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연 金泰淵(1893 ~ 1968)】 " 대한통의부 국내파견 결사대장 ,정의부, 신미부 참여"
1893년 8월 8일 평안북도 삭주군(朔州郡) 삭주면(朔州面) 용영동(龍泳洞)에서 태어났다. 1919년 고향인 용영동에서 마을 청년들과 만세시위에 참가한 뒤 남만주로 건너가 이천민(李天民)의 휘하에서 활동하였다.
1921년 9월 태평양회의(太平洋會議) 개최를 앞두고 일제의 식민 통치에 반대하고, 자주 독립을 열망하고 있음을 만방에 알릴 필요가 있다는 이천민의 지시에 따라 대원들과 함께 국내로 잠입하였다. 그 해 9월 17일경 대원 11명의 대원과 함께 소금배를 타고 압록강을 건넌 뒤 산줄기를 타고 삭주군 대관면(大舘面)까지 갔다.
1921년 9월 18일 밤 4명의 대원을 데리고 대관주재소(大舘駐在所)를 습격하였다. 일제 경찰과 총격전이 벌어지자 주재소에 폭탄을 던져 전소시키고, 일제 경찰 1명을 사살하였다. 그리고 마을 사람들과 함께 ‘대한독립만세’를 외치고, 총 7정, 군도 1개, 엽총 6정 등의 노획물을 가지고 만주의 본부로 돌아왔다.
1922년 6월 2일 열린 남만한족통일회(南滿韓族統一會)에서 통의부(統義府)와 의용군을 결성하고 총장 김동삼(金東三)을 비롯한 인원을 선출하였다. 이때 강수영(姜壽永)·이만성(李萬聲)·이석수(李析洙)·정창화(鄭昌化) 등과 함께 검무국(檢務局) 검무원(檢務員)으로 선출되었다. 당시 검무국장은 최명수(崔明洙), 검무감은 김관성(金觀聲)이었다. 6월 20일경에는 6명의 대원들을 데리고 의주군(義州郡)까지 도보로 60리를 이동하여 영산(永山)경찰주재소를 공격하였다. 일제 경찰을 처단하고 주재소를 전소시켰으며 장총 5정과 군도 9개, 소총 1정의 군수를 노획해 본대로 돌아왔다. 이러한 활동으로 일제의 집중적인 수배 대상이 되었다.
이후 정의부(正義府)에 참여한 데 이어서 1925년에는 북만주로 건너가 신민부(新民府)에서 활동하였다. 1930년 후반까지 북만주 지역을 중심으로 군자금 모집, 밀정 처단, 일제 기관 습격 등 지속적으로 항일투쟁을 이어나갔다.
1938년 일제의 본적지 조회로 수배 인물임이 드러나, 그 해 4월 8일 헤이룽장성(黑龍江省) 무단현(木蘭縣)에서 일제 경찰에 붙잡혔다. 이 해 6월 평북경찰부에서 신의주지방법원으로 송치되어 1939년에 ‘정치에 관한 범죄 처벌의 건’ 위반·강도·살인·방화 등으로 징역 15년을 받았다. 판결에 불복하여 평양복심법원에 항소했으나 기각당하였고, 1939년 6월 26일 징역형이 확정되었다. 경성형무소와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던 중 광복을 맞아 풀려났다.
1945년 출옥 후 당시 서울의 거부였던 임종상의 집에서 두 달 정도 기거하다가, 그 해 10월 고향으로 돌아갔다. 1946년 8월 먼저 월남했으나, 이후 가족과 해후하지 못하고 1968년 12월 10일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김태연 신의주지방법원 검사국 송치 보도 기사(『동아일보』, 1938. 6. 10) [판형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