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스 선교사는 목사의 아들로 런던대학의 뉴칼리지를 졸업하고
23살 때 아내와 함께 선교사로 중국 상해에 왔지만
아내 캐롤라인이 병으로 먼저 천국에 갔다.
토마스 선교사는 한 때 낙심하여 선교회를 떠나
청나라 세관에서 통역 연수관으로 근무하였다.
그 때 그는 조선인 두 명을 만나 조선말을 배우며
조선 선교에 대한 비전을 품었다.
1865년 9월 5일에 중국을 떠나 10월 9일에
황해도 자라도에 도착하여
전도지, 성경 16권과 달력을 나누어주었다.
그 일이 있은 후 2달 반 동안 백령도를 비롯한
섬에서 전도를 하였고,
한강을 거슬러 올라가 대원군에게 전도를 시도하려다
2번이나 폭풍을 만나서 중국으로 되돌아가게 되었다.
그러나 토마스 목사는 좌절하지 않고
다시 조선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제너럴셔먼호를 타고 대동강을 올라가게 되었다.
제너럴셔먼 호는 평양감사 박규수에 의해 불에 타버렸고
토마스 선교사는 포박되어 1866년 9월 2일 27세 젊은 나이로
모래사장에서 박춘권에게 참수형을 당하였다.
사랑하는 아내를 잃은 지 2년 6개월 만에
자신도 한국 땅의 최초의 순교자가 된 것이다.
그러나 그의 피는 헛되지 않았다.
"순교자의 피는 교회의 초석이 된다." 는 터툴리안의 말대로
그의 순교의 피는 한국교회의 초석이 되었다.
그에게 성경을 받은 토마스를 죽인 박춘권은
나중에 변화되어 장로가 되었다.
당시 구경나왔던 12세 소년 하나는 토마스 목사가 던져 준
성경 세 권을 주워 갖고 있었는데,
몰래 숨겨 갖고 있다가 그 중 한 권을 박영식이라는
지방 관리에게 주었다.
박영식은 성경을 다 뜯어서 방에 벽지로 발랐고
그의 조카가 집에 놀러왔다가
벽에 바른 성경을 읽고 감동을 받아 예수를 믿었다.
그는 후에 평양 숭실전문을 졸업하고 미국 선교사의 조사가 되어
한국인 성서 번역위원의 한 사람으로
성경번역에 큰 공헌을 세우게 되었다.
박영식이란 사람의 집은 후에 널다리 교회가 되어
평양 대 부흥 운동의 장소가 되었다.
그가 순교한 이후 16년이 지나면서
조선의 쇄국정책은 끝나게 되었으며
19년이 지나면서 아펜젤러와 언더우드 선교사가
이 땅에 들어오게 되었다.
그 피가 뿌려진 대동강 주변 평양은
1907년 대 부흥 운동이 일어나
한국 교회의 중심지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동양의 예루살렘이라는 명칭까지 얻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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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은 보이지 않은 거름이 있기에 아름답고 많은 열매를 맺습니다.
우리는 결정적인 결단의 순간 힘들고 어렵지만
십자가를 지는 결단을 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