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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통급(普通級) 십계문
1. 연고 없이 살생을 말며, 2. 도둑질을 말며, 3. 간음(姦淫)을 말며, 4. 연고 없이 술을 마시지 말며, 5. 잡기(雜技)를 말며, 6. 악한 말을 말며, 7. 연고 없이 쟁투(爭鬪)를 말며, 8. 공금(公金)을 범하여 쓰지 말며, 9. 연고 없이 심교간(心交間) 금전을 여수(與受)하지 말며, 10. 연고 없이 담배를 피우지 말라. |
지난주 금토일 청년훈련을 다녀오면서 여러 가지 감상을 느꼈지만 특별히 드는 감상 하나가 있습니다. 저도 오래 살지는 않았지만 살아가면서 힘든 것들이 있는데, 그 두 가지가 꾸준히 하는 것과 초심을 잃지 않는 것입니다. 꾸준히, 초심을 잃지 않는 분이 부처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여기 계신 분들은 부처님 같은 심법을 쓰시는 것 같아요. 수요공부방을 꾸준히 나오시는 모습이 존경스럽고 대단하시다는 생각이 드네요. 그래서 저도 최선을 다해서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아침 좌선 끝나고 의두연마 시간에 수요공부방 주제를 가지고 연마를 하고, 가능한 제가 실천한 것을 가지고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지식의 전달이 아닌 지혜의 전달이 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오늘 공부하실 부분은 보통급 9조와 10조입니다.
[9조]
보통급 십계문 9조는 연고 없이 심교간 금전을 여수 하지 말며 입니다. 정산종사님은 “마음으로 사귄 회원이나 특별한 지기(知己) 사이에는 정당한 연고 없이 금전을 거래하지 말라는 것이니, 연고 있는 금전의 여수(與授)란 곧
①천재지변 또는 화재, 도난 등으로 구급을 요할 때
②급병이 있어 구급을 요할 때
③세금 또는 소송비용 등의 일로 긴급을 요할 때
④기타 정당한 일로 구급을 요할 때 등 불가피한 중대사의 경우에는 범계가 되지 않나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대종사님 당대의 기록은 회보를 보면 이렇게 안내하고 있습니다.
○ 회원 가온대 서로 금전을 여수하지 말며 회중 가온대 금전을 여수하지 말나는 본의는 금전 여수를 하게되는대 따라서는 자연중 친애하는 정의가 소원하게 되는 경우가 생기는 까닭이다. 그럼으로 어떠한 경우에 저 사람을 보호나 또는 구제할 목적으로 약간의 이자를 정하고 준 것이나, 또는 피차간 돈을 갑지 않는다 할지라도 정의상 소원되지 않을만한 공부의 실력과 이해력을 가진 사람새이에 부득이한 경우 이자받을 생각없이 잠간 융통하야 군색을 면하는 것은 범계로 간주하지 아니하나, 피차 그만한 실력과 이해력이 없는새에 여수를 하는 것이나 또는 영리를 목적하고 회원간에 금전여수를 하게 되는 것은 다 범계로 간주한다. (이 계문은 재가회원에게는 관계없고 츨가회원만이 직힐 것으로 함,) 회보 제47호 |
회보를 보면 중요한 문구가 하나 있습니다. 돈을 갚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정의상 소원되지 않을만한 공부의 실력과 이해력을 가진 사람사이에만 돈 거래를 하라는 말씀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시나요? 내가 돈을 빌려줬는데 빌려준 사람에게 돈을 못 받아도 마음이 상하지 않을 정도의 마음공부의 힘이 있는 사람은 돈 거래를 해도 된다. 그 사람은 돈에 집착하지 않기 때문에 돈을 돌려받지 못한다 하더라도 사이가 나빠질 염려가 없습니다. 그런 사람은 돈 거래를 하라고 하신 것이죠. 마음이 상하지 않을 정도의 공부실력이 되는 사람들은 연고 조항에 해당이 되는 것이죠. 인터넷을 보니 공부심 없이 돈 꾸어가는 친구들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제시하고 있습니다.
1. 평소에 연락 없다가 최근에 전화가 많아진다. 2. 빌려주는 사람보다 빌려가는 사람이 씀씀이가 더 크다. 빌려주는 나는 먹을 것 안 먹고 아끼지만 빌려가는 친구는 펑펑거리며 잘도 쓴다. 3. 빌려주면 연락이 뜸해진다. 4. 약속 기일을 지키지 않는다. 우연히 만나면 미안해서 연락 못했다고 한다. 5. 행여 내가 돈 벌었다는 소문나면 다시 연락이 온다. 6. 추궁해서 돈을 받으려면 쫌스럽다, 내가 그렇게 못 미더우냐 라고 말한다. 7. 언제나 나에게 갚을 돈은 그가 쓰는 카드값에 밀려 매달 채권 후순위로 밀려난다. |
이것이 돈을 습관적으로 빌리고 갚지 않는 사람들의 특징인데 다들 웃으시는 것을 보니 이런 사람들의 특징이 비슷한 것 같습니다. 또 이와 비슷하게 공부의 실력이 없이 돈을 주고받는 사람들의 마음의 변화를 들여다보면 이렇습니다. 우리가 살면서 돈을 빌리게 될 경우가 생기죠? 결혼을 하고나면 피치 못할 일이 생기기도 합니다. 내가 돈이 필요해서가 아니라 가족이 필요할 수도 있죠. 자녀가 아프거나 전세자금 일부가 부족한데 기간이 촉박하거나 급전이 필요할 수도 있고, 돈을 빌릴 수 있는 더 이상의 담보제공 능력이 없거나 신용으로 대출한도가 초과된 경우 어디서, 누군가로부터 돈을 빌릴 수 있을까 생각하게 됩니다. 참으로 절박한 순간이 아닐 수 없습니다. 특히 자녀가 관련되거나 가족이 관련되면 자존심도 버리고 어떻게든 돈을 빌리기도 하죠. 절절하고 간절한 노력 끝에 원하던 양의 돈은 아니지만 일부라도 돈을 빌리게 되면 그 빌려준 사람이 고마워서 그 당시에는 당신의 은혜에 대해서는 반드시 보답하겠다고 다짐을 하죠. 그리고 우리가 사기꾼이 아니고서는 대부분의 돈을 빌린 사람은 확고한 변제의지가 있기 마련입니다. 관계의 유지 면에서도 그렇고 그 돈을 빌려준 사람에게 실망시켜 주고 싶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세상은 내 뜻대로 내 계획대로 돌아가지 않죠. 보통 돈을 빌릴 때는 이 돈을 투자하면 언제쯤 그 돈을 갚을 수 있다는 계획 하에 돈을 빌리죠. 절대 실패를 생각하고 돈을 빌리지 않습니다. 그런데 세상이라는 것은 내 뜻대로 되지 않기 때문에 돈을 되돌려 주어야 하는 날짜가 다가올수록 약속을 지킬 수 없을 것이라는 예감이 점차 확실성으로 변화되어 갑니다. 그리고 돈을 갚지 못할 것 같으니까 돈을 빌려준 사람에 대하여 미안함과 부끄러움이 깨어있는 모든 시간을 차지하게 됩니다. 그리고는 어렵게 이야기하죠. ‘조금만 시간을 더 주라’ 돈을 빌려 준 사람의 입장에서는 약속한 기안에 돈을 회수하지 못할 경우 최악의 경우를 생각하게 되죠. 빌려간 사람에 대한 간섭과 감시가 짧은 주기로 자주 반복됩니다. 그러면 돈을 빌린 사람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설득력을 발휘해서 돈을 갚을 수 있는 최대한의 시간을 벌려고 합니다. 이때 까지만 하더라도 감사함과 미안함이 남아있습니다. 그러나 한 달 두 달 시간이 지날수록 돈 빌려준 사람의 재촉과 독촉, 짜증 섞인 꾸지람이 지속되고 이 시기가 도래하면 감사함, 미안함, 이러한 감정은 사라지고 ‘갚으면 되는데, 뭐 이렇게 까지 사람을 괴롭힐 수 있는 것인가’라고 원망과 짜증의 감정이 점점 커지기 시작합니다. 돈을 빌렸다는 사실, 그 돈으로 어려움을 해결했다는 기억은 점점 사라집니다. 그리고는 돈을 빌려준 사람의 인격에 대해 의문을 품고, ‘돈 좀 있다고 위세를 떤다’ 이런 생각들이 점점 자라기 시작합니다. 시간이 지나면 돈 빌려준 사람의 채무독촉은 더욱 강력해지고, 내가 가진 약점에 대한 공격으로 까지 변화됩니다. 돈을 빌려간 사람은 처음에는 겁도 좀 나지만 가진 것이 없으니 빼앗길 것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좀 더 시간이 지나면 돈 빌려간 사람의 마음에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돈 빌려준 사람에 대한 분노입니다. ‘이렇게 까지 내게 자존심상하는 언행을 할 수 있는 권리나 자격을 그 사람이 가지고 있단 말인가’ 생각합니다. 이제는 상대하는 것이 피곤하다 느끼고 회피합니다. 그리고 돈을 갚지 않아도 되거나 갚지 않을 방법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에 대한 해답을 얻을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면 더 이상 그와 연락이 닿지 않는 방법을 찾게 됩니다. 이런 경우를 많이 보게 되죠. 대부분 이 과정을 겪습니다. 그래서 돈을 빌려준 사람은 돈도 잃고 사람도 잃습니다. 그리고 돈을 빌려간 사람은 사람을 잃고 신용도, 자기 자신도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래서 저는 이런 생각이 듭니다. 공부실력이 부족한 가까운 사이에 돈거래를 하는 것은 두 사람이 주인공이 되어 비극영화를 찍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특수효과는 번뇌 망상입니다. 돈을 갚을 때까지 무수한 번뇌가 두 사람사이에 일어납니다. 돈을 갚지 못한 사람은 편하게 자는데 오히려 돈을 빌려준 사람은 번뇌 망상이 엄청나죠. 따라서 잠깐 불편하고 길게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돈거래는 하지 않는 것으로 해야겠습니다.
[10조]
다음은 보통급10조 마지막인 연고 없이 담배를 피우지 말며 입니다.
잡지 Scientific Psychic이 수행한 연구에 의하면, 대부분의 사람이 다음과 같은 계기로 담배를 처음 시작하게 된다고 합니다.
-어른의 사회나, 규제가 가득한 세상을 거부한다. -사회적인 서클이나 모임 등에 적응하기 위해서 -더 이상 아이가 아니란 걸 보여주고 싶다. -독립심을 키우고, 확인시키기 위해서 -담배, 그리고 담배가 피우는 사람에 대한 동경 -체중 감량 |
대종사님 당대에는 담배를 많이 피웠던 것을 아시나요? 담배라는 것은 문화죠. 절대적인 것이 아닙니다. 천주교 신부들은 담배를 피우잖아요. 저도 천주교 신부인 친구가 있는데 점심을 먹으면 꼭 사라집니다. 수사님도 그렇죠. 가끔씩 모임을 하면 밥 먹고 나면 사라집니다. 대산종사님도 이중 한 가지 이유로 담배를 시작하셨습니다. 어떤 이유로 시작하셨을까요?
대산(大山-金大擧. 1914~1998) 종사가 원기 66년(1981) 영산성지에서 법문하며 처음 총부에 왔을 때의 이야기를 하였다. “당시 촌에서는 담배를 피우는 사람을 양반이라고 하였다. 우리 조부님 담뱃대가 상당히 길었는데 나는 조부님보다 더 큰 양반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하여 담뱃대를 더 크게 만들어 가서 다녔던 일이 있다. 총부에 올 때 열여섯 살이었는데 생각해보니 담뱃대를 가지고 올 수는 없고 해서 빈종(십 전짜리 담배)을 다섯 갑 사서 왔다. 총부에는 담배를 피우는 사람이 없었다. 그런데 유용진 씨 한 분이 살짝 살짝 피우더라. 그래서 나도 담배를 변소에 가서 남모르게 피우다 생각하니 다른 사람이 안 피우는 것을 변소에 가서 피운다는 것이 의젓하지 않고, 또 내가 안 피우는 것을 남에게 준다는 것도 그래서 담배를 모두 불 속에 던졌다. 이를 옆에서 보고 있던 사람들이 ‘나한테 줄 것이지 불에 집어넣느냐고 하더라. 그렇게 장난으로 지내다가 대종사님을 ‘내 영생의 부모로 모시고 이 회상과 영생을 함께 할 것이다’고 마음을 정하였다.” |
그 당시에는 담배가 크게 흉이 되지 않았습니다. 제가 북한이탈 청소년들을 10년이상 상담하고 있는데 거기도 그렇습니다. 어렸을 적부터 담배를 피우고 옵니다. 과학적 근거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담배를 어려서부터 피워서인지 키가 작습니다. 다는 아니겠지만 초등학생 때부터 피우는 것 같습니다. 그게 나쁜 것이 아니라 그냥 문화인 것이죠. 여러분 혹시 쥐 공원이라는 단어 들어보셨나요? 쥐 공원은 1981년에 캐나다의 심리학자 브루스 알랙산더가 만든 일종의 낙원입니다. 그는 중독에 대하여 기존의 화학 견해설을 뒤집는 ‘환경 견해설’을 주장했습니다. 그런 자신의 이론을 입증하기 위해 쥐 공원을 만든 것입니다. 무엇이 담배에 대한 중독을 일으킬까요? 담배에 있는 니코틴이 니코틴 중독을 일으킨다고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20일 동안 니코틴을 섭취하면 21일째가 되었을 때 우리의 몸이 니코틴을 강력하게 원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중독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여기에 함정이 있습니다. 쥐를 한 마리 데려다가 우리에 넣고 물병 두 개를 줍니다. 하나는 그냥 물, 다른 하나는 물에 헤로인 혹은 코카인을 섞은 물. 실험을 시행하는 거의 모든 경우에 있어서 쥐는 약물이 들어간 물에 집착하게 되고 조금 조금 더 마시다가 결국 자신을 죽이게 됩니다. 하지만 심리학자 브루스 알렉산더는 이 실험에서 무언가 이상한 점을 발견합니다. 쥐가 우리에 혼자 갇혀있다는 점입니다. 약물을 마시는 것 외엔 할 것이 아무것도 없이 말입니다. 그래서 그는 쥐 공원을 만들었습니다. 간단히는 쥐들을 위한 천국이죠. 그곳은 쥐가 색색이 공과 돌아다닐 터널이 가득한 멋진 우리로, 함께 놀 수 있는 친구들이 가득했으며 짝짓기도 내키는 대로 할 수 있는 쥐 마을에 필요한 모든 것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약물이 든 물병과 일반 물병을 두었습니다. 그러자 신기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쥐 공원에서는 약물이 들어간 물을 거의 사용하지 않은 것입니다. 어떤 쥐도 강박적으로 약물을 섭취하지 않았고 어떤 쥐도 과다복용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혹자는 이것은 쥐에게만 적용되는 이야기다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비슷한 맥락의 실험이 인간에게도 있었습니다. 바로 베트남 전쟁이었습니다. 베트남 전쟁에 참여한 미군들의 20%는 대량의 헤로인을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미국사람들은 공포에 사로잡혔습니다. 전쟁이 끝나면 거리마다 수백 수천 명의 중독자들이 가득할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집으로 돌아온 군인들을 추적한 연구는 놀라운 결과를 보여주었습니다. 그들은 재활원에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또한 금단 증상을 보이지도 않았습니다. 95%가 집에 돌아온 후 그냥 약물 사용을 멈췄습니다. 중독의 옛날 이론을 믿는다면, 이건 말도 안 되는 결과입니다. 만약 우리가 가고 싶지 않은 끔직한 외국의 정글에 던져지고 어느 순간에도 죽이거나 죽으라고 강요당할 수 있는 순간이라면 헤로인을 한다는 건 시간을 보내기 정말 좋은 방법이겠지만 만약 친구들과 가족들이 있는 행복한 집으로 돌아간다면 이는 마치 첫 번째 우리에서 꺼내져 사람을 위한 쥐 공원에 넣어지는 것과 같습니다. 화학물질이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의 철장이 문제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중독이 유지되는 ‘환경’을 눈여겨보아야 합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우리가 담배를 떠나서 중독되고 있거나, 습관화 된 것들도 환경을 바라볼 필요가 있겠죠. 환경이 내 습관을 만들고 있는 것이 아닌지. 내 의지만 탓할 것이 아니라 내 환경을 변화시킬 필요는 없는 것인지. 이번에 훈련 가서도 담배를 끊었다는 청년도 있었는데, 이야기를 들어보니 이 일화와 딱 맞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건전한 생활을 하는 친구를 사귀고 집에서 수양을 하면 담배를 끊으려는 노력을 따로 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끊어질 수 있는 원리가 생기는 것 같습니다. 내가 있는 환경을 수양하기 좋은 환경으로 바꾸고 수양을 열심히 하는 도반을 내 주변에 두면 내가 가지고 있는 안 좋은 습관들이 사라지지 않을까. 그것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줄어들고 다른 일로 바쁘게 되겠죠. 제가 저번 설교에서 이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어두울 때 어둠을 없애려 하지 말고 불을 켜면 된다. 그런데 이렇게 해도 안 되는 경우가 있을 수 있죠.
첫째, 습관 떼는 기도를 하자!
어느 여자 교도님이 일생을 담배로 살아왔는데 그 고질병을 끊게 되었다고 한다. 나이 17세에 뭣 모르고 친구들과 장난삼아 피워본 것이 습관이 되어 떼려 할 때는 도저히 뗄 수가 없도록 체질화가 되어버렸다. 더구나 아들 둘을 남겨 놓고 남편이 열반하게 되자 더욱 담배로 소일했던 것이다. 그러한 분이 입교하게 되어 교당에서 30계문을 알게 되었고 연고 없이 담배를 피우지 말라는 10계문을 듣고 그때부터 결심을 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 교도님은 새벽으로 청수를 떠놓고 혼자서 기도를 하기 시작했다. 기도를 하는 동안 갑자기 구역질이 나와 토하고는 그때부터 담배가 피우기 싫어졌다고 한다.
대종사님은 교의품 17장에서 “악을 범하지 아니하려하나 전일의 습관으로 그 악이 자주 범하여지는 경우에 그 죄과를 실심(實心)으로 고백하고 후일의 선행을 지성으로 발원하면 자연히 개과천선의 힘이 생기기도 하나니, 이것이 곧 감응을 받는 가까운 증거의 하나이며” 라고 기도의 위력에 대해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환경을 바꿔도 안 되고, 내 스스로도 안 되면 그때는 기도까지 해야 하는 것이죠. 타력의 힘을 빌려야 합니다. 그래야지 습관 하나가 고쳐지죠. 습관 하나를 고치려면 3년 정도 걸린다고 합니다.
둘째, 당초에 배우지 말자.
중독성이 있는 물질은 한번 시작하면 마음의 자력이 없는 사람은 참으로 끊기가 어렵습니다. 당초에 배우지 않는 것이 담배를 끊는 최고의 방법입니다.
셋째, 목적성 있는 삶을 살자 입니다.
원불교 교단의 창립과정에서 소태산 대종사께서는 저축조합을 만드시고 9인 제자들에게 “너희들이 담배를 피우지 아니하면 생명에 지장이 있느냐”고 물으셨다. 9인 제자들은 “담배를 피우지 아니해도 생명에 지장이 없습니다.”라고 대답하니 “그러면 담배를 참아서 조합의 기금으로 내라.”고 하셨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선진님들이 일원대도회상을 창립하기 위해서 수십 년 동안 피워왔던 담배를 끊은 것이었다. 이것은 9인 선진님들의 서원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다. 내 삶에 대한 목적성이 뚜렷하면 시간을 함부로 헛되이 보내지 아니할 것이다. 내가 지금 담배를 피우고 있다면 다시 한 번 나의 삶을 진단해 볼 필요가 있다.
제가 수요마음공부방에 보통급 십계문 설교를 하면서 비교적 시간이 많았습니다. 예전에는 한 번에 열 가지 조목을 다 말씀드렸는데 한 번에 두 가지씩 하니까 계문의 본의와 유래 또는 심리학적 접근등 다양한 측면에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런데 보통급 십계문은 보통급 십계문입니다. 즉 보통급 십계문을 법마상전급 십계문으로 생각하면 안 됩니다.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면 안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지난번 이야기한 것처럼 악한 말을 하지 말라고 하셨는데 악한 마음이 났다고 해서 체크하면 안 된다는 것이죠. 보통급 십계문은 사실 너무도 당연한 조항입니다. 그래서 일반적인 교도님들이시라면 보통급 십계를 범하는 경우는 별로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보통급 십계문을 비롯해서 체크를 열심히 하다보니까 사람마다 안 되는 조항이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전생에 지어놓은 바가 다르기 때문이겠죠? 계문은 우리가 업력에서 벗어나게 하여 마음의 자유를 얻게 하는 공부입니다. 업은 산스크리트어로 카르마라고 하며 일, 행위를 뜻합니다. 모든 카르마는 특정한 행위를 여러 번 반복하여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특정한 계문이 잘 안 고쳐지고 범한다는 것은 전생에도 그랬다는 것이죠. 그래서 습관이라는 것은 이 육신이 없어지고 나서도 없어지지 않습니다. 다음 생으로 넘어가죠. 지금 여러분들의 습관이 전생의 습관인지 현생의 습관인지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전생부터 길들여졌던 습관이라면 나의 무의식 속에 더 강하게 자리 잡고 있기에 고치기 위해서는 더 많은 노력을 필요로 합니다. 우리의 무의식 속에는 얼마나 많은 카르마가 있는지 상상할 수도 없습니다. 어찌 보면 무의식은 꽉 찬 쓰레기통입니다. 그 쓰레기통은 우리가 비우지 않는 한 현 생에서 다음 생으로, 그리고 또 다음 생으로 계속 가지고 다닙니다. 오히려 어떤 분들은 비우기는 고사하고 더 채우는 분들도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매일 보통급 십계문을 체크하면서 습관적으로 체크하지 말고 마음을 자세히 들여다보아야 합니다. 계속 계문을 범한다거나하면 내 무의식 속에 무엇이 들었는지 자세히 들여다보아야 합니다. 그래야 계문을 지키면서 내 무의식 세계를 바라볼 수 있으며 그래야 무의식 세계를 정화시킬 수 있습니다. 기계적인 체크는 표면의식만 변화시키기 때문에 습관의 뿌리를 뽑아낼 수 없습니다. 우리가 수면 위의 빙하보다 수면 밑의 얼음이 훨씬 크죠. 그래서 계문을 통해서 그 습관을 고쳤다고 하는 것은 수면위의 빙하만 치운 것일 수 있습니다. 수면 위의 빙하를 치워버리면 물속에 잠겨 있던 얼음이 드러납니다. 그 얼음을 제거하면 진정한 자유가 찾아올 것입니다. 그래서 계문 공부를 하시면서 내 무의식 세계도 들여다보시고 그 무의식 세계도 정화시킬 수 있는 공부를 하시면 좋겠습니다. 계문을 통해서 내 마음의 이면까지. 체크는 당연히 드러난 것으로 하지만 계문을 범하는 내 마음을 유심이 들여다보면서 마음 깊숙이 있는 무의식 세계까지 바라보면 기계적인 체크가 아니라 깊이 있는 공부가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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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준성교우님 타이핑 감사해요!
고생많으셨습니다!
은혜롭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