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도 따블빽 친구들의 올바른 목소리가~자유대한민국 살릴 수 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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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國病, 湖南을 말한다>
- 주동식 지역평등시민연대 대표 강연 발췌 요약
호남을 혐오하기 전에 애정어린 비판이 필요하다.
이를 전제할 때, "호남이 변해야 대한민국이 산다"고 주장하고 싶다.
이른바 '민주 성지' 호남에 민주주의가 없다. 지역 국회의원, 지자체장, 지역의원이 100% 민주당이다. 1당 독재, 전체주의다.
호남이 오늘날 호남공화국이 되기까지엔 2개의 큰 변곡점이 있었다.
6.25와 5.18이다.
일제시대만 해도 호남이 영남보다 경제상황이 나았다.
해방 직전까지 500석 이상 수확하는 호남 대지주는 600명, 영남은 400명 수준이었다. 농지 면적은 호남 2억 평(6만6천여 정보), 영남 1억3천만 평(4만4천여 정보)이었다.
조선시대 이래 경상도는 산악지대 때문에 땅이 척박해 학문에 정진. 관료 진출이 많았고, 전라도는 넓은 평야 덕분에 만석꾼이 여럿 있을 정도로 물산이 풍부했다.
이 때문에 호남지역엔 일찍부터 소수 지주 對 다수 소작인 간 계급갈등이 심했고, 또한 농민반란도 잦았다.
이같은 호남-영남간 경제력 차이는 일제시대 만주, 일본(사할린 포함) 등지로 먹고 살기 위해 이주한 조선인 상당수가 경상도 출신들임을 감안할 때 입증된다 하겠다.(이들 중 많은 사람들이 나중 산업화 시대 企業報國에 임한다)
한편 역사적으로도 호남 혐오는 있어왔다. 태조 왕건의 훈요십조는 둘째 치고, 擇里志 이종환은 호남 출신이면서도 호남에 대해 부정적 평가를 내렸다.
18세기 호남 선비 황윤석은 ◇기질이 경박하고 속임수를 잘 쓴다 ◇변괴(흉악범죄)가 많다 ◇역적이 많다고 호남을 비하했다. <하멜표류기>의 하멜도 "조선인들은 도둑질, 사기, 거짓말에 매우 익숙하다"고 썼다. 그는 조선 체류 13년 중 11년을 전라도에서 지냈다.
호남의 변화 첫번째 시련은 6.25 때 찾아왔다.
전쟁 중 호남지역 학살피해자 수가 자그마치 8만4천여 명이나 됐다. 대한민국 전체 12만8천9백여 명 중 65%를 차지했다. 이중에서도 전남이 6만9,787명이었다. 전체의 절반이다.
그만큼 6.25 당시 호남지역에선 좌우 대립이 격렬하게 벌어졌고, 그 결과 人材 고갈이란 사회적 문화적 직격탄을 맞았다. 때문에 전쟁의 상흔은 깊었다. (반면 영남은 그같은 禍를 면했다.)
1963년 박정희-윤보선 대결 때 야당 민정당은 박정희의 남로당 이력에다 형 박상희(김종필 장인)의 대구 10.1폭동 주범까지 들먹이며 이념공세를 퍼부었다. 그러나 결과는 박정희가 호남에서 35만표나 더 얻었다. 이것은 전체 득표 차이가 15만표임을 감안할 때 호남이 박정희를 선택한 셈이었다. 그리고 그 단초엔 야당의 사상공세에 대한 호남인들의 逆반응이 작용한 것이다.
이렇듯 호남인의 핏줄 속엔 계급갈등, 저항의식, 좌파적 기질이 (역사적으로) 연면히 흐르고 있다고 봐야 한다.
이렇듯 호남이 선택한 박정희 때문에 호남의 질곡이 시작됐다는 점은 역사적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박정희의 산업화 출발점은 한일회담 청구권 자금이다.
그리고 당시 경제발전의 교과서는 일본일 수밖에 없었다. 지리적 여건도 그렇거니와 원조 受惠國은 授惠國과 경제교류를 하는 게 원칙이다.
한일 무역은 지리 여건상 일본의 관서지방과 한국의 남동해안일 수밖에 없다. 간만의 차가 심한 서해안으로 무역선이 다닌다는 건 근본적으로 말이 안된다. 그래서 수출공단이 경남 해안에 집중됐고, 여기에 결정적이었던 게 경부고속도로였다. 지역적 경제적 分化가 생기고 영남패권이 형성되기 시작했다(여기서 기억나는 게 제레미 다이아몬드의 대륙별 위치가 문명발달의 차이를 가져왔다는 이론이다).
영남이 산업기지화되면서 호남의 많은 농민들이 노동자로 편입됐다. 자연스레 호남인들 사이에 사회적 저항 커뮤니티가 형성됐다. 인텔리층은 사회 및 이념운동에 매진, 反체제, 반미반일, 친북從中에 빠져들었다.
그러잖아도 일반 사회에서도 호남인들은 알게 모르게 차별을 당했다. 진급, 입사, 결혼 등 개인적 인생 고비에서 시련을 당한 경우가 더러 있었다. 그런 시절이 있었다(일반적이진 않았지만).
이를 정치 의제화에 성공한 이가 바로 김대중이다. 그리고 친북주사파들이다. 이들은 지금도 이 귀중한(?) 자산을 적극 활용, 정치적 이득을 챙기고 있다.
박정희의 산업화 이면에 내재된 호남문제(계급갈등, 분노, 소외)가 중첩 악성화돼 폭발한 게 5.18이다.
5.18은 원래 김대중 연금 해제 요구에서 촉발했다. 그러나 김대중이 전남대 총학생회장 박관현에게 반군부독재투쟁을 사주함으로써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됐다.
김대중의 정치적 욕망이 6.25 이후 대한민국 최대 비극이자 주사파들의 정치적 자산을 탄생시킨 셈이다.
이후 87체제, 이른바 민주화 시대를 맞아 호남과 주사파가 제휴, 친북좌파 상징자산으로 오염된 채 오늘에까지 이르고 있다.
한때 호남 고립을 노려 김영삼이 3당합당을 시도, 우파 정권 창출엔 성공했지만, 정치적 명분은 좌파에게 빼앗기는 결과를 낳고말았다. 민주화를 쟁취한 호남과 주사파가 87체제의 오너라는 명분이었다.
이때부터 소유권 등기는 우파, 소유권 행사는 좌파란 말이 공공연히 떠돌기 시작했고, 행정부, 학계, 언론계, 대중예술계, 시민단체, 경제계 할것없이 좌파들이 대거 잠식해 들어갔다.
이들 세력이 끝내 박근혜 탄핵, 문재인 집권까지 호남+좌파의 승리를 견인했다.
그러나 호남은 이같은 정치적 승리에도 불구, 경제적으론 불구자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 이는 스스로 자초한 측면이 크다. 기업 투자나 대형 쇼핑몰 영입 등을 좌파연합이 거부한 결과다.
호남은 이같은 경제적 낙후성을 아직도 정부보조금 등 정치적으로 때우려는 습성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농업보조금, 동학혁명 가담자 독립유공자 예우 등에 매달린다. 최근엔 5.18 후손들에게까지 무슨 보상인가 뭔가를 해주자는 말까지 나오고 있는 판이다. 그리고 나머지는 국가 프로젝트와 정부 예산 따오기다.
이는 정치적 영향력과 경제적 특혜의 맞교환, 좋게 말해서 그렇지만, 나쁘게 말하면 영남에서 번 돈 나눠먹기에 다름아니다. 아니면 뺏어먹기?
아무튼 호남은 6.25, 5.18, 87체제를 거쳐 오늘에 이르기까지 크게 변함이 없다. 한결같다는 의미에선 좋아보일지 모르겠지만, 그들의 옹졸함과 별난 유대감, 배타성 등이 나라 발전에 걸림돌이 되고 있다.
"광주에 대학(교수)은 많아도 학생이 없고, 언론(기자)은 많아도 독자가 없고, 시민단체는 많아도 시민이 없다"는 말은 광주란 도시가 죽은 도시란 말이나 다름없다. 이 모든 게 좌파이념에 빠져 영남패권을 전향적으로 극복하지 못한 罪業의 결과다. 지금이라도 반미반일에서 친미친일로 돌아서고, 자본주의와 시장과 기업, 법치와 과학, 자유, 합리주의 등의 가치에 동조해주길 바랄 뿐이다.
몇년 전 김승환 전북교육감이란 자가 高3 학생들에게 "삼성 취업 금지"란 공문을 발송한 사건(?)이 있었다. 그리고 송갑석이란 국회의원은 대놓고 "김일성을 존경한다"고 말한 적도 있다. 정율성 기념사업도 마찬가지다. 이래선 호남은 구제불능이다.
극단적으로 말해 호남이 흥하면 대한민국이 망하고, 호남이 망해야 대한민국이 성공한다.
호남문제는 한반도 근현대사의 화두이자 민낯이자 '미성숙의 표본'이다.
主流로 산 경험이 부족하고, 엘리트들은 뿌리뽑혀 知的인프라가 취약하다. 그래서 민주 성지가 反민주주의 성지가 된 게 오늘의 호남이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선 내부에 좌우 대립구조 조성이 중요하고 시급하다. 그게 호남 주민들의 올바른 판단과 각성을 돕는 길이다.
여담 삼아, 옛얘기 하나 하자면, 조선시대 지방수령 선호 1번지가 호남이었다. 본전 뽑기 가장 수월한 제1의 수탈지였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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