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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5월 22일
박수근作 ‘빨래터’ 45억2천만원에 낙찰
5월 22일 경매에서 45억2천
만원에 낙찰된 박수근의 유화 ‘빨래터’.
박수근 화백의 1950년대 후반 유화 ‘빨
래터’(37×72㎝)가 2007년 5월 22일
열린 제106회 근현대 및 고미술품 경매
에서 45억2000만원에 낙찰됐다.
불과 두 달 전 자신의 기록 25억원을
훌쩍 넘기며 한국 경매사상 최고가 기록을 세웠다.‘빨래터’는 강가에서 나란히 빨래
하는 여인 6명을 캔버스에 담은 작품이다.
이날 33억원에 경매가 시작돼 2000만
~5000만원씩 높여 호가되다가 가볍게 45억원을 넘기며 전화 응찰자에게 낙찰
됐다.
이 작품을 내놓은 사람은 80대의 미국인
으로 1950~1960년대에 군수품 사업을 하며 한국을 드나들다 박수근을 알게 됐던 그의 후원자였다고 서울옥션측이 밝혔고, 산 사람은 국내 개인 컬렉터로 알려졌다.
▶2011년김학원 前 자민련 대표 별세
▶2009년폐암 투병 탤런트 여운계씨 별세
👉🏿 47년간 배우로 살아온 여운계(69)씨가 2009년 5월 22일 오후 8시쯤 폐암으로 별세했다. 여씨는 KBS 2TV 드라마 ‘장화홍련’ 첫 방송을 앞둔 지난달 23일 갑작스레 촬영을 중단하면서 폐암 투병 사실이 알려졌다. 여씨는 이후 인천성모병원에서 암 치료를 받아왔다.
고려대 국문학과를 졸업한 여씨는 대학시절 연극활동을 하며 연기에 대한 꿈을 키웠고, 1962년 TBC 탤런트로 연예계에 입문했다. 개성있는 외모로 ‘별명붙은 여자’(1969) ‘방자와 향단이’(1972) 등에 출연했고, 이후 드라마와 영화에선 주로 어머니 역을 맡았다. 여씨는 드라마 ‘아씨’(1972) ‘토지’(1986) ‘사랑이 뭐길래’(1991) ‘대장금’(2003) 등에서 탄탄한 연기로 극을 받쳤다. 특히 할머니 연기자들이 주연으로 나온 영화 ‘마파도’(2005) 이후에는 새로운 전성기를 맞은 듯 더욱 활발히 활동했다.
“연기는 내 운명이었다”고 말해 온 그는 2007년 신장암 진단 후에도 드라마 ‘며느리 전성시대’ 촬영을 계속했다. 고인과 절친했던 동료 배우 전원주씨는 “매니저도 없었던 고인은 몸이 아파 힘든데도 새벽에 손수 운전을 해 강화도 촬영장까지 오갈 만큼 연기를 위해 온몸을 바쳤다”고 말했다.
▶2007년김영삼 전 대통령, 국립 5·18 민주묘지 첫 참배
👉🏿 김영삼(金泳三) 전 대통령이 5·18 단체들의 초청을 받아 국립 5·18 민주묘지를 처음으로 참배했다.
김 전 대통령은 22일 오전 11시 40분쯤 김무성·정의화·이경재·김기현 의원과 오정소 전 국가보훈처장 등 20여 명과 함께 광주 북구 운정동 국립 5·18 민주묘지를 찾았다. 김 전 대통령은 방명록에 ‘자유(自由), 정의(正義), 진실(眞實)’ 이라고 쓴 뒤 5·18단체 회원 100여 명의 환영을 받으며 추모탑 앞에서 헌화·분향하고 묘역 마당에 금목서 나무를 심었다.
김 전 대통령은 유족들과 악수를 나누며 위로했으며, 박경순 5·18묘지관리소장의 안내를 받아 고(故) 홍남순 변호사의 묘 등 묘역 곳곳을 둘러봤다. 이어 5·18 희생자의 영정과 위패가 모셔진 유영봉안소를 둘러본 뒤 “더 일찍 왔어야 하는데 여건이 여의치 않았다” 며 “묘지 조성 때 토지 매입에 어려움을 겪었는데 직접 와서 보니 전국에서 가장 잘 정비돼 있는 것 같아 기쁘다” 고 말했다.
참배를 마친 김 전 대통령은 광주 남구 프라도호텔에서 이홍길 5·18기념재단 이사장으로부터 재임 당시 5·18특별법 제정, 국립묘지 승격 등이 이뤄진 데 대한
감사의 뜻을 담은 감사패를 받았다.
김 전 대통령은 인사말을 통해 “11년 만에 광주를 방문, 5·18묘지를 처음 참배하게 돼 목이 멜 만큼 감개무량하다” 며 “민주주의를 최고의 가치로 삼고 살아온 만큼 5·18 희생자와 동지들을 누구보다 존경하고 그 뜻을 함께 하겠다” 고 말했다.
이날 묘역 주변에서는 남총련 학생 50여 명이 김 전 대통령의 참배에 반대하는 피켓시위를 벌였으며, 광주전남진보연대 등은 감사패 증정에 반대하는 성명을 내기도 했다.
▶2007년정부, 부처 브리핑룸 3곳으로 통폐합 확정
▶2006년AP 계열사 평양지국 설립
▶2006년이종욱 WHO사무총장 제네바서 별세
▶2005년북한 화물선 21년만에 남한에 입항
▶2005년일본 제11회 노베야마 울트라 마라톤 대회에서 대우조선 근로자 심재덕씨 우승
▶2004년스페인 펠리페 왕자 앵커 출신 레티시아 오르티스와 결혼
▶2004년세계보건기구(WHO) ‘비만과의 전쟁’ 선포
▶2004년야기라 유야, 제57회 칸 영화제서 최연소 남우주연상 수상
▶2004년‘올드보이’ 제57회 칸 국제
영화제 심사위원대상 수상
👉🏿 박찬욱 감독의 영화 ‘올드 보이’가 23일(현지시각) 막을 내린 제57회 칸 국제영화제에서 심사위원대상(Grand Prix)을 차지했다.
심사위원대상은 이 영화제 최고 영예인 황금종려상 다음으로 큰 상으로, 한국 영화가 가장 권위있는 영화제인 칸 국제영화제에서 심사위원대상을 받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2002년 임권택 감독이 ‘취화선’으로 감독상을 받은 것이 칸에서 한국 영화의
최고 수상 기록이었다.
황금종려상은 영화제 내내 최고 화제를 몰고다니며 찬사를 받은 미국 감독 마이클 무어의 ‘화씨 911(Fahrenheit 911)’에 돌아갔다.
임권택(취화선·칸 영화제) 이창동(오아시스·베니스) 김기덕(사마리아·베를린) 감독이 세계 3대 영화제에서 각각 감독상을 따내는 성과를 거뒀던 한국 영화는 이제 ‘올드 보이’의 박찬욱 감독을 통해 칸 영화제에서 그랑프리(심사위원대상)까지 받아냄으로써
국제적 위상을 확고히 했다.
박찬욱 감독은 수상 직후 가진 인터뷰에서 “한국영화에 대한 관심의 폭증 때문에 좋기도 하지만 부담스럽기도 하다”고 밝혔다. “예전처럼 ‘동양에서 온 귀염둥이’ 정도의 취급을 받는 경우가 사라져 좋지만, 한국영화 대표 그룹 중 한 명으로 대접받으면서
부담되기도 한다”는 설명이었다.
▶2004년일본-북한 제2차 정상회담, 국교정상화 교섭재개에 합의
▶2003년일본 스키어 에베레스트 최고령 등정
▶1998년‘비아그라’ 부작용 첫 공식 확인, 6명 사망
▶1994년사회운동가 장일순씨 별세
▶1993년현정화, 세계탁구선수권대회에서 여자단식 우승
👉🏿 1993년 5월 22일 밤 스웨덴 예테보리. 준결승서 루마니아의 강호 오틸리아 바데스쿠에 대역전승을 거둔 현정화 선수는 잔뜩 기세가 올라 있었다. 결승 상대는 대만의 첸징. 정신없이 상대를 몰아붙이는 현정화 특유의 전진속공이 살아나면서 반 박자 빠른 스매싱이 연속으로 테이블에 꽂혔다. 관중의 박수소리에 정신을 차린 순간 스코어는
3대0. 첸징은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올림픽보다 훨씬 어렵다는 세계탁구선수권대회 여자 단식 우승으로 현정화는 ‘세계선수권 그랜드슬램’ 을 이루며 탁구여왕에 등극했다.
1987년 양영자와 여자 복식에서 우승하며 기록사냥의 돛을 올린 현정화는 1989년 유남규와 혼합복식 정상에 올랐고 1991년엔 남북단일 코리아팀으로 출전, 만리장성을 넘어 단체전 왕관을 거머쥐었다. 그리고 자신이 마지막으로 출전했던 세계선수권에서 대망의 단식 우승을 차지해 극적이고 화려한 피날레를 장식했다. 현정화의 우승으로
1973년 사라예보에서 시작된 막강 한국 여자탁구의
신화는 정점에 올랐다.
▶1992년재일교포 소설가 이양지 사망
▶1990년남북예멘 통일 선포
▶1990년루마니아 대통령선거에서 일리에스쿠 당선, 공산주의와 결별 선언
▶1990년한국-예멘, 국교수립
▶1984년서울 지하철 2호선 전구간 개통
👉🏿 서울지하철 2호선중 잔여구간인 시청앞∼서울대입구간 19.2km가 1984년 5월 22일
개통, 운행을 시작했다. 이로써 서울의 강남과 강북을 한바퀴 도는 순환선인
2호선의 48.8km 전구간이 개통돼 서울은 본격적인
지하철시대를 맞이하게 됐다.
완공된 2호선은 1978년 3월 착공, 6년2개월 만에 개통된 것으로 투입된 공사비만 8천7백80억원이었다. 이날 개통된 구간은 시청앞 충정로 아현 이대앞 신촌 홍대입구
합정 당산 영등포구청앞 문래 신도림 대림 구로공단 신대방 신림 봉천 등
16개 역으로 2호선 전체를 한바퀴 도는 데 83분이 소요됐다.
개통 당시 요금은 1백 10원에서 최고 1백 80원으로 현재 1구간 700원, 2구간
800원인 요금에 비하면 꽤 저렴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또, 2호선은 영동, 잠실, 영등포, 신촌 등의 부도심권과 도심을 직결, 도시기능분산에
기여했으며 서울대, 연대, 이대, 서강대 등 서울시내 상당수 대학가 부근을
지남으로써 학생들에게 통학편의를 제공해 주었다.
▶1980년박충훈 국무총리 서리 취임
▶1974년남북적십자 제6차 실무회담 판문점에서 개최
▶1974년아산만 방조제 완공
▶1972년실론을 스리랑카공화국으로 국호 개칭
▶1967년브뤼셀 백화점서 대화재 280여명 사망
▶1967년미국 흑인 작가 휴스 사망
▶1963년아프리카 독립제국 수뇌회담 개최
▶1963년한국-오스트리아, 국교수립
▶1960년칠레 남부 발디비아(Valdivia) 규모 9.5 지진(관측 사상 최대)
▶1955년주한미군, 원조고문단 설치
▶1954년제네바회의에서 변영태 한국대표 14개 통한방안 제시
▶1947년남북간 물자교류 허용
▶1946년소련 만주에서 철수완료를 발표
▶1939년독일-이탈리아 군사동맹 체결
▶1930년독립운동가 장인환 사망
▶1914년농공은행령.지방금융조합령 공포
▶1911년청. 철도국휴화 선포
▶1908년라이트형제, 비행기계 특허 취득
▶1907년이완용 내각 성립1907년무용가 조택원 출생
▶1907년영화배우 로렌스 올리비에 출생
▶1906년명신여학교 설립(현 숙명. 엄귀비)
▶1905년경성중학교 설립
1885년 프랑스의 위대한 문호 빅토르 위고 사망
▶ 1882년 조미(朝美) 수호통상조약 체결, 최초의 쌍무협약
👉🏿 조미(朝美) 수호통상조약은 19세기 말 숨가쁘게 돌아가던 동아시아 국제외교의 산물이었다. 미국에 조선개항은 대(對)아시아 무역팽창정책을 펼치고 러시아의 남진을 저지
할 수 있다는 점에서 매력적인 요소였다. 강제개항을 시도했지만 실효를
거두지 못하자 포함외교(砲艦外交)를 포기하고 청의 중재를 통한
개항으로 방향을 선회한다.
청의 이홍장은 러시아의 남침과 일본의 대한 침략을 저지하기 위해 조선에 미국 세력을 끌어들일 필요가 있었다. 대한(對韓)종주권 유지를 위해서였다.
이홍장은 조선에 밀서를 보내 조약의 긴요성을 역설한다. ‘조선책략(朝鮮策略)’이 소개돼 쇄국정책에 대한 인식전환이 조선에 막 싹틀 때였다. 조선책략은 아라사(러시아)의
남진을 막기 위해(防俄) 조선은 중국과 친하고(親中) 일본과 결탁하고(結日)
미국과 연대(聯美)해야 한다는 내용을 담은 책.
고종은 척사파의 반대를 피해 대청(對)교섭을 비밀리에 추진, 전권을 청에 위임한다.
미국과 청이 조선을 사이에 두고 테이블에 마주앉았다. “조선은 청의 속국”
이라는 속방(屬邦)조항을 조약에 명문화할 것을 고집한 청과 이를
반대하는 미국이 대립했지만 결국 별도 조회문에서 속방론을
밝히기로 하고 외교전을 마감한다.
1882년 5월 22일, 조미수호통상조약이 강화도에서 체결됐다. 불평등이 배제된 주권 독립국가 간의 최초의 쌍무적 협약이었다.
▶ 1877년 독립운동가 임용상 출생
▶ 1873년 이탈리아 소설가 만초니 사망
▶ 1859년 명탐정 셜록 홈스를 만들어낸 영국의 작가 코넌 도일 출생
▶ 1813년 독일 작곡가 바그너 탄생
▶ 1602년 중국 남명의 황제 융무제 출생
▶ 1422년 경상도 성주(星州) · 김산(金山) · 합천(陜川) ·거제(巨濟)에 지진 발생
▶ 1388년 이성계(李成桂), 위화도회군(威化島回軍)으로 실정 장악
👉🏿 1388년(우왕 14) 5월 22일 요동정벌(遼東征伐)에 나선 우군도통사(右軍都統使)
이성계(李成桂)가 압록강 하류 위화도에서 군사를 회군했다.
당시 고려의 외교는 친명(親明)에서 친원(親元)으로 바뀌어 가고 있었고, 내부에서도
친원파와 친명파가 대립하고 있었다. 중국을 통일한 명나라가 1388년 3월 철령
이북 땅의 쌍성총관부와 동녕부 관하 지역에 철령위를 설치한다고
통고하자, 고려에서 최영(崔瑩)이 중심이 되어 명의 전초기지인
요동을 정벌하자는 요동정벌론이 제기되었다.
이에 우왕은 최영을 팔도도통사(八道都統使)로 삼아 평양에 나아가 독전하게 하고
조민수(曺敏修)를 좌군도통사, 이성계를 우군도통사로 삼아 5만 정벌군을
이끌고 출정하게 하였다.
처음부터 요동정벌론에 반대한 이성계는 정벌군이 압록강 하류 위화도에 이르자 진군을 멈추고, 좌군도통사 조민수와 상의하여 4불가론(四不可論)을 상서(上書)로써
회군을 청하였다. 4불가론은 첫째, 약소국이 강대국을 상대로 싸우는
것은 상책이 되지 못한다.
둘째, 여름철에 군사를 일으키는 것은 부적당하다. 셋째, 요동을 공격하는 틈을 타서
남쪽에 왜구의 침입이 증대할 것이다. 넷째, 당시 장마철이라 무기가 온전치
못하고 전염병이 돌 위험이 크다는 것이다.
그러나 평양에 있던 최영과 우왕이 이를 허락하지 않자, 이성계는 5월 22일 회군을 결행하여 군대를 국내로 돌이켰다. 그해 6월에 개경을 점령한 뒤 최영을 체포해서 유배
시키고 우왕을 퇴위시켰다. 처음에는 종실 중에서 국왕을 택하려 했으나
조민수·이색의 주장으로 우왕의 아들 창왕을 즉위시켰다.
그러나 조민수가 이성계파의 탄핵으로 실각하고 이성계가 권력을 장악하면서
창왕도 폐위당하고 공양왕이 뒤를 이었다.
결국 이 사건은 이성계파가 권력을 장악하고 조선건국의 기틀을 마련하는 계기가
되었다. 우왕도 강화도로 쫓겨났다가 다음해인 1389년 그 아들 창왕과 함께
살해당하였다. 이를 계기로 이성계는 정치적·군사적 권력을 한손에
잡아 조선창업의 기반을 구축하게 되었다.
▶ 337년 비잔티움 제국 창시자 콘스탄티누스 1세 황제 사망
https://youtu.be/p6jSGSBR4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