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중국 문명의 중심지일 뿐만 아니라 15개 국가의 수도였던 낙양(뤄양). 이 낙양을 축으로 할 때, 기원전 3세기부터 서기 9세기까지는 서북 지역에 있는 나라들이 중국과 더불어 패권 대결을 펼쳤다. 흉노족·선비족·돌궐족·위구르족 등의 활약은 이런 구도 속에서 나타난 것이다.
고대 중국 역사서인 <서경> 등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기원전 3세기 이전만 해도 중국에는 동아시아를 호령할 만한 강대국이 나타나지 않았다. 이 시기의 중국은 약했다. 중국은 진시황제의 활약으로 거대 중국이 출현한 뒤부터 서북지역의 나라들과 패권경쟁을 벌일 수 있었다.
그러던 것이 서기 10세기부터 17세기까지는 동북지역에 있는 나라들이 중국과 더불어 패권대결을 펼치는 구도로 뒤바뀌었다. 거란족·여진족·몽골족·만주족의 활약은 이런 구도에서 생긴 것이다. 동북지역이 강성해졌기 때문에 이 시기는 한민족에게 좋은 기회였지만, 하필이면 서기 10세기 초반에 발해 멸망과 더불어 만주를 상실함에 따라 한민족은 그 좋은 기회를 눈앞에서 놓치고 말았다.
10세기를 전후해서 패권구도가 뒤바뀐 것은 주로 경제적 요인에 기인한 것이다. 9세기 까지는 서북지역 국가들이 아시아대륙의 무역을 중개함으로써 실력을 축적했지만, 10세기 이후는 그들이 현저히 약화되었을 뿐만 아니라 동북지역인 만주의 경제력이 비약적으로 성장했다는 점이 정세 변화의 결정적 요인이었다.
9세기 이전에는 상당 기간 동안 한민족이 만주를 지배했지만, 이 시기에는 힘의 중심이 서북지역에 있었기 때문에 한민족이 아시아를 호령하기가 힘들었다. 한편, 10세기 이후에는 힘의 중심이 동북지역이었지만 이 시기에는 한민족이 만주를 상실한 터라 힘을 발휘할 수 없었다. 그래서 두 시기의 아시아 질서는 기본적으로 한민족에게 불리한 방향으로 짜여 있었다.
그런데 이런 핸디캡을 극복하고 한민족의 영광을 일구어낸 인물이 바로 광개토태왕이다. 10세기 이후의 한민족은 자신에게 주어진 핸디캡에 만족하고 아시아 패권에 도전하지 않았지만, 9세기 이전의 한민족은 광개토태왕이라는 걸출한 인물의 등장에 힘입어 250년 동안 아시아 패권질서를 교란시킬 수 있었다.
아시아 패권질서를 교란시켰다는 것은, 서북지역 국가들이 중국과 더불어 패권경쟁을 벌이는 구도 속에서, 경제적·지리적으로 불리한 고구려가 광개토태왕의 활약에 힘입어 아시아 패권구도에 영향을 미쳤다는 점을 의미한다. 정확히 말하면, 당시 고구려의 국력은 동아시아에서는 2위정도, 아시아에서는 3위 정도였다. 당연한 말이 되겠지만, 오늘날의 아시아 3위와 당시의 아시아 3위는 질적으로 다른 것이다. 당시에는 아메리카대륙이 별도의 세계를 이루고 있었다는 점과, 오늘날의 선진지역인 서유럽이 그때는 유라시아대륙의 변방이었다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기원전 3세기 이전의 중국은 세계 최대의 무역로인 초원길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었던 데다가 강력한 통일왕조가 없었던 탓에 기본적으로 약체 국가일 수밖에 없었다. 오늘날의 중국을 바라보는 관점으로 기원전 3세기 이전의 중국을 바라봐서는 안 된다.
중국을 통일한 진나라가 남쪽과 서쪽에는 성을 쌓지 않으면서도 북쪽과 동북쪽을 향해서만 성을 쌓은 것은, 그 이전만 해도 동북쪽의 한민족이 중국을 못살게 굴었음을 증명하는 유력한 증거들 가운데 하나다.
광개토태왕이 광활한 영토를 확보할 수 있었던 요인 중 하나는 당시의 중국이 5호 16국 시대였다는 점에 있다. 5호(胡) 즉 다섯 유목민족이 북중국에 난입해 16개 왕조를 세움에 따라 중국의 원심력이 약해진 시대였기 때문에 그가 좀더 쉽게 위업을 달성할 수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광개토태왕 시대는 서북지역이 강성한 시대였기 때문에, 정상적인 경우라면 동북 방향의 고구려로서는 힘을 쓰기가 힘들었다. 하지만 그의 등장으로 인해 약 250년 동안 한민족은 아시아의 강자로 활약할 수 있었다. 고구려 멸망 이후의 발해도 만주를 지배하기는 했지만, 발해의 지위는 고구려에 비해 강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서북지역 국가들에 비해서도 강하지 못했다.
고구려 이후 아시아에서 그런 기적을 연출한 대표적 사례로는 19세기 일본을 들 수 있을 정도다. 서양이 동양을 압도한 19세기 서세동점의 시대에 일본은 동양 국가라는 핸디캡을 극복하고, 청일전쟁 때 받은 배상금을 밑천으로 해서 러일전쟁(1904~1905년) 이후 세계 최정상급으로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