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전 한 여행지에서 화집을 사왔다.사고 싶은 화집이 많았으나 짐이 많아서 단 한권만 사기로 하고 고르고 고르다가
에곤 실레의 자화상을 모아 놓은 화집을 샀다. 여행에서 돌아온 후에는 물론 지금도 종종 바깥에서 번잡한 일에 휘말리고
돌아오면 그 화집을 보곤 한다.
에고 실레는 100여점 이르는 자화상을 남긴 것으로 유명하다. 텅 빈 공간 안에 놓인 실레의 육체는 불안정해 보이고
동작이나 움직임은 신경질적으로 보인다. 그 그림들을 보고 있으면 마음에 이는 동요나 걱정, 부질 없는 욕망이나 불안,
따위들이 그저 지나가는 삶의 일부라는 것을 받아들이게 된다.
자화상 속게 나타난 실레의 잘려진 신체 일부나 토르소는 그가 자연적인 육체에 관심을 기울인 것이 아니라,
내면에 떠오르는 영상에 관심을 갖고 있음을 보여 준다.
그는 " 나 자신의 전신을 바라볼 때면 나 자신을 바라 보아야 할 뿐 아니라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까지도
알아 내야 합니다. 내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더 나아가서 어느 정도까지 나 자신을 확장시킬 수 있는지
내가 사용할 수 있는 수단이 무었인지, 나 자신이 어떤 신비스러운 물질로 이루어져 있는지, 얼마나 더 큰 부분을
보아야 한는지, 지금까지 나 자신의 어떤 모습을 보아 왔는지. 이 모든 것을 알아야 합니다. 라고 쓴 편지를 남기기도
했다.
그의 말처럼 자화상이란 자아를 이해하고 탐색하는 작업이다. 단지 외면을 감찰하는 일이 아니라 내면에 대한 철저한
관찰의 기록이다. 자신을 오랬동안 들여다 보는 과정을 통해 자신이 원하는 것, 자신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일을 만나는
것이 자화상을 그리는 과정일 것이다.
독일의 조각가 막스 클링거는 " 자아를 탐색하는 것은 항상 자아의 이중성을 인정하는 것"이라고 했다. 탐색을 주도하는
주체가 곧 탐색의 객체가 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자신을 바라보는 일을 멈춰서는 안 되는데, 자신의 이중성을
인정하는 것이야 말로 자신을 알아가는 일부인 탓이다.
나는 사람의 얼굴을 바라보는 일을 좋아한다. 사람의 얼굴은 시시각각 다 다른 표정을 한다. 그래서 사람으의 얼굴은
역동적 이라고 했던가. 생각에 따라 표정이 바귀고 눈섭이 떨리기도 하고, 피부 결이 미세하게 달라지기도 한다.
뿐만아니라 시시각각 입술의 모양도 달라진다. 그러나 누군가의 얼굴을 오랫동안 들여다 보면 그런 역동성 가운데서
고요하게 정지하는 한 순간을 만 날 수 있게 된다. 그 순간, 내가 바라보는 누군가는 어떤 대상을 응시하는게 아니라
필시 자신을 바라보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요즘은 다른 사람들의 얼굴은 잘도 바라보면서 정작 나 자신의 얼굴은 오랫동안 바라 볼 수 가 없다.
부쩍 는 주름이나 나빠진 피부 결, 웃음 없는 얼굴 때문이 아니다. 그것들 뒤로 떠오르는 나의 정적인 순간과 마주 칠
자신이 없어서 그렇다. 그 순간, 나는 관조하는 척하며 변명을 만들고 그럴 수 밖에 없었다고 쉽게 체념하고
받아 들이라고 체념한다. 자기의 합리화라 할 것이다. 자꾸 스스로에게 기만 당하느니 점점 나 자신을 바라보는 일이
내키지 않게 된다. 그럴찌라도 어수선한 이 봄을 위시해서 올 일년 내내 나의 자화상을 그리듯 작정하고
오랫동안 바라 보아야 겠다. 어느 순간 고요가 찾아와 스스로에게 정직해 질때 그 때의 내 얼굴을 잊지 않고
기억할 수 있도록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