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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광주 가꼴
큰다리깨 밑으로 키보다 큰 주브를 끌고 첨벙첨벙 물놀이 했던 광주 큰 개울이 사진으로 잘 보인다
학교에서 수업이 끝나고 집으로 가다보면 회덕리 저멀리 군월산이 보였다
산등이가 일자로 이어지다 가운데쯤에 푹 파인 부분이 있었는데 아마도 산너머가는 길이 있었던 것 같다
그 산을 바라보면서 늘 생각하기를
저 너머에는 누가 살고 있을까?
궁금했지만 어린 나이에 갈 엄두가 나지를 않았다
이 곳 태백에서는 자작나무 숲은 자주 본다
사람이 다니던 길이었지만 지금은 좋은 길이 생겨서 이 길은 고요하다
이렇게 산길을 걷다보니 디어헌터 영화가 생각난다
친구들과 함께 사냥하며 즐거워했던 시간들
지금은 월남전에 참전하여 어떤 친구는 실종되고
어떤 친구는 고향으로 돌아오고...
산속에 들어오니 디어헌터가 생각납니다 깊은 산속에 캐딜락이라니 어울리지 않습니다.
고향으로 돌아온 주인공 로버트 드니로
그는 룰렛을 재미삼는 베트콩들에게 포로로 잡혀있다 탈출하였다
(1970) The Deer Hunter - OK.avi - YouTube
이 영화가 우리와 무슨 연관이 있을까?
이 영화는 놀랍게도 한국인의 도움으로 제작된 영화였다
그 한국인은 한국의 전쟁고아 임종덕이었다
6 25전쟁고아들을 먹여살린 고아 임종덕
1949년 당시 12세의 임종덕은 중국 용정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부모님과 함께 귀국하여 서울중학교에 입학했다.
그러나 1년 뒤 북한의 6.25 남침으로 미쳐 피난을 가지 못하고 고아가 되는데, 임종덕 소년이 고아가 되어버린
그날의 불행을 6.25전쟁 61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당시 잘 알고 지내던 형님뻘 되는 청년이 임종덕에게 서울중학교 한쪽 교실에 불을 지르라고 했다. 당시 서울중학교는
인민군들이 주둔해 있었는데 이곳에 수감된 수십 명의 청년들이 훈련을 받고 곧 북한 의용군으로 전쟁에 나가게 된 것이다.
바로 이 청년들을 탈출시키기 위해서 임종덕에게 불을 지르라는 지시를 한 것이다. 평소부터 의협심이 강했던 임종덕은
그 청년이 전해준 기름통을 들고 가서 교실옆 목조 건물에다 불을 지르고 북아현동에 있는 자신의 집으로 도망을 갔다.
집에 도착한 임종덕은 집 안에 있던 큰 나무에 올라가 나무 속에 숨었다. 잠시 후 인민군 짚차가 집 앞에 도착 인민군 요원들이 대문을 박차고 들어와 마침 마당에 있던 어린 여동생의 머리에 총검을 대고 부모님을 찾았다.
어린 여동생은 겁에 질려 와들와들 떨더니 지하 창고에 부모님이 있다고 말을 해 버렸다.
잠시 후 부모님이 양손을 뒤로 묶인 채 마당에 섰다.
인민군은 당신네들은 반동분자이기 때문에 인민 재판에 의해 처형하겠다고 했다.
임종덕을 학교 방화범으로 체포하러 온 것이 아니었다. 형식적인 재판이 끝나자 총소리와 함께 부모님은 쓰러졌다.
아버지 임성규는 독립운동가였고 어머니는 당시 숙명여고 교사였다.
인민군들은 미리 준비해온 장작 위에 시체를 얹어 놓고 기름을 부어 불을 질렀다.
6 25전쟁 때 부모님이 인민군에 총살 당하는 모습을 보고 서울중학 다니던 임종덕은 그 길로 서울을 탈출
피난민 대열에 끼어 정처없이 걷다가 다시 9.28 수복 때 한 미군을 만났다.
미군 대위는 임종덕을 친동생처럼 보살펴 주면서 데리고 다녔다. 그러나 원산과 흥남까지 임종덕을 데리고 간 그 미군 대위가 전사하면서부터 임종덕은 외로운 고아로 거지생활을 시작했다.
주로 서울역 앞에서 거지생활을 하던 임종덕 소년은 고아들을 데리고 당시 불광동에 있는 희망원으로 들어갔다.
그때 그의 나이는 열다섯 살이었다.
자신보다 어린 고아들을 동생처럼 보살폈다.
그러나 어느날 고아원 원장의 놀랄 만한 부정행위를 목격한 임종덕은 몽둥이를 들고 원장실로 쳐들어 가
사무실을 박살냈다. 원장은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산으로 도망쳤다.
임종덕도 주위 형들이 너도 빨리 도망가라고 권유해서 고아원을 나와 서울역을 향해 달렸다.
그런데 뒤를 돌아보니 동생뻘 되는 아이들이 “형, 오빠”하면서 29명이 따라오고 있었다.
임종덕은 깜짝 놀라 돌맹이를 던지면서 따라오지 말고 고아원으로 다시 들어가라고 소리를 질렀다.
“내 혼자도 얻어 먹기 힘든데 너희들을 어떻게 먹이고 또 잠은 어디서 잔단 말이냐”
하면서 계속 돌맹이를 던지면서 저지했으나, 어린 소년, 소녀들은 함께 손을 잡고 울며불며 임종덕을 따랐다.
임종덕은 어느날 염천교 밑에서 당시 거지왕자로 소문난 김춘삼을 만나서 거지로서 살아가는 데
지켜야 할 중요한 규칙 몇 가지를 교육 받았다.
1) 밥을 얻으러 갈 때 대문을 두드리지 말고 깡통 소리를 내라.
2) 밥을 얻을 때는 꼭 깡통이나 그릇을 준비해 가라.
3) 하루에 같은 집에 두 번 가지 마라.
4) 땅에 떨어진 음식은 절대 먹지 말아라.
한편 날이 갈수록 고아들이 계속 모여들어 129명이 되었다.
고아동생들을 살리기 위해 소매치기와 절도범으로 변했다.
129명의 아이들이 제대로 못 먹고 질병으로 그동안 24명이 죽었다. 어떤 날은 8명이 한꺼번에 죽는 날도 있었다.
약 사먹을 돈이 없기 때문에 심한 감기만 걸려도 고열로 쓰러져 죽어갔다.
임종덕은 아이들을 살리려 소매치기와 도둑질을 하였다. 주로 서울 장충동이 활동 무대가 되었고,
특히 제니스 라디오를 훔치는 날은 아이들에게 특식으로 꽈배기 빵을 한 보따리씩 사가지고 왔다.
어느날 임종덕 소년에게 그의 인생의 운명을 바꾸는 날이 왔다.
하루는 미군 장군의 찝차가 서울역에 와서 멈췄다.
마침 옆에 있던 임종덕은 불과 몇초 사이에 뒷좌석의 가방을 소매치기 하여 도망쳤다.
찝차는 625전쟁에 공군을 총지휘하는 제 5공군 사령관 스티브토마스 화이트 중장의 차였다
가방에는 당시 미 공군 특급작전계획 1급비밀문서가 들어있었다
미군은 즉시 한국경찰에 의뢰하였고, 경찰에서는 소매치기 왕초인 임종덕의 소행으로 알고 그를 잡아 조사를 했다.
임종덕이 경찰서에서 조사 받는 동안 수십명의 아이들이 경찰서에 찾아와 우리 형님 살려달라는 아우성을 쳤다
화이트사령관은 이러한 임종덕의 처지를 알고 임종덕을 하우스보이로 취직을 시켜주겠다고 하였다
아이들을 두고 떠날 수는 없다는 말을 듣고, 그 고아들을 미군이 운영하는 제주도 고아원으로 보내고서
임종덕을 자기 하우수보이로 채용했다.
미국 5공군 사령관 스티브 도마스 화이트 중장은 안타깝게도 전쟁중에 아들을 잃었다
전투비행기 조종사인 그의 외아들이 전투비행 중 전사한 것이었다
약 1년 동안 유심히 관찰한 장군은 그를 양아들로 삼아 곁에 두었다
이렇게 만난 인연으로 임종덕은 그의 양아들이 되고, 서울중학교를 재학하였다. 일요일이면 어김없이 양아버지 화이트장군을 따라 여의도비행장에 있는 미국교회에 갔다. 미군들의 예배가 끝나자 바로 한국 공군 장병들의 예배가 시작되었다.
이날 예배석 제일 앞줄에는 이승만 대통령과 김정열 국방장관, 김신 공군참모총장 그리고 화이트 장군과 그외 외국 고관들이 앉았다. 그날 젊은 청년 목사의 설교는 임종덕의 마음을 움직였다
“지금 이 나라는 온갖 부정부패의 척결을 단행하지 않으면 이 자유당의 정부는 오래가지 못할 것입니다. ”
자유당의 총재인 대통령에서부터 국방장관 그리고 군종감의 직속상관인 공군참모총장까지 앉아 있는 자리에서
새파란 20대의 청년 군종목사가 거침없이 설교를 해나갔다.
감수성이 예민했던 임종덕은 마음 속으로 “저 목사님은 오늘 당장 형무소 가겠구나”하고 걱정이 되었다.
그러나 예배가 끝나자 이승만 대통령은 강대상에서 내려온 군종목사를 덥석 안으면서
“아주 훌륭한 설교였소, 이 자리에 참석한 여러분들이 목사님의 설교를 모두가 다 깊히 생각하고 각자의 소임을 성실히 해 나가십시오”
그날 만난 하나님, 목사님, 대통령을 잊을 수가 없게 되었고 그도 훌륭한 크리스챤이 되기로 결심하였다
화이트 사령관이 미국 발령으로 받아 한국을 떠나게 되었다
어린 소년은 부모가 살해당한 조국을 떠날 수가 없었다고 하였다
화이트장군은 미국에 가서 공부를 하면 조국을 더 크게 도울 수 있다고 하며 설득하여 함께 미국으로 떠나게 되었다
6 25 전쟁고아가 백악관 안보 보좌관으로.
언어가 통하지 않은 미국에서 조국을 생각하며 열심히 공부하였다
고등학교 우등생으로 졸업하고 하바드 대학에 입학하였다.
“미래의 중국에 대한 논문”이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고, 백악관까지 그의 논문이 알려지게 되었다
그의 졸업식에는 미군 최고의 합참의장이 된 아버지와, 장성들이 참석하였다. 졸업식 역사상 가장 많은 별들의 잔치가 되었다
하바드 논문으로 빛난 임종덕박사는 초청하는 곳이 많았지만 아버지의 길을 따라 군에 지망하였다.
그는 그린베레로 월남전에 참전하여 전투에 투입되었다
치열하게 공방을 벌이다가 그만 부하들과 함께 포위를 당하였다
그는 부하 3명을 살리기 위해 혼자 앞으로 나가 포로가 되었고, 그의 부하들은 탈출할 수가 있었다
월맹군은 포로가 된 임종덕을 끌어내어 러시아룰렛 게임을 즐겼다
그는 머리에 권총을 대고 방아쇠를 당길 때마다 기도하였고 그 때마다 불발로 살아 남았다. 세번씩이나.
그는 다음에 또 이런 당한다면 죽을 것이다고 생각하고 탈출을 하기로 각오했다
다시 불려온 그는 방아쇠를 당기려는 순간에 앞에 있는 베트콩을 쏘았다.
그리고 그 곳을 탈출하였다
임종덕의 용감한 행적이 양아버지와 대통령에게까지 알려지게 되었다
그는 존슨 대통령의 부름을 받고 처음으로 백악관에 가서 은성무공훈장을 받고 특진되었다
존슨 대통령이 화이트장군을 불러 감사의 말을 전했다. 양아버지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5년후 임종덕은 닉슨대통령의 부름을 받고 두 번째 백악관에 가서 대통령 안보비서관 임명을 받고
전 미 국무장관 키신저와 함께 외교활동을 하게 되었다
당시 중국총리 주은래를 여러번 만나면서 미국과 중국간의 외교를 성사시켰다
주은래는 임종석을 동생처럼 여기며 호의를 베풀어 주었고, 임종래라는 이름도 지어주며, 모택동도 다섯 번 만나게 하였다.
한국을 위해 박정희 대통령 만남과 결혼
1971년 미국과 중국이 극비리에 정상회담을 합의하고, 키신저가 돌아가는 길에
"인접한 일본에도 알려야겠다"고 할때 ,
임종덕은 "한국도 알려야 한다"고 하자
"한국은 당신이 가서 알리시오" 해서 처음으로 박정희 대통령을 만났다. 박정희 대통령은 매우 기뻐하면서
"일 하느라 장가 못간 노총각이니 중신은 내가 서겠다"고 하며 육여사에게 당부하여
한국의 전통 가문인 민씨 가문의 규수를 소개하여 결혼식을 올리고 박정희대통령과 더욱 친밀 해졌다.
우리나라는 중국과 1972년 수교하였다
이후로도 임종덕 비서관은 닉슨, 포드, 카트, 대통령에 이르기까지 안보비서관을 잘 수행했다.
장군진급 포기하고 카트 대통령과 결별후 LA동양교회 장로가 됨
카터대통령이
"주한미군을 4,5년사이 완전 철수 하겠다"고 하였다.
카터대통령은 임종덕비서관에게
“당신의조국이란 입장을 떠나서 나의 철군계획과 한반도 정책에대해 말해보시요”하여
“현재 4만여 미군이 주한하여 북한이 도발 못하며, 한국은 경재부흥과 더불어 미국이 바라는
민주주의국가로 성장하고 있다”하였다.
또 카터가 국가안전보장 이사회에서 과거 월남전에서 탈영한 미군 도망병을 전부 사면하라는 지시에 아무도 말 안할 때
장군 진급심사를 두달 앞둔 임종덕은 싱글러브장군과 같이 불이익을 받을줄 알면서도
“전투중 자기만 살겠다고 도망친 자를 대통령이 사면하면 앞으로 전쟁터에서 누가 미국을 위해 생명바치겠냐”고 했다.
풀브라이트 종군기자상으로 유명한 우물가의 소년이 임종덕 거지
6 25 당시 밥을 얻어먹지 못하여 물배를 채우려고 종로구 내자동 우물가를 찾아가서 허기에 지친 배를 물로 채우고
힘없이 누어있던 한 아이를 6 25타임즈 종군기자가 찍은 사진이 유명해져 풀브라이트 종군기자상을 수상하였다.
그때 그 아이가 바로 임종덕이었다
세계를 감동시킨 The Deer Hunte (디어헌터)영화가 임종덕 대위 포로탈출기
임종덕의 포로수용소 탈출 기자회견을 계기로 그가 겪었던 수용소 생활과 특히 러시안 룰렛 즉, 권총 살인게임 등을
소재로 한 영화가 제작 되었다. 감독에 마이클 치미노 주연 배우에는 로버트 드니로를 비롯한
존케세일, 존세비지 등이 출연한 1978년에 제작된 디어헌터는 우리나라는 물론 전세계 영화 펜들을 감동시켰다.
임종덕 소령은 당시 영화 제작사로부터 기막힌 소재를 제공한 대가로 당시 15만불을 받았고 또한 미국 육군사관학교는 임종덕의 수용소 탈출과 15일간의 정글 생활에서 살 아나온 과정을 『정글 탈출기』란 책으로 만들어 육군사관학교 정식 교과서로 사용했다.
6.25는 우리에게 많은 고난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고난으로 지금의 대한민국이 있게 되었다
동창님들
봄이 왔습니다
산불도 완전히 꺼졌습니다
반드시 새로운 숲이 다시 우거지게 될 것입니다
이전보다 더 보기좋은 숲으로
첫댓글 임종덕씨가 때로는 임종석씨로 등장 하내요
상상하기 어려운 훌륭한 한국인...
청와대 비서실에 근무하던 임종석이를
샹각해봅니다.
종석이도 종덕이를 닮았으면 국민들에게 사랑을 받았을터인데...
임종덕과 임종석이라 하고 한번은 또 군월산을 군자산이라 하기도 하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