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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행복한 사람
시편 30:1-12
하나님의 평화가 말씀을 듣는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길 빈다.
오늘은 맥추감사주일이다. 일 년에 두 차례 지키는 감사주일 가운데 한 날이다. 사실 모든 예배는 감사와 찬양의 마음으로 드린다.
감사는 그리스도인의 가장 큰 믿음의 바탕이다. 우리가 입술과 마음에서 감사를 잊으면,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떠나는 것이다. 감사는 즉흥성이 아니다. 성경에서 감사는 항상적이고, 또 역사적이다. 성경은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이유를 분명히 고백한다.
성경은 무엇보다 감사의 마음을 절기를 정하여 표현하라고 하신다.
“맥추절을 지키라 이는 네가 수고하여 밭에 뿌린 것의 첫 열매를 거둠이니라”(출 23:16).
맥추절(‘하그 하카츠르’)는 ‘거두고 수확하는 절기’라는 의미이다.
농경시대의 절기를 지금도 지키라고 하는 것은 현대인에게 뜬금없이 들릴 지도 모를 일이다. 우리는 인류가 시작된 이후 가장 많은 것을 소유하고, 누리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감사를 잃어버린 세대가 되었다.
“소비는 많아졌지만 더 가난해지고, 더 많은 물건을 사지만 기쁨은 줄어들었다. 집은 커졌지만 가족은 더 적어졌다. 더 편리해졌지만 시간은 더 없다”(제프 딕슨, ‘우리시대의 역설’).
역설적이다. 그러므로 평소 감사를 잊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감사를 다시 되새기는 절기를 지키는 일은 특별하다.
하나님은 구원을 베푸셨다. 내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하나님의 자녀로 불러 주셨다. 또한 나를 선택하신 주님은 나를 눈동자같이 살피시고 인도하신다. 인생의 고난과 시련 속에서도 하나님을 향하게 하신다. 하나님은 은혜를 베푸시길 원하신다. 내가 겪는 근심과 고통에서 자유함을 주시기를 원하시며, 환난을 당할지라도 다시 기쁨을 회복시키신다.
우리 한국인은 어떤가? 단군 이래 지금이 가장 잘 산다. 해외에 나가보니 어디든 한인들이 북새통이다. 이젠 주눅 들거나. 꿀리는 법이 없다. 그 자부심은 불과 10여 년 전부터 생긴 것이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평안을 잊었다. 감사와 친절이 아닌 갈등과 경쟁이 웃자라고 있다.
1)
시편 30편은 전통적인 감사시편이다. 여기에 붙은 부제가 ‘성전 낙성가’이다. 성전을 봉헌하며 부르는 찬송이라는 뜻이다.
역사적 배경이 있다. 알렉산더 대왕 이후 4등분 한 왕조 중 하나인 헬라의 셀류커스가 팔레스타인을 지배하였는데, 이 때부터 이스라엘에게 시련이 닥쳤다. 주전 165년, 안티오쿠스 4세는 노골적인 유대교 말살 정책을 펼쳤다. 안식일, 할례, 성경 두루마리 소유를 금지하였고, 돼지고기를 먹도록 강요하였다.
특히 예루살렘 성전예배를 금지하였다. 예루살렘 성전에 제우스 신상을 세우고, 이를 숭배하도록 강요하였다. 성전은 더럽혀졌고, 많은 유대인들이 저항하다가 희생되었다.
더 이상 견딜 수 없던 유대 민족은 신앙의 자유를 찾아서 독립운동을 한다. 독립운동을 주도한 주인공은 마카비 가문이었고, 마침내 독립을 실현한 영웅은 유다 마카비였다. 구약성경 외경 마카베오 상, 하에 자세히 기록되었다.
드디어 해방이 찾아왔다. 예루살렘 성전은 회복되었고,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날이 왔다. 성전에서 가장 먼저 할 일은 성소 등대의 불을 켜는 일이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기름을 낭비하여 겨우 하루 분량밖에 남지 않은 것이다. 새 올리브기름을 얻으려면 약 8일이 걸린다고 하였다.
유다 마카비가 등대에 불을 붙였는데, 이것이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고 무려 8일 동안 불을 밝혔다. 놀라운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이 등대의 불이 꺼지지 않는 기적을 기념하여 지키는 절기가 ‘하누카’ 곧 ‘빛의 절기’이다.
시편 30편은 이 일을 감사하며 찬양한다. 감사는 기억하며 지킬 역사적 사건이 되었다. 모든 감사는 순간순간 고백하는 기도와 같지만, 늘 역사적인 사건이었고, 지금도 내게 반복될 하나님의 은혜로 다가온다.
“주의 성도들아 여호와를 찬송하며 그의 거룩함을 기억하며 감사하라”(4).
2)
시편 30편은 본래 개인의 감사 기도문이다. 기도자는 죽음에 이를 뻔한 무서운 병에 걸렸다. 이제 그가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목숨을 걸고 기도한다.
“여호와여 들으시고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여호와여 나를 돕는 자가 되소서 하였나이다”(10).
그는 하나님이 은혜 베푸시는 주님이심을 안다. 그리고 하나님이 도우실 손길이 예비되어있음을 믿는다. 결국 그는 죽음에서 기적같이 회복되었고, 이렇게 찬양한다.
“그의 노염은 잠깐이요 그의 은총은 평생이로다 저녁에는 울음이 깃들일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5).
그는 커다란 아픔 때문에 사경을 헤메던 사람이다. 오죽하면 죽을 자리가 찬양의 자리가 되었다고 찬양할까?
“주께서 나의 슬픔이 변하여 내게 춤이 되게 하시며 나의 베옷을 벗기고 기쁨으로 띠 띠우셨나이다”(11).
본문의 감사 찬양에는 두 가지 특징이 있다. 먼저 ‘성도들아’라고 복수로 부른다. 즉 하나님께 함께 예배하는 공동체 안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한다. 그리고 ‘저녁은 울음으로 시작하나 아침에는 반드시 기쁨으로 마무리 될 것’을 고백하며, 증언한다. 얼마나 큰 감격인가?
기도자에게는 한창 형통하던 시절이 있었다. 한참 잘 나갔다. 그 때는 자신이 잘나서 안전하고, 건강하고, 일이 잘 풀리는 줄 알았다. 아무런 겁날 것이 없었다. 그는 이렇게 장담하였다.
“내가 형통할 때에 말하기를 영원히 흔들리지 아니하리라 하였도다”(6).
그러나 하나님의 은총을 잊어버린 순간, 졸지에 형통함이 무너져 내렸다. 그는 자신의 잘못된 생각을 회고하며 고백한다. 기도자는 근심하며, 간절히 하나님께 탄원한다.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여호와여 나를 돕는 자가 되소서”(10).
기도자는 실패 속에, 고통 중에, 죽을 고비를 넘기며 더욱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게 되었다. 그는 하나님께 부르짖고, 간구하며, 도우심을 요청하였다. 그가 하나님께 간절히 졸랐더니 마침내 하나님이 그를 회복시켜 주셨다.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부르짖으매 나를 고치셨나이다”(2).
이제 죽을 고비를 넘긴 한 사람의 감사시는 온 백성이 함께 부르는 성전 낙성가로 확대되었다. 한 사람의 감동과 감사가 민족 전체에게로 확장된 것이다.
지난 주간에 색동교회 청년 중에서 김포시 월곶면 포내리로 농촌봉사활동을 다녀왔다는 소식을 까페에서 보았다. 나는 아주 오랜 전의 일을 떠올리며 감동하였다. 봉사활동을 한 곳은 문수산성교회 임충실 권사님 댁의 밭이었다. 34년 전 내가 개척한 교회이고, 그 분은 남자들 중에서 첫 성도였다.
임충실 형제는 아내가 먼저 교회에 다녔는데, 그는 아내를 박해하여 성경을 아궁이에 불태웠던 장본인이다. 그런데 그가 병원에 입원했다는 소식은 전도할 좋은 기회가 되었다. 사람들은 병상에서 세상에는 내 힘만으로 되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함을 배울 기회를 얻는다.
그리고 그해 성탄절 직전부터 교회에 출석하였다. 그 이듬해에 기도를 하는데 “하나님, 저는 아주 부족한 사람입니다. 많은 지도 편달을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당시 그는 많은 사람을 지도해야할 새마을지도자였다.
한번은 여름에 태풍이 불어 교회 지붕이 일부 날아갔다. 그는 지붕에 올라가 슬레이트를 교체한 후, 낮은 곳에서 훌쩍 뛰어 내려오다가 다리가 부러졌다. 아주 난감한 일이었다. 교회 봉사를 하다가 봉변을 당하다니! 그것도 개척교회에서!
그가 먼저 내게 말하였다. “전도사님, 소문나면 전도가 안 될 테니 그냥 집에서 농사일하다가 다친 것으로 할게요.”
그의 믿음은 색동교회와도 사랑의 줄이 닿아 있다. 색동교회를 개척한 후 문수산성교회에서 구유상을 만들어 보내왔다. 문수산성교회는 십자가 아래 구유상을 두었는데, 처음 구유를 만든 분이 바로 임충실 권사이다. 그는 기도를 제대로 하는 ‘하나님의 나라의 앵커맨’이었다. 그 시절에도 남한에 남는 쌀을 배고픈 북으로 보내야 한다고 기도하던 그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농부였다. 지금도 가을마다 첫 수확을 하면 내게 햅쌀을 한 가마니 보내주신다.
그인들 인생에서 뼈아픈 고생과 아픔이 없겠는가? 그런데 하나님은 그를 마치 깊은 우물에서 건져내시고, 새로운 삶을 살게 하셨다. 평생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게 하셨다. 그는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분이다.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기도자는 회중에게 함께 감사하고, 찬양하자고 권유한다. 신앙공동체에서 한 사람의 감사는 모든 성도의 감사가 될 수 있다.
3)
이번에 감리사 해외연수 중에 마드리드 사랑의교회를 방문하여 주일예배를 드렸다. 스페인에 사는 한인들과 인사를 나누고, 대접을 받았다. 예배를 시작하면서 찬양하는데 가슴이 먹먹해지고 목이 메었다. 만리타향 디아스포라교회의 예배드리는 심정이 가슴에 와 닿았다. 사실 하나님께 예배하러 나온 사람에게 모든 교회는 ‘본 교회’이고, 모든 사람은 ‘성도들’이다.
하나님께서 이방인 가운데 사는 디아스포라에게 특별한 관심과 은혜를 베푸신다.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나그네로 여기는 사람을 하나님은 늘 함께하신다.
성경에서 대표적 감사절은 무교절, 오순절, 장막절이다. 그 가운데 무교절은 봄 감사절이고, 맥추절은 여름 감사절이다. 맥추절을 가리켜 칠칠절, 오순절이라고 불린다.
무교절이 ‘종의 고난’을 기억한다면, 맥추절 또는 칠칠절은 ‘자유인의 감사’를 의미한다. 무교절에는 애굽의 억압에서 종살이 한 것을 기억하여 누룩을 넣지 않은 딱딱한 무교병과 쓴 나물을 먹는다. 그런데 맥추절에는 누룩을 넣은 맛있는 빵을 먹는다.
레위기 23장에 따르면 제사장은 새로 수확한 밀로, 누룩을 넣어 만든 “떡 두 개”(레 23:17)를 하나님께 바친다. 하필이면 두 개의 떡일까? 칠칠절에 제사장이 드리는 ‘두 개의 떡’은 유대인과 이방인을 상징한다. 즉 유대인과 이방인의 하나 됨을 예표하는 것이다.
맥추절(칠칠절)에 유대인은 다섯 두루마리 가운데 룻기를 읽는다. 룻기는 이방인 모압 여성 룻이 유대인과 한 가족이 되었다는 것을 기념하는 것이다. 룻은 이방 여성이었지만 시어머니를 따라 베들레헴으로 따라왔다.
당시 이스라엘은 가나안 땅에서 먹고 살만해지자, 애굽에서 해방 시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잊었다. 해방의 기쁨을 잊고 또 12지파 동맹의 정신에 등을 돌렸다. 모두가 쉽게 배교하던 시대였다. 그런데 이방 여자 룻은 하나님 신앙을 일깨워 준 것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룻 1:16).
우리는 하나님이 나를, 바로 자신을 주님의 자녀요, 주님의 백성으로 삼아주셨음 기억하며 감사드린다. 세상에 자기 본향에서 사는 사람이 누구인가? 하나님을 만나기까지 모두 타향에서 살아간다.
시편 30편은 고작 12절 밖에 안 되지만, 이 안에는 거룩하신 하나님의 이름으로 가득하다. “여호와”가 10회, “내 하나님”은 2회 그리고 “주”는 13회나 된다. 기도자에게 하나님의 이름은 기도 그 자체이다.
왜 이렇게 하나님의 이름을 많이 부를까? 구약 셰키나 사상에 따르면 하나님의 ‘이름’ 속에는 인격과 본질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을 소리 내어 부르면, 하나님은 몸소 거기 계신다. 성전을 가리켜 ‘하나님의 이름의 거처’라고 부르는 이유이다.
내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 내 삶은 하나님이 머무시는 현장이 된다. 하나님의 이름은 하나님이 내게로 향하시고, 나는 하나님께 다가설 수 있는 길이 된다. ‘하나님의 이름’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보증한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의 이름’을 걸고 하나님께 호소한다.
기도할 수 있다는 것이 먼저 내게 주신 감사이고, 기도하는 순간 감사의 마음이 이미 우리에게 임한다. 여기에 풍성한 생명이 열려있다. 여기에 넘치는 은혜의 창고가 있다.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감사하라. 감사란, 늘 내 삶에서 느끼는 ‘과분함’에서 비롯된다. 행복한 사람은 감사하는 사람이다. 그는 자기 분수와 그릇을 잘 알고 있다. 그러기에 내게 베푸신 그 잔에 은총이 넘침을 늘 경험한다.
“내 잔이 넘치나이다”(시 23:5).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어쩌다 로맨스’란 영화를 봤다. 아주 흔하디 흔한 할리우드 코메디였다. 그런데 이런 대목이 있다. ‘우주 온 구석을 다녀 봐도 나 만큼 가치 있고 소중한 존재를 보지 못했다’고!
여러분은 어떤가? 과연 나는 행복한가? 내 행복의 기준은 무엇인가? 행복은 순간의 감정이 있는 것이 아니다. 지금 내가 감사하는 마음과 믿음으로 사느냐, 아니냐가 그 기준이다. 행복은 평생 지켜낼 하나님을 향하는 기도이며, 감사하려는 의지이다.
그리스도인은 이런 삶의 슬로간이 필요하다. 인생의 모든 방향에서 하나님을 향한다.
‘뒤로는 감사하며, 앞으로는 용기있게, 옆으로는 사랑하며, 위로는 믿음으로.’
바로 믿음의 길이다.
하나님의 동행하심이 언제나 여러분의 삶 속에서 기억되고 감사를 드리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린다.
첫댓글 항상적이고 역사적인 감사, 타향살이, “내 잔이 넘치나이다”(시 23:5).
‘뒤로는 감사하며, 앞으로는 용기있게, 옆으로는 사랑하며, 위로는 믿음으로.’ 주님께 영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