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야속한 운명의 러브 스토리, 애수 ]
운명적인 만남과 사랑 그리고 전쟁이라는 불가항력이 가져온 이별. 또 다시 운명적인 재회와 이별 그리고 죽음. 멜로영화의 전형을 보여준 <애수>.
1940년 머빈 르로이 감독이 세기의 미남 미녀 로버트 테일러와 비비안 리를 내세워 전 세계 영화 팬들의 심금을 울렸습니다.
<애수>가 성공할 수 있었던 데는 뭐니뭐니해도 두 배우의 힘이 컸습니다. 로버트 테일러와 비비안 리, 이 두 미남 미녀 배우가 완전히 끌고 가는 작품입니다. 특히 비비안 리가 인상적입니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이후로 처음 접한 출연작인데, 본작에서는 스칼렛 오하라와 전혀 반대인 캐릭터를 연기했습니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로 치자면 올리비아 드 하빌랜드의 멜라니 같은 캐릭터입니다. 그런데 너무 잘 어울렸습니다. 스칼렛의 강인함과 악착같음은 전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시대적 배경이 세계대전(제1차)이다 보니 로버트 테일러는 트렌치 코트를 입고 등장합니다. 흔히 영화에서 인상적인 트렌치 코트를 얘기하면 <카사블랑카>의 험프리 보가트가 빠지지 않고 거론되는데, 테일러의 트렌치 코트도 무척이나 인상적입니다. 다만 두 배우의 명연기와 별개로 캐릭터성은 애매합니다. 비비안 리가 분한 '마이라'의 가치관은 흡사 조선 시대 여인의 것을 보는 듯합니다. 아무리 20세기 초라지만 영국도 이렇게 보수적이었구나 싶습니다. 로버트 테일러가 분한 '로이'는 전형적인 로맨스 영화의 남자 주인공입니다.
원제는 'Waterloo Bridge'지만, 국내에는 <애수>라는 제목으로 개봉했습니다. 첫 장면부터 예사롭지 않습니다.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1939년 9월, 안개 낀 런던의 워털루 브리지에 머리가 희끗희끗한 중년의 신사가 깊은 상념에 잠깁니다.
그의 한 손에는 못생긴 마스코트가 쥐어져 있습니다. 그는 로이 크로닌(로버트 테일러 분) 대령. 안개 속에 마스코트와 로이 대령의 얼굴이 클로즈업 되면서 화면은 한창 1차 세계대전이던 그곳, 워털루 브리지로 넘어갑니다.
런던에서 휴가를 즐기고 있던 초급장교 로이는 독일군의 공습에 대피소로 피하다 발레리나 마이라(비비안 리 분)를 만납니다. 로이와 마이라가 처음 만난 런던의 공습대피소. 하지만 이들의 만남은 운명의 장난처럼 참담한 비극으로 끝납니다.
서로에게 걷잡을 수 없이 빠져든 둘은 만난 지 하루 만에 결혼을 약속하지만 로이가 부대복귀 명령을 받는 바람에 결혼식을 올리지 못합니다. 연습시간을 어기고 로이를 배웅나간 마이라는 친구 키티(버지니아 필드 분)와 무용단에서 쫓겨납니다. 생활고에 시달리던 마이라는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신문 전사자 명단에서 로이를 확인하고 실신합니다. 그 뒤 자포자기 심정으로 거리의 여자로 전락한 마이라,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군인들을 상대로 호객행위를 하던 마이라는 낯익은 얼굴을 보고 아연실색합니다. 로이가 살아 돌아온 것입니다.
자신을 마중 나온 것으로 착각한 로이는 마이라를 뜨겁게 포옹합니다. 창녀가 됐다는 사실을 털어 놓을 수 없는 마이라, 그렇다고 이미 더렵혀진 몸으로 로이와 결혼은 더욱 할 수 없는 마이라은 단 하나였습니다.
“아무도 나를 도와줄 수 없어요.” 그녀는 울부짖으며 로이와 처음 만났던 워털루 브리지에서 달려오는 트럭에 몸을 던집니다. 로이로부터 받은 마스코트가 아스팔트에 나뒹굽니다. 내용만 떠올려도 눈가가 촉촉해 집니다.
비극적 여인의 사랑을 이처럼 애절하게 표현한 영화가 또 있을까 싶습니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서 당차고 생활력 강한 미국 남부여성을 연기한 비비안 리가 <애수>에선 운명을 거스르지 못하는 연약한 여인으로 나와 남자들의 마음을 자극합니다. 로이가 마이라에게 사랑을 고백하던 카페에서 촛불이 하나하나 꺼지며 흘러나오던 ‘올드랭사인’은 슬픈 결말을 예고하듯 구슬프기 짝이 없습니다.
[ 비비안 리의 가슴 시린 이야기 ]
"이 배우만큼 아름다운 외모를 가졌다면 연기력은 필요 없을 것이다. 또 이 배우만큼 연기력이 뛰어나다면 아마 외모는 다음 문제가 아니겠는가?" (뉴욕 타임즈)
"그녀는 우아하고 경이롭게 움직이는 무용수 같은 델리케이트한 눈부신 난초다." (테니시 윌리암스)
이 같은 말은 아마 할리우드에서 들을 수 있는 최고의 찬사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 배우는 일생동안 이러한 찬사 속에서 살았고 배우로서 최고의 명예를 얻었지만 한 평생을 사랑과 이별로 점철된 파란의 삶을 살았습니다.
이제 그녀는 할리우드의 대표적인 여배우가 됐고, 아직도 기억되는 전설 중 하나가 됐지요. 이는 바로 정열의 배우, 비비안 리를 두고 하는 소리입니다.
1913년 인도, 프랑스인과 영국인 사이에서 또랑또랑한 여자 아이 비비안 리가 태어납니다. 어렸을 때 부터 배우가 꿈이었던 비비안은 항상 교회에 가면 "하느님, 제가 세계를 움직이는 유명한 배우가 되게 해 주소서." 라는 기도를 하고는 했다고 합니다. 배우라는 직업은 비비안의 꿈이자, 환상이었고 유일한 희망이었습니다.
그러나 19세 되던 해에 비비안은 집안의 강권에 못 이겨 31세의 허버트 리 홀만이라는 원숙한 남자와 결혼하고 맙니다. 비비안은 이 남자와 결혼을 하고 임신까지 했지만 배우의 꿈을 버리지 못했고 12살 차이나 나는 남자에게 일생을 바칠 만큼 어리석지도 않았습니다. 그녀는 현명한 아내, 자상한 어머니가 아니라 세계 최고의 배우를 꿈꿔왔기 때문입니다.
당시 배우가 되겠다는 희망에 부풀어 있던 비비안의 우상은 배우 로렌스 올리비에였습니다. 비비안 스스로 "올리비에는 내 삶의 등불" 이라고 표현했을 정도로 비비안은 올리비에를 사랑했고, 존경했습니다. 그에 대한 존경은 배우가 되겠다는 비비안의 열정에 더더욱 불을 지폈고 결국 비비안은 로렌스 올리비에를 만나기 위해 우연을 가장한 만남을 준비하게 됩니다.
당대 최고의 톱스타 로렌스 올리비에와 배우가 되겠다는 꿈을 가지고 있었던 신예 비비안 리는 사적 모임에서 운명적인 만남을 갖게 됩니다. 당시 올리비에는 유명 여배우 질 에이몬드와 결혼한 유부남이었고 비비안 역시 딸을 두고 있는 유부녀였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만남에서 이것들은 조금의 장애물도 되지 못했습니다. 올리비에는 유달리 남다른 매력과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었던 비비안에게 첫눈에 반하게 됐고 영화 <무적함대>에서 같이 공연할 것을 제안합니다.
* 배우로서의 첫 걸음마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로렌스 올리비에를 만남으로써 비비안은 가정도 버리고 배우의 길에 매진하게 됩니다. 주체할 수 없는 끼와 자유분방함을 감출 수 없었던 비비안은 올리비에와 불타는 사랑을 했고 그를 따라 곧장 헐리우드로 날아갑니다.
그 당시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제작자 데이빗 오 셀즈닉은 여주인공 스칼렛 오하라를 연기할 배우를 찾기 위해 2년 반이라는 오랜 시간 동안 오디션을 진행하고 있었는데...
데이빗 오 셀즈닉은 이 오디션으로 엄청난 비용을 쏟아 부었지만 2년 반 동안이나 적합자를 찾지 못해 애를 태우던 중이었습니다. 셀즈닉은 감독 죠지 쿠커와 함께 수백명의 여배우를 만나 봤지만 항상 결과는 엉망이었고 "미모 뿐 아니라 스칼렛의 강렬함을 지닌 여배우는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베티 데이비스, 캐더린 헵번, 조안 크로포드 등 당대 최고의 여배우들이 계속되어 거론됐지만 셀즈닉의 대답은 항상 "NO!" 였을 정도니 말입니다. 그렇게 덧없는 시간이 정신없이 흘러가던 중 셀즈닉은 형 마이론이 한 여성을 오디션 장에 데려온 것을 보았습니다. 초록빛 고양이 눈에 18인치 허리를 가진 강렬한 카리스마의 여성-마치 스칼렛 오하라의 현신인 듯한 여성-바로 비비안 리 였던 것입니다.
마이론은 셀즈닉에게 비비안 리를 선보이면서 이런 말을 던집니다. "자, 스칼렛 오하라를 만나보게나." 25살, 비비안 리는 이렇게 자신의 배우 인생 중 최고의 터닝 포인트를 맞이하게 됩니다.
* 최고의 여배우로 우뚝 서다
당시 무명의 배우였던 비비안 리가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최종 주인공으로 낙점되자 헐리우드에선 미스 캐스팅이라는 우려의 목소리가 높았습니다. 우선은 노마 셔려, 베트 데이비스, 캐서린 햅번 등 당대의 모든 여배우들과 진 아서, 수잔 헤이워드, 폴레트 고다드 등 장래가 촉망되는 신예들을 모두 제쳐두고 결정된 황당한 캐스팅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셀즈닉의 소신은 확고했고 비비안 역시 자신감에 충만해 있었습니다. 이미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책으로만 100번 넘게 읽었던 비비안은 영화 속에 그대로 스칼렛 오하라 의 이미지를 완벽하게 투영시켰고 남자 주인공이었던 클라크 게이블과의 불화에도 불구하고 열정적인 연기를 선보입니다.
스칼렛 오하라와 비비안 리는 까탈스럽고 예민한 성격을 많이 닮아 있어 영화 촬영 중에 많은 일화를 낳았는데 특히 키스씬 도중 클라크 게이블의 입 냄새 때문에 촬영을 중단하고 집으로 돌아간 일은 유명한 일입니다. 이 정도로 비비안은 스칼렛 오하라라는 배역에 심하게 몰두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캐스팅 후 "이 영화는 망했다!"라는 헐리우드의 분위기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개봉과 함께 급반전 됩니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의 비비안 리는 그 자체가 스칼렛 오하라였고 신비스러운 매력과 날카롭고 아름다운 외모, 터질 듯한 연기력으로 전 세계적인 찬사를 받기에 이릅니다.
그리고 결국 1939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비비안은 베트 데이비스, 아이린 던, 그레타 가르보, 그리어 가슨 등 당대 최고의 여배우들을 물리치고 당당히 여우 주연상을 수상합니다. 이미 예정되었다 할 만큼 언론에서는 "비비안이 여우주연상인 것은 당연하다."는 반응을 보였고 비비안 역시 오스카의 여주인공이 됐다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죠.
"하느님, 유명한 배우가 되게 해주세요!" 어린 시절 그가 간절히 원하던 기도가 이루어지는 순간이었습니다.
* 단 하나의 사랑, 로렌스 올리비에
1940년 8월 30일. 비비안 리는 로렌스 올리비에와 결혼을 감행합니다.
두 명 모두 서로의 가정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혼을 하면서까지 벌어진 파격이었기에 미국사회는 발칵 뒤집어졌고... 그러나 비비안과 올리비에는 꿋꿋했습니다. 그들은 배우로서 서로를 존경했고, 인간으로서 서로를 사랑했습니다. 넘칠 듯한 예술혼과 배우라는 직업에 대한 열정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사진,올리비에와 함께)
이 완전한 사랑 안에서 비비안은 더 없이 행복해 했습니다. 그는 열정적으로 올리비에를 사랑하고 존경했습니다. 그 때문에 비비안은 올리비에의 아이를 낳기 위해 열중합니다. 그러나 18인치의 가는 허리와 선천적으로 약했던 비비안의 몸은 임신을 견디지 못했고 결국 유산에까지 이르고 맙니다. 비비안 리는 유산의 충격으로 상당한 우울증에 시달리게 됐고 이후 평생을 정신 분열에 가까운 정신병을 앓습니다.
올리비에는 비비안 리의 우울증이 유산에 따른 일시적 현상이라고 믿었습니다. 왜냐하면 비비안은 영화배우로서 끊임없이 연기에 대한 열정을 쏟았고 51년 영화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를 통해서 생애 두 번째 오스카 여우주연상을 수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비비안의 정신병은 조울증으로 확대되고 줄담배와 무리한 촬영으로 인해 결핵에 까지 걸리게 됩니다.
비비안의 이러한 심각한 정신병은 올리비에와의 부부 관계도 파탄에 이르게 합니다. 비비안은 항상 폭음을 일삼았고 53년에는 정신 착란 증세로 정신 병원에 수감됩니다. 당시 정신병에 흔히 사용되던 전기충격 치료는 비비안의 심신을 더욱 피폐하게 만들었고 이 치료가 수 십 번 반복되면서 비비안은 거의 회복 불능의 상태로 치닫게 됩니다.
비비안은 여전히 올리비에를 사랑했지만 막상 올리비에를 만나면 욕설과 폭언을 서슴지 않았고 이혼해 달라는 말까지도 쉽게 내뱉고 했습니다. 결국 20년 가까이 가던(동영상, <애수>에서)
이 결혼은 1957년 올리비에가 조안 플로라이트를 만나면서 금이 가기 시작했고 60년 합의 이혼하면서 처참한 종말을 맞았습니다. 올리비에와의 결별은 비비안으로서는 인생을 잃은 것과 마찬가지였습니다.
비비안은 올리비에와의 이혼에도 불구하고 올리비에가 자신에게 돌아올 것이라고 굳게 믿었습니다. 그녀는 항상 올리비에를 찾았고 그의 사랑을 갈구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환상이었죠. 올리비에는 완전히 그녀를 떠났고 그녀는 초라한 정신병자에 불과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정신 분열과 착란, 심각한 조울증에 시달리던 비비안 리는 1967년 7월 7일 향년 54세로 조용히 세상을 떠납니다. 그녀의 죽음을 지켜보았던 것은 고양이 한 마리 뿐이었다고 전해집니다.
* 죽음으로 사랑을 되찾다
67년 당시 암치료를 하기 위해 병원에 입원 중이었던 올리비에는 비비안의 죽음을 듣자마자 비비안에게 달려옵니다. 올리비에는 고양이 한 마리만이 그녀의 죽음을 지켜보았다는 것에 대한 애절한 슬픔과 그에 비례하는 상당한 죄책감을 느꼈습니다. 올리비에는 비비안의 싸늘한 시신 옆에 주저앉아 "비비안의 죽음은 모두 내 책임이다"라며 흐느꼈다고 합니다.
올리비에는 비비안이 죽은 뒤에도 암 치료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22년 동안 더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 22년 동안 올리비에는 비비안의 사랑을 갈구했고 말년에 이르러서는 비비안을 더욱 그리워했다고 합니다. 그것은 세 번째 부인인 플로라이트의 극진한 애정과는 상관없는 그 무언가였을 겁니다.
1987년 올리비에의 친구가 올리비에를 찾아갔을 때 그는 TV 속에서 비비안 리의 영화를 조용히 보고 있었다고 합니다. 비비안의 연기를 말 없이 보고 있던 올리비에는 굵은 눈물을 떨구며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아는가, 친구? 비비안은 내 사랑이었네....그건 내 인생에서 단 하나뿐인 진짜 사랑이었다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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