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3년 1차 오일쇼크가 발생하자 60년대 호황기로 인한 후유증으로 인플레이션과 불황의 조짐을 보이고 잇던 선진 각국의 산업계는 일거에 공황상태에 빠져듭니다. 포드 대통령 당시 미국의 재 할인율이 18%에 이를 정도로 심각한 인플레이션(스태그 플레이션으로 알려진..)이 선진각국의 경제를 죄어 왔고 고도성장은 막을 내리면서 저 성장 시대가 열리게 됩니다. 이 동안 선진각국은 고 에너지 사용산업에 대한 후진국 이전을 적극 추진합니다. 그 대상은 멕시코 브라질을 비롯한 남미 각국과 한국이었습니다. 박정희의 중화학 공업 육성이란 결국 국제 자본의 손아귀에서 놀아난 손오공 장난이었을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때 탄생한 한국의 재벌들에게 산업은행 특례보증으로 맛본 선진각국의 저렴한 금리의 자본 즉, 외채는 엄청난 유혹이었습니다. 당시, 한국의 금리 수준은 15~20% 사이, 1986년부터 시작된 3저 호황 때도 14~15%의 금리가 유지되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 시대의 금리를 저금리라고 불렀습니다. 그 정도로 한국의 금리수준은 높았습니다.
3저 호황으로 한국경제의 위기는 극복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박정희의 유산은 끈질기게 한국경제의 발목을 붙잡았습니다. 1990년 3저 호황이 끝나고 다시금 불황이 찾아 들었습니다. 산업생산은 곤두박질 치고 무역수지는 다시 적자로 반전되었습니다. 이때 전 세계적인 조선산업 불황이 찾아들면서 한국의 조선업계는 엄청난 위기에 빠져듭니다. 당시 한국 중공업의 조선 사업부 일부를 인수하여 출범시킨 대우조선은 박정희 때부터 가지고 있던 엄청난 부채로 인해 금융비용 조달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조선산업 불황으로 인해 대우조선은 파산 직전의 상황으로 몰립니다. 이른바 대우그룹의 1차 위기로 알려진 대우조선 사태였습니다. 김 우중 회장 개인의 필사적인 사투로 새로운 투자자를 물색하는데 성공하면서 대우조선은 파산을 모면하지만, 박정희 시대 경제 파라다임의 망령 ? 모딜리아니식 차입경영의 망령은 그럼에도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1990년대 초, 한국의 기성 산업계는 전반적인 이윤 하락으로 서서히 고통받기 시작합니다. 경제공황에서 벗어난 남미국가들과 동남아 그리고 중국산 제품에 한국제품의 가격 경쟁력은 떨어지기 시작했고 막대한 금융비용 조달을 위해 세계 최장의 노동시간을 통해 생산한 제품들은 국제시장에서 외면 받아 엄청난 재고 혹은 쓰레기 양산밖에 할 수 없었습니다.
한국상품이 경쟁력을 갖추려면 관리직을 포함한 모든 노동자들의 임금을 중국사람 수준으로 낮추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럴 수 없다면 대량생산으로 이를 만회할 수 있다고 한국의 산업계는 생각했습니다.
1994년부터 시작된 이른바 반도체 호황으로 한국의 많은 기업은 이 시기부터 대대적인 시설확장에 나서기 시작합니다. 게다가 주택 2백만호 건설사업을 통해 한국의 건설업계는 필요이상으로 많은 투자가 이루어집니다. 거기에다 한국의 자동차 업계는 이른바 2백만대 생산 필생론이 퍼지면서 자동차 3사가 대대적인 라인 증설에 뛰어듭니다. 이 자본들의 공급처는? 말할 것도 없이 은행권이었습니다.
기업-정치인-금융계의 3각 커넥션을 형성할 수 있던 소수 대기업을 중심으로 엄청난 자본이 국내은행, 해외은행을 통해 조달되었습니다. 차입경영이라도 문제없다는 모딜리아니 이론은 1990년대에도 한국에서는 여전히 살아 있었습니다. 선진각국은 1970년대 스태그 플레이션을 거치면서 차입경영의 문제점을 간파, 부채비율을 줄이는데 힘을 쏟았는데 반해 한국은 정 반대의 경향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1996년 반도체 호황이 막을 매리고 다시금 불황이 찾아옵니다. 그리고 주택 2백만호 건설에서 막대한 철강 수요가 일어남을 보고 엄청난 자본을 끌어들여 지었던 한보철강이 파산하면서 한국의 금융공황이 시작됩니다. 그리고 삼미-진로-기아-뉴코아-거평-쌍방울-한라 그룹등 재계의 걸출한 대 재벌들이 줄줄이 도산하면서 1997년에만 총 60조원의 부실채권이 양산되며 이른바 외환위기로 일컬어지는 대 금융공황이 시작됩니다.
박정희 시대 차입경영의 파라다임이 일거에 한국경제를 쑥대밭으로 만들었던 바로 그 사건입니다. 수많은 기업들이 경부고속도로의 성공신앙, 다시 말해 내가 하는 사업은 절대 실패하지 않을 것이라는 무모한 생각에 한국의 경영인들은 무모한 투자를 일삼았습니다. 문제는 그렇게 투자한 사업이 투자액의 이자 조차도 지급할 수 없을 정도로 낮은 수익률을 지속했고 다시 이러한 금융비용의 조달을 위해 또 은행으로부터 “운전자금”을 차입받는 악순환이 계속되었습니다. 그 결과는 IMF로 상징되는 대 금융공황이었습니다.
4.한국경제의 나아갈 길 - 박정희 패러다임의 극복
1998년 초, 대우그룹의 김 우중 회장은 현 상태에서 위기극복의 길은 오직 수출이다 라고 했습니다. 현재 상황은 외환위기이므로 달러를 많이 벌어오면 IMF 상황을 극복할 수 있다라고 믿은 까닭이었습니다. 그리고 많은, 정말 많은 사람들이 그의 말에 공감했습니다. 그리고 국제 투기자본의 농간을 미워했습니다. 그들이 한국에서 달러를 쓸어가는 바람에 위기가 왔다고 생각했습니다. 박정희 때부터 이룩해온 한국경제 파라다임에 대한 신앙 때문이었습니다.
김회장은 수출을 늘리기 위해 엄청난 연불수출 및, 외상거래를 통해 밀어내기식 수출을 지속했습니다. 그래봤자 몇 달후에는 수출대금을 달러로 받아 오면 되니까요..그런데 김 회장은 한국의 상황을 간과했습니다.
수출대금을 3개월 6개월 후에 받을 것이라면 제품생산을 위해 국내에서 동원되는 자금은 1개월 3개월의 단기자금외에는 방법이 없었습니다. 대 금융공황으로 그 어느 누구도 장기로 자금을 빌려주려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매출채권과 매입채권간의 이러한 프로세스 차이를 메우기 위해 대우그룹은 고금리 자금이라도 운전자금 마련을 위해 빌려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 이자가 다시 불어나며 단기 운전자금의 비중은 더욱 커졌습니다. 결국 이 때문에 대우 그룹은 1998년 12월 치명적인 위기상황을 맞이하고 결국 1997년 7월 끝내 좌초했습니다.
박정희식 수출 드라이브 정책의 최후 희생자가 박정희가 그토록 총애하던 김우중 회장이 되었다는 것도 역사의 아이러니지요…김우중 회장이 간과한 것은 한국의 경제위기가 외환위기가 아닌 금융공황이라는 것을 몰랐던 때문입니다. (오죽했으면 대우그룹 계열사의 부실을 빅딜 상대업체의 실사결과를 통해 알게 되었다고 실토할 정도일까요…)
금융공황 상황이므로 금융시스템의 신용은 붕괴하여 자금의 이동은 원활하지 않으며 금리는 치솟게 마련입니다. 김 회장은 이것을 간과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외환위기임을 끈질기게 믿습니다. 박정희 경제에 대한 신앙 때문이지요. 금융공황이라 함은 박정희가 이룩한 경제가 총체적 붕괴상황에 이르렀으며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경제를 재구성 해야 한다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일부 사람들은 여전히 박정희 신앙을 고수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경제의 새로운 성장 동력을 찾아야 한다고 말하기도 하고, 사이비 시장경제론을 들고 나와 기업은 자체적인 적응과정을 거쳐 모든 상황에 최적하게 기업활동을 유지하게 된다고 하면서 이것을 방해하는 것은 정부의 개입이라는 소설을 쓰기도 합니다.
이들이 공통적으로 주장하는 이데올로기의 밑바닥에는 사회는 급격히 변화하지 않는다는 그들의 철학이 깔려 있습니다. 그것은 다시 말해 박정희 패러다임이 폐기될 정도의 사회변화가 일어나지 않았다는 신앙이 바탕을 이루고 있습니다.
정말 그럴까요? 새로운 성장동력을 운운하는 사람들에게, 금융권으로부터 신사업을 위해 대출을 받으라고 해봅시다. 그러나 정부가 산업은행등을 통한 지급보증은 서지 않겠다고 해 봅시다.
아마 그러면 여전히 성장동력을 이야기할 것입니다. 이들은 실은 정부의 개입을 최소화하라고 하면서 가장 큰 개입 중의 하나인 민간사업에 대한 정부의 보증을 은연중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 박정희 때 그랬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 기업 혹은 민간의 자체적인 적응과정이라는 자연과학적 현상을 통해 이른바 하이에크류의 정부개입 불필요 논리를 주장하는 사람들에게는 두 가지를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외부환경에 적응과정을 통해 최적하게 적응하기 위해서는 최적한 적응과정 자체의 존재가 필수불가결인데 이러한 적응과정은 최적한 외부환경 적응만큼이나 어려운 문제라는 점입니다. 다시말해, 외부환경에 자체적으로 최적하게 된다는 것 자체가 실은 성립 불가능의 명제입니다.
만일 그렇다면 왜 수많은 기업들이 도산하고 심지어 대우그룹 같이 재계 2위의 대 그룹마저도 끝내 도산하고 말았을까요? 실은 정부가 그 엄청난 충격을 겁내 대우그룹의 도산을 막기 위해 그토록 노력했음에도 말이지요
그리고 또 하나는 실제로 자연계에서 그나마 최적한 적응과정이 나타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충분 조건으로 많은 개체들에 의한 경쟁이 존재해야 합니다. 다시말해 소수의 몇몇 개체의 경쟁에 의해 적응과정이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매우 많은 수의 개체들의 경쟁이 보장되지 않으면 최적한 적응은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이에크 마저도 “경쟁”에 의한 적응을 이야기 했지, 한국처럼 기업 자체의 적응과정을 이야기하지는 않았습니다.
마지막으로 사회가 변할 때는 천천히 누구나 적응할 수 있게 변화하는 것이 아니라 너무나 하찮고 관심가질 필요도 없는 작은 움직임에 의해서도 사회는 엄청난 급변의 소용돌이로 빠져들 수 있으며 오히려 이것이 사회변화의 일반적 경향입니다.
이것은 진화론에 의해서도 쉽게 설명이 되는데, 수 많은 학자들이 이른바 진화의 중간고리를 찾기 위해 노력했지만, 진화의 중간고리를 찾아내는데는 매우 극소수의 종들에 대해서만 성공할 수 있었습니다. 진화의 과정은 천천히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급속도로 진행되어 거의 화석을 남길 새도 없이 전혀 다른 종으로까지 급격히 진행되기 때문입니다.
이는 돌연변이에 의한 자연선택을 컴퓨터로 시뮬레이션 해보면 매우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그 이유는 자연계, 경제계, 혹은 사람이 살고 있는 하나의 사회라는 비 선형 시스템에서는 매우 작아서 통계로도 잡을 수 없는 작은 잡음의 영향만으로도 시스템의 출력은 크게 변화하며 전혀 엉뚱하고도 새로운 방향으로 시스템 출력이 나타납니다. (보통 단위에 대하여 10의 마이너스 4승 정도..이 정도면 통계에는 잡히지 않음)
그 실제적인 경우도 1997년 9월 한국에서 일어났습니다. 1997년 9월 21일 한국의 외환시장에서는 평소보다 단 2억달러의 추가적인 달러 매입 요구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순간 원화는 가격 제한 폭인 8원이나 떨어지며 이른바 외환위기로 알려진 원화 대폭락의 시발점이 되었지요. 단 2억달러가 한국의 외환 보유고를 거덜내 버린 셈입니다.
지금 2000년을 앞둔 한국사회는 이러한 Chaos 환경속에 존재하고 있습니다. 아주 작지만 약간의 변화로도 경제 시스템 전체가 흔들릴 수 있으며 초 고속으로 전 세계 경제의 모든 정보들이 홍수를 이루며 세계 이곳 저곳에서 금융시장에 실 시간적인 반응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어제의 최적 상황이 오늘의 불 최적이 될 수 있으며 그 반대의 경우도 가능합니다.
세계적인 대출 붐과 선진각국의 산업구조조정의 틈 바구니에서 형성되었던 30년전 박정희 시대 경제 패러다임이 과연 2000년대에도 통할 수 있을까요? 절대 불가능입니다.
마지막으로 1997년 11월, 한국이 외환위기로 알려진 금융공황의 소용돌이 속에 빠져 있을 때 국제 경제학계에서는 두 편의 주목할 만한 논문이 발표되었습니다.
논문의 내용은 모딜리아니의 차입경영이론이 실제에 접근하는 경제상황에서는 전혀 들어 맞지 않는 다는 것이며, 따라서 기업 경영은 예상치 못하는 외부환경 변화에 대응할 수 있는 강인성을 키워야 한다는 것을 실증적으로 이론적으로 논증한 것이었습니다. 바로 그 때 한국은 차입경영에 의한 금융 시스템의 붕괴를 목도하고 있었습니다.
첫댓글70년대 오일쇼크가 있을 때 박정희정권은 국민을 위협했지요..하지만 현 정부들어 원유값이 배 이상 뛰었지만, 고속도로가 막힐 정도로 정상적인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외환위기의 뿌리 역시 유신군사독재에 뿌리를 두고 있는데 수구언론은 왜곡을 일삼고 있지요..언론이 개혁되지 않고는 참다운 개혁은 요원하다는 생각입니다...ㅠ
첫댓글 70년대 오일쇼크가 있을 때 박정희정권은 국민을 위협했지요..하지만 현 정부들어 원유값이 배 이상 뛰었지만, 고속도로가 막힐 정도로 정상적인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외환위기의 뿌리 역시 유신군사독재에 뿌리를 두고 있는데 수구언론은 왜곡을 일삼고 있지요..언론이 개혁되지 않고는 참다운 개혁은 요원하다는 생각입니다...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