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르트잔 대장 트리피츤 (35) 일제 시베리아 침략사4. 니항 일본거류민의 집단자결
1920년 2월 29일 니항해방
2월 29일 파르티잔 부대는 시내에 진입한다. 이 과정에서 일제의 식민지배를 받던 민족의 환영은 대단하였다고 러시아측 기록에 등장한다.
1920. 2. 29. 니항을 해방시킨 파르티잔들, 아무르강 얼음에 갇힌 배가 보인다.
조선인 사할린 부대장 박일리야가 지휘하던 200여명도 가담하였다.
1918~1920년대 초반 시베리아를 간섭한 간섭국들과 볼셰비키의 평화교섭
니항의 파르티잔 들, 아나키스트를 뜻하는 검은색 장식을 단 사람이 있다.
A.Y.구트만과 일제가 주장하기를
‘볼셰비키 파르티잔 군대는 니항을 무력 점령한 즉시 가면을 벗고,
강도단의 면목을 드러내고,
니항에서 가장 존경받던 사람들인 백파 군대의 장교, 자본가 등을 체포하여 투옥후,
고문하고 학살했다.
게다가 니항 도회지역의 중국인·조선인·하층 노동자들을 모집해 파르티잔 부대를 편성하는 것을 보고, 일본군 간부는 분개했다.
(※이 과정에서 과거 니항에서 친일단체인 ‘니항 조선인 민회’를 조직해 일제 앞잡이 노릇을 하던 자들 중에서도 니항을 해방시킨 볼셰비키에 협조한 자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이에 따라 불안한 니항 시민들은 일본군에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트리피츤 부대(過激派軍)가 3월 13일까지 일본군을 죽일 계획을 가지고 있다는 소문이 커지자 일본군은 전투에 대비했고,
11일 오후, 파르티잔 부대의 참모장 나우모프가 니항 일본군 수비대에 와서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요구하고 다음날 정오 12시를 대답 시간으로 정했다.
그 당시 니항 수비대장의 결정은
파르티잔 지도부를 먼저 제거하고 나면, 파르티잔들을 통제 할 수 있을 것이며,
파르티잔들이 통보한 12일 정오를 기다릴 필요가 없이 적이 방심한 틈을 타서 야습해 분쇄하자는 것이었다.
일본군 니항 수비대장(守備隊長)은 즉시 이시다 부영사(石田副領事)를 방문하여 다양한 종류의 회의를 마치고 오후 8시에 막사로 돌아와 명령을 내렸고,
3월 12일 오전 2시경에 파르티잔 부대를 공격해야 했습니다...... ’
니항 사건을 국가의 수치라고 선전하는 책자 '국욕기' 시베리아 침략과 1920. 4월 참변, 간도토벌의 근거로 제시한 니항사건. 1920. 3. 12. 일 반자이 기습이 실패하자 광기어린 집단자살을 한 후 '국가의 수치'라며 대대적으로 미화하였다.
1920년 5월경의 일제의 침략 상황
니항에서 가장 존경받는 사람들 수천명 체포와 400명 처형이 있었는가?
A.Y. 구트만이 주장한 일본군의 기습공격 이유
남한에서 근래 사실이라고 받아들여지고 있는 A.Y.구타만(혹은 ‘구트만’, ГУТМАН А. Я.)과 이오키 료조(五百木良三) 의 주장(미국 교수 존 J 스테판, 일본인 하라테루 유키(原暉之)가 구트만의 주장을 주로 인용)에 따르면
‘트리피츤 부대가 니항을 1920년 2월 29일 무력으로 점령하자마자, 강도단의 면모를 드러내며 니항에서 가장 존경받던 사람들 수천여명을 체포해 투옥시키고 400여명을 처형하였다.’
(※ 이것도 친일파인 A.Y.구트만 등의 주장을 축소해 짜깁기 인용한 것이다. 주장을 할 때마다 체포된 사람과 처형된 사람의 수가 다르다.
니항 감옥의 규모로 봤을 때, 1,000명을 수용하면 전원 압축되어 즉사하는 것은 맞아 보인다.
일본군이 ‘니항에서 가장 존경받는 사람들’이라고 말한 지배층을 한국 독립군은 주로 ‘악질 친일파’라고 불렀다.)
이에 분노한 일본군이 1920년 3월 12일 파르티잔을 단순 무장해제만을 시키려고 궐기하였으나 실패하였고(제1차 니항사건), 파르티잔들이 다시 3천여명 이상이 체포해 고문하였고, (제2차 니항사건인) 1920년 6월초 일본군에게 구원되기 전까지 최종적으로 1만여명 이상을 학살했다’
고 한다.
그리고, 남한에서는 이 주장을 복사해 자주 출판된다.
최근 한국에서 인정받고 있는, 아나톨리 야코블레비치 구트만의 영문 번역본
<니항의 파괴>
당시 니항은 오늘날보다 면적이 작고 주택수도 작다
일제가 대대적으로 선전한 제1차 니항 사건
(일본군 수비대의 공격 실패로, 일본 거류민 가담자에서 다수 사상자 발생하고 집단 자결함)
일본군 수비대의 파르티잔 부대 과소평가
일제가 주장하기를
“니항 일본군 수비대 측은, 적 전력은 보병·기병 합해 350명 정도의 「강도단」 등과, 2,000명의 파르티잔 부대라고 하는 실태보다 현저하게 하산하고 있었습니다.
적의 실정에 관한 정보 입수, 혹은 얻은 정보에 대한 냉정한 사실 평가가 작동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공격을 비밀리에 준비해 온 일본군은 3월 12일 오전 2시를 기하여 공격 개시로 결정하였다.
니항 사건 참가자의 회상에 따르면,
‘3월 11일 저녁 파르티잔 본부(パルチザン本部)에서는 연회가 있었고,
이시카와 소좌(石川少佐), 이시다 영사(石田領事)도 참석하고 있어,
그 기습공격의 중대한 내용이
파르티잔들에게 최후통첩(最後通牒)되었다고 보기 힘든다.
또 일등병 계급 병사(一等卒の日記)의 일기에서는 파르티잔들이 「무기탄약의 빌려달라고 요구」했다고 되어 있다.’
어쨌든 일본군은 3월 12일 오전 1시 30분경에 야습을 감행해, 파르티잔 부대 본부를 포위해 기습공격을 감행하였다.
그러나 파르티잔 측은 곧 되살아나 일본군은 수세에 몰리게 된다.
니항에 정박중이던 중국민국 포함(영대장은 陳世栄 혹은 陳季良)은 파르티잔 측을 옹호해 일본군에 맹사했다.
중화민국 해군 승무원은 니항의 중국인 거류민과 니항중국영사와 연결되어 있었으며,
파르티잔들에 가담한 것은 자발적인 행위였다,
당시 진세영(陳世栄 혹은 陳季良)이 지휘하던 강방함대가 중화민국 북양정부의 지령을 받았다는 어떤 증거도 없다.
일본인 거류 민간인들중 야습에 동참했던 사람들은 대부분 전사했다.
일부는 포로가 되었다.
니항 사건 전람회, 황족 수상 정치인 장성 조선인 등이 동원되었다.
니항에서 구세주였다는 일본군
일본 거류민의 집단 자결 감행
니항거주 일본인 민간인의 전멸은 기습공격 과정에서 일본군의 기습에 동참했다가 패배하자 집단 자결을 감행한 것이다.
※니항사건 최종 일본인 생존자는 수십여명에 불과하며, 러시아 내전을 뒤집으려고 ‘인류역사에 없던 파르티잔의 대규모 학살극과 만행에 집단자결’이라고 대대적으로 선전되는 바람에 일본으로 생환한 일본인 여성들은 일본에서도 냉대 받았다.
시베리아 침략에 동원되었던 일본인 위안부들 역시 당시 일본에서 인정받지 못하는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니항 유곽의 일본인 여성에 대한 기록조차 불분명한데 조선출생에 대해서는 박일리야 부대의 진술외에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그러나 최근 남한에서는 ‘박유하, 이영훈, 김용삼’ 교수 등에 의해서 조선인 위안부는 ‘자발적으로 돈벌로 간 것에 불과하다’는 의견이 분명 있다.
오늘날 일본에서도
파르티잔의 항복권유에도 불구하고, 니항거주 일본 민간인 다수는 집단 자결을 선택했다고 한다.
3월 12일 전투에 있어서의 일본군 병력은 비전투원·해군 무선 전신대(海軍無線電信隊)를 포함해 363명 이상이었고, 그 외에 재류민 자위단·재향 군인(在留民自衛団・在郷軍人)이 있었다.
3월 13일 남은 병력은 100여명 정도였으며(그 중 일본인 거류민은 13명 정도였다), 그 외에 육군병원 분원(陸軍病院分院)에 환자 포함 26여명이 있었다.
일본군을 포함하는 니항 사건 일본인 최종 사망 추정자 수는 대략 680여명에서~850여명이다. 일본인 최종 생존자는 수십여명이며,
백파계 러시아인은 최소 5백여명에서 수천여명이 일본군에 투항하였다.
일본군 참모본부가 편찬한 시베리아출병사(参謀本部編纂 『西伯利出兵史』)와 菅原佐賀衛 『西伯利出兵史要』 등에 나타난 일본군의 항복 날짜 등은 러시아측 기록과는 맞지 않는다.
아마 일본군 참모본부 등의 기록이 잘못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일본군 참모본부가 주장하는 날짜로는)
3월 17일 오후 5시에 하바로프스크에 주둔한 여단장과 영사(在ハバロフスク旅団長と領事)의 전투 중지 권고가 있었다.
3월 18일 아침, 일본군은 항복하였고, 잔존하는 병사와 거류민은 포로로 수감되었다.
(※번역자의 의견 : 일제 참모본부 시베리아출병사에 나오는 날짜들은 오늘날 일본 역사학자들 사이에서도 틀린 것으로 확인되어 근래 다수 수정되고 있다.)
일본내 황족, 수상, 정치인, 장성, 조선 경성의 친일 조선인들까지 대규모 동원되어
「니항의 참극, 니항의 대학살」의 비보로 일본과 조선에 선전되자,
일본과 조선의 친일파들 중에는 ‘국가의 수치’라며 소란이 일었다.
그러나 파르티잔 지휘부를 몰살시키고 러시아 내전을 일본에게 유리하게 뒤집으려던 니항 주둔 일본군의 배신적인 기습공격과 무대포 행동,
그리고 항복거부와 집단자살에 따른 전멸이었다고는 알려지지 않았다.
일본인과 친일 조선인들 중에는 ‘인류 역사에 없었던 파르티잔(과격파)의 폭학과 학살극’에 분노하는 자가 많았다고 한다.
일본의 대대적인 선전
첫댓글 마치 니항사건의 원인 제공을 파르티잔에 있다고 왜곡하고 있군요 결과적으로 기습의 패배는 일본 거류민의 집단자결로 이어졌군요
예. 그렇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