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정도전 초반 이성계가 황산전투를 통해 일약 고려의 스타에 오르고, 그를 통해 겨우 시골 무사에서 벗어나 성공했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경처 강씨가 이인임한테 직접 농장까지 줘가면서 도당내의 관직 달라고 하는 장면까지 넣었죠.
그런데 사실 이성계는 이전에 도당입성에 성공을 한 적이 있습니다.
덕흥군 옹립사건과 삼선삼개의 난을 평정한 직후 밀직부사에 임명된 적이 있으며,
우리 태조(太祖)를 밀직부사(密直副使)로 각각 임명하고 단성양절익대공신(端誠亮節翊戴功臣)의 호를 내리는 한편..
고려사세가 공민왕13년(1364)2월 병신일
1371년에도 지문하부사에 임명된 바 있습니다.
윤환(尹桓)을 문하시중으로, 한방신(韓方信)을 찬성사로, 이색(李穡)을 정당문학(政堂文學)으로, 우리 태조를 지문하부사(知門下府事)로 각각 임명했다.
고려사 세가 공민왕20년(1371) 7월 병인일
밀직부사가 정3품에 정원 4명의 관직이었으니 그다지 큰 의미가 없었다고 볼 수 있을지 모르나, 지문하부사는 정2품에 정원1명의 관직이었던 만큼 같은 내직이라 하더라도 그 의미가 전혀 다릅니다.
저 지문하부사라는 자리는 뭐 하는 자리 일까?
고려말 원 간섭기를 다뤘던 다른 의미로 유명한 드라마인 신돈(!)에서도 나옵니다.
신돈 사망이후 정계계편하면서 최영에 의해 이성계를 지문하부사에 임명하는 장면
황산전투가 1380년이니 정확히 9년전의 일이고, 이성계가 이때이미 도당입성에 성공(?) 했던 셈이죠.
공민왕이 이성계를 그냥 도당의 요직에 임명했을리는 없으니 분명 뭔가 이유가 있었겠지요.
우선 신돈 드라마 내용처럼 이성계의 지문하부사 임명은 신돈사망 직후 이루어 집니다.
신돈을 사형시키는 한편 그 일당인 대호군(大護軍) 이백수(李伯脩)도 처형하고, 성여완(成汝完)·조사겸(趙思謙)·유준(柳濬)을 유배 보냈다.
고려사 세가 공민왕20년(1371) 7월 신유일
신돈의 사형집행 후 약 6일만에 전격적으로 이성계가 지문하부사가 된 건데, 사실 이는 내외적이유가 있습니다.
우선 전 해인 1370년 1월과 11월~12월 2번에 걸쳐 이성계가 군대를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 동녕부의 기새인첩목아를 잡아들이려 했던 일이 있었습니다. 비록 기새인첩목아를 잡는데에는 실패했지만, 큰 피해 없이 요동을 휩쓸고 민호들을 고려로 데려오는데 성공을 했기때문에, 큰 전공을 세운 것이었죠. 그랬기 때문에 이성계를 승진시켜 주어야 했을 겁니다.
이런 전공에 대한 포상 의미 이외에도 당시 국제정세가 한 몫 했습니다.
당시 아까도 말했듯이 신돈의 사형직후 이성계가 전격적으로 발탁이 되었던 건데, 1365년 신돈이 공민왕에 의해 전격 기용이 되면서 최영이 계림윤으로 좌천되고 유배가는 등 이때부터 한동안 최영을 위시한 무장세력들은 그다지 중앙정계에서 힘을쓰지 못합니다. 그 최영의 수하였던 이성계 또한 당연히 그랬겠죠.
이것이 신돈의 의지인지 아니면 뒤에서 조종하는 공민왕의 의지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큰 전쟁도 끝났으니 내부정리를 하기 위해서 한동안 무장들에 대한 적절한 견제가 있어야 한다는 판단이었겠죠.
하지만 이런 상황도 오래가지는 못합니다. 1368년 북경이 함락되어 원나라가 고비사막 이북으로 쫓겨가고 명나라가 들어섰으며, 명나라의 사신이 1369년 4월에 바닷길을 통해 수도 개경에 도착합니다.
이를 통해 원나라의 중원통치가 완전히 망했다는 것을 알게 된 공민왕은 천도 논의를 할 만큼 위기감을 느끼기도 했지만 아울러 동녕부의 기새인 첩목아를 제거하는 등의 일을 완전히 마무리 할 수 있을 적기라고도 판단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명나라 사신이 온 그 다음해인 1370년 1월과 11월 두번에 걸쳐 요동을 공격했을 것 이고요.
그리고 당연하겠지만 이러한 국제적 상황하에서는 무장들이 다시 전면에 나서야 했고, 결국에는 신돈이 제거당한 뒤, 최영이 찬성사가되어 정계에 복귀합니다. 이성계의 지문하부사 임명도 아마 이러한 맥락에서 이루어 진 것이겠죠.
다만 다음해인 1372년 6월 동북면에 왜구가 침입하니 다시 화령부윤으로 임명되어 왜구를 소탕하고 방어하게 됩니다.
겨우 도당입성에 성공했건만ㅜㅜ
이게 공민왕의 일시적 조처였을지 아니면 장기적 조처였을지는 우리가 확인 할 수 없습니다. 정확히 2년뒤에 공민왕이 비명횡사당하기 때문에..... 그리고 이성계는 한동안 화령부윤으로 있다가 황산전투 승리로 약 8년만에 중앙정계에 복귀합니다.
첫댓글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무장견제와는 별개로 제대로 유능한 지휘관을 써먹어야할때는 잘 써야하니 승진도 시켜줘야죠
사실 공민왕 성향에서 보면 최영 이성계는 안 죽인게 고려에는 다행인거 아닌가 싶으요.....
공민왕이 써먹었던 사람들은 다 죽였거나 죽음을 조장하였으니;;(조일신, 김용, 정세운, 인당, 김득배, 안우 , 이방실, 신돈 등)
“요즈음 죄를 받은 사람들은 목숨을 보전하기 힘든데 나는 계림윤이 되었으니 임금의 은혜가 두텁구나.”
최영이 좌천되었을 때 이런 말 괜히 한 건 아닌 듯
아버지도 그쪽 지방에서는 알려진 사람이었죠
고려국왕의 봉신인 동북면 변경백..
황산 전투 이전에 도당에 입성했군요
어떻게 보자면 우리 현 대통령님의 선배쯤 되네.. 크게 키워줬는데 통수라는 공통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