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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영근의 철학산책: PHILOSOPHY ESSAY
4편 : 귀게스의 반지와 『투명인간』
동양에서는 손오공 이야기에 나오는 것처럼 둔갑술이나 분신술이 인기 있는 이야기다. 서양에서는, 하데스의 황금 투구 이야기가 전해지는 것으로 보아, 아주 오래전부터 보이지 않는 인간에 대한 이야기가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투명인간을 윤리적인 문제와 관련지어 본격적으로 제기한 것은 플라톤이다. 플라톤은 『국가』 2권에서 글라우콘의 입을 빌려 귀게스의 반지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자유
귀게스는 뤼디아 왕에게 고용된 양치기였다. 하루는 큰 지진이 일어나 땅이 갈라졌다. 땅이 갈라진 틈으로 내려가 보니 속이 빈 청동 말 속에 큰 체구의 시신이 있었다. 맨몸뚱이 시신이었는데 손가락에 금반지를 끼고 있었다. 귀게스는 금반지를 빼어 들고 밖으로 나왔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반지의 보석을 만지작거리게 되었는데, 반지의 보석을 안쪽으로 돌리면 자기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고 바깥쪽으로 돌리면 도로 보이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런 사실을 알게 되자 왕궁 안으로 들어가 왕비와 간통하고 왕비의 도움으로 왕을 공격해 살해하고 왕권을 장악했다.
글라우콘은 귀게스의 전설을 전하며 이렇게 말한다.
“사람들은 정의를 고집하여 남의 재물에 손대기를 삼갈 만큼 의지가 철석같은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라고 생각해요. 그는 시장에서 원하는 것이면 무엇이든 들키지 않고 훔칠 수 있고, 아무 집에나 들어가서 누구든 원하는 사람과 교합할 수 있고, 아무나 마음대로 죽이거나 감옥에서 풀어 줄 수 있고, 인간들 사이에서 제반사에 신처럼 행동할 수 있을 테니 말예요.”
정의가 개인에게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고, 어떤 사람이 올바르다면 자진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마지못해 그렇다는 주장이다. 결국, 사람들은 불의를 행할 수 있겠다 싶으면 언제든 불의를 행하려 하고, 그러므로 가장 불의한 자는 본격적으로 불의한 일을 행하고도 들키지 않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인간을 도덕적으로 행동하도록 이끄는 강력한 동기는 내면에서 생겨나는 정의로운 마음이 아니라 주변 사람들의 시선, 흔히 말하는 사회적 평판이 아닌가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다. 이런 문제 제기에 대해 소크라테스는 직접적인 논박을 펼치지는 않고 있다.
(이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대답은 간결했다.
귀게스는 결코 정의를 실현하지 못했다. 인간에게는 이성이 있고, 이성이 자신을 통치해야만 행복할 수 있다. 따라서 부정이 아무리 많은 이득을 가져온다 해도 오직 이성이 원하는 올바른 행위만이 진정으로 그를 행복할 수 있게 해준다고 말한다. 도덕적인 행
위는 그 자체로서 보상되는 것이며, 그 보상은 비열한 방법으로 왕관을 쟁탈한 귀게스보다 비할데 없이 크다는 것이다.)https://m.blog.naver.com/armada0219/222279310097
큰 글자와 작은 글자의 비유를 들어가며, 우리 눈에 잘 보이는 큰 글자, 곧 국가의 정의를 먼저 살펴볼 것을 제안한다.
『국가』 전체의 주제가 “정의로운 국가란 무엇인가”이므로 정의로운 국가의 모습이 드러나면 정의로운 인간이 무엇인지는 자연스럽게 드러나게 되고 위의 질문에 대한 궁극적인 해답이 되는 것이다. 물론, 결론은 도덕적 판단에서도 우리의 이성에 근거해서 언제나 합리적인 판단을 내릴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은 나중에 데이비드 흄 같은 철학자의 논박을 받게 된다. 우리의 이성은 감성의 하인일 뿐이며 도덕적인 판단에서도 언제나 감정이 우선한다는 주장이다. 이런 두 관점의 대립을 검토하는 것은 다음 기회로 미루고,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자유가 주어졌을 때 과연 어떤 일이 일어날지 좀 더 살펴보고자 한다.
투명인간(영국작가 허버트 조지 웰스 지음)
그러나 마음껏 누릴 수 없는 자유
투명인간 이야기를 들으며 멋진 모험을 기대하는 마음이 어긋나 실망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놀라움을 느끼기도 했다. 아마도, 서양의 합리적 정신을 처음으로 실감하게 된 순간인지도 모르겠다. 투명인간이 된 순간, 알몸이 될 수밖에 없고, 알몸의 인간은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가? 이런 문제를 발견한 저자의 너무나 합리적이고 현실적인 사고에 어린 마음에도 감탄이 절로 나왔다.
주인공인 그리핀도 이런 문제를 고백하고 있다. 그리핀이 투명인간이 되었을 때, 런던은 추운 겨울이었다. 처음에는 자기 발을 자기도 볼 수 없어 계단을 내려가는 일조차 버거운 일이어서 몇 번이나 계단에서 굴러떨어질 뻔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알몸의 투명인간을 괴롭힌 것은 런던의 추위였다. 추위 때문에 재채기가 나오려고 해 정체가 드러날 위기도 자주 겪는다. 질척한 런던의 흙길을 쏘다니다가 발에 묻은 진흙 때문에 발의 윤곽이 드러나 어린이들에게 쫓기기도 한다. 더군다나 눈이라도 맞는 날에는 금방 정체가 드러나고 말 것이다.
투명인간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자유를 얻었지만, 그런 자유를 마음껏 누릴 수 없다. 알몸뚱이라는 제약 때문이다. 알몸뚱이의 한계를 벗어나기 위해 옷을 입을 수밖에 없지만, 그 순간 투명인간의 장점은 사라져 버린다. 아니 오히려 괴물 같은 모습이 되어야 한다. 얼굴을 붕대로 칭칭 감아야 하고, 장난감 코를 붙여야 한다. 공개된 식당에서 식사를 할 수도 없다. 입을 벌리는 순간 정체가 드러나는 것은 물론이고 그 모습은 또 얼마나 기괴하겠는가? 할 수 없이 독실을 청해 식사를 하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하지만 투명인간이 직면한 진짜 문제는 알몸뚱이라는 물리적 문제가 아니다. 철저한 사회적 고립이 그 앞을 막고 있다. 투명인간은 옷을 입으면 입은 대로, 옷을 벗으면 벗은 대로 사회적 관계를 맺을 수 없다. 영원한 이방인, 절대적 타자의 처지로 내몰리고 만다.
이제 투명인간은 하수인이든 조력자든 사회와 관계를 맺어 줄 끈이 필요하다. 잉글랜드 남부 시골 지방을 떠도는 홀아비, 키 작고 뚱뚱하고 조금 모자란 듯 보이는 마블이라는 인물을 점찍는다. 투명인간이라는 존재에 잔뜩 겁이 질린 마블은 어쩔 수 없이 투명인간의 명령을 따르지만, 언제나 투명인간에게서 벗어날 기회를 노린다. 급기야 투명인간이 훔쳐 온 돈과 투명인간의 목숨과도 같은 연구 노트를 가지고 도망치는 데 성공한다. 하수인이 탈출하고 투명인간은 다시 혼자가 된다.
오랜 피로와 굶주림에 지친 투명인간이 어느 집에 숨어드는데, 그 집 주인은 우연히도 대학 시절의 친구, 켐프 박사였다. 이 친구라면 우선 따뜻한 잠자리와 먹을 것을 제공해 줄 것이다. 같이 연구 결과를 이야기할 수도 있을 것이다. 투명인간이 허황된 이야기가 아니라 철저히 과학의 산물임을 이해해 줄 수 있을 것이다. 더 나아가 투명인간이 지배하는 사회, 귀게스처럼 남에게 보이지 않는 이점을 살려 이 사회를 지배하겠다는 원대한 계획을 같이 꿈꿀 수도 있겠지. 이런 투명인간의 바람을 들어줄 켐프 박사가 아니다. 잉글랜드의 엘리트 과학자의 도덕성이 살인과 방화를 일삼은 투명인간의 이기심에 동조할 리가 없다. 오히려 투명인간이 늘어놓은 그동안의 모든 이야기를 통해 투명인간의 약점이 무엇인지 알아내고 투명인간을 잡는 작전을 통괄하는 기획자가 되어 버린다. 배신자가 된 것이다. 투명인간에게 더 이상의 출구는 없다.
권력과 비밀
귀게스의 반지 이야기를 글라우콘처럼 사회적 평판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 아닌가 하는 문제로 읽을 수도 있지만, 권력의 일반적 속성의 문제로 읽을 수도 있을 것이다.
『투명인간』을 다시 읽으며, 켐프 박사가 투명인간의 조력자가 되어 권력을 추구해 나가는 이야기로 전개되었으면 어땠을까 생각해 보았다. 귀게스의 반지 이야기에서 귀게스는 반지의 권능에 기대어 뤼디아의 왕이 되었고, 그의 권력은 대대손손 이어졌다. 남에게 보이지 않는 능력을 지닌 순간,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게 되자마자, 권력욕을 발휘해 권력을 거머쥔 것이다. 아마 투명인간도 켐프의 도움을 받았다면 권력욕을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행동했을 것이다. 투명인간은 켐프와 대화를 나누며 공포정치로 이 지방의 지배자가 되겠다는 포부를 밝힌 바 있다.
제사장의 형태로 권력이 처음 모습을 드러낸 이래로, 언제나 권력은 비밀 속에서 작동하는 모습을 보여 왔다. 깊은 비밀을 알고 있고 간직하고 있는 것처럼 보여 주며 권력을 유지해 온 것이다. 비밀에 기대어 권력을 잡고 비밀에 기대어 권력을 유지한다. 이런 비밀은 절대 누설되어서는 안 되는 비밀이다. 그런 비밀을 간직하는 한, 글라우콘의 주장처럼, 권력자는 불의로 가득 차 있으면서도 정의로운 사람처럼 행세할 수 있다. 마키아벨 리가 『군주론』에서 말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권력자들은 자신이 선할 필요는 없지만 선하게 보일 필요가 있고, 자신이 신앙심이 있을 필요는 없지만 신앙심이 있는 것처럼 보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권력은 자신은 선하지 않으면서 선한 것처럼 행세할 뿐아니라, 선하지만 선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존재들을 끊임없이 만들어 낸다. 선한 사람에게 선하지 않다는 혐의를 덮어씌우고 그들을 적으로 삼는 것이다.
엘리아스 카네티는 권력과 비밀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권력자는 비밀을 적극적으로 이용한다. 권력자는 그 비밀에 관해 정통하여 비밀을 적절하게 평가할 수 있는 능력을 지녔다. 그는 무엇을 위해 자신이 매복하고 있는가를 알고 있으며, 그 경우 어떤 자의 도움이 필요한지도 안다. 그는 욕망이 크기 때문에 비밀이 많다.”
형식적 민주주의가 그런 대로 작동하고 있다고들 하는 오늘날에도, 욕망의 크기만큼이나 많은 비밀을 가진 권력자를 얘기하는 것은 씁쓸한 일이다. 카네티가 이어서 말한다.
“권력은 그 기만을 간파당해서는 안 된다. 권력자는 다른 사람을 꿰뚫어 볼 수 있지만 다른 사람이 권력자를 꿰뚫어 보아서는 안 된다. 그는 누구보다도 말이 적어야 하며 그의 신조나 의도는 아무도 몰라야 한다.”
투명인간이 런던 거리를 다닐 때, 애써 피한 사람이 있다. 시각장애인이다. 보지 못하는 사람이나 보이지 않는 사람이나 동등한 입장에 서게 된 것이다. 게다가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은 예민한 감각과 후각이 있어 언제나 이런 감각으로 사태를 파악한다. 투명인간이 정체를 들키지 않으려 시각장애인을 피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렇다면 권력자를 꿰뚫어 보기 위해서 우리는 어떤 감각을 벼려야 할 것인가?
♠참고도서
플라톤, 천병희 옮김, 『국가』, 숲.
H . G. 웰스, 임종기 옮김, 『투명인간』, 문예출판사.
엘리아스 카네티, 강두식·임종기 옮김, 『군중과 권력』, 바다출판사.
니콜로 마키아벨리, 곽차섭 옮김, 『군주론』, 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