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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심명 증도가
48.
住相布施는 生天福(주상보시 생천복)이나
猶如仰箭射虛空(유여앙전사허공)이라
모양에 머무는 보시는 하늘에 나는 복이나
마치 허공에 화살을 쏘는 것과 같도다.
*남에게 쌀 한 움큼 주고 돈 한 푼 주고 옷 한 가지 주는 것이 좋은 일임에는 분명하나, 모양[相]이 있는 유위법으로는 그 끝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양에 머무는 보시는 천상락은 받을 수 있다는 말이니, 꼭 천상에 가야만 복이 있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과보로써 좋은 행복을 누리게 되면 그것이 천상락인것입니다. 그렇지만 이 복은 한정이 있는 것으로서 허공을 향해 화살을 쏘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49.
勢力盡箭還墜(세력진전환추)하니
招得來生不如意(초득래생불여의)로다
세력이 다하면 화살은 다시 떨어지나니
내생에 뜻과 같지 않은 과보를 부르리로다.
*모양에 머무는 보시는 행복을 누리더라도 한정이 있기때문에 허공에 쏜 화살이 힘이 다하면 다시 땅으로 떨어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 복이 다하면 내생에는 뜻과 같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원한 자유를 얻지 못하게 되고 맙니다.
모양에 머물러 보시하는 것은 삼생(三生)에 원수라 했습니다. 금생(今生)에는 모양에 집착한 복을 닦느라고 공부를 못하고, 내생(來生)에는 금생에 닦을 복을 받느라고 공부를 못하고, 내래생(來來生)에는 복이 다하면 타락하여 고(苦)를 받느라고 공부를 하지 못하기 때문에 결국 모양에 집착하여 보시하는 것은 삼생의 원수라고 부처님이나 조사스님들이 다 말씀하신 것입니다. 모양에 머문 보시가 삼생의 원수가 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참으로 모양에 머물지 않는 보시를 해야 합니다. 모양에 머무름 없는 보시란 내 마음 속에 있는 양변,변견을 다 버려버리는 것이 참다운 보시라는 것입니다. 보시를 이렇게 해야만 영원토록 자유자재한 무상대도를 성취할 수 있는 것이지 수도인이 되어서 삼생의 원수인 '모양에 머무는 보시'는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달마스님이 양무제를 만나니 양무제가 물었습니다.
"짐이 만승천자가 되어 절도 많이 짓고 경전도 많이 펴고 탑도 많이 세우고 보시도 많이 하였는데 어떤 공덕이 있습니까?"
"공덕이 없습니다."
고 달마스님이 대답하였습니다. 그것은 '모양에 머문 보시이기 때문이니 당신이 실제로 불법을 위하여 공덕을 쌓으려거든 자성을 깨치라'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자성을 깨치는 이것이 참공덕이라는 것입니다. 모양에 머무는 보시는 삼생의 원수이니만큼 수행하는 사람은 자성을 바로 깨쳐서 영원토록 자유자재한 길을 걸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한 가지 더 말할 것이 있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아무 것도 하지 말고 가만히 앉아만 있으면 삼생의 원수는 맺지 않는 것이 아닌가, 혹 이리도 생각할런지 모르겠습니다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최상승법을 바로 알아서 그 법을 성취하기 위하여 고행난행(苦行難行)하는 것은 모양에 머무는 보시가 아니라 최상승법을 빨리 성취시키는 방편입니다. 그래서 고불고조(古佛古祖) 무상대도를 성취시키기 위해 신심을 조장시키는데 있어서는 모든 고행난행(苦行難行)을 해야된다고 이구동성으로 말씀하고 계십니다.
부처님의 정법이 십대제자 가운데 두타제일(頭陀第一)인 가섭존자에게 갔습니다. 왜그런가 하니 가섭존자와 같이 고행난행하는 철두철미한 신심을 가지고 부처님 말씀을 믿고 공부해야만이 이 무상대법을 깨칠 수 있다는 근본 표본때문입니다. 그리고 가섭존자의 고행난행은 자성을 깨쳐서 모든 모양으로부터 떠나 있기 때문에 전체가 모두 대기대용의 현발입니다.
예전의 총림에서 큰 스님네들이 공부하는 사람이 최상승법을 모르고서 다만 모양에 머무는 보시를 하는 것만을 배격하였지, 그 이외의 최상승법의 성취를 위한 고행난행은 누구에게든지 장려하였던 것이었습니다.
백장스님은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않는다.
[一日不作 一日不食]"
고 하여 구십평생을 호미를 들고 살았듯이, 이 고행난행을 하지 않고 공부한 이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모양에 머무는 보시와 예전 큰 스님네들의 조도방편(助道方便)을 혼동하면 큰 오해가 따릅니다.
그러므로 우리 종문에서 하는 공부는 모양에 머무는 보시도 아니고 삼생의 원수가 되는 것도 아닙니다. 오직 고행난행을 하여 신심이 고양되어 최상승법을 하루 빨리 깨치게 하는 것이 그 근본 방침이기 때문입니다. 예전 어느 큰 스님이든지 고행난행하는 철두철미한 신심을 가지고 모든 것을 섭수해 나갔지 이것을 배격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최상승법으로 들어가서 모든 모양을 떠난 공부를 하면 어떻게 되겠느냐?
50.
爭似無爲實相門(쟁사무위실상문)에
一超直入如來地(일초직입여래지)리오
어찌 함이 없는 실상문에
한 번 뛰어 여래지에 바로 들어감과 같으리오.
*모양에 머무는 보시를 하면 삼생의 원수가 되어서 세력이 다하면 윤회를 거듭하고 말지만, 최상승법에 의지해서 함이 없는 실상문에 바로 들어가면 눈 깜짝할 사이에 구경각을 성취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교가(敎家)에서는 삼아승지겁을 거쳐서 육도만행을 닦아 구경각을 성취할 수 있다고 했는데, 선가에서의 '한번 뛰어넘어 여래 지에 들어간다'고 하는 것은 말도 안되는 것이라고 교가에서 강변합니다. 특히 천태종이 [증도가] 가운데서 가장 반대하는 대목이 바로 '한 번 뛰어 넘어 여래지에 들어간다'는 귀절입니다. 교가의 교리상으로 볼 때는 구경각은 성취하는 기간이 무한한 시간이 걸리고 무한한 노력이 드는 것인데 어째서 자기 마음을 닦을 것 같으면 단박에 구경각을 성취할 수 있느냐, 그렇게 될 수 없다고 공격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교외별전인 비밀방법을 참으로 모르는데서 하는 말입니다. 누구든지 모양에 집착해서 자꾸 뜀밖으로 나간다면 말할 수 없는 시간이 걸리지만, 그렇지 않고 모양을 완전히 떠나서 자신을 바로 닦아 나갈 것 같으면 단도직입으로 구경각을 성취할 수 있다는 것이 선문의 정설입니다.
황벽스님 법문에 "힘 쎈 사람이 구슬이 자기의 이마에 박혀 있는 것을 모르고 시방세계를 두루 다니면서 밖으로만 찾아다녀도 끝내 찾지 못하다가 지혜로운 이가 가르쳐주면 당장에 구슬이 이마에 본래대로 있음을 아는 것과 같다." 는 말씀처럼, 구슬은 본래 이마에 있는데 자꾸만 외변으로만 돌면서 저 미국으로 영국으로 달나라로 다녀 보았자 구슬은 못 찾는다는 것입니다. 어떤 지혜로운 사람이 "구슬이 너의 이마에 있지 않느냐"고 바로 가르쳐 주면 스스로 더듬어 만져보아 알게되니 이것이 바로 '한 번 뛰어 넘어 여래지에 드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모양에 머물러 보시하는 방법과 함이 없는 실상문의 방법과는 이렇게 근본적으로 틀리다는 것입니다. 모양에 머물러 보시하는 방법으로 공부를 한다면 삼아승지겁이 아니라 미래겁이 다하도록 성불하기가 곤란할 것 같으면 '한 번 뛰어 넘어 여래지'에 들어가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육조스님께서도 '미혹하여 들으면 여러 겁이 걸리고 깨치면 찰나간'이라고 늘 말씀하셨습니다. 즉 자기의 마음을 깨치면 눈 깜짝할 사이에 구경각을 성취해 버리는 것이지 절대로 많은 시간이 필요 없으므로 누구든지 이 법을 바로 믿고 선택해서 부지런히 닦기만 하면 금생에 '한 번 뛰어 넘어 여래지'에 들어가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앞에서도 '만약 거짓말로써 중생을 속인다면 발설지옥에서 진사토록 지낼 화를 자초한다'고 맹세까지 하셨지 않았습니까? 이것은 중생의 업이 너무 두터워 참으로 믿기가 어렵기 때문에 그런 말씀을 노파심절로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누구든지 '함이 없는 실상문'에 바로 들어 갈 것 같으면 '한 번 뛰어 넘어 여래지에 들어가는 길'이 있다는 것을 확신하고 부지런히 공부한다면 옛사람과 같이 눈 깜짝할 사이에 구경각을 성취할 수 있을 것입니다.
51.
但得本莫愁末(단득본막수말)이니
如淨瑠璃含寶月(여정유리함보월)이로다
근본만 얻을 뿐 끝은 근심치 말지니
마치 깨끗한 유리가 보배 달을 머금음과 같도다.
*앞에서도 여러번 강조한 바와 같이 뿌리를 끊어버리면 나무 전체가 넘어지는 것인데 어리석은 사람은 외변으로 공연히 잎만 따고 가지만 찾고 하여 무한한 세월과 한없는 노력을 허비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누구든지 근본 자성을 닦으면 거기에 육도만행이 원만히 다 갖추어져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달마스님께서도 '마음을 관찰하는 한 가지 법이 모든 행을 다 포섭한다[觀心一法總攝諸行]'
고 하셨습니다. 마음을 관찰하여 마음을 바로 깨칠 것 같으면 전체 불교가 그 가운데 다 포함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모든 것이 완전히 성취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구경각을 성취하면 어찌 되느냐?
한 번 뛰어넘어 여래지에 들어가서 자성을 깨치면 내심외경(內心外境), 곧 안의 마음과 밖의 경계 전체가 원융무애하여 통연히 명백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비유로 '맑은 유리병 속에 보배 달을 넣어 둔 것과 같다' 는 것입니다. 맑은 유리병 속에 보배달을 넣어두면 그 속이 환한 동시에 그 빛이 밖으로 시방세계를 비추어 내외가 명백한 것을 말한 것입니다. '맑은 유리병 속에 보배달을 넣어 둔 것과 같다[如淨瑠璃含寶月]' 는 말은 [능엄경]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공부를 해가는 중간의 해오(解悟)에서 하는 말이 아니라 구경각을 성취하여 삼현십지(三賢十地)와 등각(等覺)을 넘어서서 구경의 묘각(妙覺)을 성취하여 무소득(無所得)의 경계를 체달하는 것을 말하니 진여를 바로 깨쳐서 진여의 광명이 내외에 통철하고 무장무애하여 시방세계에 두루 비치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어떤 경계에서 성취되느냐?
제팔아뢰야 무기무심인 가무심(假無心)에서 벗어나 진여의 대무심지가 현발한데서 성취되는 것이니 크게 죽어서 다시 살아나는[大死却活] 경계인 것입니다. 진여의 대무심지에 이르면 일체번뇌망상이 완전히 다 끊어져 제팔아뢰야 근본무명이 뿌리채 뽑혀 버린 것입니다. 그러면 거기에서 진여의 보배 달이 떠올라 시방세계를 비추고도 남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실제의 경계이므로 말로만 보배 달을 운위해서는 안되는 것이고 몸소 체험해야 합니다. 그 경계에 있어서는 오매일여가 문제되는 것이 아니라 밥 먹을 때나 일할 때나 자나 깨나 말하거나 앉거나 움직이거나 고요하거나 어느 때든지 그 경계는 꼭 같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공부를 해가다가 조금 되는 것 같다하더라도 거기에 조금의 간단(間斷)이라도 있다면 그것은 공부가 아닌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공부해서 간단 없음을 성취하여 객진번뇌(客塵煩惱)가 다 떨어진 구경에서 진여 보배 달이 떠오르면 억천만겁이 지나도 옛이 아니어서[歷天劫而不古] 조금도 변동이 없습니다. 이처럼 선종에서 깨쳤다고 하는 것은 구경각을 성취한 것으로써, '깨끗한 유리병 속에 보배달을 담은 것과 같은 것'을 돈오(頓悟)라 하였지 그 중간의 해오(解悟)를 돈오라 하지 않았습니다.
52.
旣能解此如意珠(기능해차여의주)하니
自利利他終不竭(자리이타종불갈)이로다
이미 이 여의주를 알았으니
나와 남을 이롭게하여 다함이 없도다.
*'한 번 뛰어 넘어 여래지에 들어가서 마치 유리병 속에 보배 달을 담은 것'같은 그러한 대진여광명을 우리가 완전히 체득하여 증하고 나면 이 여의주를 항상 옳게 수용하여 쓰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자기를 위해서도 한없는 힘을 발휘하여 무한한 능력이 있을 뿐만 아니라 일체 중생을 위해서도 미래겁이 다하도록 한없는 대자대비를 베풀면서 산다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구경각을 완전히 성취하여 여의주를 완전히 얻는 것이어서 진여본성을 바로 깨친 것이며, 진여본성을 바로 깨치었다면 영원토록 이것을 나와 남을 위해서 활용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53.
江月照松風吹(강월조송풍취)하니
永夜淸霄 何所爲(영야청소 하소위)아
강엔 달 비치고 소나무엔 바람 부니
긴긴 밤 맑은 하늘 무슨 하릴 있을 건가.
*모든 것을 완전히 끊고 해탈하여 한가한 도인이 되고 보니 강물 위에 달 비치고 솔밭에 바람 부는 경계더라는 것입니다. 그 경계에 있어서는 긴긴 밤 하늘은 맑은데, 아무런 하릴없어 자유롭고 영원토록 걸림없다는 말입니다. '강 위에 달 비치고 솔 바람 분다'는 것은 실제 자성을 깨침에 있어서 자성의 체(體)와 용(用)을 분명히 표현한 것입니다.
54.
佛性戒珠는 心地印(불성계주 심지인)이요
霧露雲霞는 體上衣(무로운하 체상의)로다
불성계의 구슬은 마음의 인(印)이요
안개,이슬,구름,노을은 몸 위의 옷이로다.
*확철히 깨쳐 마니주를 얻으면 불성계의 구슬은 마음 땅의 도장이라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마음의 도장이란 우리의 근본자성을 말함이고, 안개,이슬,구름,노을은 생멸하는 것이므로 몸에 걸친 옷처럼 중생의 망정을 말한 것이 아니냐'고 흔히 해석하는데, 그렇게 해석하게 되면 여의주를 모르는 사람입니다. 안으로는 마음 땅이 개척되어 불성계의 구슬이 둥글고 밝은 동시에 밖으로는 안개,이슬,구름,노을이 몸 위에 걸친 옷으로써 모두가 진여대용이라는 말입니다. 안개,이슬,구름,노을도 진여대용이고, 꽃은 붉고 버들이 푸르름도 진여대용이며, 산은 높고 물이 깊은 것도 진여대용입니다. '불성계의 구슬'은 안으로 자성을 표현하여 하는 말이고, '안개,이슬,구름,노을이 몸위에 걸친 옷이라'하는 것은 밖으로 일체가 진여의 발현 아닌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불성계의 구슬이란 내 마음 자리를 확철히 깨친데서 한 말로 써, 마니주 광명이 사방세계를 비추어 진진찰찰(塵塵刹刹)이 진여광명 아님이 하나도 없는데 안개,이슬,구름,노을인들 어찌 빼놓을 수 있겠느냐 하는 뜻입니다. 그래서 진진찰찰 전체가 다 진여대용임을 표현함에 있어서 이것들을 예로들어 말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음 땅의 도장[心地印]은 자성을 말함이고 안개,이슬,구름,노을은 생명하는 것이므로 망상이라고 해석하면, 여의주도 영가스님의 뜻도 모르는 사람이니 여기에 특히 주의해 살펴보아야 합니다.
55.
降龍鉢解虎錫(항룡발해호석)이여
兩鈷 金環鳴歷歷(양고 금환명역력)이로다
용을 항복받은 발우와 범 싸움 말린 석장이여
양쪽 쇠고리는 역력히 울리는도다.
*'용을 항복 받은 발우'라는 말은 출처가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삼가섭(三迦葉)을 제도 하셨다는 [본행경(本行經)]의 이야기와 육조스님의 일화입니다. 육조스님이 보림사(寶林寺)에 계실 때 절 앞 뜰에 큰 용소(龍沼)가 있어서 거기에 독룡이 살면서 수풀을 휘젓고 사람에게 해를 끼침에, 하루는 그 독룡이 큰 몸뚱이를 물 위에 나투는 것을 보시고 육조스님께서 꾸짖어 말씀하시기를, "네가 다만 큰 몸은 나툴 줄은 알되 작은 몸은 나투지 못하는 구나. 신룡(神龍)이라면 마땅히 클 수도 있고 작을 수도 있어야 하는 것이다." 고 하시니 이에 그 큰 독룡이 홀연히 없어지더니 작은 몸을 나투어 물위에 다시 떠 올랐습니다. 그 때 육조스님께서 발우를 내밀면서 "노승의 발우 속으로 들어와 보아라." 고 하시니 그 독룡이 헤엄쳐서 다가오므로 육조스님께서 그 작아진 독룡을 발우에 담아 법당으로 가셔서 상당(上堂)하여 설법하시니 그 용이 드디어 몸을 벗어 화거(化去)하여 제도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예를 들어 '용을 항복받은 발우'라 하는 것입니다.
'싸움하는 범을 말린 석장'이란 것도 일화가 있습니다. 승조(僧[禾+周:빽빽할 조])라는 스님이 산 길을 가다보니 범 두 마리가 길가에서 서로 싸우고 있으므로 두 범이 상할 것을 염려하여 육환장으로 두 범 사이를 떼어 놓으면서,
"싸울 일이 뭐 있나, 서로 잘 지내거라."
하면서 육환장으로 범 대가리를 몇 번 툭툭 건드리니 서로 헤어져 가더라는 얘깁니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호랑이 담배 피울 때 하는 말이라고 웃을런지 모르지만 실지로 이런 일이 많이 있습니다. 요즈음 심리학적으로 볼 때도 인간이 짐승을 지배할 수 있다는 것이 증명되어 있습니다. 그런 만큼 호랑이 싸움을 말려 그치게 했다는 것도 빈 말이 아닙니다.
석장(錫杖)이란 육환장(六環杖)을 말합니다. 육환장 머리에 두 개의 걸이가 붙어 있고 또 한 쪽 걸이마다, 세개씩 조그만 고리가 달려 있습니다. 그러니 육환장은 양 걸이마다 세개씩 모두 여섯개의 고리가 달려 있는 나무 지팡이입니다.
그런데 그 육환장이 무엇을 표현하고 있느냐 하면 양 걸이는 진속이제(眞俗二諦)를 표현한 것이고, 여섯개의 고리란 육바라밀을 표현한 것입니다. 그리고 중심의 나무 지팡이는 중도를 표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육환장은 그저 나무 지팡이가 아니라 중도 위에 서 있는 이제(二諦)가 원융하고 육도가 원만구족한 불교 진리 전체를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전 스님들은 이 육환장을 지팡이로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불법 진리 전체를 표현하는 것으로 생각하여 육환장을 짚고 다니면서 불법을 항상 실천한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 당시부터 스님들이 이 육환장을 짚고 다녔습니다. 육환장을 짚고 다닌다는 것은 중도에 의지해서 중도를 정등각한다는 것이고 진속이제와 육도를 원만히 성취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또 그것을 성취하지 못한 사람은 성취되도록 닦아 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육환장을 육환장이라 부르지 않고 중도장(中道杖)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56.
不是標形虛事持(불시표형허사지)요
如來寶杖을 親蹤跡(여래보장 친종적)이로다
이는 모양을 내려 허투로 지님이 아니요
부처님 보배 지팡이를 몸소 본받음이로다.
*육환장을 짚고 다니는 것은 모양을 내기 위해서 공연히 쓸데없이 짚고 다니는 것이 아니라 여래의 보배 석장을 몸소 본받기 위함이라는 말입니다.
여래의 보배 석장이란 중도를 말한 것이니 그 뜻이 나무 지팡이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나무 지팡이에 있다면 지팡이는 아무데나 있는 것이니 별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출가사문(出家沙門)이 되면 반드시 육환장을 짚도록되어 있는 것은 언제든지 중도를 바로 깨쳐서 중도를 바로 행하라는 뜻입니다. 누구든지 육환장을 짚는 동시에 중도를 바로 깨쳐 행하는 그 사람이 여래의 보배 석장을 본받는 사람이고, 중도를 깨치지 못하고 중도를 모르는 사람은 껍데기는 육환장을 짚고 다니지만 실제로는 육환장을 내버리고 다니는 사람입니다. 중도란 자성이니 자성을 깨치기 전에는 여래의 보배석장을 본받는 사람이 되지 못하니 어서 중도를 깨쳐 안팎으로 중도를 구비하여 육환장을 항상 짚고 다녀야 하겠습니다.
57.
不求眞不斷妄(불구진부단망)하니
了知二法이 空無相(요지이법 공무상)이로다
참됨도 구하지 않고 망령됨도 끊지 않나니
두 법이 공하여 모양없음을 분명히 알았도다.
*앞에서 중도를 정등각한 사람만이 여래의 보배 석장을 짚고 다니는 사람이고 여래의 길을 따르는 사람이며 여래의 길을 같이 가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 내용이 어찌 되어서 그러냐 하면, 참됨도 구하지 않고 망도 끊지 않아서 참됨도 버리고 망도 다 버려버린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참됨과 망이 다 공하여 모양이 없음을 밝게 알기 때문인 것입니다. 참됨이니 망이니 하는 것은 중생의 변견 망정에서 하는 소리일 뿐이고, 참됨도 설 수 없고 망이 본래 공해서 참됨과 망이 다 거짓말인 것이고 변견인 것이며, 양변을 완전히 여의면 그것이 중도아니냐 하는 말입니다.
우리가 언제든지 중도장, 육환장을 짚고 다녀야 하는데 중도장의 내용은 참됨과 망을 떠난 쌍차이면서 쌍조한 차조동시(遮照同時)인 것을 확철히 깨친 사람만이 중도장을 바로 짚고 다니는 사람이며 양변을 여읜 중도를 정등각한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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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
無上無空無不空(무상무공무불공)이여
卽時如來眞實相(즉시여래진실상)이로다
모양도 없고 공도 없고 공 아님도 없음이여
이것이 곧 여래의 진실한 모습이로다.
*'모양도 없고 공도 없고 공 아님도 없다'는 것은 전체를 다 막아 버리는 것이니 청룡도를 가지고 전체를 다 끊어버리는 말입니다.
그러나 일체가 다 끊어진 곳에서 일체가 다시 살아나는 것이고 항사묘용이 나는 것이니 이것이 여래의 진실상이며 중도의 보배 석장이라는 것입니다.
59. 마음의 거울 밝아서 비침이 걸림 없으니
확연히 비치어 항사세계에 두루 사무치도다
심경명감무애 확연영철주사계
心鏡明鑑無碍하야 廓然瑩徹周沙界로다
마음 거울이 환희 밝아 그 비치는 것이 걸림없이 자재하여 그 광명은 삼천대천세계를 비추고 또 비춘다는 것입니다. 모양도 없고 공(空)도 없고 공(空) 아님도 없는 여래의 진실한 모습을 확철히 깨치면 전체가 다 끊어져서 거기서 참으로 항사묘용인 진여대용의 광명이 현출하여 시방세계를 비춰 두루하고도 남는다는 것입니다.
60. 만상삼라의 그림자 그 가운데 나타나고
한 덩이 뚜렷이 밝음은 안과 밖이 아니로다
만상삼라영현중 일과원명비내외
萬象森羅影現中이요 一顆圓明非內外로다
'모양도 없고 공도 없고 공 아님도 없는 진심 실상(實相)'을 안다면 그 광명이 시방세계를 비치는 동안에 시방세계의 진진찰찰이 그 광명 아님이 하나도 없다는 말입니다. 삼라만상 전체가 다 중도실상,진여대용,진여광명 가운데 건립되어 있는 것이지 진여광명 내놓고는 삼라만상이 따로 없습니다. 따라서 만상삼라가 진여대용 가운데 있는 것이며 그 밖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일진법계(一眞法界)요 무진법계(無盡法界)며 무진연기(無盡緣起)라는 것입니다.
삼라만상이라 하니 조각조각 나 있어 통일성이 없는 것인가 하면 그렇지는 않습니다. 예를 들어 말하면, 한 덩이 구슬이 빛을 내는 것과 같아서 아주 밝고 둥글어 안과 밖이 없으니, 안과 밖이 끊어진 그곳에서는 유한이다 무한이다 할 것이 없습니다. 진진찰찰이 진여대용 아님이 없고 삼라만상 전체가 진여대용이어서 진진찰찰이 각각 차별이 있는 가운데 전체가 다 그대로 진여광명 아닌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금덩어리도 여러가지 모양의 물건을 만들면 모양은 달라도 모두가 다 진금 아닌 것이 하나도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하늘과 땅에 천만상지만상(天萬象地萬相)으로 벌어져 있는 모든 것을 아무리 둘러 보아도 진여광명 밖에는 따로 없습니다. 여기서는 중생을 볼래야 볼 수 없고 부처를 볼래야 볼 수 없어서 모두 다 진여대용입니다. 이것을 바로 깨쳐야만 불교를 바로 아는 사람이고 실지로 스님될 자격이 있는 것이지, 그렇지 않을 것 같으면 여래의 보배 석장을 한 번도 잡아보지 못한 것이 되고 억천만겁을 살아도 육환장을 헛 짚고 산 것입니다.
첫댓글 야간 어록반 분발해야 겠습니다.
감사합니다.