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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한 농부의 비유(1-12)
탐욕은 종교적 위선으로 잠시 포장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반드시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눈이 어두워지지 않도록 욕심의 싹을 잘라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많은 종들만 아니라 아들을 보내 회개와 순종을 요구하셨지만, 이스라엘은 끝내 거절하였습니다. 주인의 것을 취하고 싶은 강한 욕망 때문입니다.
1예수께서 비유로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한 사람이 포도원을 만들어 산울타리로 두르고 즙 짜는 틀을 만들고 망대를 지어서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갔더니 2때가 이르매 농부들에게 포도원 소출 얼마를 받으려고 한 종을 보내니 3그들이 종을 잡아 심히 때리고 거저 보내었거늘 4다시 다른 종을 보내니 그의 머리에 상처를 내고 능욕하였거늘 5또 다른 종을 보내니 그들이 그를 죽이고 또 그 외 많은 종들도 더러는 때리고 더러는 죽인지라 6이제 한 사람이 남았으니 곧 그가 사랑하는 아들이라 최후로 이를 보내며 이르되 내 아들은 존대하리라 하였더니 7그 농부들이 서로 말하되 이는 상속자니 자 죽이자 그러면 그 유산이 우리 것이 되리라 하고 8이에 잡아 죽여 포도원 밖에 내던졌느니라 9포도원 주인이 어떻게 하겠느냐 와서 그 농부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을 다른 사람들에게 주리라 10너희가 성경에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11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 것이요 우리 눈에 놀랍도다 함을 읽어 보지도 못하였느냐 하시니라 12그들이 예수의 이 비유가 자기들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알고 잡고자 하되 무리를 두려워하여 예수를 두고 가니라(1-12)
예수님께서는 생애 마지막 주간을 예루살렘에서 보내십니다. 그 주간 동안에 매우 중요한 핵심적인 가르침들을 주십니다. 그 중에서 가장 핵심적인 것은 자신의 몸과 삶 그리고 죽음으로 보여주신 것, 바로 십자가의 가르침입니다. 그것 외에도 예수님께서 여러 가지 중요한 가르침을 주시는데, 본문의 말씀도 가르침 중에 하나가 나옵니다.
(1) 포도원 농부 비유(1-9)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십니다. 이 포도원 농부의 비유는 이전 단락에 등장한 예수님의 권위(성전과 관련된)에 도전한 종교지도자들에 대한 예수님의 반응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권위에 도전한 자들에게 하나의 비유를 통해서 대답하고 계십니다.
그 비유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어떤 사람이 정성스럽게 포도원을 만들어서, 이 포도원을 농부들에게 세를 주었습니다. 그리고 주인은 타국으로 오랫동안 멀리 여행 중이었습니다. 포도 수확 철이 되어, 주인은 자기의 종들을 보내서 약속대로 수확한 포도에서 세를 받으려고 보냈습니다. 그러나 농사한 농부들의 반응이 상상을 초월했습니다. 세를 주기는커녕 주인이 보낸 종을 심하게 때리고 빈손으로 돌려보냈습니다.
말이 안 되는 상황을 보고, 그 주인은 또 다시 종을 보냈지만, 이번에는 종을 혹독하게 때리고 능욕을 하면서 쫓아 보냈습니다. 나중에는 죽이기 까지 합니다. 종에게 보이는 태도는 주인에게 보이는 태도와 같이 취급되었습니다.
주인이 마지막으로 자신의 아들을 보내면, 농부들도 아들에게 어찌할 순 없을 것이며 세를 줄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하지만 농부들이 그 주인의 아들이 오는 것을 보고서 서로 의논하길, ‘이 자는 상속자이니 죽여버리고, 포도원을 찾이하자.’고 못된 음모를 꾸밉니다. 그를 죽여 포도원 밖에 버렸습니다. 이런 농부들의 모습을 보고 포도원 주인이 어떻게 하겠습니까? 당연히 포도원 주인이 사람들을 데리고 와서 그 농부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을 다른 사람에게 줄 것이라고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이곳에서 말한 ‘어떤 사람(주인)’은 하나님이고, ‘포도원’은 이스라엘에 대한 풍유이며, 포도원을 맡은 ‘농부’는 종교지도자들로 묘사되었습니다. 주인은 농부들로부터 소출을 받기 위해서 종을 보냅니다. 그러나 농부들은 종을 붙잡아 때리고 빈손으로 보냅니다.
첫 번째 시도가 실패한 후 주인은 다른 종들을 보냅니다. 시간이 갈수록 종들을 대하는 농부들의 태도는 더욱 강도가 심해집니다. 머리에 상처를 내고 능욕하였습니다. 5절에서는 주인에 의해서 보내진 종을 살해하는 일까지 발생합니다. 비유 안에 등장하는 이야기는 일상에서는 좀처럼 일어날 것 같지 않은 경우입니다. 비유 안에 등장하는 이러한 과장된 묘사는 이스라엘 백성의 심각한 패역을 드러내는 역할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하나님 백성으로서의 적절한 열매를 기대하며 예언자들을 보내셨습니다.
하지만 그때마다 이스라엘은 회개하기는커녕 예언자들을 박대하고 심지어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이곳의 묘사는 바로 이와 같은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여줍니다. 주인은 종들에 이어 아들을 보내기로 결심합니다.
이 내용도 일상에서는 쉽게 상상하기 어려운 내용입니다. 종들에게 악행을 저지른 농부들이 아들에게도 얼마든지 악행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농부들은 종들을 대했던 것처럼 아들도 죽입니다. 이 비유는 농부들의 본질적 악함을 드러내주는 데 목적이 있습니다. 이 비유 안에서 아들이 농부들에게 죽임을 당한다는 설정은 8-10장에서 자신의 수난과 죽음을 세 차례 예고하신 예수님의 수난예고와 적절한 조화를 이룹니다.
마태복음과는 달리 마가복음에서는 예수께서 스스로 질문하시고 스스로 대답하십니다. ‘주인이 와서 그 농부를 진멸하고 포도원을 다른 사람에게 주리라.’ 예수님의 대답에서 흥미로운 사실은 악행을 저지른 종들을 진멸하는 것으로 이 비유가 종결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이들’에게 포도원이 양도될 것이라는 점입니다.
마태복음에서는 21:41에서 포도원을 제때 열매 맺게 하고 소출을 바칠 만한 다른 농부들에게 주어야한다고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지만, 마가의 본문에는 이러한 설명이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지도자들이 보여준 반응으로 유추할 때(12), 그들은 포도원을 빼앗기는 농부들이 자신들을 가리킨다고 이해한 것 같습니다.
(2) 시편 인용과 결론(10-12)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의 결론을 시편 1 18편인 22건축자가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시편 118:22)를 인용하면서 내리고 있습니다. 이 시편은 신약성경 여러 곳에서 인용됩니다.
예수님과 신약성경 기자들은 시편 118편의 언급이 예수님에 대한 거부와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려 자신의 우편에 앉게 하신 사건들 속에서 성취되었다고 이해하고 있습니다(사도행전 4:11; 베드로전서 2:4,7). 하나님께서는 이 죽임 당한 메시아 아들을 통해서, 즉 이 아들을 기초로 삼아 새로운 건축물을 계획하셨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구약에서는 보이지 않았던 하나님 나라의 중요한 특성인데, 예수님의 비유를 통해서 설명되고 있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의 비유가 자신들을 향하고 있음을 알아차렸으나 회개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회개하기 보다는 도리어 예수님을 잡으려고 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어떻게 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들이 두려웠던 것입니다. 그들은 마음에 찔림으로는 충분치 않습니다. 탐욕에 사로잡히면 우리도 이렇게 될 수 있습니다. 진리에 관심이 없고, 사람들의 평판과 시선 그리고 인정만을 갈망하며 살게 될 것입니다. 아무리 작은 죄라도 돌이켜 회개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세금 논쟁(13-17)
우리들이 고백한다고 모두 믿음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고, 우리들이 찬양한다고 진심을 담은 노래가 아닐 수 있습니다. 다만 진심과 차이나는 간격을 좁혀 가는 것이 신앙의 여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자신의 기도와 진심이, 자신의 삶과 신앙고백이, 그리고 자신의 고백이 인격과 일치하는 것을 목표로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신앙생활은 외식될 수밖에 없습니다.
13그들이 예수의 말씀을 책잡으려 하여 바리새인과 헤롯당 중에서 사람을 보내매 14와서 이르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참되시고 아무도 꺼리는 일이 없으시니 이는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않고 오직 진리로써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심이니이다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옳지 아니하니이까 15우리가 바치리이까 말리이까 한대 예수께서 그 외식함을 아시고 이르시되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 데나리온 하나를 가져다가 내게 보이라 하시니 16가져왔거늘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형상과 이 글이 누구의 것이냐 이르되 가이사의 것이니이다 17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하시니 그들이 예수께 대하여 매우 놀랍게 여기더라(13-17)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오신 후 두 번째 논쟁하신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종교지도자들은 하나님보다 로마 당국의 심기를 건들리지 않고 싶었습니다. 첫 번째 논쟁은 성전에 대한 예수님의 권위에 대한 질문이었습니다(11:27-33). 두 번째 논쟁에서 예수님께서는 더욱 예민하고 민감한 상황에 직면하십니다. 바리새인들과 헤롯당원들이 상당히 민감하고 난처한 질문을 던집니다.
(1) 바리새인들과 헤롯당원들의 논쟁(13-15a)
바리새인들과 헤롯당원들이 서로 나란히 기록된 것만 해도 놀라운 일입니다. 바리새인들은 헤롯당원을 로마와 결탁한 매국노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서로 상종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죽이려는 데는 놀랍게 결탁합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공공의 적으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때문에 바리새인들은 자존심에 금이 갔습니다. 헤롯당원은 예수님이 혁명을 일으키면 로마에 부합한 자신들부터 처형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두 집단은 원수지간이었지만, 이번만은 협력해서 예수님을 넘어뜨리자고 한 것입니다.
이들은 예수님의 환심을 사려고 ‘선생님이여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참되시고 아무도 꺼리는 일이 없으시니 이는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않고 오직 진리로써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심이니이다’(14)라고 좋은 말을 늘어놓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기습적으로 예수님께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옳지 아니하니이까?’라고 질문합니다. 그들이 제기한 질문은 예수님께서는 처음 받은 질문보다 더욱 정치적이고 종교적인 민감한 이슈를 모두 담는 난해한 질문입니다.
예수님 입장에서 로마의 과세를 인정하는 것은 강력한 대중적 지지를 등에 업고 진행되는 유대 민족주의에 정면으로 맞서는 것이 됩니다. 따라서 세금을 내라고 하면 지지자들을 많이 잃을 수 이었습니다. 요세푸스의 기록(유대고대사 18.1.1, 18.1.6)에 따르면 갈릴리 지방의 유다가 일으킨 반란은 조세제도 때문이었습니다. 유다는 이 세금을 바치는 것이 비겁한 행위이고 하나님을 배반하는 행위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납세 거부를 주장하면, 로마의 정치 세력에 항거하는 것이 됩니다. 세금은 통치하는 재정에 기본이 되는 것인데, 납세를 거부하면 로마에 대항하여 반역적 행위를 한 것으로 간주되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들과 헤롯당원들은 이 질문 하나로 예수님과 백성 사이, 에수님과 로마와의 관계를 갈라놓을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올무에 빠뜨릴 기가 막힌 질문을 던진 것입니다. 이런 짓들은 분열의 영인 사탄이 하는 짓입니다. 성도들 사이를 이간질 시키고, 성도와 지도자 사이를 이간질하여 분열시킵니다. 나라와 나라를 이간질 시켜 쌔우도록 만듭니다.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서로 원수가 되게 만드는 것이 사탄이 하는 일입니다.
(2) 대답하시는 예수님(15b-17)
예수님께서는 자신에게 질문을 던진 이 무리들의 의도를 정확히 꿰뚫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외모로 판단하지 않고 중심을 보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로마의 데나리온을 가져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이 형상과 이 글이 누구의 것이냐?’(16)라고 물으십니다. 이 데나리온은 노동자들의 품삯을 지불하는 데 사용되었고 일반적인 거래에서 사용하던 화폐였습니다. 이 데나리온에는 황제의 형상과 함께 ‘신이요 대제사장’이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었습니다.
황제의 형상이 새겨져 있는 이 동전 주조에 대해서 경건한 유대인들은 형상을 만들지 말라는 제2계명을 위반한 것으로 여겼습니다. 동전에 새겨진 글귀는 신성모독적인 것으로 간주하였기에 엄격한 유대인은 이 동전 사용을 거부하였습니다. 일반 상거래에서는 이러한 유대인의 민감성을 존중하여 형상과 글을 제거한 특별한 구리 동전이 사용되었습니다.
질문한 자들이 데나리온을 가져왔다는 사실은 의외입니다. 그들이 자신의 종교적 신념에 충실하지 못했다는 것을 시사 합니다. 성전 안에까지 우상의 형상을 가져온 것은 하나님의 집에까지 우상의 형상을 가져온 행동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드리라고 대답하십니다. 놀라운 대답입니다. 로마를 반대하면서 바리새인들조차 세금을 내고 있었습니다. 세금을 낸다고 가이사가 참 주인이라고 인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가이사 위에 하나님께서 계심을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가이사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권력입니다. 하지만 궁극적인 통치자는 하나님 밖에 없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 대답을 통해서 지도자 그룹이 파놓은 함정을 지혜롭게 벗어나십니다. 이 대답은 보는 관점에 따라 바리새인과 헤롯당원 모두에게 만족을 주는 대답이 될 수도 있고, 양자를 다 실망시킬 수도 있는 대답이었습니다. 원래 그들이 던진 조세에 대한 질문은 바리새인과 헤롯당원 모두 동시에 만족시킬 수 없는 질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대답을 통해서 하나님의 언약적 주권을 인정하면서도 세상의 권력도 부정하지 않으십니다. 실제로 예수께서 17절에서 사용하신 동사(아포도테, 바치다)는 이러한 사실을 강조합니다. ‘바치다’는 원래 ‘돌려주다’라는 뜻입니다. 열심당원이 로마의 세금을 거부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충성심 때문이지만,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에 대한 충성심을 약화시키지 않으면서도 정치적 충성과 하나님에 대한 충성은 양립할 수 없는 것이 아님을 보여주십니다.
이것은 ‘거룩’과 ‘세속’에 대한 엄격한 구별이 아니라 ‘거룩’에 대한 절대적 요구 안에서 ‘세속’이 적절한 위치를 찾는다는 인식입니다. 여기서는 두 요소가 충돌하면 어떻게 되는지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열심당원들과 달리 예수님은 당시의 정치적 상황을 갈등으로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이 같은 예수님의 말씀은 자신들의 질문에 대해 어느 쪽으로도 기울지 않는 모호한 대답으로 들렸을 것입니다. 그들은 이처럼 재치 있는 예수의 대답을 놀랍게 여겼습니다. 안타깝게도 그들이 예수님의 지혜로운 답변에 놀라기는 했지만, 그것이 그들의 영적인 변화로 연결되지는 않았습니다.
우리의 믿는 바를 지혜로운 언어로 설명하는 것은 분명 필요합니다. 그러나 사람의 변화는 우리가 던진 지혜로운 몇 마디의 말로 좌우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단락에서 예수님은 재치 있고 또한 모호하게 함정을 피하였을 뿐만 아니라 세상 권력의 합법성에 관한 문제에 직면할 그의 첫 제자들과 또한 후 세대의 제자들에게 중요한 원리를 제시하십니다. 하나님 나라에서 충성하기 위해 세속 권력에 반드시 저항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의 통치 아래서 세속적 권력도 적절한 위치와 역할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로마서 13:1-5).
땅의 차원에서 사고하는 이들에게 주님은 새로운 세계관을 가져오셨습니다. 비유를 통해 하나님 나라와 그 나라를 향한 이 시대의 반응을 뼈아프게 드러내십니다. 무엇이 우리로 주님을 영접하고 그분의 소유권 인정하기를 주저하게 합니까? 무엇이 그를 십자가로 끌고 갑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