소에서 작은 골방에 이르기까지 낱낱이 정확하게 치수를 재고, 문틀 하나 벽돌 한 장에 이르기까지 세심하게 규정하고, 성전 부엌의 규모까지 어느 하나도 허투루 하지 않습니다. 거룩한 성전입니다. 그렇게 온 정성과 힘을 다하여 성전을 복구하면, 다시 하나님의 영광이 거기에 임하지요. 성전 건물만 회복하는 게 아닙니다. 성전에서 일하는 제사장들도 다시 성별해 세우고, 성전 제사와 거룩한 절기들도 다시 성대하게 거행하게 됩니다. 그렇게 새 예루살렘 성전이 세워지면 무슨 일이 일어납니까? 성전으로부터 생명의 샘물이 다시 흘러나옵니다. 온 생명을 다시 일으켜 살리는 생명의 물이 솟아나는 것입니다. 성전 문지방에서 솟아나온 샘물이 성전과 제단을 휘돌아 흐르고, 그 물이 성전 밖으로 흘러나가서 냇물이 되고, 무릎과 허리와 어깨까지 차서 강물이 되고, 마침내 바다까지 흘러갑니다. 물이 흘러가는 곳마다 또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시들었던 풀과 나무들이 다시 싱그럽게 살아나고, 죽음의 바다까지 되살아나 거기 온갖 생물이 가득하게 됩니다. 그렇게 온 생명이 되살아나면, 그 나무들이 철따라 맺는 열매는 질병을 고치고 생명을 살리는 약이 됩니다. 일찍이 하나님께서 온 생명을 지으실 때, 땅에서 물이 솟아 온 땅을 적셨듯이, 다시 하나님의 새 창조의 역사가 시작되는 꿈, 그것이 에스겔이 본 성전의 희망이었습니다. (이 ‘생수의 강’에 대한 희망은 요한계시록이 꿈꾸는 새 하늘과 새 땅의 종말론적 비전에도 나옵니다. 요한계시록에서 생명의 물은 성전이 아니라 하나님의 보좌와 어린양의 보좌로부터 흘러나오지요.[계 22:1] 요한계시록의 새 예루살렘에 성전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시대에 그 꿈, 그 성전의 희망을 감히 실현해 낸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가 누구일까요? 바로 헤롯입니다. 참으로 참람하지만, 예루살렘 성전을 가장 크고 가장 화려하게 건축해 낸 사람은 헤롯이었습니다. 헤롯은 예루살렘 성전의 원조 솔로몬이 지었던 성전보다 배나 더 크고 훨씬 더 화려한 성전을 지었습니다. 포로귀환 이후 에스라와 느헤미야도 미처 완수하지 못한 대업을 헤롯은 대를 이어 60년 만에 완성해서 봉헌하였지요. 우리가 아는 것처럼, 헤롯이 짓는 성전이 얼마나 크고 압도적이었는지,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 돌들을 보고 질려버릴 정도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성전에 대한 꿈과 열망을 정략적으로 이용했던 헤롯은 온갖 부정과 패륜과 폭정에도 불구하고 성공했지요. 헤롯에게 빌붙었던 대제사장들과 성전귀족들의 종교 사업도 부흥하고 번창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의 성물 장사는 말 그대로 대박을 터뜨렸습니다. 갈증으로 목이 마른 신도들은 예루살렘 성전의 성수 한 방울이라도 받아 마시려고 성전으로 몰려들었고, 성전은 그야말로 문전성시였습니다.
그런데 이 잘 나가는 성전에 그것도 명절 대목에 시비 걸고 초를 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누구겠습니까? 바로 예수님이지요.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은 초장부터 성전으로 쳐들어가셨습니다. 성전을 장사꾼의 마당이라고, 강도의 소굴이라고 질타하시고, 채찍을 들어 비둘기를 날리고 상을 뒤집어엎으셨습니다. 아예 이 성전을 헐어버리라고 소리치셨습니다. 그리고는 초막절 대목에 또 올라오셔서, 이번에는 목마른 사람들은 다 내게 오라고 큰 소리로 외치셨습니다. 이거 정말 상도에 어긋나도 너무 어긋나는 일 아닙니까? 목마른 사람들에게, 예루살렘 성전 시장의 주요 고객님들에게, 내게 오라고 호객한다면, 이건 그냥 막가자는 얘기 아닙니까?
그런데 여기서 궁금합니다. 성전에서는 그래도 정가제로 기도도 팔고, 비둘기나 양이나 송아지 같은 제물도 파는데, 예수님께는 뭐가 있을까요? 예수님은 그냥 빈손 아닙니까? 하다못해 생수 한 병이라도 있어야 갈증을 해결하지 않겠습니까? 예수님은 무얼 주신다는 걸까요? “나를 믿는 사람은, 성경이 말한 바와 같이, 그의 배에서 생수가 강물처럼 흘러나올 것이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여기 우리가 주목할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애초부터 무얼 주신다는 게 아닙니다. 내가 안수한 물이 만병통치 성수라고 사기 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그 물, 그 생수는 그 어느 누가 주는 것이 아닙니다. 팔고 사는 상품이 아닙니다. 그 물은 그 사람의 배에서 솟아나는 생명의 물입니다. 그 사람 속에서 강물처럼 흘러나오는 생명의 물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놀라운 말씀입니다. 참으로 놀랍고 신비로운 말씀입니다. 내 배에서 생명의 물이 솟아난다면, 그 배, 내 배는 무엇입니까? 성경에서는 물이 성전에서 솟아난다고 했지요. 그런데 그 물이 내 배에서 솟아난다면, 내 배가 곧 성전이라는 말씀 아닙니까? 나의 배는 온갖 추악한 탐욕을 채우는 곳이 아니라 생명의 물이 솟아나는 생명의 샘이 되어야 한다, 그 말씀 아닙니까?
여기서 물이 ‘배’에서 솟아난다는 말은 무슨 말일까요? 배는 그 무슨 배에 복수가 찼다는 말이 아니지요. ‘배’는 곧 ‘중심’이라는 말입니다. 그리스 말에 배꼽을 뜻하는 ‘옴파로스’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옴파로스는 중심이라는 말입니다. 그리스 사람들은 이 세상의 배꼽이 바로 ‘델포이’라고 생각했지요. 델포이가 세상의 배꼽이다, 신성한 장소다, 거기에서 신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그렇게 생각한 것입니다. 반면에 유대 사람들은 세상의 배꼽이 바로 예루살렘 성전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니까 나의 배에서 생수가 강물처럼 흘러나온다는 말씀은 나의 중심에서 생명의 샘이 솟는다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내 속에서, 나의 중심에서 생명의 물이 솟는 사람, 그 물이 강물처럼 흘러넘치는 사람, 그 사람이 곧 예수를 믿는 사람입니다. 그 중심에 성령을 모신 사람입니다. 바울은 우리의 몸이 바로 성령이 거하시는 성전이라 했지요.
사랑하는 여러분, 어느새 7월 마지막 주일입니다. 성서의 절기와는 다르지만, 새해를 맞아 일곱째 달을 지냈습니다. 이번 주부터는 휴가를 떠나기도 하지요? 이스라엘 백성은 일곱째 달에 밖으로 나가 초막절을 지내면서 다시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감사드렸습니다. 우리에게도 이 휴가철이 우리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이 여름에 우리의 몸과 마음을 은혜로 감싸 주시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어떤 세상일까요? 사람들은 너무도 삭막하고 팍팍한 세상이라고, 타는 목마름의 시대라고 탄식합니다. 정말 요즘 제정신으로 살기가 쉽지 않습니다. 왜 이런 세상이 되어버렸을까요? 바울은 빌립보서에서 사람들이 “배를 자기네의 하나님으로 삼고, 자기네의 수치를 영광으로 삼고” 살아간다고 탄식했습니다. 그 배에 탐욕만 가득한 사람들입니다. 이런 세상에서, 이러한 때에, 어떤 사람들이 필요할까요? 그 배에서 생명의 물이 솟는 사람들 아닐까요? 세상이 삭막하고 강퍅할수록, 사람들이 타는 목마름으로 기진하는 때일수록, 그 중심에서 생명의 물이 샘솟는 사람이 절실하지 않겠습니까? 그 배에, 그 중심에 오직 돈만 있는 좀비가 아니라, 그 중심에 하나님의 영을 모신 사람들이 절실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우리를 도우시고 우리를 진리 가운데 이끌어주시는 성령을 내려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성령을 우리의 중심에 모시고 살아갈 수 있도록 은총으로 우리를 감싸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중심에서 절망과 분노의 화염이 아니라 생명의 샘물이 솟아나도록, 우리 모두 생수가 강물처럼 흐르는 사람들로 살아가도록, 생명과 평화의 성령께서 우리를 지켜주시고 인도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