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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산에 오르며 진달래가 꽃봉오리를 연 것이 보였습니다. 아니 이 녀석, 개나리보다 먼저 왔네! 놀랐습니다. 하기야 내려오다 아파트 뒷길에서 개나리도 피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따뜻한 햇볕이 모이는 곳, 개나리는 그곳에 있습니다. 어쩌면 다음 주에는 길가 가로수로 있는 벚꽃이 피어나기 시작하리라 생각합니다. 드디어 벚꽃놀이 철이 오고 있습니다. 근데, 금년에도 그림의 떡이 되는 건 아닐까 모르겠습니다. 아직도 거리두기는 유효하지요. 하기야 그냥 동네서 즐기면 됩니다. 구태여 돈 들여 나갈 필요 있습니까? 수입도 별 볼 일 없는데 말입니다. ㅋㅋ
우연히 예전 파일을 뒤져보다 시라고 끄적거린 것이 나왔습니다. 그런데 지금의 마음과 그리 다르지 않군요. 그래서 옮겨 봅니다. ㅎㅎ
<봄>
창밖으로 봄이 온다.
해말간 하늘을 품고
꽃잎 나부끼며
봄이 온다.
창안으로 봄이 온다.
따사한 햇살을 담고
냉이 향기 가득 담아
봄이 온다.
눈으로 봄이 들어온다.
코끝으로 봄이 들어온다.
얼굴 가득 봄이 번져온다.
아 맘으로도 들어온다.
3월도 하순이네요. 우선은 건강하고 그리고 즐거운 마음으로 행복한 주말을 빕니다. ^&^
2021년 3월 20일 김종우 목사
첨부 : 21-03-14주일설교(들을 귀가 있는가)
성경 마태복음 13 : 3 - 9 2021년 3월 14일
설교 : 들을 귀가 있는가 김종우 목사
우리 모두 시간의 흐름 속을 살고 있습니다. 세상에 태어났다는 것은 곧 시간 속에 태어났다는 것과도 같습니다. 어느 누구도 이 시간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설령 상상 속에나 나올 법한 타임머쉰을 만든다 해도 역시 시간 속을 여행할 뿐입니다. 시간을 오간다는 것뿐이지 시간을 벗어날 수는 없는 일입니다. 다시 말해서 시간의 제약을 다소 극복은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런 일이 있겠는가 지금으로서는 말하기 어렵습니다. 많은 불가능한 일들 곧 상상 속에서의 일들이 현실로 나타난 것들을 보았기 때문이지요. 놀라운 발전을 거듭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단순히 공상일 뿐이지만 언제 눈앞에 나타날지 모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우리가 여전히 시간의 세계 속에서 살 것이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계속 년도를 계산할 것이고 날수를 따질 것입니다. 그것이 무지무지하게 빨라져서 ‘광년’이라는 단위를 일상화한다 해도 그것 역시 시간입니다. 시간은 우리 존재가 벗어날 수 없는 삶의 영역입니다.
우리는 아주 쉽게 시간을 3등분합니다.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입니다. 지나간 일들 그것은 과거의 사실들입니다. 현재는 순간일 뿐이지요. 끊임없이 계속되는 순간입니다. 그리고 미래는 계속 다가오는 시간들입니다. 문제는 우리네 인생이 꾸준히 앞을 향하고 있음에도 삶에 대한 태도는 좀 다를 수 있다는 것이지요. 많은 부분을 과거 즉 지나간 사건들을 생각하는 것으로 보내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경우는 대부분 후회와 탄식, 분노와 원망에 사로잡혀 있기 쉽습니다. 그리고 죄책감에 괴로워하지요. 그러므로 보다 발전적인 삶을 기대하기 어려워집니다. 그런가 하면 끊임없는 공상으로 하루하루를 지내는 사람도 있지요. 이 또한 괴로운 현재의 삶을 잊기 위한 방편이기도 합니다. 즉 현재의 삶이 없는 것과도 같습니다. 그것은 다른 말로 하면 만들 미래가 없는 것과도 같습니다. 왜냐하면 뿌린 씨가 없으니 거둘 열매도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니면 단순히 하루 벌어 하루 사는 인생들도 있습니다. 현재에 매여 있는 사람이라고 볼 수 있겠지요. 어쩌면 하루 사는 것조차 버거운 인생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과거를 무시할 수도, 해서도 안 됩니다. 그것은 현재를 만든 밑거름입니다. 한편 미래를 꿈꾸지 않는다면 발전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과거를 토대로 하여 미래를 계획하고 꿈꾸며 전진해 나가야 합니다. 그것이 현재를 이끌어가는 힘이지요. 그렇게 하여 건전한 인생이 만들어집니다.
우리의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여야 합니다. 과거에 매여 있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렇다고 현재에만 몰두해서도 안 됩니다. 과거는 말씀하신 대로 거울입니다. 고전 10 : 11 “저희에게 당한 이런 일이 거울이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의 경계로 기록하였느니라” 그 말은 앞으로 나가는데 있어서 경계할 교훈이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 조상들의 신앙생활을 통해서 잘못된 점들을 파악하고 전철을 밟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는 말이지요. 그렇지 않으면 그 잘못을 반복할 것이고 하나님에게서 복이 아니라 징벌을 받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도 그렇게 되지 않기를 바라시므로 성경에 기록하여 주셨습니다. 성경에 교리만 있는 것이 아니라 역사가 들어있는 이유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성경에 우리가 향할 목적이 있다는 사실이지요. 바로 꿈이기도 합니다. 다른 말로 한다면 비전입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예언이 들어있습니다. 우리 하나님 백성의 꿈이 무엇입니까? 한 마디로 표현하면 바로 ‘하나님 나라’입니다. 예수님 가르쳐주신 기도문에도 나와 있습니다. 마 6 : 10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아멘! 말씀 그대로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것이고 하나님 뜻이 여기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것이지요.
우려하는 것은 우리들이 이 미래에 대한 소망보다 과거에 집착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네 교회생활을 들여다보면 알 수 있습니다. 1년 열두 달 우리네 교회력에 무엇이 그려져 있는가 보십시오. 성탄절, 부활절, 오순절, 맥추절, 추수감사절 등등입니다. 모두 기념일입니다. 그 의미를 되새기는 것은 좋은 일이지요. 거울과 경계가 되는 일이니까요. 하지만 더 중요한 일이 있다는 것을 잊고 있는 것은 아닌지 우려하는 것입니다. 더 중요한 일이 무엇입니까? 다가올 일 아니겠습니까? 그것이 비전이고 성경의 표현대로 한다면 묵시지요. 예언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잘 알고 있는 경고의 말씀도 있습니다. 잠 29 : 18 “묵시가 없으면 백성이 방자히 행하거니와율법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느니라” 아멘! 미래가 없다면 제 멋대로 산다는 말입니다. 사 22 : 13 “ 너희가 기뻐하며 즐거워하여 소를 잡고 양을 죽여 고기를 먹고 포도주를 마시면서 내일 죽으리니 먹고 마시자하도다” 그렇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미래가 없는 백성은 망합니다.
그렇다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미래가 무엇입니까? 다시 말하지만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만의 미래이고 나 혼자만의 소망입니까? 과거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은 어땠을까요? 나라가 망하고 오랜 세월 이방의 억압 아래 살았습니다. 어쩌면 현재 우리보다 더 그 날을 소망하며 살았을지도 모릅니다. 그 때 하나님이 주신 약속은 무엇이었습니까? 메시야였습니다. 그 분이 오시면 새로운 세상이 열립니다. 참으로 오랜 세월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말씀 속에서 여러 번 약속하셨습니다. 그것을 가르치며 배우면 기다리지 않았겠습니까? 사 7 : 14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로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아멘! 반복하여 말씀합니다. 사 9 : 6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그 희망과 소망이 있었기에 어려운 시절을 견디었을 것입니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 생깁니다. 그렇게 기다렸던 메시야인데 그들은 왜 알아보지도 못하고 믿지도 않으며 영접하지도 않았을까요? 요 1 : 11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그렇게 되었습니다. 결국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은 자들은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도 누리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은혜의 촛대를 그들에게서 옮기셨습니다. 더 이상 하나님 백성이 되는 길이 육신의 혈통으로 이뤄지는 일이 아닙니다. 이제는 아브라함의 혈통의 자손이라고 이스라엘이 되거나 또는 단순히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나님 백성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약속대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만 구원의 은총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 초림의 사건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에게 거울이 되는 것은 우리는 재림의 때를 앞두고 있기 때문이지요.
이제 다시금 약속대로 오실 것입니다. 요 14 : 1 - 3 “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그렇다면 우리 또한 그 분을 알아볼까요? 믿고 영접할까요? 초림 때 하나님 백성이라 자부하던 이스라엘 백성이 그 분을 배척했던 것처럼 우리 또한 그럴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말입니다. 초림 때의 공식대로 한다면 단순히 예수 믿는다고 구원의 은총을 누릴 리가 없다는 말이지요. 예수님도 그럴 것을 미리 알고 말씀하셨습니다. 눅 18 : 8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아멘! 말로는 아멘! 하지만 사실 겁나는 일입니다. 그 때 믿는 자가 있겠다고 하십니까?
예수님이 천국을 말씀하시는데 우리는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마 13 : 9 “귀 있는 자는 들으라 하시니라” 아니 귀가 없이 어떻게 듣습니까? 당연한 말 아닙니까? 구태여 귀 있는 자는 들으라 하신 뜻이 무엇입니까? 그냥 몸에 달려있는 귀가 아니라는 뜻이겠지요. 우리가 서로 대화를 해도 잘 통하지 않는 사람에게 흔히 말하기를 ‘말귀를 못 알아듣는다,’고 합니다. 그 귀가 우리 몸에 달린 귀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깨닫는 지혜가 없다는 말이겠지요. 아무리 알아듣게 설명을 해도 이해를 못하면 얼마나 답답하겠습니까? 어쩌면 우리 주님이 당신 백성에게 그런 마음을 가지셨다는 말입니다. 내가 너희들이 기다리고 있던 메시야다. 그러니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다. 이 말이 당시 유대인들 소위 하나님 백성이라고 자부하던 그들에게 통하였겠습니까? 이 웬 미친놈이 나타나서 자기가 하나님 아들이라고 우기고 야단이야? 이 정신 나간 놈이 더 이상 떠들고 다니지 못하게 없애야 하는 거 아냐? 그러잖아도 민심이 흉흉한데 미친놈까지 나타나서 어지럽게 하는 거야? 그래서 어떻게 하였습니까? 잘 알듯이 결국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자기네 소원대로 죽인 것이지요. 이것이 예수 초림의 사건입니다. 즉 역사적 사실이지요. 그리고 이것이 말세를 사는 우리에게 거울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들으면 4 가지 반응이 나오리라는 것을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잘 아는 내용이지요. 첫째 길가입니다. 둘째 돌밭입니다. 셋째 가시떨기입니다. 그리고 좋은 밭입니다.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시고 나서 조금 후에 이 비유를 해석해주십니다. 이 비유를 ‘씨 뿌리는 비유’라고 명명하십니다. 그리고 설명해주시지요. 마 13 : 18 - 23절까지의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막 4장과 눅 8장에도 나옵니다. 이 공관복음들을 종합하여 주님이 하신 이 비유를 깨닫도록 합니다. 그 전에 씨를 설명해야 합니다. 씨를 뿌렸다는데 이 씨가 무엇입니까? 눅 8 : 11 “이 비유는 이러하니라 씨는 하나님의 말씀이요” 그리고 등장하는 밭이나 땅은 씨를 받는 즉 말씀을 받는 사람 또는 그 사람의 마음을 뜻합니다. 눅 8 : 15 “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니라” 이러한 뜻을 알고 4 가지 밭을 생각해봅니다.
1) ‘길가’입니다. 마 13 : 4 “뿌릴새 더러는 길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 버렸고” 이 말씀이 19절에 설명됩니다. “아무나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할 때는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리운 것을 빼앗나니 이는 곧 길가에 뿌리운 자요” 그렇다면 여기 ‘새’가 ‘악한 자’로 표현된 것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이 악한 자를 막 4 : 15절에서는 ‘사단’으로 표현합니다. 아무튼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하면 바로 사단이 와서 채간다는 것입니다.
2) ‘돌밭’입니다. 마 13 : 5 - 6 “더러는 흙이 얇은 돌밭에 떨어지매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나오나 해가 돋은 후에 타져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랐고” 이 말씀은 20 - 21절에서 설명합니다. “돌밭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되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을 인하여 환난이나 핍박이 일어나는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 말씀을 들을 때는 기뻐하고 좋아합니다. 문제는 그 다음이지요. 환난이나 핍박이 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냥 주저앉게 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환난이나 핍박이 왜 오느냐 하는 것이지요. “말씀을 인하여” 그렇습니다. 그 천국 말씀 때문에 어려움이 닥치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 때문에 고난이 닥친다는 뜻이지요. 누가 왜 그런 환난이나 핍박을 가할까요?
예수님이 오셔서 천국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 말씀을 들으려 모입니다. 그런데 백성들이 예수님에게 가는 것을 누가 가장 싫어하고 그것을 막으려 하였습니까? 당시 하나님 백성 곧 유대인들의 영적인 지도자였던 사람들입니다. 서기관 바리새인들 , 제사장과 장로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말씀하셨지요. 마 23 : 13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 자기네가 오지 않는 것은 그렇다 치고 백성들이 예수님에게 오는 것까지 막았습니다. 오늘날은 어떨까요? 말씀 공부하려 간다고 하면 좋아하고 반겨하는 목자들이 거의 없습니다. 그 목자들에게서 그렇게 듣고 배운 신자들이 혹 자기 가족이나 친지, 친구가 어디 성경공부 다닌다고 하면 길길이 나서 반대합니다. 자기 자신이 진리의 말씀을 가지고 있지 못하면서도 진리의 말씀을 배우려 간다고 하면 결사반대합니다. 성경 말씀 거저 가르쳐준다고 해도 자기 교회 목사님이 가지 말라고 해서 안 된답니다.
옛날 서기관 바리새인들이 왜 그렇게 예수님을 반대하고 거부하였습니까? 하는 말씀이 자기네 말과 달랐기 때문입니다. 왜 다른지 알아보지도 않습니다. 자기네와 다르니까 잘못되었다고 우기는 것입니다. 자기네가 하는 말이 무조건 하나님 말씀입니다. 다른 것은 없다는 것이지요. 물론 그들이 말하는 율법이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말씀하셨습니다. 마 23 : 1 - 3 “ 이에 예수께서 무리와 제자들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저희의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저희의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저희는 말만 하고 행치 아니하며” 그렇지요. 그들이 말하는 율법은 듣고 지켜야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약속대로 오신 메시야를 따르지 않습니다. 그것은 본받지 말라 하시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 말씀, 성경에 율법만 있는 줄 착각하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약속 곧 예언(묵시)이 있다는 사실을 무시하고 있습니다. 백성은 그 약속을 알고 싶어 합니다. 그게 소망이잖아요.
예수님이 오셔서 바로 그것을 가르쳐주십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하나님을 믿는 자들의 소망, 바로 천국 아닙니까? 그 천국을 말씀하고 가르쳐주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로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막고 있습니다. 그러면 자기네라도 가르쳐줘야지요. 그런데 문제는 자기네가 모른다는 것입니다. 더욱 큰 문제는 자기네가 모르고 있다는 사실조차도 모른다는 것이지요.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천국은 그저 죽으면 가는 곳이라고 알고 있을 뿐입니다. 그 천국이 오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니 기도를 하면서도 딴소리 하는 겁니다. ‘나라이 임하옵시며’ 무슨 나라가 오기를 기도하는 겁니까? 미국입니까? 아니면 꿈나라입니까? 도대체 무슨 나라를 꿈꾸며 기도하고 있을까요? 기도하는 것과 하는 짓이 전혀 맞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우리 하나님 보시기에 얼마나 속 터지는 일이겠습니까? 안타깝게도 오늘 우리의 현실이기도 합니다.
3) ‘가시떨기입니다. 마 13 : 7 “더러는 가시떨기 위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서 기운을 막았고”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바로 ’가시‘입니다. 가시가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가요? 22절에 봅니다. “가시떨기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치 못하는 자요” 그렇습니다. 아무리 좋은 말씀을 들어도 마음에 온통 세상 걱정이 가득 차있으면 말씀이 자라지를 못합니다. 아예 들리지를 않습니다. 어떻게 살까, 집 걱정, 먹고살 걱정, 부모자식 걱정, 노후 걱정 등등 온갖 걱정으로 하루 일과가 지나갑니다. 이 모든 것이 사실은 돈 걱정과 다 연관이 있습니다. 그러니 재리의 유혹은 끊임없이 따라다닙니다. 이것을 뿌리치지 못하면 역시 하나님 말씀이 열매 맺기는 어렵다는 것이지요.
우리가 기도하는 것들을 잘 생각해보십시오. 주십사, 기도하는 내용이 주로 하늘의 것입니까, 땅의 것입니까? 스스로도 부끄럽지 않습니까? 요약하면 그렇습니다. 마 6 : 31 - 32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아멘! 여태 우리가 구했던 것들이 사실 하나님 백성이 구해야 할 것들입니까, 이방인들이 구했던 것들입니까? 대부분 이방인들이 구했던 것들입니다. 입으로는 하나님 백성이라고 자부하면서도 실제로는 이방인으로 살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하십니다. 마 7 : 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아멘! ‘주여, 주여’ 하는 것을 보니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주님은 그들을 향해서 단호히 말씀하십니다. 23절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아멘! ‘아멘’이 나옵니까? 두려운 일입니다.
4) 마지막으로 ‘좋은 밭’입니다. 마 13 : 8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혹 백 배, 혹 육십 배, 혹 삼십 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 다른 설명이 필요 없을지 모르지만 보겠습니다. 23절 “좋은 땅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결실하여 혹 백 배, 혹 육십 배, 혹 삼십 배가 되느니라 하시더라” 좀 더 자세한 설명을 보고자 합니다. 눅 8 : 15 “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니라” 아멘! 우선은 착하고 좋은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말씀을 듣고자 하는 겸손한 마음을 가져야 하겠지요. 옛날 서기관 바리새인들처럼 무슨 허물이나 책잡으려는 마음을 가지고 듣는다면 그 말씀이 귀에 들어올 리가 없습니다. 또한 말씀을 듣는 것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지요. 그 말씀을 말씀대로 지켜야 합니다.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인내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마 7 : 13 - 14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아멘! 천국은 단순히 예수 믿는다고 자동적으로 들어가는 곳이 아닙니다. 우선 그 문이 좁고 협착하니 쉽지 않다는 사실부터 알고 준비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저 단순히 ‘예수 천당!’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알지도 못하는 목자들이 우리 성도들을 무식하게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래야 다스리기 쉽고, 세상 말로 다루기가 쉽다는 말이지요. 뭔가 좀 알면 대들까봐 겁을 냅니다. 신학도 모르면서 어디서 함부로 떠들어? 그럽니다. 문제는 신학이 성경을 아느냐 하는 것이지요.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요 9 : 4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 언제가 밤입니까? 5절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 예수님 계신 동안이 낮입니다. 그런데 떠나고 안 계십니다. 그러니 다시 오실 때까지 밤입니다. 그래서 약속(예언)은 다시 묵시로 봉해져 있는 것입니다. 아무도 모릅니다.
다시 말씀하셨습니다. 요 16 : 25 “이것을 비사로 너희에게 일렀거니와 때가 이르면 다시 비사로 너희에게 이르지 않고 아버지에 대한 것을 밝히 이르리라” 잘 아는 대로 묵시는 비유로 봉해져 있습니다. 때가 되어야 열립니다. 그 때 약속하신 신약 예언의 말씀이 열려서 풀린다는 것입니다. 과연 봉해져 있던 그 말씀을 예수님이 하나님께로 받아 인을 떼어 열어서 그 종에게 주시는 이야기가 나와 있습니다. 계 5 : 1 “내가 보매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 책이 있으니 안팎으로 썼고 일곱 인으로 봉하였더라” 그것을 예수님이 받아 계 6장에서 인을 떼어 계 10장에서 천사에게 주고 요한이 그 천사에게서 받습니다. 계 10 : 9 “내가 천사에게 나아가 작은 책을 달라 한즉 천사가 가로되 갖다 먹어버리라 네 배에는 쓰나 네 입에는 꿀 같이 달리라 하거늘” 2천 년 전의 요한이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이제 이 시대의 요한을 찾아 그 열린 말씀을 들어야 알 수 있고 그래야 천국 문을 열고 들어가게 됩니다. 이 말씀을 깨닫고 알고 신앙하기 바랍니다. 정말 들을 귀가 있기를 바랍니다.
<프라미싱 영 우먼>
남성에게는 순간의 쾌락이지만 여성에게는 평생의 고통, 그것이 성폭력입니다. 남자는 흘려주면 그만이지만 여자는 일생 그 짐을 지고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남자는 여성의 그 아픔이나 고통을 알지 못합니다. 아니면 관심이 없습니다. 관심을 가질 만한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지를 못합니다. 그냥 한 순간 지나간 일일 뿐입니다. 여성은 그럴 수가 없습니다. 몸에 새겨져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 몸을 가지고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버릴 수도 없고 잊히지도 않습니다. 물론 지워지지도 않습니다. 몸의 일부처럼 달고 살아야 합니다. 좋은 것도 아닌데 얼마나 괴롭겠습니까? 그것을 남성은 이해하지 못합니다. 대부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리고 성폭력 문제가 얼마나 이중적인지 본인도 잘 인식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본인이 비슷한 상황에 놓이면 대뜸 달라집니다. 나와 밀접한 관계의 사람이 그 처지에 놓이면 생각이 달라집니다. 내 아내가, 내 딸이, 내 동생이, 나의 친척이나 지인이 그 자리에 놓였다 싶으면 태도가 돌변합니다. 이제는 남의 일이 아니라 비로소 자기 일이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냥 남의 일이고 시간이 지나면 잊어야 하는 일이고 따지고 보면 별 일도 아닙니다. 이 얼마나 기막힌 일입니까? 그런데 우리 공동체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입니다. 그렇게 남성은 거리를 활보하고 나름 승승장구할 수도 있습니다. 당한 여성만 숨어서 고통을 삼킵니다.
의대 동기생입니다. 그 날 자기는 사정이 있어서 파티에 불참하였습니다. 그런데 친구인 ‘니나’가 동기들에게 당했습니다. 물론 만취 상태였습니다. 신고를 하였고 경찰에 고발도 하고 재판도 진행되었습니다. 모두가 만취 상태였답니다. 그런 일이 있었는지도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답니다. 어떻게 모두가 동일한 상태가 될 수 있는가? 그런 것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여자가 술을 과하게 마셨고 태도가 좀 헤프다고 했습니다. 변호사는 적극 가해자 편을 옹호하였고 그 쪽이 다수였으며 중요한 것은 사람들의 생각이 비슷했다는 점일 것입니다. 여성이 당할 만한 태도를 보여주었다는 말이지요. 소위 남성 그것도 술 취한 남성을 자극했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친구를 떠나보낸 지도 7년입니다. 그 일 후 ‘캐시’도 의대 중퇴를 하고 나왔습니다. 커피숍에서 일한 지도 꽤 되었습니다. 사장 언니와 사이도 좋고 큰 불편함은 없습니다. 단지 부모님이 늘 걱정스레 지켜보고 있습니다. 뭔가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닌지, 그 때의 충격을 쉽게 잊지 못하고 있나보다 생각하며 조심스럽게 지내고 있습니다. 이제 시간도 꽤 지났는데 말입니다. 요즘 들어 종종 집에도 안 들어오고 밤을 지냅니다. 뭔 일이 있는 것인지 차라리 애인이라도 생겼으면 좋겠는데 말이지요. 그러다 어느 날 과연 남친을 집으로 데려옵니다. 소아과 의사랍니다. 속된 말로 봉 잡은 것입니다. 사람도 착하게 보이고 훤칠하니 괜찮은 남자입니다. 둘이서 꽤나 좋아하니 다행이다 싶지요. 그렇게 잘 되어 가는가 보다 싶었을 것입니다.
캐시는 한 동안 남자들의 속성을 확인하며 골탕을 먹이는 재미를 가지고 지냈습니다. 왕창 취한 척하면 꼭 가까이 접근하는 남성이 있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쉽게 다루어 재미를 보려고 이끌고 갑니다. 다 된 듯한 그 무렵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상대방에게 쳐다보며 물어봅니다. 지금 뭐 하는 거냐고. 깜짝 놀랄 수밖에 없지요. 여태 만취되어 이제 내 것이다 싶어서 끝장을 보려는 찰라 눈을 빤히 쳐다보며 대듭니다. 기분이 싹 가실 것입니다. 소위 쉬운 여자로 보았는데 그게 아니더란 말입니다. 여자가 술 취하면 헤픈 사람입니까? 남자는 헤프다는 말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여자만 헤프다고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왜 남자는 해당되지 않는 건가요?
당시 한 무리 가운데 있었으면서 나 몰라라 했던 친구들을 찾습니다. 더구나 같은 여자로 두둔해주지는 못할망정 무시하고 친구를 매장시키는 입장에 섰던 친구를 불러냅니다. 결혼해서 잘 살고 있습니다. 그 친구를 꼬드겨 만취상태로 만듭니다. 깨고 보니 호텔 방에 낯선 남자와 함께 있는 것입니다. 얼마나 놀랐을까요? 그 사실을 캐시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제 캐시에게 빌미를 준 셈입니다. 그 상황에 처해보니 옛날 친구 니나의 입장이 상기되겠지요. 친구는 가지고 있던 당시의 비디오를 건네주는 조건으로 마무리합니다. 비디오를 본 캐시는 당시 상황을 확실하게 알게 됩니다. 그 자리에 지금 남친 ‘라이언’까지 동석하고 있었다니. 관계를 칼 같이 자릅니다.
당시 니나를 범했던 그 작자는 이제 곧 결혼식을 올립니다. 잘 나가는 의사가 되어 앞이 창창합니다. 가만둘 수 없지요. 문제는 이미 시효가 지난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자가 세상을 활보하며 잘 살게 둘 수는 없습니다. 대가를 치르게 해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자기 목숨을 겁니다. 그들의 총각파티 장에 치장을 하고 들어섭니다. 남자들이란!! 살인사건까지 덮어버리고 멋진 결혼식이 치러집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 경찰이 들이닥칩니다. 기막힌 복수이지만 생명을 걸어야 했다는 점이 마음 아픕니다. 영화 ‘프라미싱 영 우먼’(Promising Young Woman)을 보았습니다.
<일루셔니스트>
사랑에 목숨을 거는 경우도 많습니다. 클레오파트라에 빠진 안토니우스도 한 예입니다. 잘 아는 젊은 베르테르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게 목숨을 잃는 경우도 있지만 기어코 사랑을 쟁취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물론 목숨을 걸고 싸워서 얻어내는 것입니다. 과연 목숨을 걸만한 가치가 있는가요? 경험해본 사람은 알 것입니다. 소위 빠졌다 하면 물불을 가리지 않게 됩니다. 세상을 뒤집어서라도 가져야 합니다. 남자만 그런 것도 아니고 여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랑은 그런 힘이 있습니다. 물론 돈과 권력보다는 고상하다고 여겨집니다. 좀 더 높은 차원의 가치라고 사람들은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돈에 목숨 거는 사람에게는 비난과 멸시가 따르지만 사랑 때문에 견뎌야 하는 고난과 고초에 대하여는 감동을 받습니다.
상대가 누구이든 차별도 구별도 할 필요가 없지만 특히 뚜렷한 차별을 넘어서 이뤄지는 사랑에는 감동과 존경심까지 부여합니다. 왜 그럴까요? 관습과 전통을 이겨내려는 용기와 대담함에 우리 자신이 이루지 못한 꿈을 심어주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쉽게 말한다면 대리만족 같은 거 말입니다. 그런 소설을 읽는다든지 영화를 보고 있노라면 시간 가는 줄 모릅니다. 잘 아는 연속극이 인기를 끌 수 있는 비결이기도 합니다. 이루어가는 그 과정에 함께 묻히는 것입니다. 다음 이야기가 기다려지는 그 마음은 사랑하는 사람을 향한 우리 자신의 마음이기도 하지요. 해보고 싶은 꿈은 가졌으나 해보지 못한 사랑을 남의 이야기 속에서 누려봅니다.
저속한 욕망을 채우려는 본능과는 좀 차원이 다르기에 우리는 때로 불륜까지 사랑이라는 치장을 해주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면 즐기면서도 속으로는 윤리적 충돌을 일으킵니다. 옳고 그름의 잣대로 맘속 전쟁을 치르기도 합니다. 입으로는 투덜대면서도 재미는 있기에 계속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두 남녀의 진실한 사랑을 보면 이루어지기를 꿈꾸면서 이야기를 따라갑니다. 그 사랑을 쟁취하려고 고난을 헤쳐 가는 길은 우리 자신의 꿈이 이루어져 가는 길이기도 하지요. 실패든 성공이든 아픔과 기쁨 속에서 우리 자신이 감동과 성찰을 얻습니다. 어차피 사랑은 두 얼굴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 사람의 사랑의 발자취에도 두 얼굴이 나타납니다. 항상 행복하기만 하지 않으니까요. 누구나 사랑하면서 기다림의 아픈 경험을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아무튼 나의 사랑을 얻기 위해 자신의 재능과 실력을 십분 발휘하는 이야기입니다. 그것도 모든 사람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마술로써. 사실 어려서부터 단짝이 되었지만 당시로서는 전혀 어울릴 수 없는 신분의 차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아이젠하임’은 평민입니다. 그러나 ‘소피’는 왕족의 피를 가진 공주입니다. 어려서는 함께 놀 기회가 있었지만 커서는 그럴 기회가 없어집니다. 그들이 원해서가 아니라 주변 환경이 그들을 떼놓는 것입니다. 그러나 둘 사이에 맺어진 정은 강제로 때놓는다고 지워지는 것이 아니지요. 두 사람은 오래도록 떨어져 있습니다. 그 사이 소피는 원하지 않지만 황태자 ‘레오폴드’의 약혼자가 됩니다. 그리고 아이젠하임이 마술사가 되어 그 도시에 나타납니다. 사람들을 매혹시킵니다.
군중을 선동하는 마술사가 황태자는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얼마 후 왕위에 오를 자기에게 와야 할 관심이 엉뚱한 데로 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나라가 도대체 어찌 되려고 이런 미신 같은 황당한 것에 빠지는지 걱정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측근인 ‘울’ 경감에게 지시를 내립니다. 저 속임수를 밝혀내서 녀석을 매장시켜버리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울 경감도 현장을 지키며 구경을 하는데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 일이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으니 어찌할 도리가 없습니다. 황태자가 직접 자기 눈으로 확인해보려 합니다. 그래서 약혼녀와 함께 관람을 합니다. 아이젠하임이 누가 와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바로 그녀 소피를 무대 위로 불러서 보조 역할을 청합니다.
속임수에 불과한 짓거리에 사람들이 빠진 것이 도무지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그런데 자신도 어찌할 방법이 없습니다. 아무튼 어떤 빌미를 잡아서라도 없애버리려 합니다. 더구나 이 마술사와 자기 약혼녀가 내통하고 있다는 사실까지 알고는 분노까지 덧붙습니다. 앞뒤 가릴 것도 없습니다. 어떻게든 처리해야 합니다. 울 경감을 독촉하여 잡아들이라고 합니다. 잡기는 하였지만 죄목을 만들 수가 없습니다. 더구나 군중이 아이젠하임을 후원하고 있습니다. 마음대로 하기 어려운 처지에서 결국 방면합니다. 그런데 질투에 눈이 먼 황태자가 약혼녀를 강제하여 결혼식을 치르려 만반의 준비를 갖춥니다. 소피가 쉽게 응하지 않고 자리를 박차고 나갑니다. 그 뒤를 황태자가 급히 말을 타고 쫓아갑니다. 얼마 후 소피가 죽은 채로 돌아옵니다.
아이젠하임은 도시를 떠나기 전에 마지막 공연을 합니다. 그 자리에서 죽은 소피를 불러냅니다. 그리고 자신이 죽은 이유를 묻는 관객의 질문에 묘하게 응합니다. 울 경감은 황태자의 살인 증거를 찾아냅니다. 권력으로 사랑까지 얻으려는 욕심, 가능할까요? 욕정을 채울 수는 있어도 사랑을 얻기는 힘들 것입니다. 기막힌 반전은 마술처럼 이야기를 끝냅니다. 영화 ‘일루셔니스트’(The Illusionist)를 보았습니다. 2006년 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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