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3월 25일 성주간 월요일
마리아가 매우 값진 순 나르드 향유 한 근을 가지고 와서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 발을 닦아드렸다.
그러자 온 집 안에 향유 냄새가 가득 찼다. (요한 12,1-11)
Mary took a liter of costly perfumed oil made from genuine aromatic nard and anointed the feet of Jesus and dried them with her hair; the house was filled with the fragrance of the oil.
말씀의 초대
하 느님께 온전히 순종하는 종이 있다. 이 종은 하느님의 뜻에 따라 모든 민족들에게 성실하게 공정을 펼 것이다(제1독서). 죽었던 라자로를 살리신 예수님을 환영하는 잔치가 벌어졌다. 그런데 이 기쁜 날 라자로의 동생 마리아는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닦아 드린다. 이는 예수님의 장례를 예고하는 행위이다. 역설적이게도 라자로를 살리신 예수님을 환영하는 기쁜 날에 예수님의 죽음이 선포되는 것이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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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에서는 죽음과 부활, 섬기는 것과 섬김을 받는 것이 대조됩니다. 첫 번째는 죽음과 부활의 대조입니다. 죽었던 라자로를 살리신 예수님을 환영하는 잔치가 벌어졌습니다. 그런데 이야기의 중심은 거기에 있지 않고,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붓고 닦아 드리는 장면에 있습니다. 향유를 붓고 닦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그분의 ‘장례’를 위한 것입니다. 사실 라자로를 살리신 직후 최고 의회에서는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의하였습니다(요한 11,45-53 참조). 라자로를 살리신 것이 오히려 예수님께서 돌아가시게 된 계기가 된 것입니다. 이는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요한 15,13)고 하신 당신의 말씀대로 지상에서의 최고의 사랑을 보여 줍니다. 두 번째 대조는 섬기는 것과 섬김을 받는 것입니다. 요한 복음에는 다른 이의 발을 씻는 장면이 두 번 나옵니다. 하나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손수 씻어 주시는 장면입니다(요한 13,4-5 참조). 또 다른 하나가 바로 오늘 복음으로,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을 씻어 드리는 내용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돌아가실 때가 되자 손수 제자들의 발을 손으로 씻어 주십니다. 그러나 제자들 가운데 예수님의 발을 씻어 드린 이는 없습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예수님의 죽음을 예감하고 예수님의 발을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닦아 드립니다. 마리아처럼 예수님을 극진하게 섬기는 모습은 요한 복음에 없습니다.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의 신비에 참으로 깊이 동참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주간이 시작되었습니다. 우리 또한 마리아처럼, ‘친구’를 살리시고자 죽음을 각오하신 예수님을 온전히 섬기며 그분의 수난과 죽음의 신비를 깊이 묵상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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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타와 마리아의 이야기(루카 10,38-42 참조) 속에 예수님 발치에만 앉아 있던 마리아를 기억하시지요? 그토록 사랑하는 예수님께 마리아는 비싼 순 나르드 향유 한 리트라를 가져와서,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그 발을 닦아 드리고 있습니다. 그에게는 나르드 향유의 가격이 얼마인지,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관심이 없습니다. 오로지 예수님을 향한 사랑만 있습니다. 그런데 그 여인의 행동을 지켜보는 한 제자가 있었습니다. 유다입니다. 그는 마리아의 행동을 보자마자 곧바로 나르드 향유 가격이 떠오릅니다. 노동자 1년의 임금에 해당하는 300데나리온 어치의 향유 값이 그의 머릿속에서 계산됩니다. 이런 비싼 향유가 그냥 낭비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 불만스러운 심정을 그냥 내보일 수 없습니다. 자신의 불만의 정당성을 내세우려고 가난한 이들을 핑계 삼습니다. 인간관계에서 ‘사랑의 관계’와 ‘이해관계’의 차이를 보십시오.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계산하거나 따지는 법이 없습니다. 마리아의 사랑으로 나르드 향유 냄새가 온 방에 가득합니다. 사랑의 향기입니다. 반대로 유다는 머릿속에서 이해득실만 따지고 있습니다. 정의를 내세우지만 스승이신 예수님에게 사랑의 마음이 없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일차적인 사랑 없이 가난한 이들을 팔아 내세우는 정의 뒤에는 권력욕과 탐욕이 숨어 있게 마련입니다. 신앙인의 중요한 덕목은 계산하지 않고 따지지 않고, 예수님을 그냥 사랑하는 것입니다. 정의는 그다음에 자동으로 따라오는 덕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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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는 라자로를 찾아가십니다. 그는 정성을 다해 모십니다. 한때 죽었던 자신을 ‘다시 살리신 분’이 오셨기 때문입니다. 라자로의 가족 역시 남다른 마음으로 맞이했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마리아는 고급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닦아 드립니다. 애틋한 정성입니다. 사람들은 숙연해졌을 것입니다. 그런데 유다 이스카리옷은 어색한 표정이 됩니다. “어찌하여 저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지 않는가?” 그는 이렇게 되뇝니다. 정성을 ‘정성으로’ 보지 못한 것이지요. 마리아는 잊지 않고 있었습니다. 오빠를 살려 주신 예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그분의 발에 향유를 부은 것은 감사의 표현이었습니다. 그녀는 예수님의 방문에 감격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향유가 ‘아무리 비싼들’ 마리아에게는 조금도 아깝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유다는 아니었습니다. 그는 돈을 먼저 생각합니다. 마리아의 마음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마리아의 순수함을 헤아려 보지 않았기에 낭비라고 판단합니다. 살면서 ‘쉽게 빠지는’ 잘못입니다. ‘너무나 쉽게’ 걸려드는 유혹입니다. “이 여자를 그냥 놔두어라. 그리하여 내 장례 날을 위하여 이 기름을 간직하게 하여라.” 모두를 배려하시는 말씀입니다. 모든 것을 덮어 주시는 예수님의 따뜻함입니다. 우리는 어느 쪽인지요? 마리아입니까? 유다의 모습입니까? 성주간 동안 우리는 우리 자신을 돌아봐야 합니다.
자립을 위한 도움
-홍경완 신부-
막 일꾼 하루 품삯이 한 데나리온이던 시절이니 삼백 데나리온은 열 달 치는 족히 되는 거금의 보물이다. 그 보물을 발에 쏟아부었으니 허투루 써버렸다는 비난도 무리는 아니다. 돈을 제대로 사용하는 일은 액수의 많고 적음과 무관하게 언제나 중요한 법이다. 써야 할 곳에 제대로 쓸 줄 아는 것은 지혜의 영역에 속한다. 이렇게 보면 마리아의 소비행위는 주님의 구원사건을 앞당겨 보여주었으니 제대로 쓴 셈이다. 마리아만큼 현세 사물을 제대로 쓰기도 쉽지 않다. 더불어 복음은 가난한 사람을 위한다는 명목이 때때로 좋은 핑계가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실 제로 가난한 이들을 위한다는 미명하에 이루어지는 교회 안팎의 많은 일이 실은 젯밥에 매달려 있는 경우가 가끔 있어 때로는 심각한 우려를 낳기도 한다. 그래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다는 계획에는 늘 되물어 보는 작업이 필요하다. 이 일이 가난한 이들에게 어떤 도움이 얼마만큼 되는지 말이다. 많은 경우 그것은 말 그대로 미명에 그치고, 실상은 제 실속 차리기 위한 치장이나, 제 이름 높이기 위한 도구로 전락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자조自助와 자립을 위한 도움이란 근본원칙은 아예 없고, 그들이 무엇을 원하는지에 대해서도 전혀 관심이 없거나, 심지어 마지막 남은 그들의 자존감마저 깡그리 무너뜨리는 일도 심심찮게 벌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가난한 사람을 위한다는 명목이 아주 치사한 것일 수도 있다.
언젠가 텔레비전 뉴스에서 소개되었던 내용입니다.
부산에 사는 어느 부부에게 어느 날 아주 큰 행운이 찾아왔습니다. 글쎄 3억 원짜리 행운권 복권에 당첨된 것입니다. 얼마나 기쁘고 좋았을까요? 그런데 복권 당첨으로 인해 이 가정에 불행이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이 부부는 복권 당첨의 행운으로 각자가 방탕의 길로 들어선 것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부부싸움이 잦아지게 되었지요. 결국 남편은 바람피우는 아내를 죽이려는 살인미수범으로 철창신세를 지게 되었습니다.
3억 원. 적지 않은 금액입니다. 그리고 이 복권에 당첨되었을 때, 이 부부는 큰 행복을 얻게 되었다고 무척이나 기뻐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복권 당첨이 진정한 행복이었을까요?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복권 당첨이 불행의 시작이었던 것이지요.
많은 사람들이 물질적인 만족을 가장 우선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물질적인 만족이 진정으로 자신을 행복하게 해주었는가를 생각해보면 아니었습니다. 그보다는 사랑의 체험이 자신을 행복하게 해주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변하지 않는 것도 바로 이 사랑입니다. 이러한 이야기가 있지요.
어느 천사가 하늘에서 내려와 이 세상에서 하루를 지내면서 기념될 만한 것을 가져가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주위를 둘러보니 정원에 핀 아름답고 향기로운 꽃이 있어 가져가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그리고 또 보니 잠자는 어린아이의 미소가 너무나도 아름다워서 그 미소도 가져갑니다. 그런데 또 보니 그 어린아이를 잠재우는 어머니의 따뜻한 사랑이 아름다운 것입니다. 결국 천사는 어머니의 사랑까지 포함하여 세 가지를 가지고 하늘로 올라갔지요. 그러나 하늘에 올라와서 보니 이미 꽃은 다 시들었고, 아기의 미소는 어른이 되어버렸고, 그래도 남아 있는 것은 어머니의 사랑뿐이었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변하지 않는 것은 바로 사랑입니다. 이 세상의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것들은 철저하게 변할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그런데도 이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것들을 더 우선시하고 있는 것은 왜 일까요?
오늘 복음을 보면 마리아라는 여인이 예수님께 사랑을 표시합니다. 즉, 비산 순 나르드 향유 한 리트라를 가져와서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닦아드리고 있습니다. 가장 큰 예우이고, 얼마나 예수님을 사랑하는지를 알 수 있는 장면입니다. 하지만 이 모습을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제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물질적으로만 생각하고 있지요. 그래서 이렇게 말합니다.
“어찌하여 저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지 않는가?”
사랑에 대해서는 물질적으로 평가할 수 없는 것입니다. 세상의 그 무엇보다도 가장 귀하고, 가장 소중한 것이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우리들 역시 사랑을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가치로 평가 절하할 때가 참으로 많았던 것 같습니다.
있는 그대로의 사랑, 사랑 그 자체를 바라볼 때만이 진정한 사랑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인생을 가장 멋지게 살아가는 방법은 가능한 한 많은 것을 사랑하는 것이다.(빈센트 반 고흐)
참된 제자
-이연수-
여기 한 여성이 완전한 자격을 갖춘 제자가 되는 길을 보여 주는 예가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마리아입니다. 예수님이 베타니아에서 다른 이들과 함께 식탁에 앉으셨을 때, 마리아가 값비싼 순 나르드 향유 한 리트라를 가져와서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그분의 발을 닦아 드립니다. 아마 그곳에 모여 있는 모든 사람이 놀랐을 것입니다. 유다교라는 배경에서 볼 때, 어느 여자가 알지도 못하는 남자들 앞에서 자기 머리카락을 풀어 헤치는 일은 한마디로 수치스러운 일이었기 때문이죠. 하지만 그녀는 노동자의 일 년 치 품삯에 해당하는 향유를 기꺼이 예수님을 위해 사용함으로써, 확신에 찬 깊은 사랑을 보여 줍니다. 이는 “어찌하여 저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지 않는가?”라고 말하는 유다처럼 거짓된 관심에서 나온 행동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듯이, “내 장례 날을 위하여” 향유를 부은 것이었기에, 예수님의 때(12,20-36)를 제때에 알려 준 예언자적 행동이 됩니다. 유다인들은 사람이 죽으면 시신에 향유를 바르기 때문에, 마리아의 행동은 예수님의 죽음과 장례를 예견한 것이지요. 다가올 사건들의 의미를 이해하여 하느님의 메시지를 전하는 도구 역할을 한 셈입니다.
예수님의 무한한 마음 읽기
- 김정택 목사-
오늘 복음은 이번에 저한테 맡겨진 매일 묵상에서 제일 피하고 싶은 이야기입니다. 저도 그러하고 어쩌면 남자분들은 유다 이스카리옷과 똑같은 마음일 것입니다. 무슨 향유인지는 몰라도 삼백 데나리온이라면 지금 시세로는 3천만 원은 되는 액수인데 그런 향유를 예수님 발에 붓는다는 것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유다보다 더 심하게 마리아를 호통쳤을지 모릅니다. 우선, 예수님은 사태를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그리고 향유를 부은 마리아의 마음을 읽고 있습니다. ‘왜 마리아가 다른 사람들은 도저히 받아들이기 어렵고 이해할 수 없는 행위를 할까 ? 반드시 이유가 있을 거야.’ 예수님은 드디어 마리아의 마음을 읽었습니다. ‘아하, 마리아는 내 죽음이 가까워오고 있다는 것을 아는구나. 얼마나 슬플 것인가 ? 아, 그래서 다른 사람은 이해할 수 없는 행위를 하는구나.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 앞에서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고 싶겠지. 그래 마리아의 마음을 받아줘야지. 그렇지만 3천만 원은 우리한테 얼마나 큰 돈인가 ? 굶주린 많은 사람이 배를 채울 수 있는 귀한 돈이지. 그래 남자들의 마음도 이해하자. 그러나 지금은 모든 것을 바치고 싶은 마리아의 마음이 상처 받지 않는 것이 우선이야.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들 옆에 있어. 남자들이 하고자 하면 이후라도 얼마든지 할 수 있어.’ 그래서 여성신학이 있는 모양입니다. 나이 60이 되어서야 아내의 마음을 조금 읽는 흉내를 내는 것 같습니다. 아내는 저한테 관심이 참으로 많습니다. 모든 이야기를 다 듣고 싶어하고, 자신의 정성을 저한테 쏟고 싶은 모양입니다. 그런데 전에는 이런 아내의 마음을 저에 대한 의존, 스스로 자기 길은 찾지 않는 의존적인 모습으로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마음은 끝까지 같이 가며 돌봐주고 지켜주고 키우고자 하는 정성 그 자체이고 원초적인 모성애의 발로입니다.
예수님게서 하신 일
- 구인회-
오늘 복음에서 많은 유다인 무리가 예수님을 보려고 몰려온다. 하지만 그들 중에는 예수님에 대한 순수한 믿음보다는 그분이 일으킨 기적을 눈으로 확인하려는 사람들이 많았던 모양이다. 복음은 이렇게 전한다. “예수님 때문만이 아니라, 그분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일으키신 라자로도 보려는 것이었다.”(9절) 죽은 사람을 살리는 것은 정말 놀라운 기적이다. 이로 인해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믿고 따르게 되었다. 여기서 눈여겨보고 싶은 것이 있다. 순 나르드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닦아드린 마리아의 행동이 그분의 죽음을 미리 드러내는 것이라면, 그에 앞서 죽은 라자로를 살리신 기적은 당신 부활을 알리는 표징이라는 점이다.
신앙인한테는 부활이 주는 희망이 크다. 세월이 유수와 같이 흐른다고 하는데 나도 나이를 더할수록 흐름의 속도가 더욱 빨라짐을 실감한다. 그만큼 죽음의 문이 가까워짐을 의미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어느 한순간 우리는 이 세상을 떠나 영원한 세계로 옮겨갈 것이다. 우리보다 앞서 죽음의 문을 넘어가신 그분 안에서 우리도 부활하리라는 희망을 갖고 그 순간을 기쁘게 맞이할 수 있도록 깨어 기도해야겠다.
어제 우리 본당에서는 피정이 있었습니다. 바쁜 일상 가운데에서 이 피정을 통해 주님의 사랑을 찾고자 하는 마음에서 매달 진행되는 월 피정입니다. 솔직히 걱정이 많았습니다. 다른 이가 진행하는 피정이 아니라 제가 직접 진행을 하고 직접 강의도 해야 하는 피정이었기 때문입니다. 더불어 제가 직접 진행하는 피정인데 사람들이 오지 않으면 어떻게 하는가 라는 걱정도 사라지지 않더군요. 특히 홍보를 제대로 하지 못했기 때문에 더욱 더 걱정이 되었습니다.
결과는 그리 나쁘지 않았습니다. 꽤 많은 분들이 참석하셨고(전보다 많이 오시지는 않았지만), 좋은 피정이었다면서 미소 지으며 돌아가시는 분들이 참 많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저 개인적으로는 피정을 마친 뒤 아쉬움이 없지 않았습니다. 조금만 더 잘했으면 더 좋은 피정이 되었을 것 같고, 이 순간에 이렇게 했더라면 더 괜찮을 것이라는 후회도 많이 생겼거든요.
하지만 이런 아쉬움을 통해 생겨나는 불평불만들은 지금 당장 버려야 할 내 마음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이미 지난 일에 대해서 연연하기보다는 늘 감사하면서 지금이라는 시간에 더욱 더 충실하게 살아가는 것이 주님께서 원하시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다보니 아쉬움보다는 감사의 마음이 더 많이 생겼습니다. 그리고 그제서야 행복할 수 있었지요.
정말로 그런 것 같습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감사의 이유를 찾았을 때 우리는 행복했습니다. 그러나 어떠한 상황에서도 불평불만의 이유를 찾았을 때 우리는 힘들고 어려운 삶을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회학자들의 분석에 따르면, 1950년대 지구촌 사람들에게 필요한 생필품은 72가지였고, 절대 필요한 필수품은 18가지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2천 년대를 살고 있는 현대인들의 생필품은 500가지 이상이고, 꼭 필요한 물품만도 50가지가 넘는다고 합니다. 필요한 생필품을 더 많이 누리며 사는 현대인이라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더 많이 누리는 현대인들이 5, 60여 년 전 사람들보다 더 행복하고 감사할까요? 그렇지는 않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두 명의 사람이 분명하게 대비됩니다. 한 명은 비싼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발을 닦아 드리는 마리아입니다. 그녀는 주님께 너무나 감사해서 최고의 예우를 최하고 있지요. 그에 반해 또 한 명은 유다 이스카리옷입니다. 그는 이 여인을 향해 불평불만의 이유를 날립니다.
“어찌하여 저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지 않는가?”
결국 이들의 운명은 후에 완전히 바뀌지요. 한 명은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하는 영광을 얻은 반면, 다른 한 명은 좌절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게 됩니다.
감사의 이유를 찾고 감사의 행동을 한 사람과 불평불만의 이유만을 찾고 그에 따른 말을 했던 사람의 차이가 이렇게 달라진다는 것을 확인할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할까요? 분명해집니다.
어디에 있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어디로 가느냐가 중요하다.(올리버 웬델 홈스)
삶과 죽음
-오민환-
“파스카 축제 엿새 전.” 이제 예수님께서 지상 생활을 마감하며, 예루살렘으로 가시기 전, 죽은 이들 가운데 우뚝 일으켜진 라자로를 만나십니다. 그의 집에서 예수님을 위한 흥겨운 잔치가 벌어집니다. 뵙고 싶었던 주님을 만난 기쁨은 말로 표현할 수 없겠지요.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붓고 닦아드립니다. 온 집안에 향기가 가득합니다. 예수님은 그 존재만으로도 차고 넘치는 분이라, 인간적인 척도로는 측량할 수 없습니다. 돈주머니를 찬 유다의 비판은 현실적, 인간적입니다. 그는 비싼 향유를 왜 그렇게 허비하는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리아를 변호하면서 당신께 닥쳐온 죽음을 예고하십니다. “나는 늘 너희 곁에 있지는 않을 것”이라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처한 상황이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이 유일무이하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제자들은 그들의 스승처럼 가난한 이들과 함께 살아갈 것입니다. 그러나 스승의 사건은 유일무이합니다. 예수님의 소재를 파악한 유다인의 무리가 몰려옵니다. 예수님뿐만 아니라 라자로도 보려고 합니다. 라자로는 예수님께 생명의 능력이 있다는 표징인데, 그들에게는 오직 호기심의 대상일 뿐입니다. 그들은 라자로도 죽이려 합니다. 라자로 때문에 너무나 많은 유다인들이 그들을 떠나 예수님을 믿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살인의 결의는 예수님뿐만 아니라 그분의 제자들도 박해와 죽임을 당할 것이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귀한 사랑
-김찬선신부-
저의 큰 약점 중에 하나가 사랑을 잘 받아들일 줄 모르는 것입니다. 가난을 살아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래서 누가 선물을 주면 고맙게 받지 못하고 부담스러워 합니다. 하여 선물을 주신 분을 실망시켜드리고 사랑할 수 있는 기회를 드리지 않습니다. 이에 비해 저와 같이 사는 선배 형제는 이 면에서 참으로 훌륭하고 그래서 그분이 부럽습니다.
그 형제님은 누구의 사랑을 받기를 원하고 그래서 사랑을 받으려고 애를 쓰지도 않지만 누구의 사랑을 아주 자연스럽게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사랑할 수 있게 하고 사랑하는 사람의 그 행복을 누리게 해줍니다.
사실 가장 큰 사랑은 그 사랑을 사랑으로 받아들여주는 것입니다. 사랑을 받아주는 사람이 없으면 어떻게 사랑을 하겠습니까? 그러므로 그의 사랑을 귀하게 여기고 고마워하는 것은 그로 하여금 사랑을 할 수 있게 하는 큰 사랑인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사랑은 주는 것이라고만 생각하여 그저 줄려고만 하는데 많은 경우 자기만족을 위한 것일 수 있습니다. 나는 받는 사람이 아니고 주는 사람이라는 자기만족감, 내가 사랑을 실천했다는 자기만족감일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마리아의 사랑을 그저 받아주십니다. 유다가 가난한 사람들을 들먹이며 마리아의 사랑을 깎아내리고 나무라지만 주님은 그 사랑을 값싼 것으로 만들지 않고 당신의 장례를 위한 선물이라고 귀하게 만드십니다. 다른 사람의 사랑을 값싼 것으로 만들지 않고 귀한 사랑으로 만드는 오, 고귀한 수동태의 사랑이여! 사랑하는 행복을 선사하는 오, 고귀한 수용적 사랑이여!
발에서 머리로
-전삼용신부-
제가 신학생 때는 교황님 미사에 참석할 기회가 많았었습니다. 교황님이 주례하시는 미사에서 독서도 해 보았습니다. 당시는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이셨는데 얼마나 소박하시던지 저를 쓰다듬어 주시고 발음도 정확하시지 않은 상태에서 무어라 말씀하셨었습니다. 저는 잘 알아듣지 못했지만 다음 기다리는 사람이 있어서 감히 무슨 말씀을 하셨느냐고 여쭈어 볼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너무 높으신 분이라 손을 잡고 반지에 입맞춤해야 하는데 입이 반지까지 도달하지 못하고 그냥 입맞춤하는 시늉만 하였습니다.
이런 기억도 있는 터라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을 존경하는데 가장 존경하는 모습은 바로 세족례를 하시던 중 당신이 씻어주시던 사람의 발에 입맞춤을 하는 장면입니다. 교황님이 한 신자의 발에 무릎을 꿇고 입맞춤하는 모습은 우리가 배우고 있는 성경과 교리의 종합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도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시면서 “주님이며 스승인 내가 한 것을 너희도 하라고 본을 보여준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낮아짐이란 사랑의 본질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마리아라는 한 여자가 예수님의 발에 비싼 순 나르드 향유를 바르고 머리카락으로 그 발을 닦아드립니다. 우리는 라자로와 마르타, 또 마리아가 베타니아의 부잣집 한 형제들임을 압니다 (요한 11,1-2). 그러나 그 마리아가 마리아 막달레나인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어쨌든 우리는 여기서 상징을 볼 수 있어야합니다. 향유는 예수님의 발에 부어졌고 그 향유를 머리카락으로 닦아드림으로써 마리아의 머리까지 향으로 적셔지게 되었습니다. 성경에서 기름은 성령님을 상징하고 사랑을 상징합니다. 발은 인간의 가장 더럽고 천한 부분입니다. 대신 머리는 가장 고결한 부분입니다. 마리아가 자신의 머리를 예수님의 발에 대는 것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신 것과 같은 겸손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 겸손하게 머리를 숙여 그 분의 발에 머리를 댈 때 성령님께서 우리 머리 위로 흘러들어와 우리를 새롭게 하신다는 교훈입니다. 절대 머리끼리 맞대거나 발끼리 맞대어서 일어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발에 머리를 대야 하는 것입니다.
베텔에서 야곱이 꿈을 꾸었습니다. 하나의 사다리가 하늘과 땅을 이어주고 있었고 하늘과 땅 사이에 천사들이 오르락내리락 하고 있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고 인간은 땅으로 떨어졌습니다. 땅에서 났으니 땅으로 돌아가게 되었고 땅도 인간 때문에 함께 저주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로 하느님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하는 것처럼 죄의 땅이 아닌 깨끗한 하늘에만 머무시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죄의 땅으로 하늘로부터 내려오신 분이 계셨으니 그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 분은 하느님이시기 때문에 하늘에 계신 분이지만 동시에 육체를 취하신 인간이시기 때문에 땅에도 계신 것입니다.
따라서 야곱이 본 하늘과 땅을 잇는 사다리는 바로 그리스도 자신을 상징합니다. 그 분을 통해 성령의 은총이 세상에 내려오는 것입니다. 야곱은 자신이 베고 잤던 돌에 기름을 붓고 제단을 세웁니다. 바로 그리스도를 통하여 야곱의 머리에 성령님이 임하신 것입니다.
야곱은 꿈에서 깨어나 ‘참말 야훼께서 여기 계셨는데도 내가 모르고 있었구나.’ 하며 그 곳을 곧 ‘하느님의 집’ (성전, 베텔)이라 이름 짓습니다.
십자가 위 예수님의 옆구리에서 흘러내린 피와 물이 그리스도의 몸을 타고 발로 흘러 땅에 떨어져 땅이 정화되고 성령으로 충만해지게 된 것처럼 그리스도의 발 밑에 있는 누구나 은총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어느 날 예수님께서 라자로의 집에서 사람들을 가르치고 계셨습니다. 마리아의 언니 마르타는 예수님을 대접할 준비로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으나 마리아만은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서 그 분의 말씀을 듣고 있었습니다. 화가 난 마르타에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에 신경을 쓰고 있지만 정작 필요한 것은 한 가지 뿐이다.”
예수님의 발치에서 그 분의 말씀을 듣는 것, 그 것이 내 안에 성령으로 가득 차게 하는 유일한 길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유일한 스승으로 모시고 그 분으로부터 배우고 그 분이 산 것처럼 살려고 하는 사람에게는 그리스도의 향기가 자신의 몸에도 배이게 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향기를 풍기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처음으로 발현했던 마리아 막달레나가 라자로의 동생 마리아라는 결정적 근거는 없습니다. 그러나 저는 같은 사람임을 확신합니다. 왜냐하면 마리아 막달레나는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예수님께 “랍뿌니!”, 즉 ‘선생님’이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은 추상적인 무엇이 아닙니다. 그 분을 스승님으로 삼고 배우고 그 분이 산 것처럼 살려고 하는 아주 구체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도 읽거나 공부하지 않고 미사도 주일미사만 간신히 하고 성체 밑에 자주 앉아 있으려 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그 분을 사랑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은총을 받으려면 오늘의 마리아처럼 그 분의 발에 우리 머리를 대어야 합니다.
"그때 마리아가 매우 값진 순 나르드 향유 한 근을 가지고 와서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닦아드렸다."
-양승국신부-
<시장 한 가운데서 활짝 피어난 미소>
가끔씩 아이들을 위해서 싱싱한 과일을 보내주시는 고마운 분들이 계신데, 어제 또 다시 전화를 주셨습니다. 다들 바빠서 제가 직접 가게 되었지요.
재래시장 한 가운데서 건강하고 활기차게 살아가시는 부부였습니다.
경기도 안 좋아 어려우실텐데, 이렇게 하셔도 되냐고 제가 여쭈었더니...
하시는 말씀이 저를 감동시켰습니다.
하루 온 종일 시장통에서 과일을 팔고 있다보면 쌓이는 스트레스가 이만저만 아니라고...은근히 속상하게 만들고, "왜 이렇게 비싸냐? 왜 과일이 이렇게 맛이 갔냐?" 태끌을 거는 손님들이 한두 명이 아니다. 단골손님 관리하려고, 또 건너 집 가게에 단골 빼앗기지 않으려고 1년 365일 하루도 쉬는 날이 없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이렇게 한번씩 과일을 보내고 나면 스트레스가 한꺼번에 확 달아난다. 너무 조금 보내서 미안하다. 바쁘실텐데 이렇게 오시게 해서 미안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일년 내내, 하루 온종일을 보내기 만만치 않은 시장 한 가운데서도 활짝 미소 짓는 두 분의 얼굴, 자신들도 어려우면서도 더 어려운 이웃들을 생각하는 따뜻한 마음씨를 접하고 보니 하루 온 종일 제 마음이 다 흐뭇했습니다.
비록 작지만 참으로 소중한 두 분의 나눔을 생각하며 그 어떤 봉헌보다도 하느님께서 기뻐하실 봉헌이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베다니아의 마리아는 아주 값진 명품 순 나르드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왕창 붓습니다.
너무나 값나가던 명품, 아끼고 아끼며 쓰던 진귀한 순 나르드 향유였기에 주변에 둘러서 있던 사람들은 깜짝 놀랍니다. 이 여자가 미쳤나? 하는 반응을 보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하는 행동은 더욱 가관입니다. 베다니아의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치 아래 엎드려 자신의 머리를 풀어 예수님의 발을 닦아드립니다.
베다니아의 마리아가 예수님을 향한 몸짓 하나 하나, 동작 하나 하나는 그야말로 지극정성입니다. 이제 머지않아 떠나가실 예수님임을 직감한 베다니아의 마리아는 자신이 지닌 것 중에서 가장 소중한 것을 예수님께 바칩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정성과 노력을 예수님을 향해 쏟습니다.
이런 내막을 몰랐던 유다였기에 이렇게 투덜거리는 것입니다.
"이 좋은 향유를 이렇게 쓸데없이 허비하다니! 정말 저 여자는 정신 나갔군! 정말 아깝구나 아까워! 저 향유는 명품이라서 값이 만만치 않을텐데...병을 따지 않았더라면 좋았을텐데..."
떠나가실 예수님 앞에서도 오직 돈 생각을 하고, 자신의 이익만을 생각하는 유다와 최대한의 정성을 다하는 베다니아의 마리아의 모습이 극명하게 대조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의 봉헌생활은 어떠한지 심각하게 반성하는 하루가 되면 좋겠습니다.
하루 24시간을 한번 분석해보시면 좋겠습니다. 나를 위해, 내 개인적인 성취를 위해, 인간적, 육적인 삶을 위해 투자하는 시간은 몇 시간입니까? 하느님 앞에 앉는 시간, 하느님을 위해 일하는 시간, 이웃을 위해 내어놓는 시간은 몇 분입니까?
어떤 분으로부터 이러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저는 솔직히 하느님을 믿기 힘듭니다. 하느님은 보이지 않고, 하느님의 말씀도 들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내 기도를 잘 들어주시는 분도 아닙니다. 아무리 열심히 기도를 해도 침묵하기만 하시는 하느님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습니까?”
어떤 분들은 이분의 말씀에 공감이 가신다고 하실 지도 모르겠습니다. 하긴 저 역시도 옛날에는 이러한 마음을 갖기도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얼마큼이나 하느님을 믿기 위한 노력을 했었는가 라는 질문을 해 보고 싶습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느님의 뜻을 나약한 인간이 알기란 사실 쉽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끊임없이 노력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들이 행한 약간의 노력만을 부각시키면서 하느님께서 침묵만 하신다고 많은 사람들이 주장하고 있습니다. 정말로 그럴까요? 하지만 예수님께서 3년의 공생활을 위해서 자그마치 30년을 준비하셨다는 사실을 왜 잊고 있을까요? 또한 많은 성인 성녀들이 하느님 나라에서의 영원한 생명을 위해 평생을 주님의 뜻에 맞게 살면서 최선을 다했다는 것은 보지 않고 있을까요?
최소의 노력으로 최고의 효과를 내는 것이 남는 장사라고 말합니다. 그래서입니까? 자기가 행한 약간의 노력으로 최고의 효과를 보지 못한다고 하느님을 믿지 않겠다고 과감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장사가 먼 미래만 보고서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지금은 약간 손해 보는 것 같지만 먼 미래를 위한 투자라는 생각으로 그 손해를 받아들이기도 합니다.
믿음도 이와 같습니다. 바로 지금 코앞의 문제만을 위해서 믿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나중에 우리가 가야할 길인 하느님 나라에서 누릴 영원한 생명을 위한 믿음의 투자가 필요한 것입니다. 장사도 먼 미래를 바라보는 사람이 성공한다고 말하지요. 우리의 믿음도 먼 미래를 바라보는 사람이 주님을 만나고 주님과 대화를 나눌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나의 믿음은 어떤 상태일까요?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의 특별한 은혜를 받았던 마리아가 값비싼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그 발을 닦아 드립니다. 바로 이 모습을 보고서 유다 이스카리옷이 말하지요.
“어찌하여 저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지 않는가?”
마리아는 지금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행했던 것이지요. 이 노력이 먼 미래에 대한 확실한 투자가 되었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유다 이스카리옷은 바로 눈앞에 모습만을 보고 쉽게 판단합니다. 그 결과 예수님을 팔아넘기는 엄청난 죄를 지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나의 작은 믿음으로 감히 하느님을 판단하는 죄를 범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보다는 겸손한 마음으로 하느님 앞에 나아가도록 최선을 다해 노력해야 합니다. 이것이야말로 먼 미래에 대한 확실한 투자이기 때문입니다.
거짓말은 상대방보다 나 자신에게 더 해롭다(몽테뉴).
야곱의 사다리
-전삼용신부-
어제 손님들이 와서 바티칸을 또 가이드했습니다. 바티칸 박물관 안에는 미사 할 때의 성작처럼 생긴 커다란 빨간 대리석 욕조가 있습니다. 바로 네로 황제의 욕조입니다. 높이가 사람의 키 정도 되는 욕조라 청년들은 서로 “저길 어떻게 올라갔을까?”하고 물어보았습니다. 답은 뻔한 것이었습니다.
“계단이나 사다리가 있었겠지.”
그렇습니다. 계단이나 사다리가 없다면 높은 곳에 오르락내리락 할 수 없습니다. 사다리는 바로 혼자 힘으로는 오르거나 내려올 수 없는 높이를 연결시켜주는 길이요 통로입니다.
구약성경에 이 사다리(계단)가 나옵니다. 바로 베텔에서 야곱이 꿈을 꾸었을 때입니다. 하나의 사다리가 하늘과 땅을 이어주고 있었고 하늘과 땅 사이에 천사들이 오르락내리락 하고 있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고 인간은 땅으로 떨어졌습니다. 땅에서 났으니 땅으로 돌아가게 되었고 땅도 인간 때문에 함께 저주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로 하느님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하는 것처럼 죄의 땅이 아닌 깨끗한 하늘에만 머무시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죄의 땅으로 하늘로부터 내려오신 분이 계셨으니 그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 분은 하느님이시기 때문에 하늘에 계신 분이지만 동시에 육체를 취하신 인간이시기 때문에 땅에도 계신 것입니다.
따라서 야곱이 본 하늘과 땅을 잇는 사다리는 바로 그리스도인 것입니다. 어떤 누구도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서는 하늘나라로 갈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분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시기 때문입니다.
야곱은 꿈에서 깨어나 ‘참말 야훼께서 여기 계셨는데도 내가 모르고 있었구나.’ 하며 그 곳이 곳 ‘하느님의 집’ (성전, 베텔)임을 깨닫고 베고 잤던 돌에 기름을 붓고 나중엔 그 곳에 제단을 세웁니다.
기름은 성경에 성령님을 나타냅니다. 예수님께서 “"주님의 성령이 나에게 내리셨다. 주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으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셨다.”라고 당신이 ‘그리스도 (기름부음 받은 자)’라고 하셨듯이 성령님은 그리스도의 머리에 부어지고 그 성령님은 그리스도의 발을 통해서 세상에 내려오시게 된 것입니다.
십자가 위 예수님의 옆구리에서 흘러내린 피와 물이 그리스도의 몸을 타고 발로 흘러 땅에 떨어져 땅이 정화되고 성령으로 충만해지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목적으로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야곱이 베고 잤던 돌에 기름을 발랐던 것은 그리스도로부터 자신의 머리 위로 성령의 은총이 흘러 들어옴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라자로의 동생 마리아는 이와 똑 같은 행위를 합니다. 바로 예수님의 발에 엄청나게 비싼 나르드 향유를 바르고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그 발을 닦습니다. 결국 그 향유는 자신의 머리를 향기롭게 한 것입니다. 인간은 야곱의 사다리의 발치에 머리를 대고 하늘로부터 오는 그 은총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어느 날 예수님께서 라자로의 집에서 사람들을 가르치고 계셨습니다. 마리아의 언니 마르타는 예수님을 대접할 준비로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으나 마리아만은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서 그 분의 말씀을 듣고 있었습니다. 화가 난 마르타에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에 신경을 쓰고 있지만 정작 필요한 것은 한 가지 뿐이다.”
예수님의 발치에서 그 분의 말씀을 듣는 것, 그 것이 내 안에 성령으로 가득 차게 하는 유일한 길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유일한 스승으로 모시고 그 분으로부터 배우고 그 분이 산 것처럼 살려고 하는 사람에게는 그리스도의 향기가 자신의 몸에도 배이게 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향기를 풍기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처음으로 발현했던 마리아 막달레나가 라자로의 동생 마리아라는 결정적 근거는 없습니다. 그러나 저는 같은 사람임을 확신합니다. 왜냐하면 마리아 막달레나는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예수님께 “랍부니”, 즉 ‘선생님’이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은 추상적인 무엇이 아닙니다. 그 분을 스승님으로 삼고 배우고 그 분이 산 것처럼 살려고 하는 아주 구체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도 읽거나 공부하지 않고 미사도 주일미사만 간신히 하고 성체 밑에 자주 앉아 있으려 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그 분을 사랑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가난한 이들을 위한 우선적 선택
- 진병섭 신부-
오늘 복음은 당신의 길을 아셨던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예고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팔아넘긴 유다 이스카리옷의 말과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우리의 삶이 얼마만큼 하느님의 뜻에 맞게 살아가는지 되돌아볼까 합니다. “어찌하여 저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지 않는가?”, “사실 가난한 이들은 늘 너희 곁에 있지만, 나는 늘 너희 곁에 있지는 않을 것이다.” 오늘 복음이 전하는 것처럼 유다는 가난한 이들에게 관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돈에 관심이 있었던 것입니다. 비단 유다만이 아닙니다. 우리에게도 가난한 이들에 대한 관심이 얼마나 있는가 생각해 봅니다. 가난한 이들은 늘 우리 곁에 있지만 예수님은 늘 우리들 곁에 계시는 것이 아니기에 사순 시기 동안 예수님의 수난과 고통에 얼마나 동참했는지 되돌아봅니다. 제 모습을 되돌아보더라도 이 기간 동안 가난한 이들에 대한 관심도, 예수님의 수난과 고통에 대한 동참도 미비했음을 고백합니다. 가난한 이들을 위해 자신을 낮추어 고개를 숙이고 발걸음 한 번 더 뗀 적이 있는지 돌아봅니다. 예수님의 수난과 고통에 동참하는 마음으로 절제하고 희생한 적이 있는지 생각해 봅니다. 참으로 부끄러운 일입니다. 성주간을 지내면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어쩌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절박함인지도 모릅니다. 내일이면 죽는다는 마음으로 오늘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늘 우리 곁에 있는 가난한 이들과 함께해야 합니다. 가난한 이들은 늘 우리 곁에 있지만 예수님께서는 늘 우리 곁에 계시는 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새벽을 열며
- 조명연신부
어느 가게에 주인의 말을 아주 잘 듣는 개 한 마리가 있었습니다. 그 개는 낯선 사람만 보면 짖어 대고 사납게 굴었지만 주인은 그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지요. 왜냐하면 자기 앞에서는 순한 어린 양처럼 양순했으니까요. 그러나 낯선 사람에게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사나운 맹수처럼 무섭게 짖어대었습니다. 이렇게 사나운 개가 있는 가계를 사람들이 들어갈까요? 시간이 지나갈수록 손님은 오지 않고 파리만 날리는 날이 이어질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주인은 이 사나운 개 때문에 손님이 없다는 것을 전혀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이렇게 좋은 가게를 찾아주지 않는 손님을 탓했으며, 자신의 가게보다 훨씬 장사가 잘 되는 옆집 가게에서 무슨 특별한 수를 쓴 것이라고 하면서 비방하기에 바빴습니다. ‘사나운 개’라는 근본적인 원인을 바라보지 못하는, 바로 자신에게 가장 큰 문제가 있는데 외부에 문제가 있다면 남의 탓만을 외치고 있습니다.
이 모습을 우리들은 자주 취합니다. 그래서 나는 언제나 옳고 남은 언제나 틀립니다. 자신에게는 관대하면서, 다른 이에게는 엄격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라자로의 누이였던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붓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그 발을 닦아 드립니다. 사실 향유는 시체에 발라서 염할 때 쓰는 것입니다. 따라서 마리아의 이 모습은 주님의 죽음을 맞이하는 예비행사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갑작스럽고 폭력적이어서 통상적인 장례절차를 치를 수가 없는 것이지요. 늘 예수님 곁에서 조용히 말씀을 경청했던 마리아는 주님께서 곧 돌아가실 것을 미리 감지하였고, 이 사건에 대비해서 값을 따지지 않고 상급의 향유를 미리 마련하였던 것입니다. 주님께 봉사할 수 있는 마지막 일을 한 것이지요. 그러나 사람들은 마리아에 행위에 대해서 못마땅해 합니다. 그 불만의 이유는 바로 ‘돈’이었습니다. 이 세속적인 돈의 관점으로 바라보니 올바른 일도 옳지 않게 보이는 것입니다.
물론 유다 이스카리옷의 말도 일리는 있지요. 일 데나리온이 보통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니, 삼백 데나리온이면 얼마나 큰돈입니까? 그 돈이면 가난한 사람들이 배불리 먹고도 충분할 것입니다. 그러나 마리아의 행동은 결코 낭비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행동은 언제나 할 수 있지만, 예수님을 위한 행동은 이번만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세속적인 눈으로 자신들은 옳고 마리아는 틀리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마리아만 옳고 다른 이들은 모두 틀렸습니다. 그래서 모두가 힘을 모아 예수님의 장례를 준비해야 할 시점에서 마리아 홀로 외롭게 예수님의 장례를 준비하는 것입니다.
세속적인 눈으로 바라보는 판단은 이제 접어야 할 때입니다. 대신 주님의 눈으로 그리고 주님께서 원하는 모습으로 바라보는 판단이 필요할 때입니다. 그때 마리아가 부어드린 향유로 온 집 안을 향유 냄새로 가득 채웠듯이, 이 세상을 주님의 좋은 향기로 가득 채울 수가 있을 것입니다.
“이 여자를 그냥 놔두어라. 그리하여 내 장례 날을 위하여 이 기름을 간직하게 하여라.”
-양승국신부-
<사순절의 기쁨>
성주간을 시작하며 수난 당하시는 예수님의 얼굴을 묘사한 그림 몇 장을 책상위에 쭉 늘어놓고 그분의 수난 여정을 한번 묵상해보았습니다.
보통 십자가 상 예수님의 얼굴을 표현할 때 화가나 작가들은 고통스런 예수님의 얼굴을 묘사하더군요.
그런데 특별한 그림 한 장이 있었습니다. 얼굴은 온통 피땀으로 얼룩진 얼굴이며, 가시관에 짓눌린 얼굴이었지만, 가만히 바라보니 고통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얼굴입니다. 고통스럽기보다는 오히려 만족스런 얼굴이었습니다. 오히려 희미한 미소조차 짓고 계셨습니다.
이 특별한 수난 예수님의 얼굴이 과연 무엇을 의미 하는가 생각해봤습니다.
수난 중에도 미소 짓고 계시는 예수님의 얼굴은 우리 하느님의 본질을 잘 드러내고 있는 표현이 아닐까요?
이제 내 한 몸 희생해서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다 이루었다는 의미의 흡족한 얼굴이 아닐까요?
당신이 그토록 염원해온 대로 당신 한 몸 제물로 바쳐 우리 모두를 구원하게 되었다는 보람에서, 충족감에서 미소 짓고 계시는 것이 아닐까요?
나는 비록 이렇게 고통스럽고, 또 이제 곧 죽겠지만, 대신 너희들은 나 때문에 살겠구나, 내 십자가로 인해 구원받게 되었구나, 하느님 아버지의 구원역사가 이제 나로 인해 완료되었구나, 하는 마음에 미소 짓고 계신 것이 아닐까요?
우리의 하느님은 바로 이런 분이심을 확신합니다.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시면서도 우리를 걱정하시는 분, 우리를 격려하시는 분, 우리 마음의 평화를 바라시는 분, 우리의 구원을 원하시는 분, 우리의 행복을 바라시는 그런 분 말입니다.
사순절은 어떻게 보면 기쁨과 은총의 절기입니다. 사순절은 마지못해, 억지로 우리에게 부과된 의무를 수행하는 괴로운 나날이 아니라 한없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얼굴을 확인하였기에 행복한 날들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소중히 여기시는지, 우리를 얼마나 끔찍이 챙기시는지를 알았기에 기쁜 마음으로 우리도 그분을 닮아나가려고 노력하는 때입니다.
예수님의 수난, 그 최종 종착지인 골고타 언덕, 거기 세워진 십자가는 역설적이게도 우리에게 가장 큰 은총의 선물입니다.
십자가형에 처해진 예수님께서는 그 끔찍한 상황 가운데서도 사목활동을 하십니다. 극악무도한 한 인간을 구원으로 초대함을 통해 세상 모든 죄인들에게 희망을 주십니다.
자기 한 몸 추스르기도 힘든 난감한 상황 한 가운데서도 개념 없는 우리 죄인들을 용서해주시기를 하느님 아버지께 청하셨습니다.
이처럼 십자가 위에서도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에게 마지막까지 기회를 주시는 예수님, 마지막까지 인내하시고, 용서하시며, 마침내 구원을 주시는 예수님께서 오늘 이 아침 우리에게 숙제 몇 가지를 내어주시는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한 번 일어서기.
정말 마음에 내키지 않지만 크게 한걸음 물러서기.
죽기보다 힘들지만 예수님 생각하며 용서하기
예수님과의 만남
-김종기신부-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수많은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생활합니다. 그 가운데 가족이나 사랑하는 사람과의 만남은 특별한 만남이며, 신앙 안에서 형제, 자매와의 만남은 하느님의 은총에 의한 복된 만남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마리아와 예수님의 만남은 아주 특별하고도 은혜로운 만남입니다. 마리아는 예수님 앞에 다가서는 순간, 예수님의 매력에 이끌리게 됩니다. 이로 인해 마리아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가장 소중한 것(나르드 향유)을 바칩니다. 너무나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광경이 아닌가 싶습니다. 우리는 마리아가 그 순간을 깊은 감사와 은혜로움으로 맞이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저는 이 복음을 대할 때마다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했던 오랜 여정을 되돌아봅니다. 어린 시절, 단순한 마음으로 사제가 되고자 했던 저는 조금씩 주님의 부르심을 느끼기 시작했고 서서히 주님의 사랑 안으로 더욱 깊이 이끌렸습니다. 저는 오랜 시간에 걸쳐 나 자신과 주님을 깊이 알게 되었고, 그럴수록 주님을 위해 나의 모든 것을 바치고 싶은 열망에 사로잡혀 이젠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주님에게 빠져 있습니다. 매일 새롭게 그리고 충실히 주님과의 만남을 준비하고 주님의 은총에 의탁할 때만이 이 사랑의 만남을 지속할 수 있음을 깨닫습니다.
바쁜 것이 죄
서효경 수녀-
예수님을 초대한 베타니아의 한 집에서 있었던 일을 요한복음은 전한다. 그곳에는 소생한 라자로가 손님들과 함께 음식을 들고 있었고, 마르타는 시중을 들었으며, 마리아는 비싼 순 나르드 향유 한 리트라를 가져와서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닦아드렸다. 중요한 것은 마리아의 행동에 대한 예수님의 해석인데, 예수께서는 당신의 죽음을 예견하고 계셨다는 점이다. 예수님의 죽음을 감지한 마리아는 저들의 악한 마음을 기워 갚기라도 하듯 순 나르드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부었다. 유기서원기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사순 시기를 기도와 극기로 열심히 보내신 아버지는 부활 대축일 새벽 4시에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나셨다. 일주일 전 아버지는 “오늘 할아버지 산소에 가는데 함께 가지 않을래?” 하고 나를 초대하셨는데, 그때 중간고사를 앞두고 있어 응하지 못했다. 그것이 아버지와의 마지막 통화가 될 줄은 몰랐다. 그날 아버지는 선산에 가셔서 당신이 묻힐 자리를 보고 오셨다고 했다. 당신의 죽음을 예견하신 아버지의 심정이 어떠하셨을까? 아버지의 예견을 감지하지 못한 나는 아버지와의 마지막 때를 함께하지 못했다. 10여 년 전 친척 수녀님이 나를 부르시더니 “수녀는 내가 힘들 때 왜 옆에 없느냐?”며 함께하고 싶은 원의를 드러내셨다. 그 수녀님이 일주일 후에 돌아가실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기에 그때도 함께해 드리지 못했다. 소임이 너무 바빴던 것이다. 바쁜 것이 죄다. 내가 바빠서 아픈 사람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고 함께하지 못했으니 그것이 죄다. 나이가 들고 보니 잘 죽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앞서 죽어가는 사람 곁에 함께하는 것도 더없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성주간 월요일 죽음을 앞둔 예수님의 심정을 조금이나마 이해해 드리고 싶다. 죽음을 앞둔 이웃과 마음으로 함께할 사랑의 여유를 찾아야겠다.
성월요일에...
-오상선신부-
성주간 동안 우리는 예수님의 공생활과 수난여정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되는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우리는 십자가의 길이라는 이 인류최대의 연극 무대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통해 우리의 모습을 반추해 보게 된다. 때론 그 주인공이 되다가 때론 조연이 되다가 때론 엑스트라가 되기도 한다.
오늘은 베타니아의 마리아와 유다가 그 중심인물로 등장한다. 이 두 사람의 태도는 사뭇 달랐다.
베타니아의 마리아는 삼백 데나리온 어치(노동자의 1년 품삯)나 되는 값비싼 향유를 예수의 발에 붓고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닦는다.
유다는 마리아의 이러한 행동을 비난한다. 그 돈이면 얼마나 많은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줄텐데 하는 그럴싸한 비판적 논리로써 말이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를 참으로 사랑하는 자세와 거짓으로 사랑하는 자세를 엿보게 된다. 베타니아의 마리아는 예수를 참으로 사랑하는 사람이고 유다는 거짓으로 사랑하고 있다는 것이 드러난다. 왜냐하면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는 돈이 아깝지 않다.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라면 돈이 얼마나 들어도 문제가 없다. 아니 목숨까지도 바칠 수 있다. 모든 것을 내어 주어도 아깝지가 않은 법이다.
그러나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을 경우에는 이것저것 따져본다. 요정도만 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다른 핑계를 댄다. 말로만 가난한 사람을 사랑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가난한 사람을 사랑한 것도 아니고 예수를 진정 사랑한 것도 아니란 말이다.
이미 유다의 이러한 가식적 사랑의 자세는 예수를 배반할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왜냐하면 유다의 예수께 대한 사랑은 전폭적인 사랑이 아니라 계산된 정략적 사랑이기 때문이다. 마치 정치가들이 정략적으로 이합집산 하듯이...
베타니아의 마리아는 라자로의 누이였고 마르타의 자매였다. 마르타와 마리아의 이야기를 통해서 볼 수 있듯이 마리아는 예수를 참으로 사랑한 여인, 예수와 함께 있고 싶어하는 여인이었다. 그를 위해서라면 언니 마르타처럼 예수님께 무엇을 해드릴 여유조차도 없을 정도였다. 그냥 함께 있고 싶을 뿐이었다.
유다에게는 마리아에게서 볼 수 있는 이러한 애정 체험이 없었을 것이다. 다만 계산적으로 저 양반을 따르게 되면 뭔가 한 자리를 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으로 예수를 가까이서 따르며 길을 찾는 자였을 것이다. 그래서 예수를 위해 전폭적으로 몸 바칠 생각은 추호도 없었으며 때가 되면 언제든지 버릴 수 있는 위인이었을 것이다.
그렇다! 성주간을 시작하며 복음은 우리에게 베타니아의 마리아와 유다를 먼저 내 세운다. 나는 누구에게 가까운가? 죄 많은 인간이지만 주님으로부터 구원과 은혜를 체험하고 전폭적으로 그분을 사랑하고 그분을 위해서라면 돈도 재산도 몸도 마음도 그 모든 것을 바쳐도 아깝지 않은 그런 사람인가? 아니면 유다처럼 기회주의자인가? 신앙이 나에게 도움이 된다치면 헌금 조금, 교무금 조금 바치고 그렇지 않으면 쉽게 냉담할 수 있는 그런 위인인가?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다시금 촉구하신다... 유다같은 사람이 되지 말고 마리아와 같은 사람이 되라고... 논리적으로 이게 옳니 그러니 따지면서 사랑은 하지 않는 그런 위인이 되지 말고 말없이 몸과 마음을 다해 그냥 사랑하라고...
오늘 또다른 베타니아의 마리아 되소서.
사랑을 쏟음에 대하여
-김찬선신부-
성주간입니다. 1년 52주 중에서 거룩한 주간이라는 뜻입니다. 무릇 거룩하다는 것은 모두 하느님과 관련이 있는 것입니다. 성가는 하느님을 찬미하는 노래이기에 거룩하고, 성서는 하느님의 말씀과 업적을 얘기하기에 거룩하고, 성당은 하느님이 계신 곳이기에 거룩하고, 성작은 주님의 피를 담는 그릇이기에 거룩합니다. 그러니 성주간은 하느님으로 가득한 주간입니다. 우리 신앙인에게 하느님이 아니 계신 때가 없겠지만 다른 어느 주간보다도 하느님, 특히 예수 그리스도께 집중하고 깨어있는 주간이라는 뜻이지요.
이런 거룩한 주간의 첫 번째 인물로 오늘 마리아가 나오고, 마리아는 예수 그리스도께 집중하는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유다의 지적처럼 그 비싼 향유를 예수님께, 그것도 발에 부어 낭비할 필요가 있을까요? 예수님께서도 이것을 좋아하실까요? 참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서 쓰이는 것을 주님께서도 원하지 않으실까요? 그렇기도 하지만 마리아의 사랑은 예수님께만 집중합니다. 아무리 가난한 사람을 사랑하고, 또 사랑해야 하지만 예수님과 자기 사이에 어떤 사랑도 끼이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자기의 가진 것 모두를, 자기의 사랑 모두를, 자기의 관심 모두를 오직 사랑하는 주님께만 쏟고 싶은 것입니다.
프란치스코는 형제들에게 권고합니다. “형제들이여, 그분 앞에 여러분의 마음을 쏟으십시오. 여러분에게 당신 자신 전부를 바치시는 분이 여러분 전부를 받으실 수 있도록 여러분의 것 그 아무 것도 여러분 자신을 위해 남겨두지 마십시오.”
<독서강론> : 연약하고 죄 많은 인간을 구원하시는 하느님 -경규봉 신부-
예언자 이사야는 메시아의 강림을 예언한다. 그는 하느님께서 뽑으시어 하느님의 영을 받아 모든 민족에게 바른 인생길을 펴 주리라. 그는 세속의 왕처럼 무력으로 정복하지 않으리라. 상한 갈대나 바람 앞의 등불처럼 연약하고 결점 많은 사람들을 외면하지 않고 은총으로 세워주시리라.
그리하여 하느님을 모르는 바닷가의 주민들까지도 그의 가르침을 애타게 기다린다. 그는 하느님께서 이스라엘과 맺으신 계약을 회복하며 완성시키리라. 그는 정의를 세우고, 온 세상에 빛을 비추리라. 소경의 눈을 뜨게 하고, 감옥에 묶여 있는 이들을 풀어주며, 캄캄한 어둠과 같은 무지 상태에 있는 이들에게 구원의 빛을 비출 것이다.
세상은 사람이 무엇을 얼마나 많이 소유했는가에 따라 그를 평가한다. 재물이나 권력, 미모나 재능, 완력 등을 많이 소유한 사람이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고 우대받는다. 따라서 사람들은 더 많은 것을 소유하려고 하고, 또한 소유한 것을 대물림함으로써 많이 소유한 사람은 후손을 통하여 더 많은 것을 소유할 수 있도록 한다. 많이 소유할수록 행복해 한다.
이러한 세상에서 많이 소유하지 못한 사람, 부족하고 열등한 사람은 항상 소외당하고 손해를 보며, 부당한 취급을 당하거나 푸대접 받을 수밖에 없다. 많이 소유한 사람이 유리하고 그렇지 못한 사람이 불리한 것이 세상이다. 세상은 소유로서 평가한다.
그러나 우리가 믿는 하느님은 소유로서 사람을 평가하시는 하느님이 아니시다. 존재 그 자체를 귀하고 소중히 여기시며, 존재 그 자체를 바라보시는 하느님이시다. 때문에 부당한 취급을 당하거나 소외당하는 사람들, 소유하지 못한 사람들을 더 어여삐 보시는 하느님이시다. 못나고 비뚤어진 자식에 대해 더 마음을 쓰며 안타까워하는 아버지처럼 하느님은 그러한 이들을 귀하게 여기신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메시아를 세상에 보내신다. 만일 사람들 모두가 죄 없이 의롭고, 많이 소유함으로써 행복을 누린다면 메시아는 결코 세상에 오지 않았을 것이다. 죄로 인하여 고통을 당하고, 소유하지 못해서 불행하고, 무지해서 하느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메시아를 세상에 보내셨다.
예언자는 힘없고 약하며, 죄 많아 바빌론의 종살이를 하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메시아의 강림을 선포한다. 그는 그들이 믿는 하느님이 “권세 있는 자들을 그 자리에서 내치시고 보잘것없는 이들을 높이시며 배고픈 사람은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요한 사람은 빈손으로 돌려보내시는”(루가 1,52-53) 하느님이시며, 곧 약하고 소외된 자의 하느님이심을 선포한 것이다. 그래서 “만국의 빛이 되고, 소경들의 눈을 열어주며, 감옥에 갇힌 이들을 풀어주고, 캄캄한 영창 속에 갇힌 이들을 놓아주는” 메시아가 오실 것을 선포한다.
예수님께서는 메시아로서 오셨다. 그래서 “주님의 성령이 나에게 내리셨다. 주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으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셨다. 주께서 나를 보내시어 묶인 사람들에게는 해방을 알려주고 눈먼 사람들은 보게 하고, 억눌린 사람들에게는 자유를 주며 주님의 은총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루가 4,18-19)라고 당신의 소명에 대해 말씀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가난하기 때문에, 죄에 묶여 있기 때문에 오셨고, 영적으로 무지하여 하느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오셨다. 때문에 “죄가 많은 곳에는 은총도 풍성하다.”(로마 5,20)
우리가 믿는 하느님이 그처럼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느님이심을 마음속에 간직하자. 주님께서는 나의 죄와 허물, 부족함과 연약함, 모자람 때문에 오셨음을 마음속에 새기자. 내 죄와 허물로 인해 은총의 주님을 만나고, 하느님께 나아갈 수 있음을 마음에 새기며, 하느님께 감사하자................◆
향유를 통해 보는 마리아와 유다스의 모습 -심순보 신부-
이번 주간은 사순절 기간의 긴 여정을 마무리하고 주님의 부활을 준비하는 마지막 주간인 성주간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베타니아에 있는 나자로의 집을 방문하셨고, 사람들은 예수님을 위한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여기서 마리아가 예수님께 값비싼 향유를 발에 부어 드렸습니다. 그 당시에는 상대방에 대한 존경의 표시로 머리에 기름을 발랐는데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에다 기름을 부었습니다. 마리아는 자신이 주님의 머리에 기름을 부을 자격조차 없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또 그녀는 자기의 머리카락으로 예수님의 발을 닦아 드렸습니다. 그 결과 향유 냄새가 온 집안에 가득했다고 합니다.
이것을 지켜본 사람들 중에 유다스와 같은 이는 마리아의 이러한 행위를 보고 어처구니없는! 낭비라고 비난합니다. 마리아가 왜 그런 행동을 해야만 하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었습니다. 다만 아깝고 비싼 향유에게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어쩌면 유다스의 말이 맞는지도 모릅니다. 저 비싼 향유를 팔면 얼마나 많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을까? 현실적으로 볼 때, 그 비싼 향유를 한번에 낭비해 버리기보다는 - 아무리 스승님을 위한 것이라 하더라도- 그것을 돈으로 바꾸어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는 것이 더 합리적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생각이 달랐습니다. 가난한 사람은 항상 우리 주위에 있고 또 언제나 무엇을 베풀 수 있는 기회가 있지만 예수님 당신자신에 대한 호의는 지금 행하지 않으면 그러한 기회는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것이라 말씀하심으로써 마리아가 지금하고 있는 행동이 결코 과하지 않다는 것으로 편을 들어 주십니다.
우리는 오늘 복음에서 마리아의 특별한 행동에 대하여 주위를 기울여봅시다. 유다스가 아까워하고 불평했던, 그 비싼 향유를 단숨에 낭비해 버린 마리아의 그 행위는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 말입니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귀한 것을 남을 위해 선뜻 내어놓지 못하는 것이 사람의 마음입니다. 만일에 내가 그것을 내어놓을 수 있다면 그것은 그 상대방과 나는 특별한 관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는 무엇을 내어놓든 아깝지 않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께 특별한 사랑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자기 자신이 갖고 있는 가장 값진 그 모두를 예수님을 위해서 썼던 것입니다. 머뭇거리며 그 대가를 계산하는 그런 사랑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자기! 모든 것을 주는 사랑의 행위였습니다. 마리아의 이러한 행위에서,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예수님의 발을 닦을 만큼, 사람들의 눈을 전혀 의식하지 않는, 즉 다른 사람이 나의 행동을 어떻게 판단할까를 염두에 두지 않는 사랑의 정을 표시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남들이 나의 행동을 어떻게 생각할까? 하는 그런 생각은 마리아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머리카락으로 예수님의 발을 닦아 드릴 만큼의 사랑에 잠기게 된 것입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을 통해서 주님의 무한한 사랑을 체험했고 자신이 가진 가장 귀한 것을 그분께 아낌없이 드릴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마리아의 모습을 통해 우리의 모습을 비추어 봅시다. 마리아가 향유를 주님을 위해 사용했듯이, 나는 주님을 위해 나의 가장 귀한 것을 내어놓을 수 있는지‥‥. 만일 내가 나의 가장 귀한 것을 아깝게 생각하지 않고 기꺼이 바칠 수 있다면, 유다스와 같은 그런 모습은 보이지 않을 수 있을 것입니다. 마리아가 주님을 향한 깊은 사랑을 가졌듯이, 우리도 주님의 깊은 사랑을 체험할 수 있도록 도움을 청해 봅시다. 아멘..............◆
-김상현신부-
하느님의 자녀인 우리는 교회 전례의 가장 핵심인 성주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이 주간을 끝으로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부활절을 맞이합니다. 여러분은 이 기쁜 날을 맞이하기 위해 예수님께 어떤 선물을 준비하고 계십니까? 부활하시는 예수님을 위해 선물을 준비한다는 것은 나 역시 그 부활의 기쁨에 동참함을 의미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당신이 살리신 라자로를 방문하십니다. 그곳에서 라자로의 동생 마리아는 비싼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그 발을 닦아드립니다. 온 집안에 향유 냄새가 가득합니다. 마리아의 이런 행동은 예수님의 죽음을 다른 이들보다 먼저 느꼈고 그 슬픔을 표현한 것입니다. 마리아는 자기가 가진 가장 비싼 것을 예수님께 드렸고, 또한 온 몸을 상징하는 머리카락으로 예수님을 위로한 것입니다. 즉 마리아는 예수님께 자기가 가진 것을 모두 드린 것입니다. 마리아의 이 마음은 향유 냄새보다 더 진한 사랑의 향기를 내고 있습니다.
반면 이 장면을 목격한 유다는 그녀를 비난하기에 주저하지 않습니다. 가난한 이들을 도와야 한다는 핑계로 자기 주머니를 채우기에 바쁜 도둑이었습니다. 그의 말은 당연한 것처럼 보일는지 몰라도 실상 그의 마음은 고약하게 썩는 냄새를 뿜어내고 있습니다. 우리는 많은 기도를 드립니다. 그러나 어떤 기도는 이루어지고 어떤 기도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 차이는 '어떠한 마음으로 하느님을 만나고 있는가'에 있습니다.
마리아처럼 온 몸으로 모든 것을 바쳐 순수한 마음으로 예수님을 만나고 있습니까? 아니면 유다처럼 내가 필요로 할 때만 예수님을 찾고 있지는 않습니까? 예수님께서 기뻐하시는 부활절의 선물은 곁 보기에 좋은 것이나 물질적인 거창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내 마음이 주님께 향하는 순수함이 필요할 뿐입니다. 그 순수함은 주님의 마음을 기쁘게 해드립니다. 또한 온 세상을 기분 좋게 만드는 사랑의 향기로 채우게 합니다. 오늘 하루 얼마나 순수한 마음으로 주님을 찾고 사랑의 향기를 내고 계십니까?
베타니아의 마리아에게 있었던 일
-이기양 신부-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죽음을 엿새 앞두시고 사랑하셨던 사람, 특히 당신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을 방문하시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살아생전에 죽은 사람을 살리는 기적을 세 번 행하셨지요. 과부의 아들(루카7장)과, 백인대장의 하인을 살리셨고(마태8장), 가장 극적으로는 죽은 지 나흘이나 되어서 냄새를 풍기며 묻혀 있던 라자로를 살리셨습니다.(요한11장)
바로 오늘 예수님께서는 죽었던 라자로를 살리셨던 베타니아 지방으로 가서 평상시에 친분이 두터웠던 라자로, 마리아, 마르타 삼남매의 집을 방문하셨습니다. 너무나도 놀라운 은총을 입었던 이 삼남매는 예수님을 영접하는 만찬을 베풀면서 그 기쁨을 함께 나누고자 많은 손님들을 초청했지요. 죽었던 라자로를 살리신 예수님께서 오신다는 소문은 많은 사람들에게 대단히 큰 관심과 궁금증을 불러 일으켰을 것입니다. 당연히 수석 사제들과 유다인들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몰렸을 테고, 그들은 예수님과 라자로가 함께 있는 모습을 보고 다시 한 번 놀랬을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이 삼남매는 예수님을 정성을 다해 모시기로 마음먹습니다. 그리고 이성적이고 기도만 할 것 같던 마리아가 값진 나르드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의 머리털로 그 발을 닦아 드리면서 예수님을 향해 주님이심을 고백합니다. 마르타의 동생 마리아는 수선스럽지도 않고 이성적이며 아주 차분한 성격으로 기억됩니다. 그런데 이러한 마리아가 일생에 한 번 볼까 말까하고 또 쓸까 말까한 순 나르드 향유를 가져와서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닦아드리고 있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모습입니다. 스캔들이지요. 이것을 본 많은 사람들이 손가락질을 하고 놀라워했다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이성적인 판단력을 갖추고 차분한 성격이었던 마리아는 주님 앞에서는 남들의 시선에 아랑곳없이 자기의 신앙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순 나르드 향유는 한 근에 삼 백 데나리온이나 나가는 값진 향유였습니다. 한 데나리온이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었으니 삼 백 데나리온은 일년 연봉 정도 되는 아주 큰 돈이었지요. 그러나 마리아는 전혀 아깝지 않다는 듯 향유를 예수님께 모조리 붓고 씻어드립니다. 참으로 큰 기적을 본 신앙인만이 할 수 있는 놀라운 신앙의 표현입니다.
그런데 유다는 이 광경을 똑같이 지켜보면서도 오로지 관심은 재물에만 있었습니다. 돈에 대한 관심이 지나쳤던 유다는 가난한 사람들을 핑계삼아 마리아의 행위를 비난합니다. 그러나 그의 본심은 가난한 이웃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돈에 있었을 뿐입니다. 역시 관심 가는 데로 믿음은 증폭되거나 멀어질 수밖에 없음을 알 수 있지요.
한편 유다인들은 라자로를 살리신 예수님이 오셨다는 소식에 죽었다가 살아난 라자로가 지금까지 잘 살아 있는지, 살아 있다면 어떤 모습인지 궁금해하며 베타니아로 떼를 지어 몰려옵니다. 그들은 예수님과 라자로가 함께 있는 모습을 보고 더욱 예수님을 믿기 시작하지요. 여기에는 수석 사제들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곳에서 벌어진 모든 일과 상관없이 악의적으로 예수님을 죽이기로 작정합니다. 심지어 그들은 라자로 때문에 수많은 유다인들이 자기들을 버리고 예수님을 믿게 되었음을 알고 라자로도 죽이기로 모의합니다.
이렇게 하느님의 놀라운 권능을 마리아도, 유다도, 유다인들도, 그리고 수석 사제들도 모두 다 체험을 했지만 그 반응은 다 달랐습니다. 참 놀랍지요. 마르타와 마리아, 라자로 삼남매는 남들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온갖 정성을 다해서 그들의 신앙을 표현하는 반면에 이스카리옷 사람 유다는 점점 더 돈의 유혹에 눈이 멀어갑니다. 또 똑같은 사건을 보았던 유다인들은 직접 자신의 눈으로 라자로가 살아서 예수님과 함께 있음을 확인하면서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더 깊어진 반면에 수석 사제들은 예수님과 라자로를 둘 다 없애버리자고 결심을 굳혀갑니다. 하느님의 놀라운 은총을 똑같이 보았으나 드러나는 반응은 이렇게 달랐던 것입니다. 마리아와 유다, 또 유다인들과 수석 사제들의 모습을 보면서 과연 나의 모습은 어디에 해당이 될 것인지를 한번 생각해 봅니다.
오늘 복음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것은 아주 명확합니다. 하느님에 대한 체험이 깊은 사람은 남들의 시선을 의식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알게 되면 오로지 하느님께만 집중하게 된다는 것이지요. 목숨도, 미래도, 남의 소리도, 손가락질도 아무 의미가 없고 오히려 그 모든 것이 하느님께로 나아가는데 별 방해가 되지 않지요. 하느님을 위해서 행하는 그 자체가 기쁨이요 감사가 될 뿐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잘 모르는 사람은 이 핑계 저 핑계를 댑니다. 남들이 어떻고 날씨가 춥고 비가 오고 집안 형편이 어렵고 하며 중요한 것을 놓치고 말지요.
거룩한 성주간 월요일인 오늘 예수님께서는 마리아의 모습과 대사제의 모습을 우리에게 비교하여 보여주십니다. 마리아처럼 하느님에 대한 체험이 있는 사람은 그에 맞는 투신을 할 때 더욱 깊어지는 신앙을 갖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저것 이유를 대고 투신하지 못하면 그나마의 체험도 서서히 옅어지는 것이지요. 이스카리옷 사람 유다의 모습 속에서 우리는 그것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거룩한 성주간이 시작되었습니다. 내가 살고 있는 바로 이 곳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실천할 때 나와 함께 하시는 주님을 체험할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마리아와 유다
-김훈일 신부-
오늘 마리아는 값비싼 나르드 향유를 가져다가 잔치에 앉으신 예수님의 발에 붓고 머리털로 그 발을 닦아 드렸습니다. 이것은 두 가지 점에서 엄청난 행동입니다. 우선 향유 가격이 삼백 데나리온이나 된다고 했는데, 이는 당시 한 데나리온이 근로자의 일당에 해당되므로 노동자의 일 년 소득과 비슷한 액수입니다. 이것을 예수님의 발에 그냥 부은 것입니다. 두 번째는 그것을 머리카락으로 닦아 드렸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아주 극진한 사랑의 표현입니다. 유다는 이것을 아주 못마땅해합니다. 그 돈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어야 마땅했다고 말합니다. 드러난 사실을 보면 마리아의 사랑은 낭비적이고 유다의 사랑은 현실적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십자가의 예수님을 끝까지 따랐지만 유다는 돈으로 예수님을 팔아먹었습니다. 이러한 결과는 사랑의 가치를 잘못 선택한 것에서 오는 결과입니다. 마리아는 그 사랑의 중심에 예수님을 선택했고, 유다는 자신의 선함을 선택했습니다. 우리도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이런 잘못된 선택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성당에서 사람들과의 친교의 자리나 활동하는 자리에는 열심히 하지만 기도에는 마음을 쓰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자선을 많이 했다고 해서 헌금을 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을 먼저 선택하고 사랑을 실천했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따르는 삶을 먼저 선택하고 우리의 삶도 시작해야 합니다. 사랑도, 선행도, 기도도, 모든 것이 예수님을 선택한 이후에 이루어져야 합니다.
사랑의 완성
-정하돈 수녀-
예수님이 베다니아에서 라자로와 함께 저녁식사를 하실 때 마리아가 값진 나르드 향유를 가지고 와서 예수님의 발에 발라드렸다. 값진 향유를 머리도 아닌 발에 바른다는 것은 상식밖의 일이었을 뿐 아니라 큰 낭비요, 무익한 일이었다. 유다는 그 향유가 적어도 300데나리온은 될 것이라고 재빨리 계산을 하면서 마리아의 행동을 불만스러워한다. 300데나리온은 품팔이꾼이 일년 동안 버는 돈보다 더 많은 것이었다. 그러나 그가 그렇게 말한 것은 진정 가난한 이들을 생각해서였을까? 아니다. 그렇다면 왜 그는 남이 사랑으로 하는 행동을 좋은 눈으로 바라보지 못했을까? 그것은 질투와 탐욕으로 눈이 어두웠기 때문이다. “온 집안이 향기로 가득찼다.” 하느님의 실존을 체험할 때 우리는 그분을 바라보고, 듣고, 맛보고, 냄새 맡고, 만져볼 수 있다. 하느님의 발자취는 사람의 영혼 안에 좋은 향기, 신선한 맛, 달콤함과 기쁨을 안겨준다. 마치 가나 혼인잔치의 향긋한 술맛처럼! 향유를 바름은 사랑을 의미한다. 더 나아가 발에 향유를 바르는 것은 아주 친근한 사이, 곧 아내나 딸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질투와 탐욕으로 눈이 어두운 유다가 어떻게 낭비하는 사랑을 이해할 수 있었겠는가! 어떻게 우리를 위해서 자신을 바친 그분 사랑의 신비를 깨달을 수 있었겠는가! 죽도록 사랑한 분을 향한 여인의 애절한 사랑을 짐작이나 할 수 있었겠는가! 십자가의 죽음은 사랑의 완성이다. 인간의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는 그분의 사랑은 낭비하는 사랑이다. 사랑하는 이만이 사랑을 이해할 수 있다. 그분의 사랑이 내 안에 흘러 넘칠 때 향기가 온 집안을 가득 채울 것이다.
“어찌하여 저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지 않는가?”
-양승국신부-
<아직 눈부신 하늘 아래 살아있기에>
사순절이 시작된 지가 엊그제 같았는데 벌써 성주간에 접어들었군요. 우리 죄인들을 위해 고통 받으신 예수님을 생각하며 어떤 보속을 이행했는지, 이제 곧 떠나가실 예수님께 무엇을 봉헌했는지 가만히 돌아보니 기가 막힙니다. 너무나 의식 없이, 개념 없이 그렇게 살아 왔습니다.
부끄러움에 가슴 치는 성주간 월요일 아침, 주님께서는 한 여인을 남아있는 사순기간의 이정표이자 제 삶의 이정표로 세워주시는군요.
베타니아의 마리아, 그녀의 예수님을 향한 봉헌은 성주간을 맞이하는 우리 모두에게 큰 귀감이 됩니다.
자신은 물론, 사랑하는 오빠와 가족 모두를 죽음의 사슬에서 풀어주신 예수님이 너무도 고마웠던 마리아였습니다.
어느 날, 밖이 소란스러워 나가보니 꿈에도 그리던 예수님과 일행이 문 앞에 서 있는 것이었습니다.
뛸 듯이 기뻤던 마리아는 고민하기 시작합니다. 생명의 은인이신 예수님, 새 삶을 부여해주신 예수께 어떤 방식으로든 감사의 표시를 해야 할 텐데, 어떤 것이 좋을까?
마리아는 우선 자신이 지니고 있는 물건 가운데 가장 소중한 것, 그래서 가장 애지중지하던 것, 생명처럼 여기던 것이 어떤 것인가 살펴보았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순 나르드 향유였습니다. 아마도 그것은 마리아에게 있어 전 재산이나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그
이제 머지않아 떠나가실 예수님임을 직감했던 마리아였기에,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정성과 사랑을 기울여 예수님을 접대합니다. 예수님께 드릴 수 있는 최상의 서비스, 가장 극진한 접대의 표시로 마리아는 그 값비싼 향유를 예수님 발에 부어드립니다.
예수님의 한없이 감미로운 사랑을 조금이라도 맛본 사람, 예수님의 무한한 자비를 조금이라도 체험한 사람은 마리아처럼 변화됩니다. 삶이 달라집니다. 행동양식이 달라집니다. 사고방식이 달라집니다. 자기중심적인 삶을 탈피해서 온전히 예수님 중심적인 삶으로 변화됩니다. 주변사람들의 시선도 의식하지 않게 됩니다. 오직 예수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것만이 일생일대의 과제가 됩니다.
극진한 하느님 자비의 체험을 통한 마리아 내면의 변화를 알 리 없었던 유다였기에 이렇게 투덜거리는 것입니다.
“어찌하여 저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지 않는가?”
제대로 된 봉헌생활을 꿈꾸는 분들은 마리아처럼 제대로 된 하느님 사랑의 사랑을 체험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분의 자비가 얼마나 큰 것인지, 그분의 사랑이 얼마나 감미로운 것인지 깨달을 필요가 있습니다.
온 세상의 모든 자비를 한 곳에 다 모은다 하더라도 하느님 한분의 자비를 능가하지 못할 것입니다.
하느님의 자비에 힘입어 완전히 새 사람으로 변화된 마리아를 바라보면서 저 역시 또 다른 희망을 지녀봅니다. 우리 모두 아직 이처럼 눈부신 하늘아래 살아있기에 마리아 못지않은 변화와 새 출발의 가능성을 지니고 있음에 기뻐합니다.
또 다시 다가온 성주간(聖週間), 죄인인 우리를 위해 자신의 목숨까지 내어놓으신 예수님 자비에 감사해야 하겠습니다. 그 풍요로운 자비에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 응답하고 있는지 돌아봐야겠습니다.
지난 사순절, 돌아볼 때 마다 부끄럽지만, 다행스럽게도 아직 1주일이란 시간이 남아있습니다.
보다 자주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피땀 흘리시는 그분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우리를 향한 극진한 그분의 사랑을 조용히 묵상해야겠습니다.
향 싼 종이에서 향기나고
-강영구신부-
당신은 봄의 향기를 느낍니까?
“향 싼 종이에서는 향기 나고, 생선 묶은 지푸라기에서는 비린내 난다.”는 말이 있습니다. 지금 당신의 가슴에 무엇이 들어있나요? 하느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을 사랑하고 이웃과 형제들을 사랑하는 마음이 가득하다면 당신에게서 사랑의 향기가 풍겨 나옵니다. 만일 당신의 가슴 속에 탐욕(貪慾)이 가득하고 미움과 증오, 시기 질투와 원망으로 부글거린다면 당신에게서는 죽음의 악취가 풍겨 나옵니다.
겉모습은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제자인 유다에게서 탐욕과 질투의 악취가 나고 대사제(大司祭)에게서 예수와 라자로를 죽이려는 살기(殺氣)가 풍겨 나옵니다. 그러나 값진 나르드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붓고 머리털로 그 발을 닦아드리는 마리아에게서 사랑의 향기가 납니다. 온 집안을 가득 채운 향기는 나르드 향유 냄새가 아니라 사랑의 향기입니다.
당신이 사랑의 향기를 풍기는 사람이라면 당신을 만나는 사람들은 행복합니다. 당신에게서 시기질투와 미움과 증오, 탐욕의 악취가 난다면 당신을 만나는 사람들은 불행합니다.
매향(梅香) 풍기는 이른 봄입니다. 당신에게서 그리스도의 향기가 풍기는 성주간(聖週間)이 되기를 기도합니다.(一明)
‘나는 언제나 함께 있지 않을 것이다’ -정호신부-
예수님께서 살려주신 라자로의 동생들인 마르타와 마리아. 이 남매와 예수님이 얽혀 있는 또 하나의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라자로를 살릴 때 언니 마르타가 한 행동, 곧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고 동생을 불러오는 행동의 이유가 된 사건이 오늘 복음에 등장합니다.
동생 마리아가 향유를 예수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 발을 닦아 드리는 일을 하게 된 것입니다. 발을 씻어준다는 것은 종이 주인이 길에서 돌아오면 하던 행동입니다. 그런데 그 발에 물이 아닌 향유를 붓고 자신의 머리털로 그 발을 닦아드렸다는 것은 정말 극진히 자신의 모든 것을 다해 그분을 주인으로 대하는 행동이라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일로 마리아는 예수님을 더 사랑하고, 또 더 사랑받는 사람처럼 취급됩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은 이런 마리아의 행동이 아닌 그를 바라보고 평가하는 한 제자의 눈을 통해 전혀 다른 모습으로 다가옵니다. 마리아가 예수님께 사용한 향유가 아주 값비싼 것이었기에 돈을 맡아있던 제자 유다가 예상치 못한 이야기를 꺼냅니다.
'이 향유를 팔았더라면 삼백 데나리온은 받았을 것이고 그 돈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줄 수 있었을 터인데 이게 무슨 짓인가?'
요한복음은 이미 유다에게 너그럽지 못하기에 그의 이런 말이 그의 욕심을 채우기 위한 이야기였다고 전해줍니다. 그러나 유다의 생각은 그냥 가치 없는 것으로 흘려들을 수만 없습니다. 왜냐하면 지금도 너무나 흔한 이야기들이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지적을 통해 유다가 다른 이가 나누는 사랑에 대해 평가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유다는 가난한 사람들의 처지를 이유로 다른 곳에 쓰여 지는 가치가 높은 물건의 사용을 문제 삼습니다. 그것을 차라리 이런 사람들에게 주면 될텐데 하고 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랑이란 그것이 이루어지는 그 순간에 절대적인 가치를 가진다고 말씀하십니다. 즉 그것의 가치가 높고 낮음이 문제가 아니라 그것을 누군가에게 주고 싶을 때 주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이야기입니다. 그것을 줄 수 있는 순간은 그 때 뿐이니 말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지만 나는 언제나 함께 있지는 않을 것이다.'
이 말씀은 예수님은 그런 비싼 향유를 받으셔도 된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가난한 사람들은 늘 곁에 있어서 언제든 사랑할 수 있다는 것, 그러므로 모든 것을 그들을 빌미로 다른 사랑의 가치를 절하하지 말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또한 그것이 오히려 가난한 사람들을 더 비참하게 평가하고 이용하는 것이라는 속 뜻 조차 숨어 있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홀로 당신의 죽음을 준비하시기에 마리아의 행동 속에서 당신의 운명을 헤아리는 비통한 심정이시지만 제자인 유다는 같은 가치로 가난한 이를 도와준 것이 아니라 스승을 팔고 자신의 살 길을 도모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누군가에게 어떤 때이든 사랑이 일어날 때 우리는 유다와 같은 시각으로 그 일을 바라보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자신은 손가락하나 까딱하지 않으면서 오히려 그 일을 하려고도 하지 않으면서 사람들의 선행이나 사랑의 실천을 다른 이유로 반대하거나 평가 절하하는 사람들이 되지는 않았으면 합니다.
† 향유에 담긴 사랑 † -박상대 신부-
어제 주님수난성지주일에는 환호와 열광, 고통과 죽음의 극단적인 두 가지 서로 다른 분위기가 큰 대조를 이루었다. 제1부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기념하는 행렬에서는 군중과 제자들의 환호와 기쁨과 믿음이 고조되었고, 제2부 미사에서는 예수님 스스로가 십자가를 지고 겪어야 할 불신과 배신, 고통과 죽음의 현실이 시종(始終) 무겁게 깔려있었다. 후자(後者)는 특히 긴 수난복음만큼이나 긴 암흑의 터널을 예수님과 함께 걸어가는 느낌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오늘 성주간 월요일부터는 암흑의 긴 터널을 하나씩 토막내어 부둥켜안고 묵상하고 또 묵상하며 내 것으로 만들어가야 할 것이다.
요한복음 제1부의 마지막을 장식하게 될 12장은 베다니아와 예루살렘을 무대로 펼쳐지는 예수님 공생활의 마지막 사건을 다루고 있다. 구체적으로 요한복음 12장은 죽었던 라자로를 소생시켜주신 것에 대한 감사의 뜻으로 보이는 베다니아 사람들의 영접 만찬회와 라자로의 동생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바르는 사건(1-11절), 예루살렘 입성(12-19절), 이방인 그리스 사람들에 대한 예수님이 자기계시(20-26절), 며칠 안에 벌어질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예고(27-36절), 예수님의 마지막 공적 말씀에 대한 유다인들의 최종적 불신과 이에 대한 심판예고(37-50절)를 그 내용으로 다루고 있다.
베다니아에서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바르고 머리카락으로 닦아드린 사건과 비슷한 내용을 마태오와 마르코복음은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후에 있었던 사건(마태 26,6-13; 마르 14,3-9)으로 기록하고 있는 반면, 요한복음은 입성 전에 있었던 사건으로 보도하고 있다. 물론 마태오와 마르코복음에는 예수께서 베다니아에 있는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 계실 때 '어떤 여자'가 와서 향유를 예수님의 '머리'에 부었다고 한다. 향유를 머리에 붓든 발에 붓든 여인(마리아)의 행위는 예수님의 '장례일'을 위하여 한 일이다. 요한은 이 사건을 과월절 엿새 전에 일어난 일로 보도함으로써 이 날이 금요일임을 암시하고 있다. 정확히 엿새 후 금요일엔 예수님의 장례식이 치러질 것이다. 장례식을 일주일 앞두고 예수님은 사람들로부터 생애 마지막 만찬을 영접 받았으며, 값비싼 향유를 자신의 주검을 위한 수의(壽衣)의 표징으로 받으셨다. 예수님과 함께 라자로, 마르타, 그리고 손님들 모두가 기뻐하였으며, 마리아는 예수님께 특별한 사랑(향유)을 보였고, 그 사랑의 향기가 온 집안에 가득 찼다.
그러나 단 한 사람, 가리옷 사람 유다만이 기분이 좋지 않았다. 예수님 발에 쏟아 부은 매우 값진 한 근의 순 나르드 향유 때문이었다. 유다는 머릿속으로 주판을 놓았다. 순 나르드 향유 한 근을 돈으로 계산하면 3백 데나리온, 이는 사람 5,000명을 빵으로 배불리 먹일 수 있는 값어치의 놀라운 금액이다(요한 6,7-9 참조). 유다의 눈에는 그것이 낭비로 보였다. 마리아의 행동은 분명 낭비이기도 하다.
그녀는 매우 값진 한 근의 순 나르드 향유를 오직 예수님의 발을 위하여 쏟아 부었으며, 그것도 모자라 자신의 머리칼로 예수님의 발을 닦았다. 마리아는 예수님께 대한 자신의 넘치는 사랑을 보였으며, 예수님은 이 사랑을 자신의 장례식을 위한 일로 받아 들이셨다. 마리아는 이로써 자신이 할 수 있는 사랑 그 이상을 한 셈이다. 사랑이 살 수 없는 곳에서 사랑은 이해 받을 수 없으며, 사랑이 이해 받지 못하는 곳에서 사랑은 살 수 없는 법이다. 이런 곳에서 사는 사람들은 어떤 행위가 전적으로 내적(內的) 사랑에 바탕을 두고 있음을 알 리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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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