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의 첫출발지 '창림사지' / 창림사지 3층석탑
경주의 창림사지는 8~9세기 경에 세워진 절터입니다만 인근에 박혁거세의 탄생지인 '나정'과 신라 6촌의 촌장을 모시는 사당인 '양산재'가 있어 창림사지 일대를 신라 건국 초창기의 궁궐터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복원된 3층석탑만 홀로 서있는 황량한 창림사지는 신라의 첫출발지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습니다. .
IMG_9597 창림사지 가는길 입구
창림사지로 가는 길은 겨울이라 더욱 누런 논밭 한가운데 차한데가 겨우 지나갈만한 길이 나있습니다. 창림사지와 당간지주 안내판이 서있는 길에서 200여 미터 가다보면 왼쪽에 남간사지 당간지주가 우뚝 서있습니다.
IMG_9546 남간사지 당간지주(南澗寺址幢竿支柱)
당간은 절에서 불교 의식이 있을때 불, 보살의 공덕을 기리거나 마귀를 물리칠 목적으로 달았던 당이라는 깃발의 깃대를 말하며, 이당간을 받쳐 세우는 돌기둥을 당간지주라고 합니다.
경주 남간사 옛 절터에서 500m 정도 떨어져 있는 논가운데 동서로 세워진 화강석 당간지주로 높이 3.6m, 폭 60cm, 두께는 45cm입니다. 또한 두 기둥은 동서로 70cm의 간격을 두고 마주보고 있습니다.
이 당간지주는 통일신라 중기인 8세기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윗부분과 옆모서리를 다듬었고 안쪽은 十(십)자 모양의 홈을 판 것이 특이합니다. 아래위에 둥근 구멍을 뚤었는데 그 구조가 단순하며 안정감을 줍니다. 남간사지 당간지주는 보물 제909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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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간사지 당간지주에서 다시 길을 따라 50여m를 더가면 왼쪽으로 3층 탑이 보입니다. 이 일대가 창림사지 입니다.
IMG_9553 길바닥 안내판
길 바닥에 안내표시가 있으나 창림사지 주변에 있는 나무를 모두 베어놓아 창림사지 삼층석탑이 어디서나 보이므로 찾아가는데는 문제가 없습니다.
IMG_9555 경주남산 창림사지 발굴조사 안내판
길을 따라가다 왼쪽을 들어서면 발굴조사 안내판이 있습니다. 안내판에는 경주 남산의 문화재 보존, 정비사업의 일환으로 2011년 5월부터 창림사지 발굴조사를 실시하고 있으며 조사결과 현 위치 주변으로 새로운 절터가 확인되었고 절터에서는 동서 쌍탑지, 용의 모양이 양각된 상층기담면석 등 다수의 석탑부재, 탑지 북쪽에서는 건물지 등이 조사되었다는 내용이 써있습니다.
IMG_9559P 창람사지의 흔적
제일 높은 곳에 있는 창림사지 삼층석탑으로 올라가는 동안 주변에는 많은 주춧돌을 볼 수가 있어 여기가 절터였음을 보여줍니다. 주변의 모든 돌들이 창림사지의 흔적입니다.
IMG_9562 창림사지 쌍귀부
3층 석탑으로 올라가는 길에 있는 쌍귀부는 이름모를 승려의 탑비석 받침돌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거북 모양의 비석 받침돌인 쌍귀부(龜趺)는 길이 142.5cm, 너비 86.3cm, 높이 38.5cm으로 특이하게 거북 2마리가 조각되어 있습니다.
두마리 모두 몸통만 남아있고 머리 부분은 잘려 나갔으며, 그 중 하나는 국립경주박물관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비문은 신라의 명필 김생이 썼다고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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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림사지 3층석탑 앞에는 무덤이 있고 철책 안쪽에도 무덤이 있었습니다.
IMG_9571 창림사지 삼층석탑
이 곳 창림사지(昌林寺址)는 삼국유사에 신라 최초의 궁궐지로 기록된 유서 깊은 곳입니다. 창림사는 통일신라시대에 창건 되었고 고려 때까지 존속되어 오다가 조선초기에 폐사되어 탑만 남아 있었습니다.
1824년에 석탑은 사리 장엄구를 도굴하려던 자에 의해 무너졌고 이 때 조탑사실이 기록된 창림사 무구정탑원기(無垢淨塔願記)가 나와 이 탑이 신라 문성왕 17년(855)에 건립된 것임이 밝혀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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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층 몸돌에는 사방에 문 모양이 새겨져 있고 문고리 모양도 양각되어 있습니다. 이는 부처님의 영(靈)이 드나드는 문임을 나타내는 것이라 합니다.
3층석탑은 전형적인 통일신라 양식이며 통일신라 후반기에 가면서 장식적인 면이 많이 나타나면서 기단부에 불교를 수호하는 수호신상을 각면에 조각을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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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층 기단부 쪽에 8면에 걸쳐 각상(像)이 원래 새겨져 있었으나 복원하는 과정에서 훼손되어 있는 부분에 새로운 돌들로 채워놓았습니다. 그래서 8개의 상들이 모두 보이질 않고 4개의 상만 볼 수 있습니다. 이때문에 정식 문화재로 지정되지는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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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림사지 삼층석탑은 원래의 모양이 아니고 주변에 흩어져 굴러다니던 탑재들을 모아 1976년에 다시 복원한 것입니다. 탑모양을 자세히 보면 옛날 돌하고 새로 채워놓은 돌하고 섞여 있습니다.
복원하면서 2층과 3층 탑신(몸돌) 그리고 기단의 절반 정도를 새로 다듬어 끼워 넣었습니다. 탑은 기단부와 탑신부만 있고 상륜부는 없는 상태로, 기단부가 2층으로 되어 있어 규모가 더욱 커 보입니다.
IMG_9585PN 창림사지 3층 석탑에서 본 풍경
창림사지 삼층 석탑에서 보면 이일대가 전부 창림사지로 어마어마한 규모의 절이었던 것 같습니다. 원래는 여기가 소나무숲 이였는데 나무를 모두 베어버려 덕분에 경주 시가지쪽의 넓은 시야를 볼 수 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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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림사지 3층 석탑에서 보면 왼쪽으로는 나정, 오른쪽에 양산재가 보입니다. 경주 시가지쪽 소나무숲이 나정이라는 곳입니다. 나정은 박혁거세의 탄생지입니다. 오른쪽 보면 기와집 건물은 양산재로 신라 6촌의 촌장을 모신 사당입니다.
신라가 건국할 당시에 6촌의 촌장들이 그자리에 모여 신라를 세울 지도자를 선정해야하는 문제로 회의를 하다가 나정쪽에서 말이 우는 소리가 나서 거기를 가보았더니 붉은 큰 알이 있었다합니다. 그 큰알을 깨어보니까 어린아이가 나왔는데 박에서 나온 아이이고, 빛나는 광채를 띄고 있어 이름을 박혁거세라고 붙여졌다고 합니다.
6촌장들이 박혁거세를 왕으로 세우고 신라라는 국가를 탄생시켰다고 하는데 바로 이런점에서 이 주변지역이 신라가 건국하던 초창기 중심지였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IMG_9593 창림사지
나정과 양산재, 창림사지를 연결하면 경주 남산의 북쪽자락이 완경사면으로 경주 벌판 과 자연스레 연결되는 지역입니다. 현재 쌍귀부 아래쪽 일대를 신라 초창기 왕궁터로 추정하고 발굴조사가 예정되어 있습니다.
지금의 경주 시가지쪽 벌판은 당시 습기가 많아 농사짓기는 좋았지만 거주지로는 않좋았으며 점차 신라가 발전함에 따라 현재의 경주 시가지쪽으로 경주의 중심지가가 확장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IMG_9594 산불감시초소(왼쪽 비닐하우스)
나라가 망하면 아무리 화려한 모습이었더라도 후손들이 노력해봐야 과거의 모습을 되찾기는 힘든 것 같습니다. 결국은 되돌릴 수 없는 모습으로 인위적인 복원만 할 수 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현재 발굴조사를 위해 주변 나무를 모두 베어 놓아 신라의 첫출발지는 그저 황량하고 썰렁한 모습입니다. 창림사지 초입에 조그만 비닐하우스에 사람이 앉아 있었는데 산불감시초소라 합니다.
날씨가 추워서 그런지 사람들의 발길이 없는 창림사지에 그래도 산불감시초소가 창림사지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여행 TIP
소재지 : 경상북도 경주시 탑동 858-6 (남간사지 당간지주)
승용차를 이용하시는 분은 양산재앞에 주차를 하시고 걸어가시는 게 좋습니다.
창림사지 위치도
- 드래곤의 사진속 세상풍경 -
http://dragonphoto.tistory.com
첫댓글 나정, 양산재, 남간사지 당간지주 등을 보았는데
창림사지 3층석탑은 처음보게 되는군요.
덧분에
찾아갈 곳이 생겨 고맙습니다.
다음 경주여행길에 꼭 들려보도록 하겠습니다.
허허벌판이지만 나름 의미있는 곳이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