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重光―그 인간과 예술
루이스 랭카스터(미 버클리대학 동양학 교수)
이 글은 1979년 12월 미국 캘리포니아 랭카스터 밀러출판사에서 펴낸 나의 「THE MAD MONK :미친 중」에 수록된 랭카스터 교수의〈중광 그 인간과 예술〉의 전역이다.
열쇠를 가진 사람, 중광과의 만남 ― 중광은 한국의 저명한 화승(畵僧)이다. 불교 승려인 그는 불교계의 점잖은 사람들의 눈에 거슬리는 비정상적인 행동으로 물의를 일으키는 사람이다.
미술가로서의 그를 강력하게 지지하는 사람들과 그를 신랄하게 비난하는 사람들로부터 동시에 주목을 받고 있다. 그렇지만 그의 그림에 대한 이 같은 그들의 견해에 관계없이 불교 미술의 감식가로서의 그의 능력을 의심할 여지는 없다. 그는 또한 민속박물관의 이사직과 위원회에도 관여하고 있으며, 한국 최대 불교 종단인 조계종의 예술 지도직을 맡기도 했다.
내가 처음 중광을 알게 된 것은 그가 통도사 박물관장의 직책으로 ‘열쇠를 가진 사람’으로서였다. 나는 1976년에 한국의 불교 사찰에서의 생활을 사진으로 수록하고 관찰하기 위해 부산 북쪽의 계곡에 위치하고 있는 통도사를 찾았다. 웅장하게 치솟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는 늦여름의 익어가는 벼가 물결치는 푸른 들판 재래종 소나무 숲속에 요람처럼 자리 잡고 있는 이 절은 정말 한국 불교의 삼보(三寶) 중의 하나처럼 보였다.
미술에 주의를 기울이는 한국의 사찰은 거의 없지만 통도사는 그 규모가 작음에도 불구하고 박물관을 설립해서 국립박물관에도 진열되지 않은 그런 그림들과 옛스런 물건들을 수집, 진열하고 있었다.
진열품들이 너무 인상적이어서 나는 캘리포니아 대학교의 고문서 도서관에 보존해 둘 양으로 사진을 찍기로 결심했다. 난처하게도 진열품들은 유리상자 안에 넣어져 열쇠로 잠겨 있었다. 가장 훌륭한 사진 기계를 가지고도 유리의 광택과 먼지 때문에 사진을 제대로 촬영할 수 없었다.
승려들에게 진열장을 열어 달라고 부탁하자 그들은 안됐다는 듯이 머리를 내저으면서 중광스님만이 그 열쇠를 가지고 있다고 했다. 여행을 즐겨 하는 그는 기약 없이 어딘가로 가고 없었다.
나는 실망하기는 했지만 이러한 일에 놀라지는 않았다. 아시아에는 방과 건물이 잠겨 있는 경우가 많은데 그 열쇠는 언제나 부재중인 사람이 가지고 있을 때가 많았다.
몇해 전에 나는 네팔에서 로울링 계곡 깊숙한 산중에 있는 사찰을 2주간이나 걸려 찾아 갔다. 이곳은 티벳과의 국경지대로 세르파들이 사는 곳이었다.
힘겹게 올라가 마을에 도착해 보니 내가 보려고 찾아 온 불교 경전의 필사본들과 목판본들을 볼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유인즉, 열쇠를 가진 사람이 기약 없이 여행을 떠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때 나는 모험을 하기로 결심했다. 천막을 치고 기다리기로 했다. 9일만에 그 방랑 승려가 돌아왔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번에는 한국에서 체류할 시간이 한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더 이상 기다릴 수가 없었다.
우리는 우선 유리상자에 들어있지 않은 몇몇 진열품들을 촬영하고 다음 해에 다시 와서 천막을 치는 한이 있더라도 이 사업을 완성하기로 결심하고 떠났다.
불교 전통이 남아 있는 몇몇 사찰을 보고 싶다는 소망 때문에 나는 수차에 걸쳐 한국을 방문하게 되었다. 나는 그 당시에 이 전통이 사라져 가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도서관에서 입수할 수 있는 자료들을 조사해 본 결과 한국 방문은 과거 잔재만을 들쳐 낼 뿐일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러나 나의 한국 여행은 한국 불교에 대해서 지레짐작한 결론을 불식해 버렸다.
필자는 동아시아 불교의 옛날 영화를 구현하는 생기 있고 성장하는 움직임을 보았다. 수천 명의 비구와 비구니 승려들이 아직도 옛날 격식에 따라 오랜 기간 동안 참선(參禪)을 하고 독신과 가난과 금주(禁酒)의 계(戒)를 지키며 살고 있었다.
나는 그들 자신의 내면적인 세계로 은퇴해 버린 것 같이 보이는 이들 사찰에 안주하는 승려들의 평정의 감정을 받았다. 그들과의 지속적인 접촉을 통해서 나의 관심과 존경은 더욱 커졌다.
나는 한국의 첫 방문을 마치고 돌아가며 비난도 많이 받고, 또 불안한 이 나라의 불교 역사와 문헌을 보다 알리는 일에 최선을 다하기로 결심했다. 몇해 동안 나는 계속 한국을 방문했고, 또 팔만대장경의 목록을 출판하리라는 목표를 지켜 왔다.
1976년 한국을 방문한 뒤에 나는 캘리포니아 대학교의 탐사 계획에 의해 재정적인 원조를 얻어 사찰 유적지의 사진을 찍고 연구하기 위하여 다시 한국에 올 수 있었다.
나의 계획 가운데에는 통도사 박물관의 ‘열쇠를 가진 사람’을 찾는 일도 끼어 있었다. 이리하여 1977년 가을에 사찰 어귀의 작은 여관에 머물면서 ‘열쇠를 가진 사람’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승려들이 절을 비우는데 한정된 기간 즉 9일 뒤에 그가 돌아왔다는 전갈을 받을 수 있었다. 걸음을 재촉하여 절에 올라가 보니 모든 승려들이 한데 모여 부산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내가 도착하자 그들은 흩어졌다. 그때 나는 처음으로 중광의 방을 들여다보았다. 문을 통해서 본 그의 방은 틀에 끼워 놓은 혼돈 바로 그것이었다. 고서와 필사본들이 벽에 기대 쌓여 있었고, 책 위에 올려놓은 육중하고 맵시 없는 물건들이 무게를 못이여 튕겨 나온 책들도 있었다.
산더미 같이 쌓인 그림들, 두루마리 그림들, 화선지 더미, 틀에 낀 그림들, 상상할 수 없는 온갖 종류의 미술적인 잡동사니 미술품들로 방은 마치 밀폐되었던 보물창고가 노략질 당한 것 같았다.
어둠침침한 큰 방속에 상당히 큰 상이 하나 놓여 있었고, 그 위에 상을 찌그러뜨릴 정도로 종이가 쌓여 있었다. 이러한 혼돈과는 동떨어져서 한구석의 방석 위에 앉아 있는 사람이 바로 내가 오래 전부터 찾던 열쇠를 가진 사람이었다.
그가 거처하는 방은 보통은 청결하고 가재도구가 거의 없는 다른 승려의 방과 대단히 상이했기 때문에 놀랐는데 중광의 옷차림이 또한 나를 놀라게 했다. 그의 구겨진 승복은 페인트로 얼룩져 있었다. 그는 미소를 지으며 나에게 자리를 권하고 차를 시켰다.
한국에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차를 규칙적으로 마시지 않기 때문에 그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그 대신 그들은 숭늉을 마시거나 보리차를 마신다. 차를 다리는 일은 하나의 예술로 불교 승려들의 전통적, 습관적으로 오랜 세월 동안에 걸쳐 보존해 온 정서생활의 하나이다.
중광은 찻잔을 꺼내고 물을 끓이기 위해서 어디에 가나 있는 전기 커피 포트를 꺼냈다. 그는 방바닥에 쌓여 있고 매달려 있고 널려 있는 여러 가지 잡동사니들을 보여 주기 시작했다.
작품을 하나 하나 보는 가운데 나의 흥분도 그 도를 더해 갔다. 이 방에 묻혀 있던 보물들 ―옛날 민화들, 십이지상 그림들, 목판 탁본들, 책들과 필사본들 ―을 보고 나의 마음은 어질어질했다. 흥분한 나는 넘어져서 전기 커피포트를 걷어찼다. 순간 옛날의 아름다운 미술품으로 가득찬 방이 수라장이 됐다.
커피포트가 넘어져서 끓는 물이 나의 발에 쏟아져서 방안에 쌓여 있는 종이로 번질 지경이었다. 걸레를 던져 물을 번지지 못하게 하는 한편 나는 체면을 지키려는 노력에도 아랑곳없이 아픔을 참지 못해 방안을 깡충깡충 뛰었다. 이렇게 해서 우리의 우정은 시작되었다.
그림들 가운데 나는 스켓치가 뛰어나고 수법은 원시적이지만 대담하고 힘찬 그림을 한 장 발견했다. 나는 이 그림을 중광에게 내보이며 필치의 효과를 칭찬했다. 그는 이상하다는 눈초리로 나를 보며 물었다.
“왜 이 그림을 좋아하죠?”
“선화(禪畵)란 반드시 이래야 되는데 이런 경지는 대단히 드물죠.”
내가 대답했다. 선화를 많이 보기는 했지만 붓과 먹을 사용하는 미술가들이 단숨에 그린 스켓치가 너무나 딱딱하고 자아의식적이고 직관적인 표현일 때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이 묵화는 그처럼 솔직하고 자아의식이 떨어진 무심필이었기 때문에 나는 순간적으로 이 그림에 감응했다.
잠깐 쉬었다가 그는 웃으며 말했다.
“이게 바로 내 그림이야!”
그 순간부터 우리의 관계는 변했다. 나는 시험에 합격했으며, 그는 그의 작품과 문제들을 나와 같이 의논함에 따라 우리 둘 사이에는 장벽이 무너졌다.
그는 다른 승려들이 그의 작품이 신성한 불교 회화의 정전(正典)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거부하기 때문에 실망하고 있다고 말했다.
소수의 동료 승려들과 박물관 관계자들, 그리고 미술품 수집가들이 그의 작품 활동을 지원하고는 있으나 중광은 팔려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고 그의 작품 세계만을 추구하고 있었다.
그는 그의 친구 몇 사람에게 그림을 주었을 뿐 대부분의 작품은 사찰이나 암자의 다락과 서랍에 버려져 있었다. 대단히 익살스러우면서도 의식적으로 그렇게 하려는 의도가 전혀 없는 그의 동물 그림 한 장을 보고 나는,
“당신은 동양의 피카소요.”
라고 말했다. 이 말에 중광이 쏘아 붙였다.
“내가 낫지. 그의 그림은 생각과 기교로 차 있지만 내 그림엔 그런 것이 전혀 없는 무심선필(無心禪筆)이지.”
우리는 통도사 그의 방안에 흩어져 있는 그림을 몇 시간이고 앉아서 보았다. 그 곳에서 우리는 그의 화집을 출판할 계획을 세웠다.
전국 여러 곳에 흩어져 있는 그의 걸작품들을 한데 모아서 서울의 사진작가에게 보내기로 했다. 이 일을 위한 여행을 시작하기 위하여 우리는 일주일 뒤에 내가 묶고 있는 호텔의 로비에서 다시 만나기로 약속했다.
결과적으로 대단히 번거로운 여행이었다. 버스, 기차, 비행기, 택시와 긴 등산 여행으로 여러 곳을 찾아다녔다. 2주일 이상이나 우리는 전국을 누비며 다녔다. 이 여행 기간 동안에 우리는 서로를 더 잘 알게 되었다.
내가 중광을 처음 보았을 때 나는 그가 보통 승려들 보다 다른 진정한 예술가라는 사실을 육감적으로 알았을 뿐만 아니라 또한 그가 정도를 벗어난 방식으로 행동하는 사람임을 알았다.
어느 날 그가 위스키를 병째 들이키고 있을 때 나는 그의 태도에 대하여 농담을 했다. 그는 ‘무애행위(無碍行爲)’를 실천하고 있기 때문에 승려생활을 지배하는 엄격한 규칙에 얽매이지 않는다고 대답했다.
한국 불교사에는 득도한 뒤에 제약적인 사회의 규범에서 벗어나 자기 마음속의 질서에 따라 살았던 비구와 비구니 승려들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이들 승려들은 때로는 부도덕하다는 딱지가 붙을 정도로 자유분방한 행위는 물론 기이한 행위를 할 때가 많다.
이러한 승려들에 관한 책을 읽은 일이 있지만(예를 들면 원효대사도 이런 범주에 속한다) 그러한 생활 방식을 오늘날까지도 실천하고 있는 사람을 만나기는 중광이 처음이었다.
나는 무절제하고 방종한 그의 행동에 대해서 열심히 질문도 하고, 또 옳지 않다고 대들기도 했다. 나는 그의 이야기를 그가 말한대로 노트에 기록을 했다.
― 내가 처음 절에 있을 때는 참선을 제일 열심히 했다. 참선을 어찌나 열심히 했던지 오랫동안 끓어 앉아서 발에 못이 배겼다. 언젠가는 2, 3년 동안 옷을 갈아입지 않고 지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맑고 청명한 날에도 한결같이 나는 그 같은 옷을 입고 외출했다. 그때에는 비가 내 목욕을 시켜 준 셈이다. 마침내 참선하는 것과 참선을 하지 않는 것 사이의 상이점이 없어져 버린 날이 왔다. 하나의 행위, 한 마디의 말이 모두 참선이었다. 그때부터 나는 ‘무애행위’를 실천했다. 잠을 잘 때도 있지만 잠을 자지 않을 때도 있었다. 배가 고프면 밥을 먹지만 며칠 동안 밥을 먹지 않을 때도 있었다.
어떤 때는 물만 마시지만 또 어떤 때는 막걸리나 위스키만을 마신다. 나와 교제한 많은 여자 가운데 한 여자는 꼽추였는데 나 밖에는 그 여자를 원하는 사람이 없었다. 허나 나에게는 그 여자가 대단히 아름다운 여자로 보였다. 내가 그 여인을 사랑했기 때문에 그녀는 더욱 행복한 여인이 되었다. 나는 내 행위로 인하여 아무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는다.
나는 불교계의 걸레다. 걸레는 모든 것을 깨끗하게 만들지만 그 자체는 더욱 더러워진다. 나는 이렇게 살 도리밖에 없다. 세상에는 분별이 없고, 옳고 그른 것도 마음의 투시에 불과하다는 불교의 교리를 생활로 실천한다. ‘무애행위’를 생활화 함으로써 나는 불교의 가르침을 간직한다. 사람들에게 그들의 습관과 모범을 일깨워 주는 나와 같은 사람이 몇 명은 언제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주의 깊게 듣고 있던 젊은 승려가 물었다.
“나도 스님처럼 행동해도 되겠습니까?”
“안돼지, 안돼. 그런 일을 물어 볼 필요가 있다면 참선을 더 해야 하고 또 예외 없이 모든 규칙을 지켜야 돼! 겨울눈이 더운 여름 저녁과 같고, 비가 햇볕과 같게 느껴질 때에만 그런 행동을 생각할 수 있는 거야. 이러한 방식으로 행동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사람에게는 이것이 체력을 고갈시켜서 몇 주일 내에 시들어져 병에 걸리고 말거야. 나는 몇 해 동안 무애행위를 실천하고 있는데 언제나 마음이 차분하거든. 만약에 내가 허세를 부렸다면 내가 벌써 오래 전에 죽었을 거야.”
중광의 말이 불교의 경전과 무애행위를 실천했던 많은 한국 사람들의 말을 반영하고는 있지만 그래도 나는 그의 설명을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다. 나의 이지적 관찰은 나로 하여금 이처럼 비정통적인 생활 방식을 가진 승려와 여행을 하기에는 나의 훈련이 부족함을 느끼게 했다. 그러나 나는 그러한 경험이 얼마나 압도적인 것인가를 발견하게 되었다.
우리가 처음 찾아간 곳은 한국 내륙의 가야산에 있는 해인사였다. 그곳에서 우리는 승려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또한 그 절에 소장되어 있는 미술품들을 조사하면서 2, 3일간 머무를 계획이었다.
그날 밤은 유난히도 하늘이 맑고 바로 쳐다볼 수 없을 정도로 달이 너무나 밝은 오싹한 가을밤이었다. 승려들이 잠자리에 드는 밤 9시에 나도 내 방에 들어갔다. 중광은 마루에 앉아 있었다. 조금 뒤에 내가 잠이 들려고 할 때 그는 노래를 불렀다.
이불 속에서 기어 나와 창문을 열었다. 그는 달빛 속에서 홀로 밤과 하늘에 장단을 맞추어 춤을 추고 있었다.
동이 트기 전에 어둠속에서 중광은 나를 흔들어 깨웠다.
“비구니를 보러 갑시다.”
라고. 정신을 차리고 손목시계를 들여다보니 새벽 3시가 좀 지났다.
“중광! 너무 일러요. 비구니들이 아직 일어나지도 않았을 텐데.”
라고 내가 말했다.
“아니 다들 일어났을 거야. 우리도 조반을 먹어야지.”
나는 구겨진 옷을 주워 입고 어둠속을 헤치고 걸어갔다. 길은 좁고 산등성이를 굽이굽이 감아 돌았다.
우리의 희미한 전등불이 길만 겨우 밝혀줄 뿐 작은 개울은 밝히지도 못했다. 중광은 서슴치 않고 건너가는 작은 개울들을 나는 아무리 조심해도 빠지곤 했다.
우리가 비구니들의 처소에 당도해 보니 사방이 고요하여 모두들 아직도 자고 있는 것 같았다. 중광은 잠들어 있는 것도 아랑곳없이 문을 두드리며 소리쳤다.
“여보쇼! 어디들 있어요? 손님이 왔는데 아직도 참선하는 중인가?”
중광의 목소리가 찢어버린 고요 뒤에 옷을 입는 소리와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나더니 마침내 불빛이 대문에 와 닿았다. 비구니 한 명이 조용히 문을 열고 들어오라고 말했다.
중광이 시장하다고 말하자 우리를 작은 방으로 안내했다. 비구니들이 우리를 즐겁게 맞아주자 이런 시간에 찾아온 것이 미안하기 짝이 없었다.
얼마를 기다리자 음식이 들어왔다. 과일, 따뜻한 우유, 그리고 마침내 밥과 미역국과 도토리묵과 나물과 김치가 들어왔다.
해가 떠오르자 우리는 방문을 열고 숭늉을 마시며 먼 계곡과 산을 바라다보았다. 이 한적한 곳에서 우리들이 비구니들에게서 받은 환대를 나는 결코 잊을 수가 없었다.
그날 오후에 이른 아침의 여행으로 아직도 졸리운 나는 사랑방 앞의 계단에 조용히 앉아 있었다. 헌데 중광이 허겁지겁 마당으로 달려오며,
“이곳에 진력이 났어. 부산으로 갑시다.”
라고 말했다.
“중광스님! 벌써 오후 5시인데 버스로 부산까지 가자면 4, 5시간이 걸릴 텐데 내일 갑시다.”
라고 말하자 중광은 작은 회색자루(이것이 그의 짐의 전부였다)를 걸머지고 빠른 걸음으로 버스 정거장 쪽으로 걸어 내려갔다.
나는 재빨리 방으로 들어가서 옷과 카메라, 책, 필름과 여행용 가방을 들고 그의 뒤를 따라 내려갔다.
모든 짐을 작은 수레 위에 매달았기 때문에 험한 길을 따라 중광을 쫒아가자니 숨이 가빴다.
술과 춤 그리고 그림
우리 일행(중광과 나 내 조수인 우씨, 미국스님 혜명과 사진작가 빌호커)은 부산으로 출발했다. 우리는 그날 밤 늦게 출판사를 하는 중광의 친구 집에 도착했다.
집안은 벌써 잠을 잘 준비를 하고 있었다. 우리의 도착이 집안 전체를 다 뒤집어 놓았다. 사무실과 살림집이 동일한 건물 내에 있었다.
중광의 왕래에 익숙해진 주인은 음식과 침구와 다과를 차려 왔다. 주인이 중광에게 말했다.
“내가 스님에게 이렇게 대접을 해도 내게 그림 한 장 그려 주지 않았습니다. 오늘 저녁엔 꼭 한 장 그려 주십시오.”
“좋소. 재료들을 모두 챙겨 오세요. 새 붓 몇 자루, 종이, 술, 담배, 오징어, 라디오, 그리고 먹을 갈아 줄 사람.”
집안 남자 아이들을 가게로 서둘러 보내서 재료들을 사오게 했다. 밥상을 치우자마자 중광을 위한 무대가 마련되었다. 우리는 그를 마주보고 반원형으로 둘러앉았다.
그는 종이를 뒤적거리고 먹을 시험해 보고나서 먹을 혀에 대어 본 다음 모든 것이 다 잘되었다고 말했다. 그런 후 그는 술병 마개를 열고 미국 록 음악의 한국판인 라디오 음에 맞추어 춤을 추기 시작했다. 그는 방안을 빙빙 돌며 전통적인 무당춤 흉내를 내면서 술을 마시고 또 오징어를 씹었다.
춤의 템포가 빨라짐에 따라 그는 그의 발길에 걸리는 물건들을 발로 걷어차며 점점 더 흥겹게 춤을 추었다. 그는 갑자기 옷을 벗어부치고 손에 붓을 잡고 우리가 앉아 있는 쪽으로 향했다.
그는 날렵하게 허리를 굽혀 단숨에 선종불교(禪宗佛敎)의 대성(大聖)인 보리달마상을 그렸다. 그의 동작은 그가 춤을 출 때의 취중의 멋부리는 행동과는 대조적으로 극도로 차분했다.
몇 분 사이에 그는 술을 마시며 담배를 피우며 춤을 추며 음식을 먹으며, 또 웃어가면서 6장의 그림을 그려 냈다.
그는 벗어버린 옷을 다시 주워 입고 조용히 자리에 앉았다.
“내가 그린 그림들을 좀 봅시다.”
이렇게 말하는 그의 음성은 희미하고 거의 지쳐 있는 것 같았다. 그는 그림을 한 장 한 장 감상하며 때로는 자기의 필법에 감탄하기도 했다. 그는 제일 나중에 그린 그림을 빼내어 꾸겨버리고 나서 영어로 ‘노 굳’이라고 말했다.
낮 동안의 활동과 그림 그리는 일로 지쳐서 우리는 모두 잠자리에 들었으나 중광은 잠을 잘 수가 없는지 또는 잠을 잘 필요가 없던지 집을 나가 거리를 방황했다.
중광과의 여행이 계속됨에 따라 나는 서서히 미리 결정한 스케줄을 결코 따르지 않는 것을 배웠다. 여행 예정표를 만들 필요가 없었다. 해야 할 일들을 적은 날짜와 명단으로 가득한 내 노트를 짐 속에 넣어버렸다.
나는 모든 것을 하나의 모험으로 즐기기 시작했다. 어느 날 우리는 그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는 절로 가는 버스를 타기 위해 정거장으로 갔다.
중광은 잠시 동안 서서 버스 시간표를 살펴보더니 우리 버스가 30분 뒤에 들어올 예정임을 알고 어깨를 으쓱해 보이더니 반대 방향으로 가는 버스에 올라탔다. 나는 한마디도 않고 그의 옆자리에 앉았다. 몇 개 마을을 지났을 때 중광이 말했다.
“참 좋은 곳에 왔구나. 여기에 훌륭한 식당이 하나 있으니 밥을 먹읍시다.”
그래서 우리는 앉아 음식을 먹었는데 중광은 그를 잘 아는 식당 여인과 농짓거리를 했다. 그렇다고 나의 행동과 생각을 지배해 온 여러 겹의 조건을 완전히 벗어버리는데 성공했다는 말은 아니다.
우리가 여행을 하는 동안 매일 매일 나는 마음의 상태가 도를 깨달은 행위를 하기에 얼마나 부족한지를 알게 되었다.
중광은 대화가 인습적인 대화의 노선을 따르게 용납하지 않았다. 그는 ‘달마화술(達磨話術)’을 이용하여 우리의 상호교감을 선(禪)의 공안(公案)에 용해시킨다. 이러한 상호교감을 통해서 스승은 그의 제자를 제약하는 이성의 메카니즘(기계적)을 내팽개치게 만들려고 노력했다.
내가 감각의 세계에서 얻은 지식을 늘어놓으려고 하는 낌새를 챈 중광은 다음과 같은 대화로 질문을 하고 또 파고들었다.
“오늘은 날씨가 따뜻하군요.”
내가 무심하게 말했다.
“무엇이 따뜻하고 또 무엇이 따뜻하지 않은지 내게 보여 주시오.”
그가 반문했다. 나는 당황했다.
“날씨.”
“어디에?”
“모든 곳에...”
“그럼 일기가 아닌 것이 있나요?”
“그럼, 있지요. 이 차 주전자는 아니지요.”
내가 대꾸하자,
“하, 그러니 일기가 모든 곳에 있지 않다는 말이군요.”
그가 웃었다. 이러한 대화에서는 내 처가 나보다 잘해 나갔다.
우리 여행이 끝나갈 무렵 어느 날 밤에 우리가 향연을 열고 앉아서 웃으며 이야기하고 있는데 중광이 담배에 새로 불을 붙여서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그녀는 벌써 담배를 하나 피우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두번째 담배를 건네주며 흥미로운 듯이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거리낌 없이 그 담배를 손가락 사이에 끼고 두 개를 동시에 피우기 시작했다. 그는 만족해서 이렇게 말했다.
“이것이 도(道)야. 두 번 생각지 말고 통상적인 방식을 따르지 않는 것 말이야.”
그날 저녁에 그는 그녀에게 명랑하게 웃어보였다. 그날 밤에 그는 두 개피의 담배를 피우는 여자의 상으로 보리달마상을 그렸다.
이러한 대화는 반드시 스승과 제자 사이의 대화에만 국한되지는 않았다. 중광이 화가 나서 언쟁하는 중에 나는 그가 ‘달마화술’에 호소하는 경우를 몇 번 보았다. 중광은 세워놓은 예정표를 따르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승려들이 잠이 든 뒤에 절에 도착할 때가 많았다. 비구와 비구니 승려들이 괴로워하는데 또 모두 맞을까 두려워하는 것에도 중광은 흥미롭게 반응했다.
어느 날 우리는 먼 산꼭대기에 있는 절에 도착했다. 중광은 아무도 없는 마당을 돌며 소리쳤다.
“여보시오!”
아무 대답이 없자, 그는 더 큰소리로 불렀다.
“아무도 없소!”
“문이 삐걱 열리며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누구시오?”
“나 중광이요. 잠자리가 필요한데. 빨리 서둘러 이 느림보 양반아.”
“이 밤중에 찾아와서 무슨 말씀이 그렇소. 다른 데나 가보시오.”
그리고는 문을 닫아버렸다.
“나를 내쫒을 것 같소? 여보시오. 여보!”
“사람을 뭘로 보는 거요?”
그 중이 문 밖으로 다시 머리를 내밀고 말했다.
“잠자리가 필요하니 빨리 서둘러요. 이 느림보 양반아.”
이렇게 말을 하고는 갑자기 씩 웃으며,
“그렇게 답답하게 놀지 마시오. 일어나는 거나 드러눕는 거나 다 같은 게 아니오.”
그 중이 그제야 억지로 웃어 보이며,
“그럼 나는 다시 눕겠소.”
라고 말했다. 그러자 중광은 얼굴을 찌푸리며,
“그럼 나는 다시 소리 지르겠소.여보!”
방안에서는 아무 대답이 없다.
“여보시오. 여보!”
나는 약간 불안한 마음으로 대답을 기다렸다.
“알아들었소.”
“이제야 도를 깨달았구먼.”
그 중은 중광의 위엄 있는 태도에 굴복했다. 그는 방에서 나와 우리를 정중하게 대접했다.
날이 갈수록 나는 이상한 안도감을 가지고 살았다. 기억들이 서로 엉키고 또 지금까지 일어났던 대부분의 사건들이 모두 하루에 일어난 것 같이 생각되었다.
작은 잡화 상점에서 더운 우유와 빵으로 아침식사를 마치고 문간으로 나가보니 약수물이 가득 찬 우물정자가 있어 그 속에 들어가 방바닥에서 잤기 때문에 생긴 통증을 말끔히 씻어버리고 이발소에 들어가 몇 시간이고 면도를 하고 손톱을 깎고 맛사지를 받으며 호사를 했고, 또 중광이 쉴새없이 찾아오는 친구들과 인사를 나누는 것을 보고 나는 웃었다.
우리의 여행이 끝날 무렵 어느 날 중광은 한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잡지의 신간호를 보았다. 그 머리 제목이 ‘고기를 먹고 여자를 사랑하는 기이한 중’이라고 적혀 있었다. 표지에는 중광의 사진이 실려 있었고, 기사에는 중광의 생활양식보다 야한 면이 실려 있었다. 많은 여자들과 동침을 하고, 동물들과 성교를 하고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운다는 것 등이었다. 그의 생활이 그러한 타락에 빠진 사실을 보고 실망했다.
“중광, 왜 그런 이야기를 다 털어놨소?”
내가 물었다. 그는 놀란 표정과 약간 실망한 표정으로 나를 보고 대답했다.
“무애행위를 실천하는 사람은 거짓말을 안 해요. 사실을 은폐하지도 않고, 이 기사가 마음에 들어요. 내가 이야기한대로 썼어요.”
이 잡지의 인기가 금방 분명해졌다. 우리가 길에서 만난 중은 중광을 보자 잡지를 흔들어 보이며 중광을 꾸짖었다.
“당신은 중이 아니야. 왜 법의를 입고 다녀.”
이렇게 말하며 그는 마치 중광의 옷을 벗기기라도 하려는 듯 했다.
“나도 중이요. 아무도 내 법의를 벗기지는 못할 거요.”
하고 태연하게 중광이 대답했다. 어디를 가나 사람들은 중광에게 손가락질을 하고 말을 걸며, 그는 조롱하는 군중들 속에 끼어 있었다. 마침내 내가 중광에게 물었다.
“잡지 기사에 언급된 일들을 정말 당신이 다 했소?”
“그럼요. 모든 생물들이 불성(佛性)을 가지고 있는데 왜 분별을 하겠소.”
라고 그가 대답했다. 나는 이렇게 알려지는 것이 걱정스러웠으나 중광은 이 소란이 정부의 고위층과 조계종 내부에까지 이르러도 별로 개의치 않았다.
중광은 부끄러움을 느낄 사람이 아니었다. 그리고 이 문제를 처리하는 중광의 의연한 태도가 내가 그와 같이 여행할 때 받은 가장 인상적인 면이었다. 내가 걱정하고 있다는 눈치를 챈 그가 어느 날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가 그림을 그릴 때 내 붓이 거침없이 움직이지 않으면 안돼요. 바로 잡을 수 있는 잘못이 있을 수 있는 잘못이 없으니까요. 무애행위가 있는 곳에서만 붓이 힘차게 움직이니까요.”
그는 자기 그림 한 장을 꺼내서 위로부터 아래로 내리 그은 힘찬 선(線)을 가리키며,
“이 선을 봐요. 이것이 바로 도를 깨달은 선이예요. 세상에는 이런 선이 이것 하나 밖에는 없습니다. 이런 선을 다시 그릴 수는 없습니다. 이런 선을 그을 수 있다고 생각하면 절대로 성공하지 못합니다. 선을 긋는 행동에 제약이 있으면 이런 선이 나오지 않습니다.”
이러한 사건들을 통해서 나의 온순한 태도의 교수로서의 생활관이 끊임없이 시험을 받았다.
중광은 불교 전통의 최고의 가르침을 깊이 깨닫고 말하는 사람이다. 그는 불교를 배신한 승려가 아니라 오히려 잘 훈련된 참선을 하는 사람으로 높은 깨달음의 경지에 도달해서 그것이 나의 조심스럽게 통제된 생활관에 반대하는 자유를 그에게 주었다.
나는 중광과의 접촉의 결과로 나의 마음속에 심각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음을 알았다. 그리고 나는 나 자신의 합리적인 절차에 점점 자신이 없어졌다.
어느 날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밤늦게 지금은 내 기억 속에 그 이름도 사라진 작은 마을에 도착했다. 거리는 어두웠고 작은 여관의 간판에서 새어나오는 한가닥 불빛이 있을 뿐이었다.
“이 여관이 마음에 드실 거예요. 내 제자 한 사람이 경영하고 있어요.”
그가 말했다. 작은 응접실은 별로 사용되는 것 같이 보이지 않았으나 뒤쪽 방에선 웃음소리와 음악이 들려 왔다. 실내를 알고 있는 중광이 나를 안내해서 큰 방에 들어가 보니 한복을 정성들여 입은 여자들 10여명이 술을 마시며 이야기하는 남자 손님들을 접대하고 있었다.
“누가 중광의 제자요?”
라고 내가 약간 당황해서 물으며 그의 뒤를 따라 복도를 걸어갔다. 마침내 그가 방문을 열어젖히고 큰소리로 인사를 했다. 나이든 얌전한 한 여인이 깜짝 놀라 일어섰다. 그녀는 아직도 젊은 시절의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었다. 다른 많은 사람들이 그랬듯이 그녀도 그를 만나 반가운 것 같아 보였다.
우리는 곧 값진 서양 가구들이 가득한 방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이윽고 그녀는 중광 덕분에 불교로 개종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야기를 하면서도 염주를 세었다.
그녀는 불교 교리에 관한 질문이 많았고, 내가 교수인 것을 이용해서 대단히 이지적이고 깊이 있는 질문을 던졌다.
얼마 뒤에 우리 두 사람만이 지성적인 대화를 내버려 두고 중광은 여관방을 전전하며 친구들을 만나고 이따금씩 그가 여급들과 실랑이를 벌이며 웃음을 터뜨렸다.
동이 틀 무렵에 우리는 식사를 하고 나서 중광은 나를 데리고 버스 정류장으로 갔다. 그 다음날 우리는 서울행 기차를 탔다. 차 안은 퇴근하는 사람들로 만원이었고, 차내의 공기는 덥고 답답했다. 승객들은 하루의 일로 피곤해서 조용하고 무표정했다.
중광은 통로 사이를 왔다갔다 하며 사람들에게 이야기도 걸어보고 웃기기도 하며 또 처녀들에게 그들의 아름다움을 노골적으로 칭찬해서 얼굴을 파묻고 웃게 만들기도 했다.
그가 나에게 돌아오자 나는 내 자리를 그에게 내어주려 했으나 그는 나를 눌러 앉히고 자신은 통로에 덥썩 주저앉았다. 참선하는 자세를 취하면서 그는 퇴근하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채 잠이 들었다.
통로 바닥에 홀로 앉아 있는 그는 허약해 보였다. 나는 그를 바라다보며 마치 그를 일어서서 보호라도 하듯이 그가 자고 있는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았다.
2주일에 걸친 벅찬 여행 끝에 나는 내 비행기 표가 지정된 날에 출발해야 했기 때문에 이별의 시간이 왔음을 그에게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내 스케줄의 중요성을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이 내 비행기 표를 흔들어 보였다. 나의 옛날 습성이 다시 고개를 들고 나왔다.
그는 중부지방에 있는 절에 중요한 그림들이 있는데 그것을 꼭 보아야 한다고 말했다. 나는 다시 비행기 표를 내보이며 이번에는 그것을 볼 수 없다고 말했다. 중광은 이상하다는 듯이 머리를 흔들었다.
나는 내 손에 매달려 있는 비행기 표를 쳐다보았다. 우리들의 주어진 여정에 대단히 얄팍한 장벽이 내려앉았다. 나는 예정대로 한국을 떠났지만 나에 대한 중광의 영향은 계속 남아 있다.
그의 도움으로 그의 화집에 실을 글을 쓰고 있는 지금까지도 그의 정신이 내 주위를 맴도는 것 같다. 그리고 나는 우리가 함께 했던 여행을 언제나 즐겁게 회상한다.
중광이 걷는 길은 우리들 대부분이 따를 수 없는 길이다. 중광의 생활 방식은 잠을 자지 않는 긴 밤과 항상 부족한 식사와 긴 여행과 힘 드는 등산과 한국 도시들의 보도 위를 끊임없이 방황하는 것을 요구한다.
그에 대한 외국 학자로서의 나의 영향도 과일 가게 주인보다 더 클 것이 없다. 그의 행동에 대한 나의 질문 공세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같이 여행하는 동안 중광은 한 번도 무애행위라는 그의 교리에서 한 발자국도 물러선 일이 없었다.
한 순간 한 순간이 나에게는 놀라움이었고 그의 생소한 생활양식 속에 새로운 의식이 나를 삼켜버렸다. 한정된 기간 동안 나는 교수로서의 면모를 버리고 이 ‘미친 중’이 나를 새로운 길로 인도하도록 맡겨 버렸었다.
중광은 무애행위의 길을 이렇게 설명했다.
“무애행위를 실천하던 사람이 죽는다면 그 사람은 숭배를 받지만 살아있는 동안은 곤란을 겪게 마련이오.”
중광과 같은 사람들은 옛날 도교의 성인들과 불교 승려들 사이에서 그리고 기인들과 모든 문화에서 멸시를 당하기가 일쑤인 무당들 사이에서나 찾아 볼 수 있다. 그러나 한국 불교도들처럼 쉽게 이러한 기인을 받아들일 수 있는 사회나 종교적인 인습은 흔치 않다.
나는 이 비범한 사람 앞에서 삶의 경험을 함께 하려고 시도했었다. 그의 그림들 또한 그의 생활방식의 표현이었다. 그래서 중광의 그림들은 그가 실생활에서 보여 주는 생생한 힘으로 충만하다.
중광의 그림들은 우상 타파적이며 개인이나 성스러운 물건들을 놀림감으로 만든다. 그래서 그의 그림은 언제나 보는 사람에게 도전해 온다. 모두가 몇 초 사이에 완성한 그의 그림들은 붓을 가지고 무애행위를 예시한 것이다. 이 그림들은 거침없이 생각없이 그린 것들이다(無心等).
중광의 그림은 한국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서양 사람들의 주목을 받아 마땅하다고 믿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에게 회화의 외부적 한계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즉, 하나의 획이 경험의 전체이며, 또 예술가의 정신을 담고 있다는 점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나는 이 그림들을 볼 때마다 그가 자신의 그림을 칭찬하며 주먹을 쥐고 엄지 손가락을 위로 치켜 올리며, 영어로 ‘베리 굿’하며 웃는 그의 얼굴이 떠오른다.
(번역: 백승길 유네스코문화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