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살고 있는 원룸 주소가 동해시 발한로 211-3 이다.
1980년 4월 명주군 묵호읍과 삼척군 북평읍이 합하여 동해시가 되면서 탄생한 발한은 명주군 묵호읍 발한 1,4,7,8 리가 발한동으로 편입 승격 후 행정구역 개편으로 옛 발한 1,2,7,8,21리를 합쳐 발한동이라 했다.
이 마을은 청주 韓씨가 개척했다고 해서 發韓이라 했는데, 그 후 한씨 후손들이 마을 이름에 성을 사용하는 것은 좋지 못하다고 해서 韓 이 翰으로 고쳐쓰게 되어 發翰이 된 것이다.
1998년 5000명 미만의 동 통합으로 향로동과 합하여 지금의 발한동이 된 것이다.
청주 韓씨의 묘소가 동문산에 지금도 있고, 그곳은 할미꽃 군락지다. 작년 산불로 어떻게 되었은지 궁금하다.
마을 유래는 큰 바란이(발한)로 사재 말랑에서 서쪽 골안에 있는 마을이 있다. 마을에는 11 가구가 살았고 서낭이 있었으나 지금은 서낭재를 지내지 않는다.
작은 바란이(발한)로 묵호초등학교 뒤에 있는 마을, 밤나무가 많이 있었는데 지금은 주택들이 들어서 있다.
발한 마을의 거리는 현 시가지 중심 지역, 전 강원은행 한일은행 등 상가가 있는 길거리, 1937년 묵호항이 개항되면서 삼척 지역의 무연탄 수송 집산 하면서 번성하기 시작했다.
느릅재에서 발원한 발한천은 묵호초등학교 앞을 지나 중앙시장을 거쳐 묵호신협 옆으로 해서 바다로 흘러나갔다. 지금은 모두 복개되어 보이지 않는다.
동해 목욕탕 자리는 큰 버드나무가 있었고 빨래터였다.
보영 백화점이 있던 해변 일대는 정어리 공장과 염전이 수십 개 있었다.
해방 직전은 하루에 몇 번씩 미군 비행기가 묵호항을 공격했고 묵호초등학교 옆에는 방공호가 있었다.
외항 선원들이 가져온 미제 일제 밀수품으로 부자가 된 사람들이 많았다.
특히 발한천 옆에 리어카 한 대 놓고 온갖 밀수품을 취급한 ‘깡통박’ 이라는 사람이 유명했다.
명태 꽁치 오징어가 엄청나게 잡히자 전국에서 사람들이 몰려 들었다. 자연스레 발한동에는 중앙시장이 생겼다.
남쪽 마을 천곡 북평 송정 사람들은 당말재나 철길을 따라 농산물을 팔기 위해 발한동 중앙시장으로 오고, 북쪽 마을 망상 만우 초구 괴란 옥계 사람들은 사문재를 넘어 왔다.
묵호항은 갈수록 수많은 어선 선원 어판장 상인들 화물선 하역꾼 선적 종사자로 들끓었다.
해방 직후 부터는 동해안을 지키던 해군 경비대 묵호 지구대가 생겼다.
지금의 해군 1사령부의 원조이고, 묵호 경제를 이끌고 있다.
묵호항 사람들과 해군들은 발한동 유흥가에서 돈을 흥청망청 쓰기 시작하고 작은 마을에는 영화관이 3개(동호, 문호, 묵호극장)나 들어섰다.
밤이 되면 ‘오동나무집’에서 구워파는 노가리 양미리 꽁치 냄새가 시내를 진동했다.
통행금지 해제 사이렌이 울리면 어판장 리어카가 줄지어 항구로 갔다가 오징어 노가리 명태를 싣고 나왔고 뒤이어 지게꾼들이 바수쿠리(싸리나무로 만든 바구니)에 고기를 잔뜩 지고 가공 공장으로 향했다.
묵호 시내는 고기 냄새와 석탄 가루로 하루 종일 붐볐다.
당시 밀수품 시계 하나가 1500원이었다.
‘오리엔트’와 ‘시티즌’이 인기였는데 중학교 한 반에 한 명이 겨우 찼다.
술집에서는 술값이 없으면 시계를 맡겼다.
선원들은 주로 방수시계를 찾으며 선주 화주 점주 선장들은 방수 시계 보다 금딱지 시계를 더 좋아했다.
내가 매일 들리는 ‘옛고당’ 형님이 그 당시 시계방을 했다.
지금도 그 자리는 ‘황금당’으로 속초에서 시집 온 할머니가 운영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