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멈춘 그곳,
책 향기 가득한 부산 보수동 책방골목
나이 지긋한 가게 주인, 어지럽게 쌓아올려진 책, 노랗게 빛바랜 책갈피와 손 때 묻은 책장, 몰래 접어둔 페이지부터 알 수 없는 낙서와 꾹꾹 눌러쓴 이름들.
쉽게 떠올릴 수 있는 헌 책방의 풍경이다. 헌 책방은 그 책을 스쳐간 많은 이들의 체온과 흔적이 남아 따뜻한 삶의 향기가 페이지마다 스며들어 있다. 어르신들에게는 추억과 향수의 공간이, 젊은이들에게는 빈티지스러우면서도 신비로운 공간으로 자리하고 있는 헌 책방. 50년 전 그 자리에서부터 꿋꿋이 명맥을 이어오고 있는 헌 책방 골목, 부산 보수동 책방 골목을 거닐어본다.
보수동 책방골목의 시작을 알리는 커다란 간판. 저 멀리서도 눈에 띈다. 지하철 1호선 자갈치역 3번출구에 내려 극장가 쪽으로 따라 걷다보면 재미있는 아이템들이 가득한 국제시장이 나온다. 진귀한 물건들에 눈길을 던지며 조금 더 걷다보면 대청로 사거리가 나오고 거기서 조금만 더 걸으면 보수동 책방골목이 나온다.
한국 전쟁 당시 전국에서 내려온 사람들이 좁은 땅에서 부대끼며 살아온 보수동. 사람들이 모이다 보니 자연스레 시장이 형성되었고 미군의 군용물자, 부산항으로 들어온 물건들이 주로 거래되었단다. 아이들의 교과서도,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온 물건너 온 영어책도. 사과 궤짝 위에서 시작된 중고책 시장은 담벼락에 책장을 세워놓고 팔던 시절을 거쳐 지금의 작은 서점들이 모인 책방거리로 발전했다.
서울 청계천, 대구의 극장 앞 거리 등 전국에 이름난 헌책방 거리가 도시개발에 따른 이전과 철거 탓에 점점 사라지고 있어 아쉬움을 자아내지만, 다행스럽게도 부산 보수동은 꿋꿋하게 그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내일로 여행 혹은 부산 여행을 오는 관광객들이 꾸준히 방문하는 덕분이 아닐까.
보수동 책방 골목에 들어서면 일단 양 쪽 빼곡한 책들에 압도되는 분위기다. 낮은 천장 아래까지 빼곡히 꽂혀있는 책들로 모자라 길가로 삐져나온 책들. 책들이 벽이 되고 기둥이 되어 천장을 받치고 있는 느낌마저 든다. 한 권을 잘못 건드렸다가는 금세라도 와르르 하고 무너져버릴 것 같아 불안하기도 하고, 과연 이 곳에서 내가 원하는 책을 어떻게 찾아야할지 까마득하기도 하다.
얼핏보면 장사를 하는 가게인지 그저 창고인지 쉬이 구분이 가지 않지만 책방 주인에게 원하는 책을 말하면 느릿느릿한 손길이긴 하지만 이내 책을 내어준다. 내가 매의 눈으로 스캔하며 찾을 땐 그리도 보이지 않던 책들이 역시 주인의 손이 닿으니 일사천리로 나에게 온다. 그냥 무작위로 쌓아놓은 것처럼 보이지만 그들 나름대로의 정렬 방법과 규칙이 있다고. 정말 주인이 아니고서는 내가 원하는 책을 찾기란 쉽지 않은 일이지만 꼭 원하는 책이 있는 게 아니라면 여유를 가지고 책장을 훑어보길. 잊고 지내던 추억의 동화가, 첫사랑 실패의 아픔을 달래주던 유치하고도 유치했던, 하지만 큰 위로가 되었던 연애소설이 그 어느 곳에서 나와의 재회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헌 책방이라고 해서 좁고 미어터지는 공간들만 있는 건 아니다. 헌 책방 가운데서도 규모가 큰 곳은 지하부터 지상까지 헌 책과 신간들이 가득하고 카페가 딸려 있어 자유롭게 책을 가져다 읽을 수 있는 공간들을 마련하고 있다. 대형서점처럼 깔끔하게 정돈된 책장 사이사이마다 오랜시간 독서에 열중하고 있는 사람들도 만날 수 있다.
한국 도서는 물론 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한국도서도 그렇지만 빛바랜 책장에 꼬물꼬물한 글씨들이 참 매력적이다. 표지는 너덜너덜하고 손 때 묻은 책장을 넘기면 왠지 그 시절을 살아왔던 또 다른 어떤 이의 숨결이 느껴지기도 하고 빈티지스러운 느낌의 책은 왠지 모를 친근감으로 나를 또다른 세상으로 초대하는 기분이 든다. 헌 책방의 매력은 바로 시간을 거슬러가는 느낌이 아닐까. 20년 전, 30년 전, 내가 좋아하는 이 책을 펴들었던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했을지, 내가 좋아하는 구절에 똑같이 밑줄을 그어둔 이 사람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자꾸만 궁금해하고 상상하게 되는 곳.
책방 골목에서 원하는 책을 찾기 위해서는 여러 가게를 전전하며 발품을 팔아야하고 책에 취미가 없는 사람이라면 무너질듯 위태롭게 쌓여있는 책들이 위험천만해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잘 살펴보면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책들이 당신을 기다리고 있을 수도 있으니 굳이 무엇을 '구매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연히 만날 준비'를 하는 게 좋다.
책의 연도와 상태에 따라 가격이 달라지기 때문에 가격 흥정은 필수. 보통 정가의 40-70% 가격으로 구매할 수 있고 대량으로 구입할 경우 택배를 통해 편리하게 받아볼 수도 있다. 컴퓨터 앞에 앉아 표지와 목차만으로 책을 구매하는 요즘 같은 때, 시간의 향기가 가득 담긴 책장을 직접 넘겨보며 많은 이야기가 담긴 책을 마주할 수 있는 보수동 책방골목, 굉장히 매력적이지 않나?
보수동 책방골목의 끝에 다다르니 더위에 지친 주인 할머니의 모습을 만날 수 있었다. 얼마나 긴 세월을, 그리고 또 그 긴 세월을 함께 보낸 책들과 함께하고 계셨을지 굳이 얘기하지 않아도 느낄 수 있다. 더이상 '버려진 책'이 아닌 '다시 읽힐 책'이 있는 소중한 공간 부산 보수동 책방골목, 이곳만은 부디 오래오래 남아주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 대중교통으로 보수동 책방골목 찾아가는 길
부평동, 보수동 방면 59번, 60번, 81번 버스 등을 타고 부평동이나 보수동 정류소에서 하차
지하철 1호선 자갈치역 하차 후 3번 출구, 극장가 쪽으로 올라와 국제시장을 지난 뒤 대청로 네골목에서 보수동 방면
■ 공식홈페이지 : www.bosubook.com
첫댓글 책 산다고 무모님에게 쩐 받아서 헌책사고 남은건 맛나거 사묵었네
아무리 생각해두 나는 괜찮은 놈이다고 생각한다.
다른놈은 헌책두 안사고 맛없는것 사묵었으니...
근디 이놈이 지금 잘살고 있어 세상을 다시본다.
괜찮으시지요. 아암. ㅎㅎ
우선 먹고 봐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