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농구 출범 8년 동안 150여명의 외국인 선수가 한국 코트를 밟았고 그 중 몇몇은 우승, 혹은 최우수 선수나 스타로서 제법 성공한 경력을 가질 수 있었다. 그러나 유독 백인들의 모습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혼혈을 포함해 KBL무대에 발을 디딘 백인은 모두 일곱 명. 그 중 제법 농구 좀 한다는 평가를 들었던 선수는 에릭 이버츠, 존 와센버그, 바비 레이저 정도일 것이며, 이들 중 프로농구 팬들에게 가장 기억에 남는 혹은 다시 보고 싶은 선수가 누구냐 묻는다면 대부분은 이 선수의 이름을 먼저 말할 것이다.
영화배우 톰 크루즈를 연상케 하는 깔끔한 외모에 신사다운 매너, 외국인 선수 중 역대 한 경기 최다득점(58점)을 폭발시킨 막대한 득점력을 겸비한 에릭 이버츠. 전형적인 백인 농구선수였던 이버츠는 KBL에서 뛴 얼마 되지 않는 백인들 중 가장 성공한 케이스이자, 전체 외국인 선수들을 통틀어 가장 고생을 많이 한 선수로 여겨질 것이다.
이버츠는 미 명문 빌라노바 출신으로 케리 키틀즈(현 뉴저지), 앨빈 윌리암스(현 토론토) 등과 함께 94년 NIT 토너먼트 우승을 맛본 바 있다. 한국 무대를 밟은 외국인 선수 중에서는 데이먼 플린트(前현대/신시네티)와 함께 NCAA 토너먼트에서 가장 많이 노출된 선수이기도 하다. (그러나 빌라노바는 95년 토너먼트에서 3번 시드로 올랐음에도 불구, 1라운드에서 올드 도미니온에 의해 탈락하는 불운을 안기도 했다) 당시 이버츠는 샤리프 압둘-라힘, 레이 알렌, 마커스 캠비 등과 함께 95-96시즌 지켜봐야 할 대학생 TOP100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는데, 당시 나온 스카우팅 리포트를 살펴보면, 그의 대학 시절 플레이 스타일이 그의 KBL 마지막 시즌이었던 2002-03시즌까지 거의 변함이 없었음을 알 수 있다. 「장점_스티브 라피 감독이 ‘Assassin’이라는 별명을 붙였을 정도로 슈팅능력이 뛰어나다. 릴리즈가 빠르고 정확하기에 3점 라인 밖에서는 결코 혼자 둘 수 없다. 또 슛이 여의치 않을 때는 날카로운 패스를 찔러줄 줄 아는 선수이기도 하다. 단점_스피드가 부족해 운동능력이 좋은 선수와의 1:1에서 어려움을 겪는다.」
96년 대학을 졸업한 이버츠는 97년 KBL 프로원년부터 한국에서 뛰며 팬들에게 독특한 인상을 남겼다. 2미터에 가까운 신장으로 내외곽에서 자유롭게 득점을 올리는 스타일의 플레이는 그간 한국 농구판에서는 보기 힘들었던 것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는 알렌 휴스턴(뉴욕) 타입의 선수들을 가장 좋아하며 그들을 보며 슛 연습을 해왔다고 한다. 드리블을 하며 달려오다 던지는 외곽슛의 정확도도 높고, 그 외에도 다양한 득점루트를 지녀 한번 풀리는 날에는 30~40점은 기본으로 기록했다. 그는 한국에서 뛰는 동안 무려 85차례나 30득점을 기록해 이 부문 1위에 올라 있으며, 50득점 이상 2번, 40득점도 15차례나 기록해 모두 1위에 올라 있다. 최다 득점에 관해서는 조니 맥도웰이나 데니스 에드워즈 못지 않은 대기록을 갖고 있는 것이다.
불운의 시작
이버츠는 97년 외국선수 드래프트에서 광주 나산 플라망스에 지명되었다. 그러나 애초 드래프트가 개최된 현장에서는 지명되지 못했다. 그를 지명한 나산 플라망스는 클리프 리드가 전체 1순위로 지명되었던 드래프트 이후, 한 달이나 늦게 KBL로부터 기업은행 인수 승인을 받고 부랴부랴 정비를 서둘렀기 때문이다. 좋은 배경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처음부터 관심을 받지 못했다는 의미다. 많은 언론에서 보도했던 시즌 전력분석 코너에서도 이버츠에 대한 언급은 거의 없었다는 게 이를 뒷받침해준다.
그러나 시즌 개막 후 이버츠의 이름은 어느 선수 못지 않게 자주 거론되었다. 평균 32.2득점에 11.1리바운드, 그리고 튀지 않는 성격에 꽤 괜찮은 외모를 지닌 이 선수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평균 득점은 총득점에 1점이 모자라 2위에 그쳤고, 리바운드는 3위, 블록 4위에 야투성공률은 5위였다. 나산 플라망스는 그 시즌 5위로 포스트시즌에 올라가는 기염을 토했고, 그가 일등공신이었음은 부정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버츠에 대한 평가는 오프시즌만 되면 암담해졌다. 앞서 언급했듯 3-4번으로 뛰던 선수였던 지라, 센터 역할을 보기에는 공·수 양면에서 답답한 면이 많았기 때문이다.(이 문제는 이버츠가 지명, 혹은 재계약 되지 못했을 때 꼬리표처럼 따라다녔다) 그에게 ‘비운의 용병’이라는 반갑지 않은 별명이 붙은 것도 이것이 한 몫했다.
이버츠는 플레이오프 일등공신임에도 불구하고 재계약 되지 못했고, 구단간의 담합으로 트라이아웃에서 조차 탈락했다. 97년 9월, 외국 선수 문제로 골머리를 앓았던 인천 대우가 잠시나마 이버츠를 데려오는 것을 생각했지만, 이버츠를 지명하지 않기로 한 이사회 협조사항과 “이미 계약을 맺은 선수는 부상이 아니고는 교체가 곤란하다”는 KBL의 방침에 의해 생각을 접어야 했다. (이 제도는 후에 보완이 되었다) 비운은 한번으로 그치지 않았다. 98년 트라이아웃에서는 신청은 했지만 교통사고로 참석하지 못한 것.
이러한 이버츠의 3전 4기는 마침내 99년 트라이아웃에서 결실을 맺게 된다. 나산을 전격 인수한 골드뱅크에 1순위로 지명되며 마침내 한국 땅을 다시 밟게 되었다. 당시 최대어였던 로렌조 홀이 아닌 이버츠를 지명한 것을 놓고 말은 많았지만, 이번에도 이버츠는 제 몸값을 해내며 선택에 후회는 없게 만들었다. 특히 그 시즌 중반에 SK나이츠로부터 현주엽을 받아들인 후 그의 활약에는 더욱 힘이 붙었는데, 두 선수 동급 포지션과 비교할 때 키가 작지 않은데다 밖에서 드리블을 치고 들어와 스스로 마무리하는가 하면, 찬스를 내주는데도 일가견이 있어 골드뱅크는 그 효과를 톡톡히 볼 수 있었다.(당시의 활약 덕분인지 훗날 상무에서 제대한 현주엽이 KTF에서 이버츠를 간절히 원했다는 후문도 있다) 이버츠는 99-00시즌에 서장훈을 평균 3.4점차로 따돌리며 여유 있게 득점왕을 차지했다. 그러나 그 시즌 플레이오프 진출에 실패한 골드뱅크는 이버츠를 다시 포기했다.
달리고, 또 달린다
2000년 시즌을 앞두고 이버츠는 다시 한국 땅을 밟을 수 있었다. 이번에는 창원 LG였다. 김태환 감독이 막 취임해 조성원과 조우현을 영입하고 수비 중심의 팀에서 공격 중심의 팀으로 색깔을 바꿔가던 LG와 이버츠는 궁합이 제대로 맞아들었다. 이 팀은 시즌을 치르는 내내 리바운드와 포스트 수비의 열세에 대한 지적을 받아야 했지만(2003-04시즌을 제외하면 김태환 사단이 그 지적을 받지 않았던 적이 있었나) 평균 103.3득점에 3점슛 성공률이 40.3%에 이르는 무서운 득점력과 시원한 농구를 선보인 LG는 팬들의 사랑을 받기에, 그리고 KBL챔피언결정전에 오르기에 부족함이 없는 팀이었다.
그 시즌 MVP에 오른 조성원(25.7득점)이나, 이버츠(27.8득점)나 모두 툭하면 도합 50득점 이상씩을 올려댔고, 여기에 조우현(14.4득점)까지 덩달아 터지는 날에는 이를 당해낼 팀이 없었다. 특히 2000년 12월 16일에는 제법 수비 좀 한다는 SBS를 만나 조성원-이버츠의 81점 합작을 내세워 무려 129점을 뽑아냈고, 2월 21일 SK나이츠전에서 이버츠는 왼쪽 코너에서 극적인 3점슛을 성공시키며 팀의 극적인 역전승을 이끌어내기도 했다. 당시 어린아이처럼 이버츠 품에 안긴(?) 조성원의 모습은 LG팬들이라면 잊지 못할 장면 중 하나일 것이다. PO에서 SK를 꺾고 삼성과 결승을 치르게 된 LG. 그러나 포스트 열세는 사상 첫 우승을 꿈꾼 LG의 기대를 무너뜨렸다. 3차전 호프(삼성)의 41점 24리바운드 등 예상치 못한 변수의 폭발과 내·외곽 높이에서 우위를 점한 삼성은 LG를 앞섰고, 이버츠 역시 체력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한 채 고개를 떨구었다.
코리아텐더 4강 신화
2001-02시즌 중반, 그는 코리아텐더로 이적하게 된다. 이버츠로서는 나산-골드뱅크의 계보를 대물림한 친정팀으로 돌아오게 된 셈. 사실 구단은 이버츠가 떠나기 전이나, 돌아온 후나 상황이 좋지 않았다. 딱히 스타급 선수들도 없었고, 재정난에 허덕여 2002-03시즌내내 ‘헝그리 팀’이라 -결코 선수들은 원치 않았던- 불려야 했다. 그렇지만 그 와중에서도 이버츠와 코리아텐더는 그들만의 전설을 만들어냈다. (2001-02시즌에 그는 대구 동양을 상대로 58점을 뽑아냈다. 이는 밀어주기로 인해 만들어진 기록을 제외하면 역대 최고성적이다) 2002-03시즌, 안드레 페리와 짝을 이룬 이버츠는 잘 달리고 많이 움직이며 이기적이지 않은 동료들과 함께 절묘한 호흡을 만들어냈다. 이는 “막판 체력저하가 고비”라며 끝까지 코리아텐더의 선전에 큰 점수를 주지 않았던 전문가들을 놀라게 만들었다. 특히 코리아텐더는 서울 삼성을 PO 6강 상대로 맞이해 2차전에서 70%라는 엄청난 3점슛 성공률을 기록하며 그들을 무너뜨렸다. 서울 잠실체육관에서 코리아텐더의 승리를 자축하던 코리아텐더 서포터스의 “남행열차”는 아직도 귓가에 울리는 듯 생생하다.
그들은 디펜딩 챔피언 대구 오리온스의 벽은 넘지 못했다. 체력이 고갈된 듯 이버츠는 더 이상 화력을 발휘하지 못했고, 더 빨리 그리고 더 정교하게 움직이는 김승현과 마르커스 힉스, 김병철 트리오를 막는 이중고는 그들을 더욱 지치게 만들었다.
농구 팬들을 놀라게 한 4강 신화를 뒤로 한 채 이버츠의 KBL 스토리는 조용히 끝을 맺었다. 추일승 감독 체재로 개편한 코리아텐더가 애초 이버츠와의 재계약을 긍정적으로 생각했지만, 결국에 가서는 이버츠가 재계약을 거부하였기 때문이다. 뉴저지에서 2개의 레스토랑을 개점한 것으로 알려진 이버츠는 당시 개인사업으로 바쁜데다 부인이 북핵 문제로 인한 전쟁발발 가능성에 우려를 표시한 것으로 전해진다.
외국인 선수 몸값이 20만 달러까지 올라간 지금, 이버츠가 다시 KBL 무대를 밟을 가능성은 없어 보인다. 물론, 바비 레이저 같은 다른 훌륭한 백인 선수들 -굳이 피부색을 나눈다는 게 우습지만- 은 계속 등장할 것이다. 하지만 레이저가 그랬듯, 앞으로도 백인 선수들은 이버츠와 계속해서 비교될 것이다. 맥도웰이 그랬듯, 이버츠 역시 한국 프로농구 역사상 최고의 백인 선수 중 한 명으로 기억되고 있기 때문이며, 모르긴 몰라도 농구 선수로서 NBA는 가지 못했어도 어느 리그에서든 그 하나의 기준이자 척도를 세워놓고 떠났다는 것 자체는 높이 평가해도 좋을 것이다. 어디서 무엇을 하든, 그의 3점포처럼 모든 일이 깨끗하게 성공가도를 달릴 수 있길 기원한다.
에릭 이버츠 프로필
생년월일 _ 1974년 3월 31일, 신장/체중 _ 197cm/99.8kg, 포지션 _ 포워드/센터, 대학 _ 빌라노바 대학
[월간 점프볼 2004년 8월호 개재]
손대범 객원기자
점프볼에서 펌
다시 보고싶네여 현주엽이랑 콤비플레이 잘맞았는데, 체력이 좀 약한것빼고는 그동안 용병중 톱클래스에 속하는 용병인데, 다시 ktf에서 볼수있었으면...
첫댓글 이버츠 젤 좋아하는 외국인 선수입니다. 엄청난 득점력과 더불어 바스켓 센스가 좋아 난사한다는 느낌보다는 동료를 살려준다는 특이한 선수. 보고 싶네요.
에릭 이버츠...KBL에서 번 돈으로 식당차렸다고 하지 않았나요?
체인점도 냈다는..;;(뉴저지에서 가게냈던걸로 기억합니다..)
정말 한국에 있었을때 창원살아서 LG팬이었는데, 그때 경기를 보러가면 조성원과 이버츠선수, 항상 날라다녔었죠....정말 잘했는데....
이버츠는 진짜.. 던지면 들어가는 선수..
다시 한국에서 선수생활을 햇으면 하는 개인적인 바램이네요^^
특유의 고각 삼점슛!
센스있는 선수
김주성이 있는 TG정도의 팀이 양경민을 SG로 돌리고 이버츠를 SF로 활용하는것도 좋을것같은데...
우리나라에 왔던 용병 선수중 가장 농구에 대한 기본기가 좋았던 선수.
삼성이나 티쥐같은 팀에서 용병 수비에 대한 부담없이 플레이를 한다면 정말 엄청난 득점력을 보여줄것 같습니다...
이버츠를 인사이더로 쓰긴 좀 아깝긴 하죠..
장후니형이랑 쌍포로 가동시켜 보아효~~~~
탐 크루즈 완전 오버...
탐 크루즈가 아니라... 톰 행크스 아닐까여... 클럭~~~
캬캬컄캬
에릭이버츠 최고의 용병임 저렇게 득점력이 높아도 난사한다는 생각을 전혀 안들게함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