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아지 받던 날
김 선 구
학생시절 나의 꿈은 목장운영이었다. 뭔가 농가의 어려운 생활을 돌파 해 보고 싶은 충동에서다. 전통적인 농법에 의존하여 밭에 씨앗을 뿌리고 김 메기 하고 거둬들이는 농촌생활이 따분하고 싫었다. 노동에 대한 대가가 적고 전망도 낮아 보였다. 좀 더 높은 소득을 창출해 보고 싶다는 마음에 짐승 키우기를 생각했다. “저 푸른 초원 위에 구름 같은 집을 짓고... .” 당시 유행하던 남진의 노래도 한 몫 했다. 푸른 초원 위에 한가롭게 풀을 뜯는 소들의 모습은 하나의 로망으로 떠올랐다.
당시 우리나라에 축산이란 영세하기 짝이 없었다. 한우는 농가마다 한 마리 씩 키우고 있었으나 용도가 농사용이었다, 부엌 잔재 물 처리용으로 한 마리정도 키우던 돼지는 집안에 경조사가 생기면 희생용으로 운명을 다 하였다. 뒤뜰에 놓아 키우던 닭들이 알을 낳으면 모아서 시장에 내다 팔았다. 오일마다 장이 서는 날이면 계란 장사들이 계란을 수집해 갔다. 그야말로 축산업이라 부를 수 없는 수준이었다. 그래도 축산물은 귀한 식품이었다. 생산만 해 놓으면 잘 팔리고 수입도 짭짤했다.
대학 축산학과를 지원하여, 학교 부속목장에 기거하며 열심히 동물 사육법을 터득했다. 부화기에서 병아리를 까고, 돼지새끼는 송곳니를 자르고 어미 젖꼭지를 물려주었다. 양은 털을 깎고, 꼬리 자르기를 실시하고 염소는 발톱을 깎아 주고. 여러 가축을 두루 섭렵하며 관리기술을 익혔다.
무엇보다도 관심의 초점은 젖소관리였다. 그 때 우리나라에는 젖소가 몇 마리 사육되는지도 몰랐다. 나중에 기천 마리에 불과했다고 들었지만 그 소들이 어디에서 키우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우유라는 것은 구경도 못했으니 우유의 맛을 알 리 없었다. 초등학교 시절 미국에서 구호품으로 보내 준 분유를 끓는 물에 타서 먹어 본 경험이 유일했다. 우유란 환자들이나 먹는 고급식품으로 생각했다.
대학에서 “낙농학”이란 강좌를 처음 접했다. 낙농이란 젖소를 사육하여 우유를 생산하고 이용하는 산업이다. 구미선진국에서는 일찍부터 낙농업이 발달하여 우유나 유제품을 일상 식품으로 이용하였다. 그러나 전통적으로 주곡농업을 이어 온 우리나라는 우유를 생산하여 이용한 기록이 없었다. 허약한 병자에게 약으로 먹인 기록이 약간 있을 정도다. 왕실이나 상류층에서 약용이나 보신용으로 이용했지만 왕명으로 우유이용을 금하여 소들을 농용으로 보호하였으므로 낙농이란 단어자체가 낯설었다. 왜정시대 일본인들이 젖소를 들여와 사육한 일이 있지만 해방과 6.25사변을 겪으면서 축산이 괴멸되고 그 수가 대폭 줄어들었다.
그 후 정부의 낙농장려 정책으로 외국으로부터 젖소를 들여오기 시작했다. 그 때 우리 대학 목장에도 젖소를 사들이면서 젖소란 것을 처음 대하게 되었다. 홀스타인이란 품종이었다. 네덜란드 원산으로 원래 이름은 “프리지언“이었다. 유럽의 청교도들이 미국으로 이민 가며 함께 데리고 갔으나 소의 품종 명을 알 수 없었다. 소를 배에 실었던 항구가 독일의 홀스타인 항이어서 홀스타인이라 부르다가 원 이름을 알고 ”홀스타인 프리지언”이라 불렀다. 그러나 우리나라에 들여오면서 다시 홀스타인으로 불리게 되었다.
홀스타인은 젖소의 여왕(Dairy Queen)이란 닉네임을 갖고 있었다. 성질이 온순하고 기후와 풍토에 대한 적응력이 강하여 세계 어느 나라에서나 잘 자랐다. 젖 생산량이 많고 유지방구가 작아서 젖을 마시면 소화 흡수도 잘 되었다. 젖소들은 품종마다 서로 다른 특징이 있었다. 저지와 건지종은 젖에 지방이 많고 덩어리가 커서 버터제조에 적당하였고, 에어셔 종의 젖에는 단백질이 많아 치즈제조에 적합했다. 홀스타인의 젖은 가공용 보다는 시유(마시는 우유)로 적합 했다.
외국에 다녀 온 교수가 우유식단의 경험을 들려주고, 국민 건강을 위하여 우유를 음용해야 하는 필요성을 역설했다. 또 영국 처칠수상이 “자라는 어린이들에게 매일 우유 한 컵을 먹을 수 있게 하는 것은 국가의 책무이다”라고 한 얘기도 소개했다. 낙농업은 우리들에게 꿈의 산업으로 비춰졌다. 우유를 맘껏 마실 수 있도록 하는 것이 하나의 사명처럼 느껴졌다.
우유는 계란과 함께 완전식품의 대명사이다. 둘 다 생명의 탄생과 성장에 관여하기 때문이다. 그래도 계란은 가끔 식탁에서 대했지만 우유는 생소했다. 우유에 대한 호기심이 클수록 젖소가 빨리 새끼 낳기 를 고대했다. 열심히 젖소를 보듬었다. 축사를 깨끗이 청소하여 쾌적한 환경을 만들어 줌은 물론 좋은 목초를 골라주고, 몸도 솔질하며 항상 건강을 유지토록 하였다.
드디어 젖소가 임신하여 배가 불러오기 시작하자 분만 예정일을 손꼽아 기다렸다. 분만 일주일 전부터 분만실에 가두어 수시로 거동을 살피고 관찰했다. 외음부가 부어오르고 질에서는 점액이 흘러 내렸다. 타올과 알콜, 머큐롬, 가위 등 분만준비를 마치고 태아가 나오기를 기다렸다. 나의 조바심에 못지않게 소도 불안한지 앉았다 일어서기를 반복했다.
통증이 시작되었다. 소가 힘들었는지 옆으로 누워 목을 길게 늘이고 앓는 소리를 했다. 소의 진통에 맞추어 목부 강씨가 배를 눌러주었다. 질 강이 열리면서 커다란 물주머니가 밀려나오고 그 속에 송아지 다리가 보였다. 양막이었다. 양막이 터져 양수가 쏟아져야 하는데 터질 기미가 보이질 않았다. 소의 진통은 계속 되었다. 내가 용기를 내어 손으로 양막을 터뜨리자 양수가 쏟아져 나왔다. 우리는 송아지 발목을 새끼줄로 묶어 소의 진통의 리듬에 맞추어 당기기 시작했다. 송아지 머리가 자궁경을 통과하자 송아지 전신이 딸려 나왔다. 먼저 타올로 송아지의 입과 코를 닦아주고 마른 건초로 전신을 마사지 한 다음 가위로 탯줄을 자르고 머큐롬을 듬뿍 발라주었다.
난생 처음으로 송아지 받기 실습을 마쳤다. 내가 해냈다는 성취감에 심장이 뛰었다. 무슨 일이 던 성공적인 첫 경험은 기쁨이 충만 하는 법이다. 산부인과 의사들도 어린애를 처음 받아 본 경험을 뿌듯하게 여긴다고 한다. 이 후 나는 자신감이 충만 했다. 축산시험장에서 연구업무에 종사하며 많은 송아지들 내 손으로 받아 내었다. 항상 동물들과 함께 있었으니 절반의 꿈은 이룬 셈이었다. 목장운영의 꿈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송아지를 받아내었던 자취만은 추억으로 점철되어 마음 한구석을 채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