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의 멸망 (이자성과 오삼계)
왕조의 멸망
한 왕조가 망조가 들려면 3가지 일이 동시에 벌어지는 것 같습니다. 일단 혼군이나 폭군이 등장합니다. 정치에 관심이 없어서 환관들이 득세를 하던지 폭군이 돼서 마음대로 하던지 그러면서 천재지변이나 가뭄이 지속돼서 백성들이 먹고 살기가 힘들어집니다. 이럴 때 농민의 난이 벌어집니다.
진시황제가 이룬 최초 통일 국가인 진나라도, 조조와 유비의 등장을 유발한 후한의 소멸도, 이세민이 세원 당나라도, 몽고의 원나라도 마찬가지고 명나라도 같은 패턴입니다. 중국의 왕조들은 대충 300년이면 수명이 다합니다.
진나라는 진승과 오광의 난으로 시작해서 진나라의 장한이라는 장군이 항후에게 항복을 하면서 결정타가 되고 명도 이자성의 난으로 시작해서 후금을 만주에서 막고 있던 오삼게 장군이 후금에게 투항을 하면서 돌이킬 수 없게 됩니다. 한나라 멸망의 빌미를 제공한 황건적의 난 그리고 원나라 멸망의 빌미를 제공한 홍건적의 난.
이자성(李自成, 리쯔청, 1606년 9월 22일 ~ 1645년 5월 17일)은 명 말기 농민군 영수이다. 아명(兒名)은 이홍기(李鸿基, 리훙지)인 이자성은 명을 멸망하게 한 주요한 사람 중에 한 명이다.
생애
숭정제가 즉위하던 시기 명은 말기 증상을 노정하였다. 숭정제가 즉위하고서 기근이 들고 도처에서 봉기가 일어나는 데다가 후금군도 나날이 격렬하게 침공했다.
후금군의 주병력이었던 만주족은 국호를 후금에서 청으로 개칭한 후 명나라 장군 원숭환이 사사건건 침공하는 청군(후금군의 후신)을 늘 방어하여 왔으나 청(옛 후금)의 홍타이지가 전개한 책략에 빠진 숭정제가 무고한 원숭환을 의심하여 죄를 물어 북경 서시 거리에서 온몸을 칼로 잘라서 죽인 탓에 침공하는 청군을 방어할 힘이 사라진 때 이미 백성을 규합하고 틈왕이라 자칭한 뒤 전사한 고영상을 계승한 이자성이 농민군을 지도하여 서안을 점령하고 국호를 대순이라 칭하였으며, 그 농민군 세력이 북경에 육박하였다.
숭정 17년인 1644년 4월 25일(음력 3월 19일), 이자성이 농민군을 지도하여 북경을 점령하자 명 마지막 황제인 숭정제는 신무문으로 나와 매산에서 목을 매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숭정제는 당시 향년 33세였다. 이로부터 이자성은 스스로 황제의 위에 올랐다. 이로써 명나라는 277년이라는 역사가 끝이 났다.
1644년 5월 27일 청의 도르곤은 명의 숭정제가 죽자 투항한 명의 장수 오삼계와 함께 산해관을 넘어 이자성을 공격하여 격파하고서 명의 도읍인 북경에 진입해 자신들이 명의 정통성을 승계한 왕조라고 선포하였다.
북경에서 섬서 상저우로 철수한 이자성이 지도하는 농민군이 계속 패퇴하자 많은 명의 유신이 남경에서 세운 남명이나 청에 투항하여 이자성이 지도하는 농민군 세력은 급속히 약화했다. 1645년 이자성이 지도하는 농민군은 청에 동관마저 빼앗기자 양양을 거쳐 호북성으로 이동하였다. 거기서 남명의 좌양옥과 연합하여 청군에 대항하여 형세를 회복하려고 노력했지만, 좌양옥이 청군과 전투 도중 갑작스레 병에 걸려 죽어서 그처럼 천재일우의 기회는 안개가 걷히듯 흩어져 소멸되었다.
이자성의 난
그때 당시 명나라 농민들은 청나라와의 잦은 전쟁과 무거운 세금, 황제 숭정제의 포악성으로 고생하고 있었다. 이때 천민 출신이었던 이자성이 무리를 모아 반란을 일으켰고 명나라는 군대를 보냈으나 패하고 말았다. 끝내 이자성의 반란군은 순식간에 뤄양을 함락시키고 카이펑과 시안을 점령했으며, 베이징으로 진격하였다.
오삼계의 공격
그때 후금군은 산해관에서 오삼계의 50만 명나라군 때문에 진격하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자성이 오삼계의 아버지 오양과 가족들을 붙잡고, 휘하의 장수인 유종민이 애첩인 진원원을 취하자 오삼계는 산해관을 열고 후금에 투항했다. 후금군은 오삼계의 길잡이를 도움받아 북경으로 진격해 이자성의 난을 진압한다. 오삼계의 공격 작전이 전개된지 불과 40일만에 이자성은 순나라 황제 보위에서 폐위 축출되었다.
최후
우창과 강서에서도 청군에 패배한 이자성이 지도하는 농민군은 현재 호북 통산(通山)인 통성(通城)으로 퇴각하였지만, 구궁산(九宮山)에서 명에 충성하는 현지 무장 세력에게 살해당했다는 유언비어가 있으나 실제 사정은, 《청세조실록》에 관련 기록을 보면, 탈출이 어려워지자 이자성은 자결하였다.
이자성이 사망하고 나서 대순의 농민군은 사망한 이자성을 위해서 구궁산 일대를 소탕하여 보복하고 남명과 연합하여 청에 계속 대항한 일변, 이자성 사망 후 사체는 발견되지 않았으므로, 이자성이 탈출하여 현재 중화인민공화국 후난 성 창더인 석문(石門)에 소재한 협산사(夾山寺)에서 승려가 되어 1674년까지 살아 있었다는 제설이 아직도 전한다.
오삼계(吳三桂, 1612년 ~ 1678년)는 명말청초 장수이다. 자는 월소와 장백이며, 명 말기에 청에 투항하여 청군에 협력한 공으로 번왕에 봉해졌다. 강희제가 번을 폐하려고 하자 반란을 일으켰다.
생애
본래 집안은 강소성 고우에 적을 뒀지만, 부친이 요동성에서 근무하여 요동으로 이적하였고 오삼계는 1612년 요동에서 태어났다. 부친의 공적으로 무장에 등용된 뒤 출세를 거듭하여 1641년에 제독으로 요서의 영원(랴오닝 성 흥성시)에서 명군을 지휘하여 청군을 방어하는 임무를 수행하던 오삼계는 청이 건국되었을 때 산해관을 수비하는 임무를 맡았다. 1644년 농민군을 이끌고 명을 멸망시킨 대순의 이자성이 북경을 물리칠 때 청 태종 홍타이지에게 투항하였다. 그 후, 청군은 오삼계를 길잡이로 하여 관내로 들어왔다.
후에 번왕인 평서왕으로 봉해지고 운남을 관리해서 운남은 한족 오삼계가 다스리는 독자성을 띤 지방 정권이 된다.
반란
청나라 제4대 황제 강희제(성조)가 한족을 탄압하는 정책을 실시하자 운남에서 명을 재건국한다는 명분을 세워 군사를 이끌고 반란을 일으켰다. 평남왕 상지신와 정남왕 경정충이 오삼계의 반란에 호응하는데 역사에서는 이 사태를 삼번의 난이라고 칭한다.
강력한 군사를 이끌고 섬서성과 하남성과 감숙성을 휩쓸었으며 곧이어 청 조정을 얕잡아 보고서 수도인 북경으로 진군하다가 멈추었다. 청 조정에 숨돌릴 틈을 준 사이, 조정은 한족 출신 장군을 등용하여 반격하기 시작하였고 수차 패배했다.
최후
1678년 강희 17년에 삼번의 맹주 오삼계는 황제를 참칭하고 국호를 주(周), 연호를 소무(昭武)라 정하였으나 당년 8월에 죽으니 향년 67세였다. 이로 말미암아, 오삼계군세는 크게 약화했고 1681년 강희 20년에 오삼계의 손자이자 오씨의 주의 두 번째 황제인 오세번이 곤명에서 자살하여 8년에 걸친 삼번의 난은 종결됐다.
삼번의 난(三藩之亂)은 청나라 첫 한인 무장에 의한 반란이다. 운남성의 오삼계, 광동의 상지신, 복건의 경정충이 반란을 일으켰다. 보통 삼번의 난은 오삼계 등이 일으킨 내란을 말하며, 삼번은 명나라가 멸망 후 남쪽으로 망명한 제정권(남명)을 가리키기도 하며, 그 경우는 남명을 전삼번, 오삼계 등의 반란을 후삼번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배경
오삼계, 상가희, 경정충의 조부 경중명은 원래 명나라의 무장이며, 명나라가 이자성에 의해 멸망할 때 청군에 협력한 공적으로 각각의 번(藩)을 인정받고 있었다. 이러한 번을 부여받은 자는 지방의 일부 토지를 부여받고 토지 내의 징병, 징세, 관리 임용권 등을 얻을 수 있었다. 이는 독립국가의 역할과 대등할 정도였다. 번의 존재를 당시의 황제 강희제는 꺼림칙하게 생각하였고, 중앙집권 체제를 확립하기 위해서 번을 폐지하려고 하였다.
1673년(강희 12년), 상가희가 아들 상지신과의 불화를 이유로 스스로 은퇴를 하고 상지신에게 계승을 신청했다. 이에 강희제는 번 자체를 폐지하겠다고 상가희에 답했다. 이에 놀란 다른 두 명은 정부의 저의를 알기 위해 그들의 번도 폐지를 신청했다.
조정에서는 번의 폐지를 강행하면 오삼계 등이 반란을 일으킬 것이라고 반대를 했지만, 강희제는 조정 내의 소수의견을 채용하여 폐지를 강행했다. 예상대로 오삼계는 스스로 천하도초토병마 대원수라고 자칭하고 반란을 일으켰다.
전란
1674년(강희 13년), 오삼계는 호남을 점령하고, 군을 동서로 나누어 서쪽은 사천성, 섬서성에 동쪽은 광서, 복건으로 진군시킴과 동시에 상가희, 경정충에게 호응을 권유하였다. 경정충은 유혹에 넘어가 반란을 일으키지만, 상가희는 반대를 했기 때문에 상지신에게 살해 당하고 상지신은 반란을 일으켰다. 이에 가세해 대만에서 정경(정성공의 아들)도 호응을 하여 한때는 장강 이남 모두 오삼계 세력의 손에 떨어졌다.
그러나 오삼계 등의 반란은 대의명분 보다는 자신들의 권익을 지키기 위한 것이었기 때문에 민중으로부터의 지지는 두텁지 않았다. 오삼계 등은 만주족을 내쫓고 한족의 세상을 되찾는다는 대의명분을 내세웠다. 그러나 남명에서 저항하던 한족 왕조의 망명 정권을 남쪽으로 추적해 멸망시켰고, 이로 인해 큰 지지를 얻지 못했다. 또한 오삼계 등 세 명은 모두 동등한 지위로, 지휘권의 통일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러한 약점으로 인해 청도 서서히 세력을 만회하고, 반란군을 각개 격파 하는 데 성공하게 된다. 1676년(강희15년), 섬서가 진압되어 상지신이 항복한다. 경정충도 청에 항복하고 창을 돌려 반란군 토벌에 참가하게 된다. 1678년(강희 17년), 열세에 서게 된 오삼계는 황제에 즉위하여 국호를 주로 삼고 독립을 선언했지만, 반년 후에 병사하게 된다.
사후
대장을 잃은 반란군은 급격히 이탈을 시작했고, 운남으로 도피하여 오삼계의 손자 오세번이 황제를 이었지만, 1681년에 청군의 공격을 받아 오세번은 자살하고, 전란은 종결되었다. 이후 경정충과 상지신은 사형에 처해졌다.
이어 1683년에는 정경의 아들이 항복하자, 국내의 반청 세력이 일소되어 강희제에 의한 군주독재가 완성되었으며, 《삼세의 봄》이라는 청나라의 절정기가 초래되는 결과로 이어진다.
대청국(大淸國, 다이칭 구룬)은 1616년에 태조 천명제(누르하치)가 건국한 ‘금’(후금)을 근간으로, 아들 태종 숭덕제(홍타이지)는 '후금'에서 ‘청’으로 국호를 바꾸어 중국 대륙을 대표적으로 지배하는 왕조였다. 대청국은 정식명칭이며 약칭은 청나라(淸朝)로 불린다.
일반적으로 중국의 역사에서, 중국 대륙이 만주족(여진족)의 지배를 받은 정복왕조이자, 근대식 공화정 수립 이전 마지막 전제군주정으로 본다.
아무르 분지(헤이룽 강변)에서 탄생한 이민족의 나라 청나라는 광대하진 않으나 융성했으며 인구도 증가하였다. 청 초기에는 훌륭한 황제들(강희제, 건륭제)이 통치했다.
한족의 중국 명나라뿐 아니라 주변의 몽골, 위구르, 티베트를 모두 정복하여 역대 중국 왕조 중에서, 심지어 원나라보다 큰 중국 역사 중 가장 큰 영토를 이루게 되며, 1689년에는 네르친스크 조약으로 러시아의 침입을 저지하였다. 1683년부터 1830년까지는 그야말로 중국의 평화시대(팍스 시니카)였다. 이민족으로서는 가장 오랫동안 중국을 지배하였다. 제8대 도광제부터 말대 선통제 대에서 서구열강 세력 등의 영향으로 국력이 약해져 청나라는 멸망하고, 중국 역사에서 2천여 년 넘게 이어졌던 봉건 왕조가 끝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