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경대사9회 동기 金星 김승태 교장이 단톡방에 올린 동영상
다산(多山) 정약용(丁若鏞)
※ 두 아들을 위한 글(인터넷)
※ 정약용이 딸에 대한 그리움을 담아 1813년 강진 유배지에서
부인이 보내온 붉은 비단치마 하피(霞帔)에 그린 매조도.
참새 두 마리는 딸과 사위를 상징한다. 고려대 박물관 소장(인터넷)
※ 정약용이 유배 당시인 1813년 갓 태어난 소실 남당네가 낳은 딸 홍임을 위해 그렸다는 매조도(梅鳥).
학계에서 진위 논란이 있는 작품이다. 개인소장(인터넷)
※ 다산 정약용과 부인 홍씨의 합묘(인터넷)
※ 다산은 아버지 정재원의 두번째 부인 소생이다. 첫째 형은 아버지의 첫부인 의령 남씨 남하덕(南夏德)의 딸(1729~1752)과 사이에서 낳은 정약현(丁若鉉, 1751~1821)이다. 둘째, 셋쩨 형이 다산과 같은 어머니
해남 윤씨다. '자산어보'를 쓴 정약전(丁若銓, 1758~1816)이 둘째, 신유박해때 아들과 순교한
정약종(丁若鍾, 1760~1801)이 세째다. 동생으로 생모 사후 들어온 계모 김씨의 아들
정약횡(丁若鐄, 1785~1829)이 있다.
아홉살때 어머니 윤씨가 사망, 큰 형수(맏형수 경주 정씨)와 계모 김씨(1754~1813) 손에 자랐다.
어린 시절(10살 이전) 지은 시를 모아 '삼미자집(三眉子集)'을 냈지만 전하지 않는다. 삼미(三眉)는 눈섭이 세개라는 뜻으로 어린시절 천연두 흉터가 있어 동무들이 놀렸는데, 이를 호로 삼았다.
출처: 지성인간
이후에 그를 아끼던 정조가 세상을 떠나자 1801년(순조 1년) 3월 신유박해 때 두 형과 함께 경상도 장기현에
유배되었다. 노론에서는 정 씨 형제들을 제거하려 했으나 셋째인 정약종 아우구스티노만 순교를 택하고 정약전과
정약용은 배교하여 사형에서 유배로 감형되었다. 이후 정약용의 큰형 정약현의 사위인 황사영이 일으킨 황사영 백서 사건에 연루되어 1801년 11월 전라도 강진으로 이배되었다.
정약용이 18년 동안 귀양 생활을 조정에서 끊지 못했던 것도 영의정이던 노론 벽파의 거두 서용보가 극렬하게
반대했기 때문이다는데 애초에 서용보는 자신 역시 아버지와 관련된 일에 연루되어서 1806년에 조정에서
물러났다가 영의정으로 복귀한게 1819년이었기에 그 사이에 정약용이 못 풀려난 것에 대한 설명이 되지 않는다.
그냥 정약용 자체가 정조의 신임으로 조정에 있었던 사람이었던데다 그가 귀양을 가게 된 것이 다름 아닌 천주교
관련 문제였기에 쉽게 풀어주기 어려웠을 것이다.
강진이 그의 외가가 있는 지역이었고 외가의 장서량이 상당했기에 유배에서 풀려날 때까지 18년간 학문에
몰두할 수 있었다. 정약용의 외가는 해남 윤씨다. 해남에 있는 '녹우당'이 해남 윤씨의 종가로 자체적으로 장서를
수집해 '만권당'이라는 장서각을 지어놓았다. 바로 이 집안이 고산 윤선도와 공재 윤두서의 종가다. 신위를 불태워
처형된 윤지충, 권상연은 정약용과 먼 외가 친척 사이가 된다. 그런데 하필 강진현감이 노론 벽파의 맹장
이안묵이었다. 이안묵은 금평군 이제의 증손이고 이하술의 손자였으며 종친의 후손이었는데 이안묵은 서학의
추종자의 친척이고 남인인 정약용을 못마땅히 여겨 유배지에서 정약용을 냉혹하게 대했고 정약용도 이안묵
재임 3년 동안 유배지에서 힘들게 지냈다. 이안묵은 강진현감에 있었을 때 토색질을 하여 탄핵당하고 권유와 합작해 대혼저지기도 사건에 가담하여 역적으로 몰려 정법당했다. 진짜 정약용을 괴롭힌 사람은 서학 문제로 원수가
되어버린 이기경과 노론 벽파의 강경파인 이안묵이 되겠다.
출처: 나무위키
※ 정약용의 여인들
2006년 4월 TV진품명품 프로에 하피첩(霞帔帖)이 소개되었을 때
온 나라의 큰 화제였다.
하피첩(霞帔帖)이란 붉은 치마로 만든 첩이란 뜻이다. 사연은 이렇다. 다산 유배 10년 차에 다산의 부인 홍 씨가
유배지의 다산에게 시집올 때 입은 노을색 치마를 보낸다. 다산은 이 치마를 잘라 네 권의 첩으로 만들어
두 아들에게 주는 교훈의 글을 쓰고, 딸에게 줄 매조도를 그려서 하피첩이라 이름 붙였다.
많은 전문가들은 부인 홍 씨가 노을 치마를 보낸 것은 남편을 그리워하는 애절한 사랑이라 했고, 다산이 치마를 잘라 하피첩을 만든 것은 고마운 부인에 대한 애틋한 사랑이라고 했다. 이처럼 하피첩을 다산과 부인 홍 씨의 사랑의
증표로 자리매김한 것은,
대학자 다산은 티끌만큼도 흠이 없어야 한다는 후학들의 존경심 때문일 것이다. 부인은 속내를 말하지 않았지만,
그녀의 성품과 기록을 보면 치마를 보낸 까닭은 투기(妬忌)였다.
유배지의 다산에게 여인이 있었기 때문이다. 홍임이란 어린 딸도 있었다. 다산은 해배되어 고향 마재로 돌아갈 때
이 모녀를 데리고 갔다. 그러나 모녀는 부인 홍 씨에게 소박 맞고 강진으로 쫓기듯 돌아오고 만다. 이후 이 모녀의
행적은 알려지지 않았으나,
이 모녀의 기구한 운명을 노래한 한시 16편이 남았으니 남당사 16 수이다.
나는 이 숨겨진 사연을 '하피첩 유감'이라는 제목으로 해남신문 칼럼난에 기고한 바가 있다.
'정약용의 여인들'은 하피첩 사연을 바탕으로 작가 최문희가 문학적 상상력을 가미하여 쓴 장편소설이다.
소설은 다산이 강진으로 유배 가기까지의 정치 상황이 긴장감 있게 전개된다. 천주교도의 시련과 다산의 형제들이 고초를 겪는 신유박해도 소설의 한 줄기이다. 그러나 결국 소설의 중심은 다산과 부인 홍 씨와 유배지 여인과의
삼각 애증의 서사이다.
다산의 명성만큼 다산의 형제와 다산의 두 아들은 이름이 알려졌으나, 다산의 부인이나 딸은 이름이 알려져 있지
않다. 남성 중심 사회 조선의 한계다. 부인의 이름은 혜원이다. 딸의 이름은 홍연이다.
유배지 강진에서도 제자들 이름과 지인들 이름이 알려지고 기록으로도 남았으나, 그림자처럼 고요히 다산의 위로가 되어준 그 여인은 이름이 없다. 작가 최문희는 그 여인을 진솔이라 이름 붙여준다.
혜원의 친정은 대대로 무인 집안이다. 혜원은 지아비 다산보다 대범하고 직선적이다. 첫날밤 신랑이 겹겹이 단장한 신부의 옷고름을 푸는데 진땀을 내자, 수줍어야 할 신부 혜원은 적극 신랑을 도와 옷고름을 풀고 첫날밤을 치른다.
다산이 유배지에서 18년 동안 제자를 가르치고 수많은 저술을 하는 동안 부인 혜원은 지아비 없는 집안의
가장으로서, 폐족으로 진로가 막힌 아들의 어미로서, 언제 돌아올지 기약할 수 없는 유배지 남편의 뒷바라지하는
부인으로서 너무나 힘들게 살아야 했다. 지아비의 유배 못지않게 혜원도 똑같은 유배의 고통 속에서 살았던 것이다. 혜원은 집안의 겨울바람을 막아주는 대숲 같은 존재였다. 무너진 집안을 받쳐주는 마지막 보루였다. 그런 혜원에게 유배지 지아비에게 여인이 있다는 소식은 청천벽력과 같았을 것이다.
진솔은 유배지에서 힘들게 버티는 다산에게 있는 듯 없는 듯 그림자처럼 가까이에서 수발드는 여인이다. 현감에게 끌려가 곤욕을 치른 다산의 몸과 마음을 정성 다해 치료해 준 고마운 여인이다. 그녀의 출신 배경은 정확하지 않다. 동반 매반가 노파의 딸이라는 설도 있고, 바닷가 남당 마을 어부의 딸이라는 설도 있다. 그녀는 평민 출신 답지 않게 기품이 있고 우아한 여인이다. 강인한 혜원의 기에 눌린 다산이 수줍은 듯 은은한 진솔에게 끌리는 것은 자연스럽다. 그러나 다산은 중년 남성의 본능을 억제하면서 진솔을 품지 않았다.
유배 십 년 차 되던 해 마재의 혜원이 머슴을 시켜 유배지 초당으로 보내온 짐 속에는 보자기에 싸인 붉은 치마가
있었다. 혜원이 시집올 때 입었던 노을 치마다. 노을 치마 앞에서 다산의 절제는 무너진다. 다산은 진솔을 품는다.
다산이 치마를 거칠게 자르자, 진솔은 정성껏 다림질하여 주름을 편다. 하피첩이 만들어지는 역사적 순간이다.
유배 생활 18년 드디어 해배의 명이 내리고
다산은 다섯 수레 가득 저술한 책을 싣고 따르는 제자들과 마재로 향한다. 진솔은 따를 수 없다고 하지만, 다산은
귀여운 딸 홍임과 진솔을 데리고 고향 마재로 간다.
마재 집으로 들어서면서 어린 홍임은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진솔은 사랑하는 임의 시중을 들지 못한다.
다산 또한 사랑하는 딸을 안을 수 없고 진솔을 보지 못한다. 진솔과 홍임은 다산에게 하직인사도 드리지 못하고
강진으로 쫓기듯 돌아온다.
소설은 강진에서 모질게 살아가는 진솔 모녀의 삶을 서술한다. 홍임은 아비를 닮아 너무 영민하다 남자라면 과거
급제의 실력이다. 진솔은 초당에서 어깨너머로 배운 공부로 임을 그리며 시를 쓴다. 남당사 16 수이다.
마재의 다산은 노쇠해 가고, 다산의 도움 받아 입신하려는 강진의 제자들도 실망하여 배신하고 떠난다. 혜원은
여전히 집안의 대소사를 관장하는 대숲 같은 존재다. 다산도 혜원도 진솔 모녀를 입 끝에 올리지 않는다.
18년의 세월이 흘렀다. 다산의 76번째 생신이자 혜원과의 회혼일 날, 성년이 된 딸 홍임이 마재 다산을 찾아간다.
홍임은 다산에게 책 한 권을 주고 바로 돌아선다. 남당사 16수 시집이다. 다산은 홍임을 붙들 기력조차 없다. 혜원도 홍임이란 것을 알고도 나가보지 않는다.
강진에서의 유배 18년, 해배 후 고향 마재에서의 18년, 그리고 회혼일 날 짚불처럼 사그라진 대학자 다산의
파란만장한 일생,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틱하다.
"진솔 그대는 나의 목젖에 걸린 가시였소"
"혜원 그대는 나의 숨이었소".
다산의 마지막 독백이다.
혜원이 대나무라면, 다산은 소나무이다. 진솔은 소나무 아래 하얗게 핀 한 송이 차꽃이었다.
혜원은 마지막까지 다산을 용서하지 않았다. 진솔은 마지막까지 다산을 원망하지 않았다.
아래의 시는 남당사 16수 중 12번째 시다.
홍귤촌 서쪽에는 월출산이 솟았는데
산머리의 바위 흡사 오는 사람 기다리듯
이 몸 만 번 죽는대도 남은 한이 있으리니
원컨대 산머리의 한 조각 돌이 될래요.
(끝)
출처: 덕재산
주: ※ 편집자
거북산우회에서 두 팀으로 나누어 승용차로 서울서 무주구천동을 거쳐, 땅끝 마을에서 배를 타고 보길도에 가서
고산 윤선도 유적지를 보고, 강진으로 가서 다산 정약용의 유배지를 보고 서울로 왔다.
우리는 무주구천동을 대충 보고 땅끝 마을로 가서 보길도에서 배를 탔는데, 다른 팀은 무주구천동에서 시간을 지체하여, 풍랑으로 보길도행 선편이 취소되어 배를 타지 못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