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시베리아 철도, 전철화 완공
세계 최장 철도인 시베리아횡단철도(TSR)의 전철화 작업이 완공됐다. 지난 1929년 착공한 뒤 73년 만의 일이다. 러시아 철도부는 2002년 12월 25일 극동 루지노역에서 기념행사를 갖고 “극동 지역 일부 구간의 전철화가 끝나, TSR 전 구간 전철화 사업이 완료됐다”고 선언했다.
TSR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모스크바까지 총연장 9288km이며, 동쪽 태평양에서 서쪽 발틱해까지 광활한 대지를 관통하는 세계 최장 단일 철도시스템이다. 지난 1891년 제정러시아 황제 알렉산더 3세 칙령으로 시작된 TSR 건설은 경제·군사적 목적이 강했다. TSR은 1901년 만주횡단을 통해 완공됐지만, 러시아 국경만을 거치는 노선은 1916년 완성됐다. 아무르강을 따라 건설된 하바로프스크~블라디보스토크 구간은 죄수들을 투입, 중장비 하나 없이 맨손으로 부설됐다.
철도 완공은 시베리아 혁명, 즉 시베리아 개발·이주·정착 등 산업화를 가져왔다. 현재 러시아 인구의 5분의 1(약 3100만명)이 TSR 주변 도시를 중심으로 살고 있으며, 러시아 경제의 70% 이상이 TSR을 기반으로 움직인다. 전철화로 동북아·유럽을 잇는 철도 현대화 작업이 완성됐으며, 러시아가 갈망해온 한반도 종단철도를 위한 기반이 확보됐다. 러시아 철도부 겐나디 베데르니코프 대변인은 “전철화로 열차 1회의 수송량이 두 배(6000t)까지 늘어나게 됐으며,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러시아 서부 국경 지역까지 시속 120km로 달릴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조선
[1991년]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 연방 대통령 활동 중단 선언
옛 소련의 미하일 고르바초프 연방대통령이 1991년 12월 25일 소련(USSR)연방 대통령으로서 활동을 중단한다고 선언, 연방대통령직 사임을 공식 발표했다.
이로써 소비에트사회주의 공화국연방(USSR)의 해체와 더불어 11개 공화국의 독립국공동체(CIS) 탄생과 옛 소련 최고지도자인 연방대통령직의 소멸이 공식화됐다.
소련의 8번째 지도자인 고르바초프는 소련 역사상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연방대통령'에 재임, 6년9개월 동안 소련을 이끌어왔다.
이날 전 세계에 생중계된 모스크바의 중앙TV 뉴스 시간에 연설 형식으로 사임을 발표한 고르바초프는 연설에서 소련 연방을 해체하고 그것을 11개 공화국 독립국 공동체로 대체한 것은 우리 국민들과 세계공동체에 중대한 위협을 부과하는 것이라고 경고했다. /조선
[1989년] 타임지, 고르바초프 소련공산당 서기장을 '80년대의 인물'로 선정
고르바초프 전 대통령은 1989년 러시아를 개혁한 공적을 인정받아 타임지가 인정한 ‘80년대의 인물’로 뽑힌 바 있다.
고르바초프는 “푸틴과 나는 어떤 점에 있어서는 각각 다른 관점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그러나 중요한 사실은 러시아의 추세가 바뀌었으며 삶의 질도 향상됐다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노벨 평화상 수상자인 엘 고어 전 미국 부통령과 해리포터의 작가 조앤 롤링 역시 ‘올해의 인물’로 선정됐다.
푸틴 대통령은 고르바초프, 안드로포프, 흐루시초프, 스탈린에 이어 러시아 지도자 중 5번째로 ‘올해의 인물’로 뽑혔다. 이정인(JOINS) /Joins AP월드
[1989년] 루마니아 독재자 차우셰스쿠(Ceausescu, Nicolae) 총살형
1918. 1. 26 ~ 1989. 12. 25
루마니아 차우셰스쿠 대통령과 부인이 특별군사재판에서 사형선고를 받아 1989년 12월 25일 총살형에 처해졌다. 차우셰스쿠 정권은 비밀경찰을 이용해 완벽한 언론통제를 해와 부인을 제1부수상으로 하는 등 권력을 남용해왔다.
헝가리계 주민의 인권옹호에 적극적인 한 목사를 연행하려는 정부방침에 헝가리계 주민이 반발하자 정부는 진압부대를 파견, 반정부운동을 하는 1만명 이상의 시민을 학살했다.
이것이 계기가 돼 1989년 동구권에 불어닥친 자유화 물결에 루마니아도 독재타도와 민주화을 요구하는 시민봉기가 일어났다. 봉기는 수도 부카레스트에도 파급돼 치안부대와의 충돌로 다수의 민중이 사상했지만 군대가 시민편에 서자 차우셰스쿠는 12월 22일 해외망명을 시도했으나 루마니아군에 의해 체포됐다. /조선
[1977년] 찰리 채플린 사망
채플린 [Chaplin, Charles Spencer, 1889.4.16~1977.12.25]
흑백 무성영화시대의 전설적 스타 찰리 채플린(Charlie Chaplin)이 1977년 12월 25일 오전 4시 스위스 로잔 자택에서 88세로 영면했다. 채플린은 영화 1백년 역사상 대중들로부터 가장 폭넓은 사랑을 받은 배우이자 감독, 그리고 제작자였다.
첫 장편 연출작 '키드'(1920)에서 후기 대표작 '라임 라이트'(1952)에 이르기까지 그는 같은 시대를 살아간 사람들에게 영화보는 재미와 멋을 알게 해준 영화예술가였다. 배우출신의 알콜중독자인 부친과 정신병원을 전전한 모친 사이에서 태어난 그의 어린시절은 늘 불우했다. 채플린이 뉴욕 연극무대를 거쳐 헐리우드에 진출한 것은 헐리우드가 영화도시로서의 틀을 갖춰가던 1913년이었다.
'키드'와 '시티라이트'(1931)에서 따스한 인간애의 중요성을 강조한 채플린은 전체주의가 휩쓸던 1940년 '위대한 독재자'를 통해 시대의 잘못된 조류에 정면으로 대항했다. 채플린의 영화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은 '모던 타임스'(1936)이다. 이 영화는 컨베이어 벨트에 얽매인 노동자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시계에 지배되는 현대 자본주의 문명 속에서 인간이 겪는 소외를 날카롭게 파헤친 것으로 평가받았다.
그는 2차대전이 끝난뒤 냉전 분위기속에서 공산주의자로 몰려 1952년 미국에서 추방되었으나 1972년 다시 미국으로 돌아와 아카데미 특별상을 수상했다. /조선
[1971년] 서울 대연각호텔 화재 ← 대연각 호텔 화재 현장
1971년 12월 25일 성탄절 아침 9시50분, 서울 충정로 1가 대연각호텔 2층 커피숍에서 LPG 가스폭발로 불이 나 지하 2층, 지상 21층의 빌딩을 몽땅 불태워버렸다.
32m 길이의 국내최고 사다리차를 뻗쳐 진화작업에 나섰으나, 7층까지밖에 미치지 못해 인명 구조용으로만 쓰여 안타까움을 자아냈다. 불은 8시간만인 오후 5시반경 모두 진화됐다. 이 불로 2백22개의 객실에 들어있던 1백67명의 투숙객들이 불타 숨지거나 질식사 또는 떨어져 죽었으며 64명의 부상자를 냈다. 사망자 가운데는 주한 터키 대사관 무관 1명을 포함, 외국인이 13명으로 확인됐으며 일본인 3명은 실종됐다. 피해액만도 8억5천만원에 달해 세계 호텔화재사상 대규모의 화재로 기록됐다.
경찰은 주방 안의 LPG 가스가 폭발, 주방옆에 있는 비상통로와 환기창을 통해 불길이 삽시간에 위층으로 번졌다고 발표했다./조선
[1938년] 체코의 극작가 겸 소설가 카렐 차페크 사망 ← 카렐 차페크
체코의 극작가 겸 소설가 카렐 차페크가 1938년 12월 25일 사망했다. 차페크는 밀란 쿤데라와 함께 체코어로 작업을 한 가장 유명한 작가이고, 20세기 세계 문학사에 반드시 기록돼야 할 작가 중 한명이다.
차페크 작품 중 가장 널리 알려진 작품은 `로봇`(1920)이다. 체코어로 `일하다(rbota)`라는 동사를 바탕으로 차페크가 만들어낸 `로봇`이라는 단어는 이제 현대 과학기술의 상징어로 자리잡고 있다.
작가는 이 작품에서 인간이 부리는 로봇이 노동을 통해 지능을 얻게 돼 마침내 인간을 멸망시키는 상황을 설정함으로써 자동화가 미래의 사회에 끼칠 영향에 대한 전형적인 비관론을 표출했다./조선
[1926년] 히로히토(裕仁) 제124대 일왕으로 즉위
1926년 12월 25일, 히로히토(裕仁) 제124대 일본 왕이 25세 나이로 즉위했다. 원호(元號)는 ‘쇼와(昭和)’. 히틀러·무솔리니와 함께 2차 대전 3대 전범으로 꼽히는 히로히토는 왕이 되기 전부터 군국주의적 교육과 환경 속에서 뼈가 굵었다. 어린시절 다닌 귀족학교 교장부터 골수 천황파이자 군국주의자로 유명한 노기 마레스케(乃木希典)였다. 히로히토는 미국 타임지와의 인터뷰에서 그런 노기를 거리낌 없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꼽을 정도였다.
하지만 군국주의자 히로히토의 얼굴은 종전후 극적으로 바뀐다. 일제의 침략전쟁을 총지휘한 현인신(現人神)이던 그가 ‘군부의 희생양’ ‘해양생물학자’ ‘타고난 평화주의자’로 미화됐다. 이런 변신은 맥아더의 정치욕과 미소냉전 개막, 히로히토의 비굴한 생존전략에서 비롯됐다.
히로히토가 총애한 도조 히데키조차 전범재판에서 “일본 사람 누구도 천황이 시키지 않은 일을 하는 사람은 없다”고 증언했지만, 맥아더와 재판관들은 귀를 막았다. 그러나 2000년 12월 ‘일본군 성노예 전범 국제법정’은 히로히토에 대해 “인간의 노예화·고문·살인·인종차별 등 인도(人道)에 관한 죄를 범했다”고 사후에나마 단죄했다. /조선
[1918년] 사다트 이집트 대통령 출생
사다트 [Sādāt, Muhammad Anwar el-, 1918.12.25~1981.10.6]
육군사관학교를 거쳐 육군대학을 졸업하였다. G.A.나세르와 함께 자유장교단을 결성하고, 1952년 이집트혁명 때에는 자유장교단의 일원으로서 참가하였다. 1951∼1957년에 국무장관, 1957∼1961년 국민연합(아랍사회주의자연합)의 서기장, 1961년에 국민의회 의장을 거쳐 1962∼1964년 대통령평의회의원을 지낸 후 1964년 부통령 겸 국민의회 의장이 되었다. 1970년 9월 대통령 나세르가 병으로 사망하자 그뒤를 이어 10월 제3대 대통령으로 취임하였다. 1973년 제4차 아랍이스라엘분쟁 때에는 직접 이집트군을 지휘하여 전세를 유리하게 이끌었다.
그는 현실주의적인 온건노선을 취하여, 1977년 이스라엘을 방문하고 중동평화의 길을 열었다. 이로 인하여 1978년 이스라엘의 수상 베긴과 함께 노벨평화상을 받았으며, 이어 1979년 3월 이스라엘과의 평화조약에 조인하였다. 이렇듯 중동평화의 주역을 담당하고 있던 그는 1981년 10월 6일 카이로 근교 나스루에서 대(對) 이스라엘 10월전쟁 8주년 기념식장에 참석하였다가 총격을 받고 사망하였다. 저서에 《나일의 반란 Révolte sur le Nil》(1957)이 있다. /naver
[1899년] 미국 배우 보가트(Bogart, Humphrey) 출생 ← 〈Sahara〉에 출연한 보가트(1943)
"현명한 남자는 결코 여자와 맞서 욱박지르지 않는다. 스스로 알아서 할 때까지 기다린다." - 험프리 보가트
본명은 Humphrey DeForest Bogart.
1899. 12. 25 미국 뉴욕 시~1957. 1. 14 할리우드.
1940, 1950년대 영화에서 거친 남성의 이미지로 큰 성공을 거두었다. 햇볕에 탄 무표정한 얼굴 뒤에 이상을 숨기고 있는 듯한 독립심 강한 모험가의 전형을 창조해냈다. 사생활에서는 할리우드의 관습을 거의 따르지 않는 냉소적인 독불장군으로 보였으나 미국 영화계의 우상이 되었다.
유명한 외과의사와 삽화가의 아들로 태어나 제1차 세계대전 때 미국 해군에서 복무했다. 우연히 나무가시에 찔려 뻣뻣해진 윗입술은 훗날 영화배우가 되었을 때 그를 상징하는 신체적인 특징이 되었다. 〈응접실 희극 drawing-room comedy〉(가벼운 풍자극)에서 소년 역을 맡으면서 무대에 서기 시작했고, 〈브로드웨이는 저렇게 Broadway's Like That〉(1930)로 영화에 데뷔했으나 성공하지 못하고 뉴욕으로 돌아갔다. 브로드웨이에서 공연한 〈화석의 숲 The Petrified Forest〉(1935)과 이를 영화로 각색한 작품(1936)에서 살인자 만티 공작 역을 맡으면서 배우로서의 전환점을 맞이했다. 1930년대 후반에는 에드워드 G.로빈슨, 제임스 캐그니 등이 출연하는 범죄영화에서 악당역을 맡아 인기를 얻었다. 1941년 〈하이 시에라 High Sierra〉에서 매드 도그 로이 얼 역과, 〈몰타의 매 The Maltese Falcon〉(1941)에서 매정한 사립탐정 샘 스페이드 역을 맡으면서 스타로 부상했다. 그밖에 유명한 배역에는 〈카사블랑카 Casablanca〉(1942)의 추방당한 카바레 주인 릭, 〈시에라마드레 산맥의 보물 The Treasure of the Sierra Madre〉(1948)에서 욕심 많은 탐광자(探鑛者) 프레드 C. 도브스,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받은 〈아프리카의 여왕 The African Queen〉(1951)에서 술고래 뱃사공, 〈케인호(號)의 반란 The Caine Mutiny〉(1954)에서 신경증 환자 퀴그 선장, 〈그들이 더 타락할수록 The Harder They Fall〉(1956)의 지친 신문기자 등이 있다. 4번째 부인 로렌 바콜(1945 결혼)과 영화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To Have and Have Not〉(1944)·〈깊은 잠 The Big Sleep〉(1946)·〈어두운 통로 Dark Passage〉(1947)·〈키 라르고 Key Largo〉(1948)에 함께 출연하여 선풍을 일으켰다./브리태니커
[1899년] 리더스 다이제스트 발행한 월리스 부인(Lila Bell Acheson) 출생
1889. 11. 12 미국 미네소타 세인트폴~1981. 3. 30 뉴욕 마운트키스코(D. 월리스)
1889. 12. 25 캐나다 매니토바 버던~1984. 5. 8 마운트키스코(L. B. A. 월리스)
세계적으로 가장 널리 배포되는 〈리더스 다이제스트 Reader's Digest〉를 창간·발행했다. 월리스(Wallace, DeWitt)는 세인트폴에 있는 장로교파 매칼레스터대학 교수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2년 동안 매칼레스터대학에서 수학하다가 은행에서 일하려고 대학을 그만두었다. 그무렵부터 그는 최신 정기간행물에서 마음에 드는 기사의 색인을 카드로 작성하기 시작했다. 그뒤 그는 버클리대학교에 입학했고, 입학한 지 얼마 안 되어 한 친구와 워싱턴 주 타코마에 머무는 동안에 릴라 벨 애치슨을 만났다. 월리스는 약간의 정부 팜플렛을 농업에 관한 소책자로 요약하여 판매해 성공을 거두고 나서 그는 일반적인 흥미거리 기사로 확대하여 요약 소책자로 만드는 것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그무렵 미국은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고 월리스는 미육군에 입대해 복무했다. 전쟁에서 입은 치명적인 부상으로부터 회복하는 동안에 그는 다이제스트 잡지에 대한 계획을 좀더 구체적으로 구상했다. 그는 이미 인쇄했던 견본호를 1920년에 정성스럽게 모아 정리한 뒤 한번에 1부씩 복사하여 여러 출판업자에게 발송했으나 어느 누구도 관심을 가져주지 않았다. 그러는 동안 그는 그의 다이제스트 계획을 믿어주는 릴라 애치슨을 다시 만났고, 그녀에게 청혼했다.
장로교 목사의 딸인 애치슨은 타코마로 이사가기 전에는 중서부에 있는 조그만 마을에서 자랐다. 월리스가 전쟁터에 있는 동안 그녀는 동부의 여러 주에서 군수산업에 종사하고 있는 여성근로자들을 위해 기독교여자청년회(YWCA) 센터를 조직했다. 전쟁이 끝난 후에도 그녀는 계속 동부에서 사회봉사활동을 했다. 1921년에 두 사람은 뉴욕 주 플레전트빌에서 결혼했다. 월리스 부부는 그들의 힘으로 〈리더스 다이제스트〉를 발행하기 시작했으며, 그리니치 마을의 주류밀매점 아래의 지하실로부터 직접 가정으로 배달·판매했다. 1922년 2월 제1호가 출판되었다. 발행부수가 급속도로 증가하여 1922년의 1,500부에서 1929년에는 20만 부로 증가했으며, 1980년대 중반에는 전세계적으로 17개 국어로 번역되어 41판 3,000만 여 부를 발행했다. 드윗은 1921~65년에 편집자로, 그리고 1921~73년에 회장으로 일했다. 〈리더스 다이제스트〉는 11년 동안 다른 잡지들로부터 요약한 기사나 발췌한 기사들만을 실었으나, 1933년부터는 이따금 독자적인 고유 기사들을 싣기 시작했으며, 1934년에는 시사서적의 요약판을 싣기도 했다. 1940년 외국어판이 발행되기 시작했으며, 증가되는 유통비용으로 인한 수지균형을 맞추기 위해 광고가 실리기 시작했다. 비록 비평가들로부터는 진부하고 보수적인 발행자라고 평가받았으나 월리스 부부는 긍정적인 논조를 추구하려고 했으며, 다양한 주제의 기사들을 실었다. 커다란 반향을 불러 일으킨 이 잡지의 성공으로 그들은 크나큰 부(富)를 축적할 수 있었다. 이 부부는 특히 프랑스 지베르니에 있는 클로드 모네의 저택과 토지의 복구, 이집트에 있는 아부 심벨 사원의 보존 등과 같은 많은 자선적인 공공문화사업을 적극 후원했다. 1972년에 월리스 부부는 자유훈장을 받았으며, 1980년에는 미국 영예전당의 사업가 부문에 선출되었다./브리태니커
[1898년] 독립협회 강제 해산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사회정치단체 독립협회가 1898년 12월 25일 고종의 만민공동회 금지령과 함께 사실상 해산됐다. 독립협회가 출범 초기와는 달리 점차 급진적 정치단체로 선회하자 고종이 위기의식을 느꼈기 때문이다. 독립협회는 갑신정변 실패 후 미국에 망명했던 서재필이 11년 만에 귀국해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적 개혁사상으로 민중을 지도, ‘자주독립의 완전한 국가’로 만든다는 취지로 1896년 7월 2일 창립됐다. 초기엔 개혁인사와 고급관료들의 사교모임 수준이었으나, 점차 개혁파 관료와 지식인층이 주도하는 민중적 사회단체로 변모했다. 그러나 만민공동회 개최를 시작으로 민권투쟁기로 접어들자, 보수세력은 이상재·남궁억 등 독립협회 요인 17명을 체포했다. 결국 고종은 독립협회 활동을 반체제운동으로 단정, 칙어와 함께 민회금압령을 내려 협회 활동을 중단시켰다. /조선
[1642년] 만유인력 발견한 영국 물리학자 뉴턴(Newton, Sir lsaac) 출생 ← 뉴턴
1642. 12. 25(신력 1643. 1. 4) 링컨셔 울스토르프~1727. 3. 20(신력 3. 31) 런던
17세기 과학혁명의 상징적인 인물이다. 광학·역학·수학 분야에서 뛰어난 업적을 남겼고 1687년에 출판된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 Philosophiae Naturalis Principia Mathematica〉는 근대과학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책으로 꼽힌다.
뉴턴은 1642년 소지주의 유복자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생후 2년 만에 재가해서 그의 곁을 떠났고 할머니 손에 의해 양육되었다. 의붓아버지가 죽고 어머니가 다시 돌아올 때까지 9년 동안 그는 어머니와 떨어져 지냈고, 이것은 그의 심리에 큰 영향을 미쳤다. 후에 논문을 발표할 때마다 보인 심리적 불안감이나 비판에 대한 지나친 반응 등은 모두 어렸을 때의 모성결핍에서 기인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랜트햄에서 기초교육을 마친 후 1661년 케임브리지대학교 트리니티 칼리지에 입학했다. 당시는 과학혁명이 급속히 진행되고 있었지만 다른 대학과 마찬가지로 케임브리지대학도 여전히 아리스토텔레스 체계를 고수하고 있었다. 그도 다른 학생과 마찬가지로 아리스토텔레스를 공부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했으나, 곧 데카르트를 접하게 되었고 우주의 모든 물리적 현상을 운동과 물질로 설명하려는 기계적 철학에 매료되었다. 1664년경부터 쓰기 시작한 〈몇 가지 철학적 문제들 Quaestiones Quaedam Philosophicae〉이라는 기록은 과학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신호였다. 그는 제목 아래에 다음과 같은 문구를 첨가했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나의 친구다. 하지만 나의 가장 친한 친구는 진리다."
그가 다룬 ‘문제들’을 보면 그가 과학혁명의 근간이 되는 새로운 생각들과 접촉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데카르트의 저작들뿐만 아니라 피에르 가생디가 부활시킨 원자론도 공부했는데 그는 여기에 더욱 끌렸다. 로버트 보일의 책에서는 화학에 관한 지식을, 케임브리지의 플라톤주의자였던 헨리 모어를 통해서는 허미티시즘 전통(Hermetic tradition:자연현상을 연금술과 마술적인 개념들을 가지고 설명하는 전통)을 접했다. 자연철학의 중요한 두 전통인 기계적 철학과 허미티시즘 전통은 지속적으로 그의 학문에 영향을 미쳤다.
이 시기부터 수학에 관한 연구도 시작했다. 그는 데카르트의 〈기하학 La Géometrie〉에서 대수적인 기법을 기하학에 적용하는 법을 배웠고 고전기하학도 깊게 공부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이항정리를 발견했고 미적분학을 개발했다. 1669년까지는 그동안의 성과를 종합하여 〈무한급수에 의한 해석학에 관하여 De Analysi per Aequationes Numeri Terminorum Infinitas〉를 펴낼 정도로 발전했다. 그후 2년 동안 보완해서 〈급수와 유율(流率)의 방법에 관하여 De methodis serierum et fluxionum〉를 수고(手稿) 형태로 세상에 내놓았다.
1665년 4월 학사학위를 받을 때까지 그는 자신만의 새로운 철학과 수학의 세계를 펼쳐나가고 있었다. 그해 흑사병으로 대학이 문을 닫게 되자 고향집에 돌아와 2년 동안 그가 배운 것들에 대해 여유를 갖고 명상했다. 이 기간 동안 미적분학의 기초가 다져지고, 〈색깔에 관하여 Of Colours〉에 정리될 중요한 내용들이 나타난다. 또 원운동의 요소들을 분석했고 이것을 달과 다른 행성들에 적용해서 역제곱법칙(inverse square law:힘의 크기가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한다는 법칙)을 유도했다. 그러나 이 발견들은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다. 1667년 트리니티 칼리지의 펠로우로 선출되었다. 2년 후에는 아이작 배로우의 후임으로 루카스 석좌(碩座) 수학교수로 임명되었다. 그는 광학에 대한 강의로 교수생활을 시작했는데, 그 내용은 〈색깔에 관하여〉로 발전되고 후에 〈광학 Opticks〉의 제1권이 되었다.
그는 데카르트의 영향으로 빛이 기계적인 성질을 가지고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데카르트와는 달리 빛을 원자와 같은 작은 입자들이 공간을 이동하면서 생기는 현상으로 보았다. 그가 광학에 끼친 가장 큰 공헌은 무엇보다도 색에 관한 것이었다. 그는 빛은 원래 흰색의 단색광이고 변형에 의해서 여러 가지 색깔로 나타난다는 고대로부터의 색깔이론을 부정했다. 1665~66년에 수행한 일련의 실험을 통해 빛이 단색광이 아니라 혼합광이라는 것을 밝혔고, 색깔은 이질적인 혼합광이 개개의 요소로 분해되면서 생겨난다고 주장했다. 또 각각의 광선이 일정한 각도로 굴절되는 성질 때문에 무지개와 같은 현상이 생긴다고 밝혔다. 이후부터 빛의 이질성은 물리광학의 기본이 되었다. 한편 렌즈의 색수차(色收差)를 제거하는 방법을 모색하던 중 반사망원경을 최초로 발명했다.
그의 색에 관한 이론은 런던의 왕립학회를 통해서 세상에 알려졌다. 1671년 반사망원경의 발명으로 그의 이름이 알려졌고 왕립학회 회원으로 선출되었다. 이에 고무되어 1672년 빛과 색깔에 관한 논문을 학회에 제출했다. 이 논문은 비교적 좋은 반응을 얻었지만 학회 지도자였던 로버트 훅과의 마찰을 불러일으켰다. 훅의 신랄한 비판은 그를 격노하게 만들어 결국 한동안 모든 외부와의 관계를 끊고 고립생활에 들어가게 했다.
1675년 런던을 방문한 뉴턴은 훅이 자신의 색깔이론을 인정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에 자신을 얻어 얇은 막에서의 색깔현상을 다룬 2번째 논문을 발표한다. 이 논문은 빛이 반사를 통해서도 분해될 수 있음을 보여주어 고체의 색현상을 설명했고, 뉴턴의 원무늬(Newton's rings) 발견도 싣고 있다. 이것은 후에 〈광학〉 제2권의 내용이 된다. 훅과의 관계는 이 논문의 발표로 더욱 악화되는데, 훅은 뉴턴이 자신의 생각을 도용했다고 주장했다. 또 영국의 한 예수교 분파도 이 논문의 내용을 공격했다. 1678년까지 계속된 이 싸움은 뉴턴의 신경쇠약을 동반한 발작으로 끝을 맺게 되는데, 그후 6년 동안 그는 외부와 완전히 격리되었다. 이 격리기간 동안 허미티시즘 전통의 영향을 크게 받아 이전부터 흥미를 갖고 있던 연금술에 깊숙이 빠져들었다. 자연관도 큰 변화를 겪어서 기계적 철학에서 벗어났다. 1679년 빛의 현상을 설명하려고 도입했던 에테르(ether)와 그에 수반된 눈에 보이지 않는 체계를 포기하고, 대신 인력(引力 attraction)과 척력(斥力 repulsion)을 도입했다. 인력과 척력은 원래 화학적 친화력, 화학반응으로 생기는 열, 액체의 표면장력, 모세관현상 등을 설명하기 위해 도입했는데, 허미티시즘의 동감(sympathy)과 반감(antipathy)이라는 개념을 그대로 번역한 것이었다. 그는 이 개념을 기계적 철학의 한 변형으로 보았다. 사실 인력은 정량적으로 규정될 수 있었고 17세기 과학의 두 주요 조류인 기계적 전통과 피타고라스적 전통을 잇는 다리 역할을 했다.
처음에는 인력과 척력을 지상의 현상에만 적용했다. 그러나 1679년말부터 훅의 편지에서 암시를 받아 행성의 운동에도 이 개념을 적용하기 시작했다. 뉴턴에게 보낸 편지에서 훅은 인력에 의해서 직선운동이 지속적으로 방향을 바꾸어나간다는 점과 중력은 거리의 제곱에 비례해서 감소한다는 점을 지적했다. 하지만 이것은 단순히 직관에 의한 추측일 뿐 구심력이나 케플러의 제3법칙에서 수학적으로 얻어낸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뉴턴은 이미 10년 전에 이러한 관계를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뉴턴 자신은 후에 훅의 편지에서 타원궤도가 한 초점을 중심으로 역제곱의 인력관계를 수반한다는 암시를 받았다고 고백했다. 또 인력이 지속적으로 작용해서 행성의 궤도이탈을 방지한다는 훅의 생각은 힘을 천체운동에도 적용할 수 있다는 점을 깨닫게 했지만 아직 중력(gravitation)이라는 개념에는 못미쳤다.
1684년 8월 궤도역학의 문제로 곤란을 겪던 천문학자 에드먼드 핼리(Edmond Halley)가 뉴턴을 방문했다. 3개월 후 핼리는 뉴턴으로부터 〈운동에 관하여 De Motu〉라는 짧은 논문을 받았는데, 이것이 2년 반 후에는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프린키피아〉라고도 부름)로 확장된다. 〈프린키피아〉에서는 기계적 철학과는 달리 눈에 보이지 않는 체계에 관한 설명이 없다. 다만 눈에 보이는 물체의 운동을 엄밀한 계량적 방법으로 다루고 있다. 그의 새로운 역학은 다음과 같은 3가지 운동법칙에 근거한다. 첫째, 물체는 외부에서 힘이 작용하지 않는 한 현상태를 유지하려 한다. 둘째, 운동량의 변화는 주어진 힘에 비례한다. 셋째, 모든 작용에는 크기가 같고 방향이 반대인 반작용이 있다. 이 운동법칙으로 구심력을 계량적으로 유도해낼 수 있었고, 케플러의 제3법칙을 대치할 수 있었다. 그결과 태양 주위를 도는 행성의 운동뿐 아니라 지구나 목성 주위를 도는 위성의 운동도 성공적으로 설명할 수 있었다. 그는 태양계의 모든 천체운동을 지배하는 단일한 힘을 상정하고 그것을 중력(gravitas:라틴어로 '무거움'이라는 뜻)이라고 불렀다. 이 중력(또는 만유인력)은 혜성의 운동이나 조석현상의 설명에도 성공적으로 적용되었고, 우주의 모든 물질입자들 사이에 보편적으로 존재한다고 믿게 되었다. 〈프린키피아〉의 출판으로 그는 세계적인 인물이 되었다. 대륙의 과학자들은 원거리(遠距離)작용에 대한 거부감 때문에 뉴턴의 이론을 쉽게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기술적인 완벽함에는 찬사를 보냈다. 영국에서는 젊은 과학자들이 곧 뉴턴의 뒤를 따랐고 그의 후원하에 옥스퍼드, 케임브리지, 그래샴 칼리지와 같은 주요대학의 교수직을 이어나갔다.
열렬한 개신교도였던 그는 제임스 2세의 가톨릭 정책에 반기를 들었고 명예혁명 후 케임브리지대학교를 대표하여 혁명회의에 참석했다. 이 기회를 통해 폭넓은 교제를 하게 되고 철학자 존 로크와도 친교를 맺었다. 런던 생활을 즐기게 된 그는 친구인 수학자 파티오와 찰스 몬티규(후에 핼리팩스 경이 됨)의 도움으로 1696년 조폐국 이사로 임명되었다. 얼마 후에는 국장으로 승진해 매년 2,000파운드의 막대한 수입을 올렸다. 그는 화폐의 재주조가 대규모로 이루어지는 동안 정력적으로 활동했고 임무를 완성한 후에는 화폐의 위조를 방지하는 데 힘썼다. 그당시 런던의 위조범들에게 그는 공포의 대상이었고 실제로 많은 위조범들을 교수대로 보냈다.
런던으로 거처를 옮긴 뉴턴은 영국 과학의 대부 역할을 했다. 1703년 왕립학회 회장으로 선출되었고, 1705년 과학자로서는 최초로 기사작위를 받았다. 그는 왕립학회를 독단적으로 운영했다. 왕립 그리니치 천문대 대장이자 왕실천문가였던 존 플램스티드는 〈프린키피아〉를 집필하는 데 필요한 많은 관측자료들을 제공했음에도 불구하고 뉴턴에게 우호적이지 않아 부당한 대우와 모욕을 받았다. 독일의 철학자 고트프리트 빌헬름 라이프니츠와의 불화는 잘 알려져 있다. 현재는 뉴턴이 라이프니츠보다 훨씬 먼저 미적분학을 개발했고 라이프니츠도 독립적으로 미적분학에 도달했다고 인정받고 있다. 문제는 뉴턴이 자신의 연구결과를 일찍 발표하지 않았기 때문에 1694년에 나온 라이프니츠의 논문이 세상에 먼저 알려졌다는 점이다. 처음에 추종자들의 부추김에 못이겨서 시작한 우선권 논쟁은 뉴턴이 이성을 잃어버릴 만큼 화를 내면서부터 추잡한 싸움으로 변했고, 라이프니츠 사후에도 계속되었으나 뉴턴의 죽음으로 하여 싸움은 끝을 맺었다. 그는 말년을 〈프린키피아〉와 〈광학〉을 수정·보완·번역하는 데 바쳤다. 최후까지 왕립학회를 주관했는데, 회의 도중 조는 때가 많았다는 일화가 전해진다./R.S. Westfall 글 | 金東源 참조집필 /브리태니커
[1887년] 미국의 호텔왕 힐턴(Hilton, Conrad) 출생
힐턴 [Hilton, Conrad (Nicholson), 1887.12.25~1979.1.3] "아주 가난한 그리스 사람이 아테네 은행의 수위에 응모했다.
시험관이 글씨를 쓸 줄 아느냐고 물었다.
이 사람은 자기 이름밖에 쓸 줄 모른다고 하여 퇴짜를 맞았다.
그 사람은 돈을 빌려 미국으로 건너갔다.
몇 년 뒤 그리스 태생의 한 실업가가 뉴욕의 사무실에서 기자회견을 했다.
한 기자가 회고록을 쓰라고 하자 실업가는 웃으면서
'나는 글씨를 못씁니다.
내가 글씨를 알았다면 아직도 은행 수위로 있을 겁니다.'고 대답했다."
- 힐턴의 자서전에서
세계 굴지의 호텔 체인을 설립한 미국의 실업가.
뉴멕시코 주 샌앤토니오의 조그만 마을에서 태어난 힐턴은 어린시절 아버지를 도와 가족 소유의 커다란 벽돌집을 여관으로 개조했다. 1915년 A.H. 힐턴 앤드 선 잡화점의 동업자이자 사장이 되었다. 주의회에서 활동한 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소위로 임관되어 프랑스로 떠났다.
1918년 아버지가 죽은 후 힐턴은 가족사업을 계속 확장시키려고 노력했다. 은행매입 협상차 텍사스 주 시스코에 갔다가 모블리 호텔을 매입했다. 호텔 운영이 수지맞는 사업이라는 것을 깨닫고 댈러스·포트워스·웨이코·텍사스의 다른 도시 호텔들도 매입했다. 1930년대의 대공황으로 타격은 받았지만 힐턴 호텔 체인은 사업운영을 계속해나갔다. 1939년경에는 캘리포니아·뉴욕·일리노이와 그밖의 지역에서 호텔을 건축·임대·매매했다. 1946년 힐턴호텔사가 설립되었다. 해외로 사업이 확장됨에 따라 1948년에는 힐턴인터내셔널사가 설립되었다. 1954년에는 스태틀러 호텔 체인을 매입했고, 그후 경영다각화의 일환으로 신용 카드업과 자동차 임대사업에도 뛰어들었다. 1960년대 힐턴사는 외국회사 및 정부와 공동경영하는 형태로 해외사업부를 재조직했다. 많은 힐턴 호텔이 프랜차이즈화되거나 힐턴 체인에 의해 부분적으로 소유되었다. 콘래드 힐턴은 1966년 아들 배런에게 사장직을 물려 주었다. /브리태니커
[1717년] 로마 교황 비오 6세(Pius Ⅵ) 출생
비오 6세 [Pius Ⅵ, 1717.12.25~1799.8.29]
이탈리아 체세나에서 마르코 아우렐리오와 안나 데레사의 8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나 예수회【?운영하는 학교에서 법률을 공부한 후 1735년 법학사 학위를 받았다. 페라라 대학에서 법학을 계속 공부하다가 이곳의 교황 대사인 T.루포의 비서로 임명되었으며, 1740년에 새 교황으로 베네딕토 14세(재위 1740∼1758)가 선출되면서 루포가 오스티아와 벨레트리의 주교로 임명되자 그의 교구를 대신 관리하였다.
로마나 나폴리 왕국 사이의 관할권 분쟁을 조정함으로써 외교적인 능력을 인정받아 1753년에 교황 베네딕토 14세의 수석 비서가 되었으며, 1758년에 사제 서품을 받았다. 1766년에는 교황 클레멘스 13세(재위 1758∼1769)의 신임을 얻어 교황청 회계 책임자가 되었고, 1773년 4월 26일에는 추기경으로 서임되었다. 정치적이고 종교적인 논쟁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예수회의 폐지에 관한 가톨릭 국가들과 교황청 사이의 논쟁에 가담하였으며, 1774년에 교황 클레멘스 14세가 사망하자 이듬해 2월 15일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교황 비오 6세는 가톨릭 교회가 매우 위태로웠던 혼란기를 보내면서 조카들의 중용으로 내적으로는 족벌주의 정책을 펼쳤다는 비판을 받았고, 외적으로는 계몽주의로부터 공격을 받았으며, 프랑스 혁명(1789∼1799)에 의해 타격을 입기도 하였다.
프랑스혁명으로 프랑스에서는 교회와 성직자에 대한 박해가 일어나 약 4만 명의 신부들이 투옥·유배·처형되었으며, 1793년 11월에는 그리스도교가 폐지되는 등 교회와 국가의 완전 분리가 법제화되었다. 이에 교황 비오 6세는 프랑스 혁명을 악마의 혁명이라고 비난하였다.
나폴레옹이 교황령을 침공하여 볼로냐·페라라·모데나·로마냐 등의 교황령을 잃었으며, 1798년에는 로마가 점령되고 로마공화국이 선언되자 교황청은 로마에서 쫓겨났고 남아 있던 다른 교황령마저 잃고 말았다. 프랑스 군대에 의해 1799년 3월 28일 프랑스 남부에 있는 발랑스로 끌려간 교황은 그곳에서 같은 해 8월 29일에 사망하였으며, 1802년 2월에 그의 유해가 로마의 성 베드로 대성전으로 이장되었다. /naver
[ 336년] 크리스마스 행사 시작
336년 12월 25일부터 로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념하는 크리스마스 축제가 거행되었다고 로마 역서(曆書)는 기록하고 있다. 예수의 탄생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으며 12월 25일은 원래 동지를 기념하는 로마의 축제일로 태양 숭배와 관련이 있는 날이다. 로마 제국의 동방 지역에서는 원래 1월 6일을 그리스도 탄생 축하일로 지켰으나, 4세기부터 12월 25일로 바꾸어 기념하기 시작했다. 크리스마스와 관련된 전통 관습들은 이교도들이 한겨울에 벌이던 농사 및 태양 의식과 그리스도의 탄생에 대한 기념이 합쳐져서 생겨났다. 12월 25일 크리스마스는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그리스도교 국가들에서 대중적인 공휴일이 되었다. 음식과 교제, 크리스마스 이브에 벽난로에 때는 장작과 크리스마스 케이크, 푸른 젓나무, 선물과 인사 등이 이 축일을 기념하는 상징이 되었다. /브리태니커
그밖에
2008년 기니 쿠데타 성공
2002년 시베리아 철도, 전철화 완공
1995년 ‘한국의 슈바이처’ 장기려 박사 별세
1994년 자일 싱 전 인도대통령 사망
1983년 스페인 화가 후안 미로 사망
1977년 베긴-사다트 2차 평화회담
1976년 중국 예술인 창작활동 재개
1974년 국문학자 이재수 사망
1968년 10.5구락부와 무소속 정우회 발족
1963년 키프러스내 그리스 터키 양군, 4일간 전투후 휴전협정
1960년 부산 국제시장 화재, 234개 점포 손실
1949년 맥아더 장군, 일본전범에 특사
1949년 북한, 소련과 영사협정 체결
1941년 일본군 홍콩을 점령
1932년 한중연합 토일(討日)군 (한국측 이청천 황학수, 중국측 채세영)
1926년 일본의 제123대 왕 대정(大正) 사망
1915년 중국 진남에 제정반대의 혁명군 봉기. 제3혁명 개시
1906년 전자현미경 발명한 독일의 전기공학자 루스카 출생
1878년 독일 소설가 한스 카로사 출생
1861년 프랑스 조각가 마이욜 탄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